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29화 (129/197)

# 12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29회

강수는 통화를 연결했다.

“선배님? 이강수입니다.”

[전화 통화 괜찮은가?]

“예. 말씀하십시오.”

[오전에 한 주간 문화계 소식 담당자한테 연락이 와서 자네 개인전에 관해 얘길 나눴다네.]

“한 주간 문화계 소식에서요? 설마 제 전시회를 찍겠다는 건 아니죠?”

[아니. 자네 개인전을 촬영하고 싶다는데? 다만 방영 여부는 내부 회의에서 결정 난다고 하더라. 자네 개인전이 한 주간 문화계 소식에서 소개되면 대박인데 말이지. 그리고 한 가지 자네 답변이 필요해서 전화했다네.]

“답변이요? 뭐죠?”

[방송국에서 지난번처럼 캐리커처 사인회 할 건지 묻더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아, 캐리커처 사인회요?”

캐리커처 사인회는 적지 않은 시간과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행사였다. 강수는 사인회에서 관람객의 얼굴을 그리며 사람마다 다른 미묘한 표정과 그 안에 담겨 있는 미지의 개성을 엿보았다. 비록 캐리커처였지만 각각의 미묘한 표정을 담아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인물 표현에 있어 적지 않은 깨달음을 얻었고 많은 것을 배웠다.

‘좋아, 이번 전시회는 모델의 감정과 내면의 풍경을 캐리커처에 녹여낼 수 있는지 시도해보자.’

이번 기회에 사람의 얼굴에 대해 원 없이 천착해보리라 마음먹은 강수가 대답했다.

“캐리커처 사인회는 저한테도 도움 되는 행사입니다. 당연히 이번에도 해야죠. 오픈 당일에는 못 하고 다음 날 목요일부터 전시가 끝나는 14일까지 하겠습니다. 캐리커처는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두 시간 정도 그리고요.”

[뭐?]

장영봉의 놀란 기색이 목소리를 통해 느껴졌다.

[그건 너무 무리한 행사 아닌가? 저번 행사 때도 관람객이 그림을 관람하기보다는 캐리커처 받으려고 줄을 섰거든. 아마 이번 캐리커처 행사에는 저번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릴 걸세. 게다가 TV에 방영이라도 되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은 사람이 몰릴 수도 있어. 내 생각은 삼사일만 사인회를 하면 좋을 것 같네만.]

“전시회에 지장만 주지 않는다면 전 많은 사람의 캐리커처를 그리고 싶습니다. 그들도 제 그림이 좋아서 찾아온 분들이니까요.”

[음, 자네가 괜찮다면 그대로 진행해 보겠네. 다만 오픈 다음 날까지 차분하게 작품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캐리커처 행사는 금요일부터 하는 건 어떤가?]

캐리커처 행사를 하루 연기하는 것은 괜찮았다. 하루 늦추면 갤러리가 휴관하는 월요일은 쉬고 총 10일간 캐리커처 사인회를 진행하게 된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알았네. 방송국에는 그렇게 전하지. 그리고 이번에는 캐리커처 사인회 행사 홍보는 하지 않겠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홍보까지 해서 사람이 몰리면 곤란하니까.]

“그건 선배님이 편한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래, 수고하게.]

“네, 선배님.”

전화를 끊은 강수는 캐리커처 사인회를 어떻게 치를지 염두를 굴렸다.

‘이번에는 캐리커처 그리는데 3분쯤 투자해서 제대로 그려봐야지. 문제는 두 시간 동안 그려도 몇 명 못 그린다는 거네?’

한 명당 3분을 쓰면 1시간에 20명, 2시간이라고 해봐야 40여 명에 불과하다. 저번 행사 때 줄 선 사람을 떠올린 강수가 피식 실소를 짓고 말았다. 아마도 2시간이 아니라 폐문할 때까지 그려야 할지도 몰랐다.

‘그것도 괜찮아. 어차피 내 공부인데.’

자기 이젤 앞으로 간 강수는 두 후배가 끝낸 작품을 이젤에 걸고 검토했다.

고원철과 서혁중이 작업지시서대로 끝낸 작품들은 완성도가 높았다. 73점 가운데 강수가 덧칠하지 않은 작품이 20점에 달했다. 나머지 작품들도 덧칠 작업이 대부분 두세 시간이면 끝날 정도로 손볼 곳이 별로 없었다.

그림을 검토한 강수는 부분적으로 덧칠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강수마저 붓을 들고 작업을 시작하자 실내는 에어컨 돌아가는 바람 소리만 들리고 정적에 빠져들었다.

*

장영봉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캐리커처 사인회를 금요일 4시부터 6시까지 며칠간 진행한다고 통보해주었다. 일부러 행사 기간은 알려주지 않고 관람객을 대상으로 행사를 진행한다고만 말했다.

방송 탈지도 모르는데 날짜를 정하면 안 될 것 같았다.

