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23화 (123/197)

# 12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23회

7월 중순.

한동안 기승을 부렸던 더위는 오전에 내린 소나기로 한풀 꺾였다. 하지만 구름만 걷히면 따가운 햇볕에 달궈져 도시는 금방 숨 막히는 열기를 뿜었다. 비가 온 뒤라 후덥지근한 날씨도 매한가지였다.

인사동 근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강수는 문을 열고 나왔다. 뜨거운 공기가 훅하고 얼굴을 덮쳤다.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햇살이 강렬하고 공기가 후덥지근할 때는 콜드마법이 인챈트 된 옷이나 우산이 절실했다.

‘인챈트마법이 아쉽군. 인챈트마법 때문이라도 4서클 마나하트를 빨리 완성해야 하나?’

4서클 마법사가 되면 1, 2서클 마법을 물건에 인챈트할 수 있다. 인챈트에 성공할 확률은 0.5%에 불과하지만 마나가 완충된 상태에서 인챈트마법을 200번은 사용할 수 있다. 확률상 1번은 성공할 수 있다. 즉, 일주일에 한 번 마법이 인챈트 된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

3서클 마나하트면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마법이 필요할 때는 4서클 마법사가 돼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어떤 계기나 동기가 있어야 의욕이 생기는 것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

강수는 선암갤러리를 향해 걸었다. 더위를 피해 산과 바다로 휴가를 떠난 사람이 꽤 되는지 도로나 거리는 한산한 편이었다.

선암갤러리 3층 사무실.

강수는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이 작가님이시네요? 어서 오세요.”

하얀 블라우스를 입어 산뜻한 분위기를 연출한 여직원이 미소 띤 얼굴로 강수를 맞았다. 봄에 개최한 개인전에서 오프닝 당일 전시 작품이 완판되었고, 관람객의 인기를 끈 사인회로 인해 선암갤러리 직원은 강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장 부장님 만나 뵈러 왔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직원과 걸어오는 강수를 발견한 장영봉이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웃었다.

“하하. 이 작가, 어서 오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예, 선배님.”

“회의실로 가세.”

“차는 뭐로 드릴까요?”

“난 녹차. 이 작가는?”

“저도 녹차 한 잔 주세요.”

“네. 곧 갖다 드릴게요.”

장영봉과 강수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직원이 녹차 두 잔을 가져왔다.

장영봉이 녹차를 한 모금 음미한 후 먼저 운을 뗐다.

“작품은 잘 받아보았네. 네 번째 작품도 끝나가니 이제 한 작품만 남았군.”

“네.”

“작품은 어떻게 디스플레이할지 생각해 보았나?”

“예? 그냥 한 작품씩 전시할 생각인데요?”

“역시 그렇군. 앤디 워홀의 ‘최후의 만찬’처럼 15점을 한 작품으로 디피해보는 건 어떨까 싶네만.”

“앤디 워홀은 ‘최후의 만찬’ 60점을 한 작품으로 만들었죠?”

“그렇다네. 자네 작품도 5점을 한 단으로 놓으면 3단을 쌓아서 한 작품으로 만들 수 있지. 그림의 가치나 가격 책정하는 데도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네.”

강수가 실크스크린 인쇄로 한 작품당 15점을 복제한 이유는 그림값을 낮춰 일반 관람객도 자기 작품을 소장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15점을 한 작품으로 전시하면 자기 의도와는 정반대 결과가 되고 만다.

강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해도 괜찮긴 하지만 전 한 작품씩 전시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많은 컬렉터가 제 작품을 소장하고 감상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 그런가?”

장영봉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그림값은 생각해 보았나?”

“예. 그림 하나를 복제해서 여러 작품으로 만들었으니 그림값을 낮춰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작품당 천만 원이 어떨까요?”

“뭐? 천만 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장영봉이 말했다.

“아무리 실크스크린 인쇄로 15점을 복제했어도 개별적으로 채색해서 회화작품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건 너무 저가 아닌가? 그리고 기존 판매가격 때문에 호당 십만 원은 문제가 있다네.”

“무슨 문제죠?”

“두 번째 개인전에서 호당 가격을 너무 차이나게 내리면 저번 개인전에서 호당 이십칠만 원에 자네 그림을 구매했던 컬렉터에게 피해를 주는 걸세. 그들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네.”

“그런가요? 그럼 얼마가 적당할까요?”

“내 생각엔 최소 호당 이십만 원은 해야 할 것 같네. 그 정도는 해야 기존 컬렉터들도 수긍하지 않겠나?”

잠시 생각을 정리한 강수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죠. 호당 이십만 원으로 하죠.”

장영봉의 얼굴이 밝아졌다.

한 작품당 천만 원과 이천만 원의 차이는 크다. 총매출 규모를 따져도 작품 수가 75점이니 7억 5천만 원과 15억 원이다. 물론 몇 점이나 팔릴지는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몇 점이 팔리든 수익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알겠네. 호당 이십만 원으로 하지. 내 얘기만 했군.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게....”

