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28화 (128/197)

# 128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28회

해왕식품 회장실.

서준홍은 잭상 위에 놓인 우편물을 열어 하나씩 살펴보다 선암갤러리에서 온 우편물을 발견하고 반색해서 집어 들었다. 봉투에는 이강수 작가 두 번째 개인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드디어 이강수가 두 번째 개인전을 여는구나. 첫 번째 개인전을 봄에 연 것 같은데 꽤 빠르군?’

서준홍은 봉투를 뜯어 팸플릿을 꺼내 보았다.

‘이건 뭐지? 팝아트인가?’

의아한 생각이 든 서준홍은 그림을 자세하게 살핀 후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으음.... 팝아트 양식을 채용했지만 팝아트 작품은 아니군.”

팸플릿에 소개된 작품은 25점이었으나 그림의 제목은 다섯 가지였다.

군마, DNA남녀, 탄생, 마지막 시선으로부터, 야만의 종말

실크스크린 인쇄로 복제했는지 아니면 각각 그렸는지 팸플릿에 실린 사진으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림은 개별적인 회화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림은 원화를 봐야 평가할 수 있는 법.’

개인전 개막일은 9월 1일 수요일, 시간은 오후 4시였다.

두 번이나 작품 구매에 실패한 서준홍은 이번엔 직접 오픈 시간에 맞춰 가기로 작정하고 인터폰을 눌렀다.

[박 실장입니다.]

“잠깐 들어와.”

[네, 회장님.]

인터폰이 끊기고 단정한 투피스를 입은 박연경이 수첩과 펜을 가지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9월 1일 수요일 오후 2시 이후엔 스케줄 비워 놔. 그날은 인사동 선암갤러리 갈 거야.”

“선암갤러리요?”

“이강수 개인전이 오후 4시에 오픈이야. 이번엔 내가 직접 가서 봐야겠어. 저번에 오픈 두 시간 만에 전시 작품이 완판됐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대체 그 이유가 뭔지 내 눈으로 작품을 확인해봐야겠다.”

“아, 예. 알겠습니다.”

“됐어. 나가봐.”

“네.”

회장실에서 나온 박연경은 신유라에게 지시했다.

“유라 씨. 9월 1일 2시부터 회장님 스케줄 비워 놔.”

“무슨 일이시죠?”

“인사동에 가신대.”

“인사동이면 혹시 이강수 개인전에 가시는 건가요?”

“맞아. 유라 씨가 어떻게 알았지? 팸플릿 봤어?”

“네. 저한테도 선암갤러리에서 전시 관련 우편물이 오거든요. 이강수 화가 두 번째 개인전이 오후 4시에 오픈해요.”

“그래? 저번에 첫 번째 개인전 가서 보니까 이강수 작품이 단체전 때보다 꽤 올랐더라. 작품 사이즈가 커지기도 했지만, 그림값이 대부분 이천만 원 선이야. 이번엔 더 오를까?”

“첫 번째 개인전 작품도 완판됐는데 아마 더 올려서 내놓겠죠?”

“그러게. 이강수 화가는 그림값이 가파르게 올라가네. 나도 한 작품이라도 사놔야 하는 건지 고민되네?”

“실장님, 고민하지 마시고 개인전 가서 마음에 드는 작품 있으면 한 점 구매하세요.”

“글쎄?”

미간을 좁힌 박연경이 얼굴을 펴며 말했다.

“회장님 안목도 보통 아닌데 이강수 작품 구입하려고 직접 인사동에 가실 정도면 뭔가 있는 화가는 분명한 것 같아. 정말 괜찮은 작품 있으면 한 점 구매할까 싶어.”

“그러세요. 투자를 떠나서 방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걸어 놓고 매일 보니까 기분 좋더라고요.”

“유라 씨는? 팸플릿 보니까 어때? 사고 싶은 작품 있어?”

신유라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네. 이번 작품들은 전부 초현실적인 소재를 다뤘는데 팝아트 양식을 차용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분위기가 독특하고 환상적이죠. 그런 특색 있는 작품 하나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전 한 작품 사려고 하는데 어떤 걸 살지는 직접 봐야 고를 수 있을 것 같아요.”

박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 씨는 앞뒤 재지 않고 과감하게 저지르는 면이 있어. 나도 첨엔 그랬는데 몇 번 실패하니까 그렇게 안 되더라. 하지만 이번엔 나도 한 점 구입할까봐.”

“제가 팸플릿 가져올게요.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는지 미리 골라보세요.”

“그래. 가져와 봐.”

“네. 실장님.”

*

한 주간 문화계 소식의 리포터 나미연이 담당 PD 김도진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감독님, 정진규 선배한테 연락 왔는데 이강수 화가 개인전이 9월 1일에 오픈한다는데요.”

“그런데?”

“이강수 화가 그림 좋잖아요. 미리 보는 공연, 전시 코너에서 소개하는 것 어때요?”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김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굳이 개인전 전시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까? 자칫하면 특정 화가 개인전 홍보했다고 구설수에 오를 수 있잖아.”