‘9월 이후로 강수의 전시가 연달아 열리는구나.’

두 번째 개인전이 끝나면 11월에 ‘희망을 던져라’ 전이 열리고, 12월에 이강수의 세 번째 개인전이 준비되어 있다.

장영봉은 이강수의 세 번째 개인전을 끝낸 후에 그 성과물을 바탕으로 내년부터 이강수의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계획이었다. 해외 유명 갤러리 전시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아트페어 참가, 홍콩과 뉴욕 경매 시장에도 출품을 타진할 것이다.

사실 이번 전시에서 작품 가격을 너무 낮게 책정한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군마나 DNA남녀, 탄생 등 모든 작품이 글로벌 미술 시장에 내놓아도 호평받을 만한 작품들이었다.

이강수의 커리어와 성장을 위해서도 작품 당 최소 3천만 원에 책정하는 편이 나았다.

‘휴, 그나마 이천만 원에 책정해서 다행이야. 천만 원이 뭐야, 천만 원이.’

100호 작품을 천만 원에 팔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적잖이 당황했었다.

이강수는 돈 욕심이 너무 없거나 자기 작품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강수의 세 번째 개인전 출품작은 캔버스 사이즈와 상관없이 작품성과 예술성에 중점 둬서 가격을 책정해야겠어. 무엇보다 이번 전시회에서 좋은 성적이 나와야 할 텐데 어떨지 정말 궁금하구나....’

장영봉은 75점이나 되는 전시 작품의 완판은 기대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전시 작품의 완판은 상당히 드문 일이다. 하지만 이강수의 작품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판매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내심 완판까지도 기대하고 있지만, 과신은 금물이다. 결과는 언제나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

늦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8월 말 오후 늦은 시각.

중산아파트 강수의 집 거실.

강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백금반지를 심각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백금반지에는 일곱 개의 다이아몬드가 본래 백금반지의 일부인 것처럼 매끄럽게 박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수의 입에서 비장하리만치 진중한 한마디 마법어가 흘러나왔다.

“실드 인챈트”

푸르스름한 마나가 강수의 손에서 백금반지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크윽!”

인챈트 마법을 캐스팅한 강수가 별안간 심장을 부여잡고 탁자에 엎어지며 짤막한 신음을 토했다.

순식간에 마나가 고갈된 것이다. 강수의 몸은 부들부들 떨렸고,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얼굴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잠시 후 서서히 혈색이 돌아온 강수가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바로 세웠다.

“으아, 심장이 찢어지는 줄 알았네.”

마나 고갈에 따르는 고통을 각오하고 인챈트 마법을 캐스팅했다. 이번이 세 번째지만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으, 성공했으면 좋겠다.”

강수가 탁자에서 반지를 집어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인챈트가 성공하면 마법어가 반지에 새겨진다. 반지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강수가 실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실패구나.”

인챈트마법을 캐스팅하면 마나가 완전히 고갈된다. 그리고 고갈된 마나를 완충하려면 7일 동안 꼬박 수련해야 한다.

‘내일은 전시회 오픈이라 수련도 못 하겠구나.’

어느새 전시회 오픈이 내일이다.

오늘은 전시장에 작품만 옮겨 놓았다. 오픈인 내일은 가능하면 빨리 디스플레이를 끝내야 한다. 두 후배뿐만 아니라 김종대와 이동석이 도와주기 때문에 시간은 넉넉할 것이다.

마나하트에 한 줌의 마나도 남지 않고 고갈되어도 신체적으로 이상 없지만,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든다.

강수는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늦었지만 마나수련하고 오자.’

밤새워 마나수련하면 15%쯤 마나가 찰 것이다. 그 정도만 마나를 채워도 허전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강수는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배낭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

선암갤러리 입구에는 첫 개인전 때보다 늘어난 십여 개의 화환이 놓여 있었다.

1층 중앙에는 오프닝 컷팅식과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 놓았다. 주하에게 첫 번째 개인전 오프닝 다과를 맡겼다가 너무 비싼 고급 음식이 차려진 것을 본 강수는 이번에는 고원철과 서혁중에게 과일과 다과, 음료만 간단하게 준비시켰다.

강수는 긴장했던 첫 개인전과는 다르게 여유 있는 표정으로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1, 2층 전시장에 총 75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1층에 군마와 DNA남녀 30점을, 2층에 탄생, 마지막 시선으로부터, 야만의 멸종 등 45점이다.

오픈식 시간이 다가오자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한 명 두 명 선암갤러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강수의 대학교 동문 김종대, 이동석, 염진구 등과 선후배,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장 강승호, 카메라를 든 기자, 갤러리윤 수석 큐레이터 김이라를 비롯한 몇몇 갤러리스트는 물론이고 미술관 관계자의 얼굴도 보였다. 특히 핑크티티 팬카페 회원으로 보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친구들 20여 명이 이강수를 둘러싸고 사인을 받고 있었다.

