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27화 (127/197)

# 12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27회

<크크크, 내가 돌아왔다.

내가 누구냐고? 설마 벌써 날 잊었니? 난 우리 카페 최고의 조회수!는 아니지만 버금가는 조회수를 기록한 ‘이강수 아저씨 전시회 방문기’를 쓴 장본인이다. 크크~~ 이제 머리에 반짝! 불 들어왔지?

거두절미하고!

이번엔 이강수 아저씨의 신작, 그리고 대작 ‘향유고래의 꿈’ 감상기를 올리겠어.

난 요 밑에 게시된 글을 읽자마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서 지하철역으로 질주.

목표는 강남역 퍼스트타워.

퍼스트타워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벽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엄청나게 거대한 그림을 발견했어.

난 뭔가에 홀린 듯 그림 앞으로 다가갔어. 그리고 한동안 장승처럼 그림 앞에 서 있었던 거야!

그래, 바로 이강수 아저씨의 향유고래 그림이야.

보시라! 거대하고 장엄하고 유연한 향유고래의 아름다운 자태를!

처음엔 충격과 전율에 몸을 떨었어. 그리고 찾아온 평화와 고요.

나는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듯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기분을 맛보았어.

향유고래라는 존재가 이토록 강렬하게 심상에 아로새겨질 줄이야!

향유고래가 살아 숨 쉬는 듯한 디테일한 표현과 황홀한 색감은 말이나 글로 표현이 안 돼.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밖엔 못 하겠어.

일상이 지겹고 따분하면 강남으로 달려가서 봐!!

잠시나마 깊은 바닷속을 향유고래 떼와 같이 헤엄치는 환상을 경험할 수 있을 거야.

아래 사진은 향유고래의 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찍어놓은 거야.

대박 아니니?

물론 내가 찍은 게 아니고 어떤 네티즌 언니가 SNS에 올린 거 퍼온 거야. 주소 링크해 놨어. 더 자세한 걸 보고 싶은 얘들은 링크 클릭해.

참, 강수 아저씨 두 번째 개인전이 한 달 뒤 선암갤러리에서 열린대. 어떤 그림일지 벌써 가슴이 두근거려. 오픈하자마자 달려가야지.

하여튼 내가 강수 아저씨 그림에 빠질 줄이야! 아저씨는 영원한 사랑이야~~>

-진하god: 우리 귀염둥이 해사야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사진만 봐도 환상이다. 강남역까지 다녀오느라 수고했어.

-소행성1004: 잘 봤어요.

-movi1999: 오, 이것이 다 향유고래? 가서 보고 싶다.

┗유다정: 동감. 백 마리가 넘는 향유고래라니. 이런 그림은 가서 봐야해.

-쌈디: 너 누구 팬이냐? 수상하다?

┗준: 지x. 네가 수상하다는 생각 안 드니?

┗루미앙: ㅋㅋ. 재 원래 저래.

┗마튜: 크, 이 인간 여전히 삐딱하네. 좋으면 좋다고 글도 못 쓰냐?

해사야가 올린 게시글에 댓글이 줄줄이 달리기 시작했다.

‘향유고래의 꿈’이 퍼스트타워 빌딩 로비에 걸려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핑크티티 팬카페에서는 핑크티티 초상화에 이어 때 아닌 향유고래 인증샷 열풍이 일어났다.

또한 ‘향유고래의 꿈’은 SNS를 타고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SNS의 파급력은 빠르고 광범위하지만, 한계가 있다. SNS 매체는 새로운 소식이나 이슈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기 때문에 기록, 저장하는 기능보다는 공유, 확산하고는 금방 휘발해버린다.

강수의 ‘향유고래의 꿈’은 빠른 확산만큼이나 빠르게 네티즌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

중후한 인상을 풍기는 40대 초반의 사내가 서류 가방을 들고 ‘향유고래의 꿈’ 앞에 서서 한동안 그림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S급?’

머릿속으로 S급이라는 판정을 내린 사내는 아트 컨설턴트 이필성이다. 그는 우연히 SNS를 통해 이강수의 ‘향유고래의 꿈’이 퍼스트타워 로비에 걸려 있다는 글과 사진을 접했다. 그림에서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이필성은 즉시 퍼스트타워로 달려온 것이다.

신인작가의 작품이 S급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

S급은 작가의 명성이나 대중적인 인기, 미술비평가의 작품 분석, 미술관의 작품 소장 여부, 작가만의 작품 세계의 형성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대체 S급이란 단어가 왜 뇌리에 떠올랐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이필성은 이강수를 블루칩 작가로 분류하고 있었다.

아직 미술관 관계자나 갤러리스트, 컬렉터에게 별 관심을 끌고 있지 못하지만 어떤 계기가 있으면 한순간에 스타작가로 뜨고, 그림값이 폭등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핑크티티의 초상화의 대중적인 이슈와 개인전 작품의 완판이 그 전조라고 봐도 된다.

언제 뜰지가 관건이지만 뜨기만 하면 10배 이상의 수익을 안겨줄 아주 드문 작가가 분명했다.