“근거도 없는 구설수가 뭐 그리 대순가요? 무엇보다 볼만한 전시회 소개한다는 우리 본연의 목적에 충실 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리고 저번 개인전 때 오픈 당일 전시 작품이 완판됐잖아요. 이번에도 수요일 오픈 당일 전시 작품이 완판되면 특정 개인 전시회를 홍보한다는 말은 못 하지 않겠어요?”

“그때는 그때고, 이번에 전시 작품이 완판될지 안 될지 어떻게 알아? 물론 완판되면 욕은 덜 먹겠지만 누군가는 비난하고 떠들어대겠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부화뇌동해서 목소리를 높일 테고.”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요? 우리가 떳떳하면 되죠.”

잠시 미간을 좁히고 염두를 굴린 김도진이 말했다.

“물론 그렇긴 한데 이강수 화가 전시회를 소개하려면 다른 몇몇 작가 전시회도 묶어서 소개해야 할 거야. 그래야 특정 개인 전시회 홍보라는 악의적인 공격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역시 감독님은 생각이 깊으시네요. 아예 인사동 전시회 특집처럼 몇몇 작가의 전시회를 소개하면 되겠네요.”

“근데 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냐? 왜 이강수 화가 전시회를 소개하려고 들어?”

김도진이 툭 던진 말에 흠칫한 나미연이 당황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뭐, 뭐요? 꿍꿍이는 무슨 꿍꿍이가 있어요? 그림이 워낙 볼만 하니까 소개하는 거죠.”

김도진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미연을 노려보다 능글맞게 말했다.

“저번에 이강수 화가가 캐리커처 사인회 했잖아. 캐리커처가 아니라 거의 초상화 수준이었지만. 미연 씨도 캐리커처 부탁하려는 거 아냐?”

‘그, 그거였어?’

나미연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눈치 엄청 빠르시네. 감독님도 한 컷 그려달라고 하세요. 이강수 화가가 유명해지면 캐리커처도 꽤 비싸질걸요?”

“그래. 사람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지. 이강수 그림은 색감이 놀랄 정도로 뛰어나서 캐리커처가 아니라 작품을 한 점 구입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 근데 신인화가인데도 그림값이 장난 아니게 비싸서 고민되네.”

“그러게요. 그림 한 점에 이천만 원씩 하니 쉽게 살 수 없긴 해요.”

“그럼 미연 씨가 인사동 전시회 컨셉으로 소개할 만한 다른 전시회가 있는지 알아봐. 전시 자료도 챙기고. 그리고 방송에 나가는 건 미정이니까 회의에서 결정나면 알려준다고 해.”

“네. 알았어요.”

“참, 그리고 이번 전시회도 캐리커처 사인회 할 건지 선암갤러리 쪽에 문의해봐.”

“그건 왜요?”

“저번에 캐리커처 사인회 하는 장면 찍어놓은 영상이 꽤 볼만하거든. 그거 써먹게.”

“호호, 빠르게 재생한 것 같은 그 영상이요. 그 영상 편집해서 넣으면 재밌겠어요.”

김도진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밝은 얼굴의 나미연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미연 씨가 뭣 때문에 당황했지? 이강수한테 관심 있나? 이강수가 워낙 체격도 좋고 미남이라 미연이랑 어울리긴 한다만....’

김도진은 이강수 개인전에서 보았던 여성을 떠올렸다.

외모나 몸매가 연예인 뺨치게 생긴 미모의 여성이었다.

‘두 사람 보통 사이가 아닌 게 분명한데. 설마 미연 씨가 이강수를 마음에 두고 있진 않겠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남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자존심 강한 나미연이 임자 있는 남자에게 관심 가질 이유가 없었다. 김도진은 자신이 오버했다는 생각에 피식 실소를 짓고 말았다.

‘바보 같은 생각 말고 일이나 하자.’

김도진은 이번 주에 다뤄야 할 축제와 공연, 전시 등 보도자료에 시선을 돌렸다.

*

8월 중순.

중천에 떠오른 해는 이글거리며 숨 막힐 것 같은 열기를 뿜어냈다.

짙푸른 녹음으로 뒤덮인 북한산이지만 거침없이 내리쬐는 뙤약볕의 열기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마나회로 수련을 마친 강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일어났다.

‘땀이 저절로 흐르는구나.’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두 번은 운동 삼아 마나회로를 수련했다. 산을 달리지 않으면 몸이 찌뿌둥해서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주문한 반지를 찾으면 인챈트마법을 사용해봐야지.’

강수는 주하에게 줄 선물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반지를 주문해 놓았다. 그 반지에 실드마법을 인챈트할 계획이었다.

‘과연 몇 번 시도해야 인챈트에 성공할 수 있을까?’