서로 안면 있는 갤러리스트와 미술관 관계자들이 인사하며 안부를 물으며 잡담했고, 끼리끼리 모여 있는 젊은 친구들은 웃으며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전시장 입구에서 미술 관계자들을 반갑게 맞이하던 장영봉은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풍채가 당당한 노년의 신사를 보고 살짝 놀랐다.

‘서준홍 회장님!’

해왕식품 서준홍 회장이었다.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장 부장. 반갑네. 내가 이강수 화가 작품을 두 번이나 놓치지 않았는가? 또 놓칠 수 없어서 왔지.”

“회장님, 이강수 작가 만나보았는지요?”

“하하. 지금 왔는데 이 작가를 만나볼 시간이 어디 있는가? 보지 못했다네.”

“예. 그래서 제가 이강수 화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잠시만요.”

장영봉은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사인을 해주고 있는 강수에게 다가가 양해를 구하고 팔을 잡아끌었다.

“이 작가, 잠시 보세나.”

“예? 무슨 일이죠?”

“이 작가. 해왕식품 서준홍 회장님께 인사 좀 하게. 알아두면 앞으로 큰 힘이 되실 분이라네.”

강수는 장영봉이 이끄는 대로 서준홍 앞으로 갔다.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강수를 바라보는 서준홍의 눈에서 광채가 번뜩였다.

장영봉이 강수를 소개했다.

“회장님, 이강수 작가입니다.”

강수가 예의를 차려 서준홍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강수입니다.”

“오, 자네가 이강수로군. 최이석 평론가가 쓴 글을 읽고 자네가 어떤 작가인지 무척 궁금했었네. 이렇게 만나고 보니 그림만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아주 훤칠한 청년이었군. 인중지룡이라는 말이 아주 딱 어울리는구나. 만나서 반갑네.”

“감사합니다.”

서준홍이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강수는 서준홍의 오른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서준홍이 강수의 팔을 흔들며 껄껄 웃었다.

“허허허. 이거 앞으로 자네와 자주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자신의 전시에 자주 찾아오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강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서준홍의 옆에 서 있던 박연경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서준홍 회장은 인사치레나 실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방금 한 말에는 이강수를 자주 만나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이강수가 마음에 들었구나.’

박연경은 그렇게 판단했다.

“서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안녕하세요?”

서준홍을 알아본 김이라와 갤러리스트들이 재빨리 몰려와 인사했다.

서준홍은 외국 작가보다 한국 작가 작품을 구매하는 미술계의 큰손이자 귀한 컬렉터였다. 서준홍을 전시장에서 보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갤러리스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서준홍에게 얼굴을 비췄다.

“응? 당신들이 신인화가 개인전에 웬일이오?”

“호호. 장 부장이 전시회 안 오면 두고두고 후회한다며 겁을 주지 않겠어요? 안 올 수 있어야죠.”

“그러게요. 장 부장이 이강수 화가 작품을 자랑하면서 치켜세우는데 정말 작품이 괜찮은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흐흠, 그런가? 장 부장이 자랑할 만한 화가인지 어디 보세.”

옆에 듣고 있던 장영봉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회장님, 보시면 느끼겠지만 이강수의 그림은 뭔가 사유하게 하고, 감성을 사로잡는 특이한 힘이 있습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서준홍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사실 나도 팸플릿에 실린 그림을 보고 무척 기대하고 있다네.”

이때, 카메라를 든 기자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사내가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서준홍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잡지 월간 예술 기자 강상택입니다.”

강상택이 명함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명함을 받아든 서준홍이 강수를 가리켰다.

“월간 예술? 잘 왔네. 여기 이강수 작가는 재능 있는 화가니까 취재해서 널리 알려주게나.”

“예. 물론입니다. 저, 회장님. 평상시 만나 뵙고 회장님의 예술품 컬렉션에 대해 고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몇 가지 질문드려도 될까요?”

시간을 확인한 서준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픈까지 십 분 정도 남았군. 물어보게.”

“감사합니다. 회장님은 고향인 충주에 미술관 설립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매년 많은 작품을 수집하고 계시는데 회장님의 컬렉션 기준은 무엇입니까?”

“컬렉션 기준이라.... 내 컬렉션에 거창한 기준은 없지만 자기 작품 세계가 뚜렷한 중견작가를 선호한다네. 물론 독특한 감각을 보여주는 신진작가 작품도 수집대상이지. 그리고 손이 안 가는 작품이 있어. 현대미술을 표방하면서 장난스럽거나 유치하고 엽기적인 작품은 개인적으로 예술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예술품이면 작가의 철학과 예술혼이 스며있어야 하지 않겠나? 난 그런 작품을 선호한다네.”

“유치하고 엽기적인 작품은 어떤 작품인지 몇 가지 예를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껄껄. 그런 작품은 널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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