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31화 (131/197)

# 13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31회

자주색 투피스 차림의 여직원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영화 ‘몬스터를 막아라’ 여주인공 민설희 씨요. 고객상담실에 있어요. 자기가 온 거 비밀로 해달래요.”

흠칫 놀란 장영봉이 판매된 작품 리스트를 여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윤경 씨, 이 작품들은 판매됐어. 리스트 복사하고, 판매된 작품에 레드 스티커 붙여요.”

리스트를 살펴본 여직원 김윤경이 화들짝 놀라며 경탄했다.

“어머! 벌써 이렇게 팔렸단 말이에요? 대박!”

장영봉은 김윤경의 놀라움이 가득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고객상담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실내에는 대충 입은 것 같은 캐주얼한 복장의 여성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옷차림 때문인지 언뜻 보기에는 예쁜 외모의 젊은 여성처럼 보였다. 단지 얼굴에 그늘이 진 듯한 표정이 옥의 티였다.

민설희가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장영봉입니다. 스크린에서 본 민설희 씨를 직접 만나다니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고마워요.”

“이강수 작가 첫 개인전에도 오지 않았나요? 그때는 몬스터를 막아라 개봉 전이었죠?”

“절 기억하시네요? 네, 맞아요.”

대답하는 민설희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몬스터를 막아라는 관객이 구백만 명인가 들었죠? 천만 영화에 이름을 올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겠어요.”

몬스터를 막아라 최종 관객은 913만 명이었다.

“천만을 돌파하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구백만 명이나 관람해주어서 정말 감사한걸요. 제가 부장님을 뵙자고 한 건 다름 아니라 작품 한 점 구매하려고요.”

“아, 네. 작품 구매면 어떤 작품을 원하는지요?”

“DNA남녀 작품 9번 구매하고 싶어요.”

“네. 9번이면 구매 가능합니다.”

장영봉이 탁자에 있는 서류함에서 서류를 한 부 꺼내 민설희에게 건네주었다.

“구매계약서 작성해주시겠어요?”

구매계약서를 받아 내용을 훑어본 민설희가 물었다.

“주소도 적어야 하나요?”

“전시 끝나면 작품을 배송해드립니다. 집주소를 밝히기 어려우면 작품 수령할 수 있는 곳을 적어주면 됩니다.”

“그럼 부모님 집 주소 적을게요.”

“그래도 됩니다. 계약금 10%는 오늘 중으로 입금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죠.”

서류를 작성해 사본을 장영봉에게 건네준 민설희가 선글라스를 끼며 말했다.

“화장 안 하고 옷도 엉성하게 입으니까 전 줄 못 알아보겠죠?”

“네? 하하. 화장 안 했어도 그 미모는 어디 안 가는데요?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고마워요.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어서 저는 이만 가볼게요.”

“네. 안녕히 가십시오.”

민설희가 묵례하고 밖으로 나갔다.

텅 빈 상담실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장영봉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번엔 두 작품 구매해야겠다.’

장영봉은 이강수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아내 명의로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한 점 구매했었다. 여유만 된다면 몇 작품 더 구매했을 테지만 평범한 직장인이 서울에서 아이 둘 키우며 생활하면 저축이나 재테크 투자는 쉽지 않다.

저번에 강수 작품 구매할 수 있었던 자금은 순전히 인센티브였다. 이번에도 인센티브와 통장에 있는 약간의 여윳돈으로 작품 두 점을 구매하려는 것이다.

장영봉은 아내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여직원 김윤경이 ‘군마’ 15점에 빨간 스티커를 다 붙이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관람객이 탄성을 질렀다.

“15점이 다 팔린 거야? 누가 샀을까?”

“전부 붙인 걸 보면 누군가 한꺼번에 구매한 모양이야.”

“헐, 15점이면 삼억인데 엄청나군.”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며 고원철과 서혁중은 희희낙락했다. 작품 한 점이 팔리면 이강수가 받는 그림값의 15%는 자기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스티커 붙이는 그림이 늘 때마다 둘의 입꼬리는 귀를 향해 올라갔다.

고원철과 서혁중은 빨간 스티커 붙이는 여직원을 따라다니며 판매 작품의 개수를 셌다.

1층에서 스티커를 붙이고 2층으로 올라온 김윤경이 ‘탄생’ 작품 5번에 스티커를 붙이려다 뒤돌아 자기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고원철과 서혁충을 노려보았다.

고원철과 서혁중은 여직원의 날카로운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작품 감상하는 척 그림을 쳐다보았다.

“당신 두 사람!”

김윤경이 앙칼지게 고원철과 서혁중을 불렀다.

