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22회
컴퓨터를 켠 강수는 포털 사이트를 열어 복지법인 설립 요건을 검색창에 써넣고 클릭했다. 검색 결과가 모니터에 쭉 올라왔다. 검색 내용을 살핀 강수는 복지법인에 관한 글을 복사해 문서프로그램에 붙여 넣고 그 내용을 인쇄했다.
위이잉-
기계음과 함께 프린터에서 자료가 출력되었다.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시려면 먼저 시군구의 담당자와 의논하세요.>라는 문구가 출력된 자료의 첫 문장이었다.
강수는 첫 문장을 읽고 설립 절차가 간단하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고자 하는 자는 사회복지사업법 시행규칙 제7조에 규정되어 있는 사회복지법인 설립허가 신청서와 기타 구비서류를 완비하여 시군구에 제출해야 하고, 신청인은 신청서 제출 전 법인 주사무소가 소재할 시도 및 시군구와 법인 설립 필요성 등에 대해 충분하게 협의하여 추후 절차가 원만하게 수행되도록 지도를 받아라.
‘음.... 설립의 필요성? 그거야 국가가 돌보지 못하는 불우한 빈곤 계층을 돕겠다는데 필요성을 따져야 해? 요식행위인가? 어쨌든 행정 담당자 의견을 들어서 나쁠 건 없겠지.’
시도는 법인 설립 신청서와 시군구의 기초자료, 시도의 복지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법인설립허가를 결정하며, 목적사업의 범위가 2 이상의 시도에 걸치는 법인의 경우 처리기한은 22일이었다.
구비서류가 적지 않았다.
설립 취지서, 설립 발기인 명단, 정관, 법인 설립 당시의 기본재산목록, 임원명단, 법인이 사용할 인장, 재산출연증서, 재산출연자의 인감증명서, 재산의 소유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 임원의 취임승낙서, 재산의 평가 조서, 설립 당해 연도 및 다음 연도 사업계획서 및 예산서 각 1부 등이다.
‘헐, 준비할 서류도 꽤 되는구나.’
사회복지법인은 시설법인과 지원법인으로 나뉜다.
특히 출연 재산은 목적사업용 기본 재산과 시설운영을 위한 보통 재산으로 구분하고, 기본재산은 목적사업용과 수익사업용으로 구분하여 평가가액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작성해야 한다.
‘시설법인은 시설과 건물 지을 부지도 마련해야 하니 규모가 장난 아니겠다.’
그 외 관련법 내용을 살펴봤지만, 복지 법인 설립은 간단하지 않았다.
‘이거 쉽지 않네? 인적 구성이야 양 교수님이 맡아준다면 알아서 꾸릴 테지만 역시 재원 확보가 문제구나.’
복지법인 설립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면 역시 출연 재원의 확보다.
지원법인이라고 해도 최소 10억은 필요할 것 같았고, 법인의 기본 재산 외에 법인 운영비도 필요했다.
사회복지법인의 설립 자료를 살펴본 강수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확인했다. 법인 설립을 우습게 여겼던 강수는 자기의 순진함과 무지함을 깨닫고 쓴웃음을 흘렸다.
‘큭큭. 중학생 때부터 그림만 그리긴 했지만 나도 세상 물정에 어지간히 어둡구나. 서두를 건 없지만 법인 설립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군. 당연한 건가? 하여튼 재원부터 마련하고 추진해야겠다.’
프린트물을 서랍에 보관한 강수는 옷을 갈아입고 작업실로 갔다.
*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작업실로 돌아온 잭슨 폴락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젠장, 혼자 다 해 먹었네....>
‘공감한다. 하지만 잭슨 폴락 역시 회화의 또 다른 세계를 열었지. 나 역시 그렇게 되지 말란 법 없어.’
창밖에서 여명이 터오는 시각, 이동석은 그렇게 자위하며 옥탑방 방구석을 뒹굴고 있었다. 어제 밤,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안주 삼아 맥주 세 캔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소변이 마려워 새벽에 잠을 깬 이동석은 다시 잠들지 못하고 온갖 상념에 빠져 있었다.
이동석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결에서도 킥킥거렸다.
“낄낄낄!”
그의 뇌리에는 잡다한 이미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벽에 캔버스를 사선으로 절반쯤 박아 넣기도 하고, 캔버스에 커다란 스피커를 꽂고 해체해 물감처럼 뒤섞기도 한다. 냉장고에 운석이 처박혀 주방과 냉장고가 난장판이 되고, 흐물흐물 녹더니 엿가락처럼 늘어져 ‘절규’의 요동치는 붉은 강물의 하늘처럼 물결을 이루고 있기도 했다. 종국에는 형체가 사라지고 추상화처럼 오방색의 화려한 색깔만 남았다.
