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30회
너털웃음을 터트린 서준홍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흠흠. 돼지를 반으로 잘라 포름알데히드에 담가 놓고 붙였다 뗐다 반복하는 거. 먹다 남은 사과 찌꺼기를 방부 처리해서 실락원이란 제목 붙여서 작품이랍시고 한 거. 자기 피 뽑아서 두상 만들어 놓은 거. 지저분한 침대를 전시장에 갖다 놓은 거. 텅 빈 캔버스에 칼질해 놓은 거. 통조림에 작가 똥 담아놓은 거. 상품 포장한 박스를 똑같이 만들어 놓은 거. 스테인리스로 거대한 하트를 만들어 놓고 반짝반짝 색칠해 놓은 거. 거론하자면 수도 없이 많아. 내 기준에 그런 건 전부 쓰레기거나 상점에 있어야 할 상품이야. 쓰레기나 상품을 갖다 놓고 예술 작품이라고 전시하는 무능한 자들이 예술가로 통용되는 현대 사회가 좀 이상한 것 같네. 예술가라는 칭호가 한없이 가벼워졌다고나 할까? 하여튼 그런 엽기 작품이나 쓰레기 작품을 파격이라며 환호하고, 소장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만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것을 예술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서준홍이 예술에 대한 지론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회장님이 예를 든 작품은 대부분 키치 아트나 개념 미술에 기반을 둔 작품들입니다. 현대 미술의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하는 개념 미술에 대해 부정적이시군요?”
“개념 미술이 미술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관심 없어. 어쨌든 사람마다 예술품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니까 그런 작품이 통용되는 거겠지. 방부 처리한 사과 찌꺼기를 오백만 원에 사서 거실에 걸어두고 감상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 취향일 테니까 누가 뭐라고 하겠나? 내게는 쓰레기지만 그 사람에겐 예술품이니 취향이 다를 뿐이지. 그건 아무래도 좋아.”
“알겠습니다. 이강수 화가는 올해 봄에 첫 개인전을 가진 한국 미술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인화가입니다. 무명화가나 다름없는 이강수 전시회에 귀한 시간을 할애해서 방문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 얘기를 하려면 작년 전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작년 전시요?”
“작년 여름 선암갤러리에서 한국청년화가 12인전을 개최했는데 그 사실을 아나?”
“예. 알고 있습니다. 장동운, 박해나, 김이연 등 쟁쟁한 신인화가가 참여한 전시회죠.”
“그 전시에 이강수 화가가 출품한 작품 한 점 구매하려고 했는데 아깝게도 누군가 먼저 구매했더군. 꽤 마음에 드는 그림이었는데 말이지.”
“혹시 어떤 작품이었는지 기억나십니까?”
“글쎄? 공원의 평화로운 한낮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제목은 아마 ‘초대’였나?”
서준홍의 좌측에 서 있는 박연경이 말했다.
“초대 맞습니다. 회장님.”
“박 실장이 맞다는군. 그 그림을 놓치고 아쉬웠던 참에 올봄에 이강수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렸지. 그래서 한 작품 구매하려고 박 실장을 보냈는데 황당하게 전시 오픈 두 시간 만에 전시 작품이 완판되었다는 거야. 결국 저번 전시회에서 한 작품도 구매하지 못한 거지.”
“그래서 이번엔 몸소 오신 거군요?”
“이번엔 기필코 마음에 드는 작품을 구매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단 말이지.”
“이번 전시회에 전시 작품은 75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작품을 15개씩 실크스크린 인쇄해서 각각 채색을 달리한 특이한 작품들입니다. 혹시 마음에 둔 작품이 있는지요?”
“마음에 둔 작품은 바로 저 작품이야.”
서준홍은 행사장 뒤에 전시된 군마를 가리켰다.
“군마로군요.”
“그래. 하지만 그림은 원화를 봐야 작품의 예술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워낙 특이한 색감의 작품들이라 다른 작품을 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네.”
10분은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인터뷰하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어느덧 오픈 시간이 되었다.
“시간 다 됐군. 인터뷰 한 건 잡지에 실리는가?”
“물론입니다. 회장님의 컬렉션에 대한 소중한 인터뷰는 특집 기사로 준비하겠습니다.”
“하하. 다음 달 월간 예술은 필히 살펴봐야겠군.”
강상택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회장님, 몇 가지 질문이 더 있는데 관람 끝나시고 10분만 더 인터뷰할 수 있는지요?”
“응? 인터뷰 한 김에 마저 하는 게 낫겠지. 관람 끝나고 전화하겠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4시가 되자 장영봉이 단상에 올라섰다.
단상 옆에 서 있는 강수는 자신의 두 번째 전시회에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온 것이 얼떨떨했다.
‘사람이 꽤 왔네?’