이필성은 이강수가 미술관계자들에게 알려지고, 스타작가로 뜨기 전에 가능하면 많은 작품을 확보해 놓을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9월에 있을 이강수의 두 번째 개인전에 대비해 소장 작품 6점을 팔아 2억 원을 준비해 놓았다.

‘이 그림만 해도 억대가 넘겠어. 아무래도 이억은 좀 불안하군. 그림을 좀 더 팔아서 삼사억 정도 준비해야겠다. 한데 이 작품 팔라고 하면 팔까?’

로비에 걸기 위해 빌딩주가 그림을 주문 제작했다면 돈이 궁하지 않은 이상 팔 이유가 없다. 하지만 빌딩주와 같은 상류층 인물과 안면을 터서 잠재 고객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자기 일이다.

영업 차원에서라도 빌딩주를 만나야 할 필요가 있다.

‘빌딩주 김용극. 글로벌 YKC 사장이기도 하고. 그런데 어떻게 이강수의 신작이 여기 걸리게 된 것이지?’

이필성도 작품 의뢰를 생각해보았다.

4월쯤 장영봉 부장에게 작품 의뢰를 문의했을 때 이강수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이 9월 초에 잡혀 있어서 개별 의뢰는 받지 않는다는 대답을 받았다. 그래서 9월을 기다렸던 것인데 뜻밖에도 신작이 이곳에 걸린 것이다.

두 번째 개인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이곳에 신작을 그려 주었는지 궁금했다.

‘장 부장은 알고 있겠지? 물어보자.’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이필성은 장영봉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필성 사장님이시군요. 장영봉입니다.]

“네, 장 부장님. 날도 더운데 휴가는 다녀오셨는지요?”

[하하. 아직 못 갔습니다. 저는 다음 주에 갈 계획입니다.]

“네. 즐거운 휴가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전화했습니다.”

[예? 뭔가요?]

“이강수 작가가 강남 퍼스트타워에 ‘향유고래의 꿈’이라는 신작을 그렸던데 어떻게 된 사연인지 궁금해서요.”

[아, ‘향유고래의 꿈’이요. 그게 친지의 부탁을 받아서 그렸다고 합니다. 다행히 개인전 작품 하는데 차질 없어서 그리게 됐답니다.]

“친지라면 빌딩주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요?”

[어떤 관계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장 부장님, 이강수 작가 개인전 팸플릿은 받아보았는데 전시 작품을 사진 파일로 따로 받아보고 싶습니다. 안 될까요?”

[아뇨. 보내드려야죠. 이메일로 보내드릴까요?]

“예, 이메일로 부탁합니다.”

[그럼 바로 보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필성은 김용극을 만나기 위해 27층으로 올라가 글로벌 YKC로 들어갔다.

김용극과 선약은 하지 않지만, 운이 좋으면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오셨나요?”

산뜻한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직원이 방문자 이필성을 맞이했다.

“김용극 사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사장님이요? 약속되어 있나요?”

“그렇진 않고 난 아트 컨설턴트입니다.”

이필성이 명함을 여직원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사장님께 로비에 걸린 향유고래의 꿈이란 그림에 대해 상담하고 싶다고 전해주시겠어요?”

여직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림에 대해 무얼 상담하신다는 말인가요?”

“그건 사장님을 만나서 말씀드릴 문제입니다만.”

“그래요?”

명함을 확인한 여직원이 고개를 꺄웃했다.

“선약이 없으면 안 되지만 혹시 모르니까 인터폰을 넣어보겠어요. 잠시 기다리세요.”

“그러죠.”

인터폰을 들고 통화한 여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필성은 여직원이 안내한 사장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고 있던 김용극이 사무실로 들어온 이필성에게 소파를 가리켰다.

“여기 앉으시오. 아트 컨설턴트라고 했소?”

“예. 그렇습니다.”

이필성이 명함을 꺼내 김용극에게 건네주었다. 명함을 받은 김용극도 자기 명함을 이필성에게 주었다.

“저는 컬렉터의 소장품을 판매 대행하거나 투자 가치가 높아 장기적으로 수익을 내는 예술품을 컬렉터에게 소개하고 추천하는 아트 컨설턴트입니다. 또한 저 역시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컬렉터이기도 합니다.”

이필성이 가방에서 파일을 꺼내 김용극에게 내밀었다.

“지금까지 제가 판매했거나 추천을 통해 구매 대행한 예술품 목록입니다.”

김용극이 자료를 읽어보고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는 예술품 컬렉터가 아니다. 자료에 적힌 예술품을 살펴봐도 아는 예술가나 작품이 유명작가 말고는 거의 없었다.

“그래요? 한데 ‘향유고래의 꿈’에 관해 용건이 있다고 했는데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한 것이오?”

“SNS에서 우연히 향유고래의 꿈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는 글을 발견하고 감상했습니다. 그림이 매우 특이하고 마음에 와닿더군요. 혹시 사장님이 향유고래의 꿈 작품의 소유주 되십니까?”