원색의 오방색으로 덕지덕지 칠해져 있는 모서리, 그 모든 모서리에 무언가를 꽂아 넣기도 했다. 자동차를 꽂고, 코끼리를 꽂고, 거대한 참치를 꽂는다. 모서리에 꽂힌 물체는 흐물흐물 형체가 녹아 오방색의 화려한 모서리와 하나로 섞였다. 그건 오방색의 모서리인지 자동차인지 코끼리인지 참치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오방색 속에 자동차가 있고, 코끼리가 있고, 참치가 있다.
‘왜 이런 이미지가 떠오르는 거지....’
방구석을 뒹굴뒹굴하던 이동석은 그런 의문을 반문하다가 그 의문조차 지워버렸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떠올랐다는 점이다. 때때로 위대한 발견은 논리적인 사고를 통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발견되기도 한다. 물론 그 우연이 필연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준비된 깊은 사고가 필요하겠지만.
‘준비된 사고!’
비몽사몽 상념에 빠져 있던 이동석이 이불을 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그려야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치솟았다. 지금 그리지 않으면 분명히 이 감정과 느낌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주방으로 나간 이동석은 식탁에 스케치북을 펼치고 뇌리에 떠오른 이미지를 그리 시작했다. 하지만 추상적인 표현을 연필로 구체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물감이 있어야 하는데....’
당장 작업실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사이 머릿속에 펼쳐진 이미지들이 흩어질까 두려워 작업실로 가지 못했다. 이동석은 완성된 이미지의 형상화 과정을 아예 처음부터 한 장면 한 장면 스케치해나갔다.
쓱쓱, 쓱쓱!
선이 물결처럼 흐르는 거대한 기둥, 모서리 중간에 자동차가 꼬라 박히고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친다. 자동차와 기둥, 사람, 배경이 선과 면으로 융합되고 형체가 모호해진다. 모호해진 형체는 결국 색채만 남는다.
하나의 이미지 작업이 끝나면 두 번째 이미지를 스케치했다.
창밖은 어두웠고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이동석은 비 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듯 스케치에 열중했다.
꼬르르륵!
아랫배가 콕콕 쑤시는 것 같은 허기를 느낀 이동석은 스케치를 멈췄다.
‘벌써 12시네.’
벽시계를 보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 비가 오나 보다’
이제야 빗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동석은 창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쏴-
“쩝!”
밖에서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집중해 그림을 그려본 적이 얼마만인가? 하늘은 잿빛으로 우중충했지만, 이동석의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밥 먹고 작업실로 가자.’
머뭇거리며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김치와 마른반찬을 꺼내고, 어제 먹던 된장국을 끓인 이동석은 대충 점심을 해치우고 외출을 서둘렀다.
청바지에 반팔 티를 주어 입은 이동석은 가방에 스케치북을 넣고 밖으로 나갔다.
쏴아아!
빗방울이 제법 굵었다.
시원스럽게 내리는 빗줄기는 무엇을 그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지난 몇 달간 답답했던 마음을 말끔하게 씻어내는 듯했다.
4층 옥상에서 바라보는 동네는 뿌옇게 우막에 잠겨 있었다. 서로 냉정하게 경계를 긋고 있던 수많은 건물의 선이 흔들리며 흐려졌다. 우막에 갇힌 세상은 흐려진 경계만큼이나 조금은 포근해진 것 같았다.
아래로 내려간 이동석은 우산을 쓰고 작업실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빗방울이 우산 속으로 들어오고, 옷을 적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옥탑방에서 작업실은 멀지 않다. 1킬로 정도 떨어져 있으니 엎어지면 코 닿을 데다. 헐레벌떡 작업실까지 뛰어간 이동석은 반지하 작업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와서 작업하고 있던 김종대가 비에 젖어 가쁜 숨을 내쉬는 이동석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오라. 근데 누가 쫓아 오냐? 왜 뛰어왔냐?”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야지.”
한 마디 내뱉은 이동석은 온갖 화구로 가득 차 있는 창고로 들어가 캔버스부터 찾았다.
‘30호 캔버스 하나, 50호 캔버스 하나. 50호로 그리자.’