강수는 ‘청년 작가들이여, 희망을 던져라’전을 개최하게 된 사연을 장영봉에게 풀어놓았다. 강수의 설명을 들은 장영봉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전시회를 자네가 주최한다고? 주최 측이 강하아트라는 곳이던데 설마 자네가 오너인가?”

오너라는 말에 강수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번 단체전을 치르려고 개인사업자 낸 것뿐입니다.”

“개인사업자도 자네가 주인이니 오너는 오너지. 한데 전시 규모가 굉장히 크군. 아트페어나 다름없는 것 같네. 그런 대규모 청년 작가 단체전 전시회는 성공하기 어려울 텐데 무리 하는 것 아닌가 싶어. 실제로 매년 다수의 아트페어가 개최되고 있지만, 성과내는 아트페어는 드물거든. 실패하면 손해가 클 텐데 어쩌려고 그러나?”

강수가 담담히 말했다.

“실패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실패하면 금전적인 손해는 보겠지만 전시회를 통해 얻는 것도 있을 겁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자네를 재능 있는 화가로만 생각했는데 그런 도전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네. 내 생각이 짧았군.”

“하하. 저야 명함만 걸고 일은 진구가 다 합니다.”

“진구야 시키는 일 하는 거지. 단체전에 대한 기획과 자금은 전부 자네에게서 나온 것 아닌가? 그런데 전시회가 11월이면 9월 개인전 끝나고 두 달 정도 후에 개최하는군. 자네도 단체전에 출품할 건가?”

“예. 전 좀 많은 작품을 출품할 생각입니다.”

“많이 출품해? 작품 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을 텐데 몇 점 정도 출품하려고?”

“글쎄요? 적어도 150점은 출품할 겁니다.”

“헉! 150점? 농담인가?”

장영봉의 놀란 표정에 강수가 미소를 지었다.

“10호, 20호 내외 소품 위주로 출품하거든요.”

“소품이라고 해도 150점을 그리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텐데? 그리고 8월까지는 개인전 작품 그려야 하지 않나?”

“개인전 작품은 후배 도움을 받고 있어서 전 단체전 작품 그리고 있습니다.”

“후배가 도와준다고?”

장영봉의 의문이 깃든 목소리에 강수는 간략하게 현재 작업 시스템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허, 그런 식으로 준비하고 있었군. 굉장하군. 정말 놀라워.”

감탄하던 장영봉이 진중한 표정으로 강수를 불렀다.

“음, 한데 이 작가.”

“예?”

“내 경험상 하는 얘기네만 다른 작가들을 배려한다면 출품작 수를 좀 줄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네. 10점 이상 출품하라고 했으니 보통 15점이나 20점 정도 출품할 텐데 혼자 150점 넘게 출품하는 건 다른 작가와 균형이 맞지 않으니 말일세.”

강수는 다른 작가와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듣고 보니 장영봉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럼 몇 점 출품하면 괜찮을까요?”

“60점을 넘지 않으면 적당할 걸세. 그리고 단체전이 끝나고 이 주쯤 후에 바로 자네의 세 번째 개인전에서 나머지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세 번째 개인전을 선암갤러리에서 개최하자는 얘기였다.

사실 이강수는 선암갤러리 전속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선암갤러리를 통해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맞다. 또한 개인전을 자주 개최할수록 작가의 경력이나 명성을 쌓는 데 유리하다.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네요. 작품은 소품으로 약 100여 점 정도 준비할 수 있으니까 선배님이 세 번째 개인전 날짜를 잡으세요.”

“그래. 아마 12월 초에 비어있을 거야. 잠깐 기다리게. 일정 확인하고 오지.”

“천천히 알려주셔도 됩니다만....”

“아닐세. 말 나온 김에 날짜를 확정해 놓자고.”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장영봉은 강수가 다른 말 할 틈을 주지 않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전시 날짜를 확정해 놓으면 변수가 사라진다. 이강수 그림은 신인화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와 반향이 엄청나다.

4월에 연 개인전에서 오프닝 날 전시작이 완판되는 바람에 작품을 사지 못한 컬렉터가 이십여 명이 넘었다. 그들은 이강수의 두 번째 개인전을 기다리고 있다. 그 때문에 장영봉은 이강수의 두 번째 개인전도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히 소품 위주로 그린다는 세 번째 개인전도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우웅!

강수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주하의 전화였다. 강수는 통화를 연결했다.

[강수오빠, 통화 괜찮아요?]

“괜찮아. 얘기해.”

[아빠가 할 말 있나 봐요. 다음 주에 오빠하고 한번 오라고 하시네요. 언제 시간 있어요?]

“그래? 다음 주라.... 기왕이면 빨리 찾아뵙는 게 낫겠지? 월요일에 시간 되는데 월요일에 가자.”

[네. 좋아요. 점심시간에 맞춰서 가는 거 어때요?]

“좋지. 한남동으로 가면 되니?”