“예?”

“어째서 내 뒤를 쫓아다니며 실실거리는 거예요? 성희롱하는 건가요?”

성희롱이란 단어에 고원철과 서혁중이 깜짝 놀라서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황급하게 팔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고원철이 당황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우린 그저 그림이 몇 점이나 팔렸는지 궁금해서 따라다녔을 뿐입니다.”

“그림 몇 점 팔렸는지 왜 궁금해요?”

김윤경의 누그러진 말투에 미소를 회복한 서혁중이 대답했다.

“팸플릿 보면 전시 작품 어시스턴트 두 명 적혀 있죠? 고원철, 서혁중이라고.”

“그래요? 누군지는 몰라도 있는 것 같네요?”

“그 두 명이 우립니다. 이 친구가 고원철이고 내가 서혁중이죠.”

“어머! 그래요? 호호,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날 놀리려고 그런 줄 알았잖아요.”

“하하. 말없이 따라다녔으니 오해할 만 했네요. 죄송합니다.”

“저기요, 오픈한 지 얼마 지나지 안 됐는데 몇 점이나 팔린 거죠?”

고원철의 질문에 김윤경이 복사 용지를 보며 개수를 세었다.

“세 보질 않아서. 잠깐요. 음, 35점이네요.”

“헉! 35점이요?”

“놀랐죠? 이 작가님은 좋겠다. 이게 다 얼마야.”

“흐흐흐. 칠억입니다.”

“맞네요. 35점이면 칠억 원이네요.”

“우히히히--”

고원철과 서혁중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더니 마주보았다.

“원철아!”

“?”

서혁중이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고원철을 부르며 와락 부둥켜안았다.

‘뭐야, 이 사람들. 도와주기는 했다지만 자기 작품이 팔린 것도 아닌데 왜 자기들이 좋아서 난리야?’

김윤경은 갑자기 감격에 겨워하는 두 사람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다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주변 사람의 싸늘한 눈초리를 느낀 고원철과 서혁중이 포옹을 풀고 헛기침을 하며 전시장 구석으로 갔다.

“원철아, 우리 몫은 얼마냐?”

“강수선배가 절반, 삼억 오천을 받겠지. 삼억 오천의 15%면.... 오천이백오십만 원. 만약 75점이 완판되면 일억 천이백오십만 원이고.”

“억!”

서혁중이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턱 빠지겠다. 입 다물어라.”

“어? 그, 그래.”

얼빠진 듯한 표정의 서혁중이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사실 작품 옮길 때만 해도 절반만 팔리기를 기도했는데 이렇게 미친 듯이 팔리면 완판될 것 같다. 그럼 우린 억대를 버는 거야. 몇 개월 알바해서 억대를 벌 수 있다니 꿈만 같다.”

고원철도 억대의 러닝개런티를 받게 된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고원철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작품에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김윤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원철아, 난 강수 선배 조수로 계속 일할까 봐.”

“뭐? 무슨 소리냐?”

“뼈 빠지게 내 작품 해 봐야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작품은 팔리지도 않지 않냐? 이럴 바에야 강수 선배랑 작업 하는 게 낫지.”

“네 작품은 안 하고?”

“강수 선배 알바 해도 시간은 많이 남으니까 내 작업할 시간은 충분해. 어차피 예술 하고 관련 없는 다른 알바하면서 몇 푼 버는 것에 비교하면 강수 선배 알바는 전공을 살릴 뿐만 아니라 완전 귀족 알바 아니냐?”

서혁중의 말이 맞았다.

얼마 전에도 열흘 야간작업하고 1,800만 원 받지 않았던가?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강수 선배와 작업하면 배우는 점이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보수받으면서 작품 창작을 공유하고, 예술에 대해 뭔가 고민하고 배울 수 있는 알바는 지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고원철이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네 말이 맞긴 한데 작업이 끝나서 일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잖아?”

서혁중이 능글맞게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 강수 선배 창작열은 활화산처럼 솟구치는데 뭘. 하루에 한 작품씩 뚝딱 그리는 거 봐라. 그 작업도 우리한테 달라고 해보지 뭐.”

‘자식, 넉살은 좋아서.’

“넌 그런 염치없는 말이 잘 나온다? 난 그런 말은 못 하겠는데.”

“인마, 체면이 밥 먹여 주냐? 일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일 있을 때 불러 달라고 하면 되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선배한테 한번 물어봐라.”

“오냐. 일 없다고 하면 일 달라고 졸라 볼 테니까.”

고원철은 서혁중의 넉살에 실소를 짓고 말았다.