캔버스를 들고 창고에서 나온 이동석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잡다한 물건을 치우고 캔버스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책상 위의 백색 공간을 한참 노려본 이동석은 물감 울트라마린블루를 집어서 송곳으로 뚜껑에 작은 구멍을 냈다.
튜브에 힘을 주자 뚜껑 구멍에서 물감이 실처럼 빠져나왔다.
‘됐어.’
고개를 끄덕인 이동석은 캔버스 위에 직접 물감을 짜 발랐다.
선은 각이진 기둥이 되었고, 그 기둥에 자동차가 박혀있는 단순한 형상이 그려졌다. 물감의 선으로 형상을 완성한 이동석은 크림슨레이크를 집어 이번에도 송곳으로 뚜껑에 구멍을 뚫어 세부적인 묘사를 해나갔다. 차례차례 오방색 물감으로 선처럼 길게 짜 바르거나 여기저기 거칠게 물감을 짜 바르며 캔버스를 채워나갔다.
이동석이 하는 짓을 바라보고 있던 김종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가 잭슨 폴락이라도 되는 줄 아나? 이젠 붓도 쓰지 않고 캔버스에 물감을 짜서 바르네. 뭐, 별별 방식으로 그리는 게 개성이긴 하다만.’
창작에 대한 고뇌는 모든 예술가의 공통된 화두다.
세상에서 유일한 형식의 작품, 나만의 개성, 성향을 표현하는 스타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때문에 독특한 미술 재료를 찾아서 작품을 창작하고, 다른 작가와 차별적인 자기만의 작품 소재를 찾는다.
오죽했으면 거시기를 붓으로 사용하는 예술가도 있을까.
김종대는 이동석이 작업하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특이하긴 하군.’
현대 미술은 과거 작품들 속의 일부 기교나 표현을 차용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가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민과 함께 기존 작품의 모방과 변형을 통해 자기만의 이미지를 잡아내 자기 것으로 승화시킨다.
왜 그럴까?
근본적으로 새로운 예술 사조를 만들 영역이 남아 있을지 조자 의문일 정도로 예술이 만개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날고뛰는 작가라고 해도 자기가 생각해 본 것은 이미 누군가도 생각했고, 작품화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모방과 변형은 넘쳐도 피카소의 큐비즘, 잭슨 폴락의 추상표현주의,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등 새로운 예술 사조의 창의적인 작품은 드물다. 그 때문에 새로운 예술 사조를 만들어낸 예술가는 위대하고, 화인처럼 미술사적으로 영원히 남는 것이다.
어쨌든 예술은 과거 위대한 작품의 모방 속에서 발전해 왔고, 앞으로도 모방과 변형, 차용의 과정 속에서 창조의 씨앗이 싹틀 것이다.
피카소는 말했다.
<일반적인 화가는 모방하고, 진짜 예술가는 훔친다.>
어떻게 새로운 흐름을 훔칠지는 예술가의 몫이다.
김종대는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초현실적인 분위기에 추상표현주의적 양식? 하지만 구상적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구상표현주의 양식은 아닌 것이.... 복잡하군. 완성되면 볼만 하겠는데?’
김종대는 흥미로운 눈길로 이동석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자기 이젤로 갔다.
‘동석이가 한동안 뭘 그려야 할지 고민하더니 드디어 길을 찾았구나.’
김종대는 붓을 들었다. 이젤에 놓인 100호 캔버스에는 프리지어 블루베이유 꽃이 춤추고 있다. 물론 춤추는 형체는 꽃으로 형상화된 여인들이다.
제목은 ‘프레지아 블루베이유의 여인’.
꽃과 여인.
졸업 전에서 선보인 이후 지금까지 계속 그리고 있는 자기만의 소재고 주제였다.
지금의 스타일을 변형, 진화시켜 가며 평생 가지고 가야 할지 아니면 꽃과 여인 말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 슬슬 고민되었다. 변형은 어렵지 않다. 추상이나 큐비즘 요소를 도입해도 되고, 팝아트 방식이나,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릴 수도 있다. 그것은 쉬운 길이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고 했어. 어렵게 나만의 그림을 구축해 왔는데 굳이 불확실한 길을 찾아갈 필요는 없잖아?’
김종대는 평생 ‘꽃과 여인’을 그린다고 하면 몇 점이나 그릴 수 있을지 계산해보았다.
1년 평균 30, 40점으로 잡으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은 1,500여 점이다. 적지 않은 작품 수였고, 전부 팔리기만 한다면 미술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것이다.
‘일단은 더 그리면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모색해보자.’
생각을 정리한 김종대는 붓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