[한남동으로 11시까지 오세요. 같이 아빠 회사로 가요.]

“오케이.”

전화를 끊은 강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아버님이 일로 보자고 하시는 거지?’

전혀 짐작 가지 않았다.

‘만나보면 알겠지.’

강수는 미지근해진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장영봉을 기다렸다.

*

조명이 밝혀져 있는 7, 8평 넓이의 스튜디오.

찰칵! 찰칵!

피팅모델과 조명 보조와 촬영하는 실내는 조용해서 셔터 터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던 박두준이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고 피사체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여자는 굳은 자세에 왠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델의 부자연스러운 모습 때문에 사진이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 자신 있는 포즈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야 원하는 사진이 나온다.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어?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일할 땐 잊어야지.’

서은미.

피사체의 이름이다.

20대 중반으로 168센티의 신장에 몸매가 늘씬하다. 얼굴도 예쁜 편이어서 배우나 연예인을 꿈꾸는 게 분명했다.

‘휴, 이럴 땐 말재주라도 있으면 음료수 한잔하면서 기분을 풀어줄 수도 있으련만.’

박두준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피팅모델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면 좋겠지만 175센티의 평균 키에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 바로 자기다. 결정적으로 말재주마저 딸렸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밉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시원스런 눈은 깊었고, 코는 날렵하고 오뚝했다. 뚜렷한 인중에 입술은 단정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미남이라고 해도 된다.

하지만 그런 장점을 광대뼈와 턱뼈가 전부 상쇄시켜버린다. 광대뼈가 조금 튀어나와 이마가 좁아 보이고, 턱이 각 져서 눈, 코, 입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평범한 얼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큰 눈, 반듯한 이마와 오뚝한 코, 붉고 단정한 입술 때문에 인상이 선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광대를 깎거나 턱을 브이라인으로 깎으면 미남 소리를 들을 것이다.

예전에 얼굴을 찍어 포토샵으로 조금 나온 광대를 제거해 보았는데 얼굴선이 부드럽게 변해 미남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얼굴이 바뀌었다. 그 때문에 광대뼈나 턱뼈를 깎으려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수술비가 만만치 않고, 수술이 잘못되면 후유증과 부작용이 크다는 소리가 많아서 보류 중이었다. 누가 의료사고의 피해자가 될지 모를 뿐 의사도 인간인지라 매년 안면윤곽수술로 인한 의료사고가 일어나지 않는가.

‘요즘은 외모가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데 돈 모아서 수술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수술이 조금만 잘못돼도 인생 조진단 말이야. 휴, 어차피 수술하려면 빨리하는 게 낫긴 한데....’

“다 찍었으면 옷 갈아입을까요?”

포토그래퍼 박두준은 서은미의 질문에 잡생각을 떨쳤다.

서은미와 몇 차례 작업했지만, 업무상 하는 말 외에 개인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서은미는 생긴 것만큼이나 도도하고 눈이 높았다.

말재주가 없으니 음료수라도 한 잔 마시면서 서은미의 마음이 풀리기를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다.

“은미 씨.”

“네?”

“음료수 한잔하고 마저 찍을 까요?”

서은미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뜨악한 얼굴로 힐끔 박두준을 쳐다보았다.

박두준의 표정은 담담했다. 박두준의 표정에서 별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서은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스튜디오에서 나와 자판기가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박두준이 캔 음료를 뽑아 서은미에게 건네주었다.

“여기요.”

“고마워요.”

사실 박두준은 처음 서은미를 보았을 때부터 상당히 호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몸매와 외모가 남다른 피팅모델 서은미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일 턱이 없기 때문이다.

박두준은 무슨 말을 할까 잠깐 고민했다. 표정이 굳어 있어서 사진이 잘 안 나온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자칫 그녀의 기분이 더 상할 수 있었다.

박두준은 가장 무난한 날씨로 대화를 시도했다.

“오늘도 무척 덥더군요. 밤에 잠 자기도 쉽지 않겠어요.”

“그러네요.”

서은미는 날씨에 관심 없다는 듯 약간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박두준은 뭔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공적인 대화 외에는 귀찮다는 듯 선을 긋는 무미건조한 말투에 본론을 꺼냈다.

“오늘 은미 씨 표정이 조금 굳어 있네요. 내가 뭘 잘못해서 기분 나쁘거나 한 건 아닌가 싶어서요.”

서은미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두준 씨 때문에 그런 거 아녜요. 표정에 신경 쓸게요.”

서은미는 박두준이 왜 음료수를 마시자고 했는지 알았다는 듯 간단하게 대답했다.

박두준은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무뚝뚝한 서은미의 말투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길게 얘기해서 역효과 나면 자기만 더 귀찮아진다. 그럴 바에야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게 더 낫다.

우웅!

빈 캔을 버리고 올라가려는데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박두준이 서은미에게 말했다.

“먼저 올라가 있을래요? 전화 받고 금방 올라갈게요.”

“그러세요.”

박두준은 건물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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