곧 많은 관람객의 축하와 기대 속에 장영봉의 사회로 오프닝 행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조창석 관장의 축사에 이어 강수가 관람객에게 인사할 차례가 되었다.
강수가 단상에 올라가 내외귀빈을 한 차례 둘러보고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강수입니다.”
“와아!”
“아저씨, 파이팅!”
“오빠, 사랑해요~”
짝짝짝!
젊은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젊은이들의 짧은 해프닝에 사람들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전시장 한쪽에서 오프닝을 지켜보고 있는 주하는 청년들이 강수에게 보내는 환호를 지켜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단상에 있는 이강수가 자기 남자라는 사실이 너무 뿌듯했다.
젊은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준 강수가 전시회를 개최한 소감을 발표했다.
“이렇게 많은 분이 전시회에 귀한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전시회는 팝아트 양식을 이용해 작업해보았습니다. 똑같은 열다섯 개의 그림이지만 채색과 묘사를 통해 새로운 느낌과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작가가 어떤 의도 가지고 작품을 창작했던 여기 있는 작품은 이제 작가의 품을 떠났습니다. 전시된 작품에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주체는 관람객입니다. 제 작업이 의미 있는 작품으로 탄생했는지는 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평가에 달려있을 겁니다. 저는 여러분의 평가를 겸허히 받겠습니다.”
전시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모두 단상에 선 강수에게 집중했다. 잠시 말을 끊은 강수는 수많은 시선을 담담하게 마주 훑어보았다.
오프닝 시간에 겨우 맞춰 전시장에 도착한 아트 컨설턴트 이필성은 관람객 속에서 참석자의 면면을 살펴보고 있었다.
‘갤러리스트와 미술관 관계자까지 참석했어? 이강수가 미술 관계자들에게 어느 정도 알려졌구나. 이번 전시회가 끝나면 완전히 뜰 수도 있겠는데?’
이필성은 십여 명의 미술 관계자를 발견하고 속으로 경각심을 일으켰다.
‘엇, 저 사람은....’
이필성이 누군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눈을 크게 떴다.
‘해왕식품 서준홍 회장이 여길 왔어?’
이필성은 속으로 침음을 삼키며 얼굴을 찌푸렸다.
‘으음, 서준홍 회장이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리가 만무하지. 전시장에는 75개 작품이 전시되어 있지만, 실제론 5개 작품으로 볼 수도 있어.’
돈에 구애받지 않는 누군가는 같은 제목 작품 1부터 작품 15까지 15개 작품을 전부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런 사태를 배제할 수 없었다.
‘갤러리스트, 미술 관계자들에다 서준홍 회장까지 왔단 말이지....’
이필성은 장영봉이 보내준 작품 사진을 A2 크기로 출력해서 면밀하게 검토했다. 군마, DNA남녀, 탄생, 마지막 시선으로부터, 야만의 종말 등 전부 초현실적인 화풍을 선보였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작품은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아무래도 제목당 3점씩 살 것 없이 한 가지, 15점을 전부 사야겠어. 앤디 워홀도 최후의 만찬 60점을 붙여서 한 작품으로 만들었지. 그것이 더 가치 있을 테니까. 한데 어떤 걸 산다?’
막상 다섯 개의 제목 가운데 하나를 고르려고 하자 무엇을 사야 할지 막막해졌다.
이필성은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뭘 사야 할지 고민하느라 단상에서 말하는 이강수의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
200여 명이 넘는 참석자 뒤로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인을 발견한 강수가 살짝 놀랐다. 민얼굴에 선글라스를 끼고 헐렁한 복장을 한 여인은 민설희였다. 민설희는 몬스터를 막아라가 900만 명을 돌파하는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단숨에 톱 여배우의 한 명으로 화려하게 부상했다.
‘설희가 여길 왜? 일부러 저런 복장하고 사람 눈 피해 설마 내 그림 관람하러 온 거야?’
민설희가 전시장에 찾아올 이유라곤 그림을 관람하거나 사려는 이유밖에는 없었다.
의문을 뒤로한 강수는 전시회 소개를 이어나갔다.
“저는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저 자신에게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질문의 도정에서 다양한 미술 장르와 형식을 제 안에 받아들여 융합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의 일부가 바로 오늘 전시장에 전시한 작품들입니다. 또한 11월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하는 ‘청년 예술가들이여, 희망을 던져라’ 전에서도 선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팸플릿에서 밝혔듯이 작품 제작에 커다란 도움을 준 두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강수가 고원철과 서혁중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강수의 시선을 따라 고원철과 서혁중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원철과 서혁중. 이 두 분은 대학교 후배입니다. 두 후배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의 두 번째 개인전은 사 개월 뒤에나 열려야 했을 겁니다. 제 작품을 도와 헌신적으로 어시스트해준 고원철과 서혁중 두 후배에게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강수가 오른팔을 들어 고원철과 서혁중을 가리켰다.