“그렇소. 내 것이오.”

“외람된 말씀이지만 혹시 그 그림을 판매할 의향이 계신지요? 만약 판매할 의향이 있으면 제가 최대한 높은 가격에 맞춰 드리겠습니다.”

“그림을 팔아라?”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이런 기회에 팔 수도 있다. 하지만 안면 있는 몇몇 입주사 오너나 임원에게 그림에 대해 칭찬을 들은 김용극은 그림을 팔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인사치레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로비에 내려가면 사람들이 항상 그림 앞에서 모여 고개를 쳐들고 감상하고 있을 정도였다.

다만 1억 2천만 원을 들여 제작한 그림이라 판다면 본전은 받을 수 있는지 흥미가 생겼다.

“그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군. 그보다 당신이 보기에 향유고래의 꿈을 내가 얼마에 샀을 것 같소?”

“그건 갤러리에서 샀을 경우와 작가에게 직접 구입했을 때 가격 차이가 납니다. 사장님은 그림을 어떻게 구입했는지요?”

김용극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작가에게 직접 구입했소.”

“그러면....”

현재 이강수의 그림값은 신인화가라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높다.

봄에 열린 첫 개인전에서 200호인 ‘무언의 약속’이 6천만 원에 팔렸다. 800호 정도 되는 ‘향유고래의 꿈’은 단순하게 계산하면 200호의 4배인 2억 4천만 원 정도이고, 작가에게 직접 구입했으므로 절반 가격인 1억 2천만 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1억 2천만 원이라는 그림값은 여러 변수를 배제했을 경우고, 지인을 통해 의뢰했다고 했으니 최소 1억은 지급했을 것 같았다.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1억쯤에 샀을 것 같습니다.”

김용극이 어깨를 으쓱했다.

“비슷하오. 구매 가격은 그렇다 치고 그림을 팔면 얼마 정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소?”

잠시 염두를 굴린 이필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강수 작가는 신인화가 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아트페어 상하이나 개인전에서 높은 가격에 팔렸습니다. 그때 팔린 가격이 이강수 화가 작품의 현재 가치이고, 여기에 플러스나 마이너스 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화가와 갤러리를 떠난 개별 작품의 정확한 가격은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결정됩니다. 아무리 비싼 그림도 팔려고 할 때 구매자가 없으면 그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 여러 요인을 고려해서 ‘향유고래의 꿈’을 지금 판매하신다면 저는 삼억 정도 받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억이라.... 하하하.”

김용극이 느닷없이 대소를 터트렸다.

이강수는 주하와 결혼할 예비 사위가 아닌가. 이강수의 직업이 화가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실망했다.

하지만 김용극은 딸의 선택을 존중했다.

자기가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한 경험을 딸에게 반복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는 변화, 발전하고 세대의 가치관도 변하기 마련이다. 딸의 행복을 자기의 가치관에 맞추는 것은 서로가 불행하다. 또한 딸이 가진 건물의 임대료면 남자가 돈을 벌지 않아도 둘이 사는 데 부족하지 않았다. 아니, 사치하며 호화롭게 살지 않는다면 임대료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한데 그림 한 점에 3억 원이라니!

첫 개인전이야 주변 지인이 사주니 그러려니 했다. 자기도 이강수가 주하와 결혼할 녀석이라서 고민하지 않고 작품을 의뢰했다. 한데 이강수는 배고픈 화가가 아니었다. 배고픈 화가는커녕 황금 손을 가진 화가가 아닌가?

김용극은 물감으로 황금을 만드는 화가가 자기 사위가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흡족해서 절로 대소가 터져 나온 것이다.

“이강수, 이 친구 생각보다 대단하군. 굉장해! 믿기지 않을 정도야.”

이필성은 3억이라는 그림값에 흥분한 김용극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일억짜리가 며칠 만에 삼억이나 됐으니 흥분할 만하지. 한데 일억짜리가 몇 년 뒤 수십억짜리가 되면 소파 위에서 펄쩍펄쩍 뛰겠군.’

이필성은 착각했다.

김용극은 1억짜리 그림이 3억이 돼서 흥분한 것이 아니라 이강수가 사위가 될 사내라서 흥분한 것이다. 그런 내막을 모르는 이필성은 단순히 그림값 때문에 김용극이 흥분했다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팔고 싶지만, 기껏 로비에 그림 한 점 장식해 놨는데 체면 없이 일주일 만에 팔아먹을 수는 없겠지요?”

“그렇긴 합니다.”

“당신의 제안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소. 어쨌든 나중에 팔고 싶은 생각이 들면 당신에게 연락하지.”

“알겠습니다. ‘향유고래의 꿈’ 말고도 판매하거나 구매하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제가 저렴하게 작품 구매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럽시다.”

“다음에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용극에게 인사한 이필성은 소파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애초에 김용극이 그림을 팔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이필성은 이강수 작가의 신작을 보고 그의 잠재력을 확신했다는 데 의미를 두었다. 또한 재력 있는 잠재 고객과 면담한 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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