인챈트 성공 확률은 0.5%다. 절대 만만치가 않다. 한데 인챈트마법을 사용해 마나가 고갈되면 마나 완충까지 최소 일주일은 걸릴 것이다. 김대풍 어르신이 귀국하기 전에 인챈트가 성공하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배낭을 챙긴 강수는 빠른 걸음으로 하산했다.

아파트에 도착해 등산복을 벗고 몸을 씻은 강수는 집을 나와 돈암동으로 차를 몰았다.

전시회 출품 작품 75점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고원철과 서혁중이 마지막 작품을 하나씩 작업하고 있는데 아마도 오늘쯤 완성될 것 같았다.

‘가만, 작업이 마무리되면 알바도 끝나는 거네?’

막상 두 후배가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몇 달 같이 작업하면서 정이 든 것이다.

‘음, 이번 달까지는 나오라고 할까? 어차피 작품 포장하고 옮기고, 디스플레이하려면 일손이 필요하긴 한데....’

자기 생각과는 달리 단체전 출품 준비나 자기 작품 한다며 그만 둘 수도 있었다. 일단 전시회 할 때까지 나올 수 있는지 의중을 타진해보기로 했다.

돈암동에 도착한 강수는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5층으로 올라갔다.

삑삑삑삑!

강수는 디지털도어락을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원철과 서혁중이 강수를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날씨 덥죠? 오는데 푹푹 찌더라고요.”

“그러게. 갈수록 여름철 날씨가 더워지는 것 같다. 에어컨 아니면 여름나기 쉽지 않겠어.”

“그러게요.”

에어컨이 돌아가는 작업실은 시원한데 고원철과 서혁중은 여느 때와 달리 시무룩한 모습이 기운 없어 보였다. 강수가 의아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너희들 왜 기운 없어 보인다? 더위 먹었냐?”

서혁중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 그게 아니고 오늘이면 마지막 작품이 끝날 것 같은데요? 그러면 저힌 내일부터 안 나오는 건가 해서요.”

고원철과 서혁중도 작업이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 모양이었다.

“전시 개막이 9월 1일이잖냐. 앞으로 보름 정도 남았는데 그때까지 나와 주면 나야 고맙지. 어때? 나올 수 있어?”

서혁중이 얼굴을 활짝 펴며 대답했다.

“당연히 나와야죠. 개인전 오픈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작품을 선배님 혼자 언제 포장합니까? 저희가 해야죠.”

“저도 나오겠습니다. 한데 포장 끝나면 우리가 할 작품이 있나요?”

“작업할 건 있긴 한데 혁중이 말대로 작품 포장이 급한 것 같다. 작업은 작품 포장 끝나고 얘기하자.”

“알겠습니다.”

문득 서혁중이 강수를 불렀다.

“선배님.”

“왜?”

“만약 선배님한테 천억 원쯤 있다면 뭐 할 겁니까?”

“천억?”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천억으로 뭘 할 수 있는지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런 엄청난 돈이 있으면 뭔가는 하겠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한데 뜬금없이 그런 건 왜 물어?”

“어제 뉴스에 나왔는데 박상천 아세요?”

“박상천? 처음 듣는 이름인데?”

“박상천은 몇 달 전에 핑퐁톡이라는 채팅앱을 팔아 천억 원 돈벼락 맞은 청년 갑부거든요. 그 친구가 룸살롱에서 술 마시다 시비가 붙었는데 상대방이 휘두른 양주병에 뒤통수를 맞고 혼수상태래요. 천억을 가진 청년 갑부가 룸살롱에서 인생 조졌으니 진짜 허망하지 않습니까?”

“혼수상태면 깨어날 수도 있지 않겠어?”

“사건이 터진 건 열흘 전이래요. 깨어나려면 벌써 깨어나야죠. 지금까지 혼수상태면 깨어나기 쉽지 않을 걸요.”

옆에서 듣고 있던 고원철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난 천억 자산가가 룸살롱에서 술 마시다 그런 일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더라. 뭔가 내막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 마무리 작업이나 하자.”

“하긴 댓글에 음모론이 난무하긴 하더라.”

“음모론은 또 뭐냐?”

“박상천 아내가 청부했다는 말도 안 되는 낭설이 떠돌더라고요. 돈 많은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으니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거겠죠. 뭐, 음모가 있으면 경찰이 밝혀내겠죠?”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지.”

고원철과 서석중이 작업한다며 이젤로 갔다.

세상은 황당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천억의 자산가 박상천은 자신의 장미빛 인생이 룸살롱에서 망가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별 일이 다 일어나네.’

강수는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해?’

박상천은 천억이나 소유한 앞날이 창창한 젊은 청년이다. 룸살롱에서 무슨 일로 다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젊은 나이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불쌍하기도 했다.

‘도와줄까?’

서혁중은 박상천이 깨어나려면 벌써 깨어냈을 거라고 했지만, 자신의 도움 없어도 어느 순간 깨어날 수 있었다. 혼수상태면 생명에는 지장 없을 테니 자기가 섣부르게 나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웅! 우웅!

이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장영봉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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