오프닝에 모인 사람들이 고원철과 서혁중에게 환호성과 우레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와아!”
짝짝짝!
예상하지 못한 소개를 받은 고원철과 서혁중이 당황한 얼굴로 내외 귀빈을 향해 황망히 인사했다.
박수가 수그러들기를 기다린 강수가 이어 말했다.
“제 전시회에 찾아오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인사말을 끝으로 이제 전시된 작품은 여러분과 마주할 것입니다. 제 작품이 많은 분에게 사랑받는 그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수가 말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와 관람객을 향해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오프닝 행사에 참석한 관람객들이 강수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환호성을 질렀다.
짝짝짝짝!
“이강수 화이팅!”
“와아, 축하해요!”
“두 번째 개인전 축하합니다!”
축하인사를 받으며 강수와 관장 조창석, 예술평론가 최이석 등 몇 사람이 곧바로 개인전 오프닝 컷팅식을 했다.
그렇게 환호성과 뜨거운 열기 속에 오픈 행사가 마무리되고, 관람객은 전시된 그림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컷팅식이 끝나자마자 이필성은 안면 있는 사람과 인사는 뒤로 미루고 군마와 DNA남녀를 일별했다.
두 작품의 평가를 끝낸 이필성은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원화를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구매 작품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2층에 전시된 탄생, 마지막 시선으로부터, 야만의 종말을 차례로 훑은 이필성은 구매 작품을 결정했다.
‘전부 좋지만 결국 군마를 사야겠다.’
이필성은 스마트폰을 꺼내 장영봉에게 전화했다.
신호만 갈 뿐 장영봉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한 이필성은 다급하게 1층으로 내려가 장영봉을 찾았다.
‘저깃군.’
장영봉은 서준홍 회장과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수첩에 뭔가 적고 있는 장영봉의 모습에서 별안간 불안이 엄습했다.
얼굴을 찡그린 이필성은 서둘러 장영봉에게 다가갔다.
“그럼 나는 2층으로 올라가 보겠네.”
“예, 회장님. 작품 구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서준홍 회장은 박연경과 2층으로 향했다.
장영봉 옆으로 득달처럼 다가온 이필성이 질문을 던졌다.
“장 부장님, 서준홍 회장님이 혹시 군마 구매했습니까?”
“아, 이 사장님? 들으셨나요?”
장영봉의 반문은 서준홍 회장이 군마를 구매했다는 말이었다. 입을 벌린 채 허탈한 표정을 지은 이필성이 재차 물었다.
“군마 몇 작품 구매했습니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 장영봉이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몇 작품 구매한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구입하는 것이 낫겠다며 15작품 전부 구매하셨습니다.”
이필성의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잠깐 사이 군마를 놓쳤구나. 즉시 구매했어야 했는데 실수다. 그러면....’
이필성이 두 번째로 높이 평가한 작품을 말했다.
“그러면 ‘마지막 시선으로부터’ 15개 작품 전부 구매하겠습니다.”
“이 사장님, 죄송한데 ‘마지막 시선으로부터’ 작품 1번은 팔렸습니다. 다른 작품도 작품 1번은 전부 팔렸습니다.”
“예? 벌써요? 아니 누가?”
“누구인지는 알려드릴 수가 없어서... 미안합니다.”
이필성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그래요? 작품 1번이 빠지면 이빨 빠진 것 같은데....”
“그렇기는 한데 본래 15개 작품이 한 작품이 아니라서 고객이 원하면 판매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이필성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별수 없이 4점씩 구매해야겠구나. 4점을 붙이면 한 작품처럼 보이니까.’
이필성이 물었다.
“2번도 팔렸습니까?”
“아닙니다. 2번부터는 구매 가능합니다.”
“그럼 DNA남녀, 탄생, 마지막 시선으로부터, 야만의 종말 각각 작품 2, 3, 4, 5번을 구매하죠.”
“이 사장님, 작품 구매 감사드립니다. 그림값은 삼억 이천만 원입니다. 계약은 언제 하시겠습니까?”
“작품 좀 더 둘러보고 곧 올라가죠.”
“네. 사무실에 있겠습니다.”
장영봉은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필성에게 묵례하고 3층 사무실로 올라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프닝이 끝나자마자 35점이 팔려나갔다. 순식간에 7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렇게 빨리 판매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이강수 작품의 판매력이 예상을 초월하는구나. 이러면 몇 작품이 판매될지 고민할 일이 아니라 언제 완판되느냐의 문제로군.’
사무실로 들어가자 여직원이 장영봉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 부장님. 유명연예인이 한 분 왔어요.”
“유명연예인?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