*

박연경은 선암갤러리 여직원이 작품에 빨간 스티커 붙이는 모습을 보며 조급함을 느꼈다.

‘이러다 완판되면 또 못 사겠다. 빨리 한 점 사야겠어.’

박연경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서준홍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회장님.”

강수의 그림을 한 점 한 점 감상하며 시종일관 흐뭇한 표정를 짓고 있던 서준홍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응? 왜?”

“장 부장에게 할 말이 있어서 3층 사무실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갔다 와.”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싱겁게 허락을 받은 박연경은 1층으로 내려가 마음에 두고 있는 DNA남녀를 살펴보았다.

‘왠지 작품 11번이 끌리네. 이 작품으로 하자.’

거칠게 표현된 짙은 노란색 바탕에 DNA 나선 구조가 엉켜 형상화된 남녀의 모습이 박연경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구매 작품을 결정한 박연경은 전시장을 둘러보며 장영봉을 찾았다.

‘없네. 사무실에 있나 보다.’

박연경은 3층으로 올라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직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연경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작품 구매하려고요. 장 부장님은 어디 있나요?”

“장 부장님은 손님과 상담 중이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박연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상담은 언제 끝나죠?”

“아, 그러면 제가 작품 구매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떤 작품 구매하시겠어요?”

“DNA남녀 작품 11번이요. 아직 팔리지 않았더군요.”

“예. 잠시 거기 앉아계시겠어요. 제가 장 부장님께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고객상담실로 들어간 여직원이 잠시 후 서류 한 장 가지고 돌아왔다.

“작품 11번은 구매 가능하세요. 여기 구매계약서를 작성해주시겠어요?”

박연경은 여직원이 내민 구매계약서를 받아 내용을 작성해 돌려주었다.

“작품 구매 감사드려요. 계약금은 지금 입금해주시고 잔금은 전시가 끝나는 14일까지 입금해주시면 됩니다.”

계약금만 지급하면 나중에 살지 말지 고민할지도 모른다. 그림값 전부 지급해 아예 고민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속 편할 것이다.

박연경은 스마트폰을 꺼내 계좌번호를 입력하고 이체 금액 2천만 원을 찍었다. 막상 이체 버튼을 누르려 하니 마음이 떨렸다.

‘휴, 그림 한 점에 이천만 원이라니....’

그림 한 점 사는데 2천만 원이나 하는 거금을 투자하기 쉽지 않았지만, 박연경은 눈 딱 감고 이체 버튼을 눌렀다.

‘샀다! 이천만 원이나 하는 그림을 구매했어.’

박연경은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림값 이천만 원 이체했어요. 확인해보세요.”

“어머, 그러셨어요? 감사해요. 여기 구매계약서입니다.”

원본 구매계약서를 받아 챙긴 박연경은 후련한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

주하는 빠르게 빨간 스티커가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호호. 이렇게 팔려나가면 내가 살 그림이 없을지도 모르겠네?’

주하는 컷팅식이 끝나자마자 장영봉을 찾아가 군마, DNA남녀, 탄생, 마지막 시선으로부터, 야만의 종말의 작품 1번, 5점을 전부 구매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많았지만, 저번처럼 판매 추이를 지켜보다 두 시간 후인 6시에 남아 있는 작품을 마저 구매할 심산이었다. 할아버지가 해외로 나가기 전에 필요할 때 쓰라며 준 통장에 10억이 있어서 돈은 넉넉했다.

‘이렇게 되면 두 번째 개인전도 오프닝 날 완판이네. 아휴, 다시 생각해도 군마는 아깝다.’

주하는 ‘군마’ 작품 1번을 양보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조금 전, 계획한 대로 5점을 구매한 주하는 느긋한 마음으로 작품 감상하는데 장영봉이 찾아와 서준홍 회장에게 ‘군마’ 작품 1번을 양도할 수 있냐고 물었다. 물론 양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데 서준홍 회장이 몸소 전시장을 찾은 전후 사정 얘기를 듣고 서준홍 회장의 노력이 가상해서 ‘군마’ 작품 1번을 양보하고 말았다. ‘군마’ 작품 1번을 서준홍 회장에게 양보한 것이 아깝기는 했지만 서준홍 회장이 ‘군마’ 15점을 전부 구매했다는 데 위안 삼았다.

“주하 씨, 해영 씨 여기 있었네요.”

김종대와 이동석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주하와 해영에게 다가왔다.

“종대오빠, 동석오빠.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해영 씨.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네. 저야 항상 똑같죠.”

임해영이 이동석에게 시선을 주었다.

임해영을 마주 보며 이동석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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