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21회
뽀르릉, 뽀릉!
산새 소리만 가끔 들려오는 고즈넉한 산중. 한차례 바람이 불면 짙은 녹음이 푸른 물결처럼 파도가 쳤다.
북한산 강수의 수련장소.
가부좌하고 있던 강수가 눈을 떴다.
번쩍!
눈에서 푸르스름한 광채가 순간적으로 번득이더니 사라졌다.
“드디어 3서클이 완성됐다.”
강수의 입에서 기쁨이 묻어 있는 나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나폭증현상이 일어난 후 거의 두 달이 흘렀다. 여유를 두고 수련한 탓도 있지만, 작업실에서 작품 창작에 매진하는 바람에 3서클 완성이 늦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빈틈 한 곳 없는 선명하고 완벽한 서클을 만들었다.
강수는 몸을 풀며 천천히 일어났다.
3서클 마법 가운데 가장 실용적인 마법은 치유마법이다. 치유마법의 효능은 단연코 최고다. 두 달 전, 부러진 코뼈를 치료해보았지만 감쪽같이 원상으로 치유되었다.
한계가 있다면 3서클 마나하트로 치료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라는 정도다. 당연히 치료의 범위를 넓히고, 치료 속도를 빠르게 하려면 서클이 높아야 한다.
이제 인챈트마법도 캐스팅할 수 있다.
인챈트마법은 4서클 마법. 캐스팅할 수는 있지만 상위 마법이라 마나 소비가 극심하다. 인챈트마법의 문제는 성공 확률이 낮다는 점이다. 기껏해야 확률이 0.5%에 불과하다. 200번 시도하면 통계적으로 한 번 인챈트 되는 확률이다.
확률은 낮지만 운이 좋으면 한 번, 열 번만에 인챈트할 수 있기도 하다. 순전히 운빨이다.
인챈트하기 적당한 물건은 반지나 목걸이, 핸드백, 시계같이 항상 몸에 소지하는 물건이 유용할 것이다.
‘반지에 실드마법을 인챈트해서 주하한테 선물하면 딱 좋겠는데. 주문을 외우면 보호막이 생겨나 주인을 지켜주는 기적의 반지라고 하는 거지.’
물건에 인챈트를 하고 싶어도 성공할 확률이 너무 낮다. 한 번 실패하면 아마도 일주일은 마나를 보충해야 할 것이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나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다.
몇 년이 걸리든 종국에 가서 인챈트에 성공한다고 해도 마법이 인챈트된 반지를 주하가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건 인챈트에 성공해서나 고민할 문제. 지금부터 고민할 이유는 없지.’
문득 기적이라는 단어에 여러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소용돌이쳤다.
‘기적을 일으키는 반지라....’
모든 마법이 기적이나 다름없지만, 치유마법이야말로 사람에게 정신과 마음으로부터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기적 같은 마법이다.
‘종교지도자가 치유마법을 쓰면 초대박이겠구나.’
신의 사도인 종교지도자가 신의 축복이라며 병든 자, 죽어가는 자를 고쳐주면 신도는 무한증식할 테고 세상이 뒤집어질지도 모른다.
‘의사가 치유마법으로 환자를 고쳐줘도 초대박이지.’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전 세계에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이 돈을 짊어지고 몰려들 것이다.
‘치유마법만 활용해도 돈 버는 건 일도 아니군.’
법의 굴레만 벗어나지 않으면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 자본에서 시작해서 자본으로 끝나는 사회,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인간 존재의의를 규정하는 것은 자본, 달리 말하면 재화, 한 글자로 표현하면 돈이다.
3서클 마나하트를 완성한 강수는 손쉽게 돈 벌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왜 애써서 그림 그려 돈 벌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캔버스에 물감칠해 작품 한 점 완성해서 전시를 통해 팔면 천만 원이든 이천만 원이든 그림값을 받는다. 화가의 재능과 노력이 화폐로 전환된 것이다.
치유마법으로 병든 자를 고쳐주고 돈을 받으면 마법이 화폐로 전환된 셈이다. 그림을 그리든 치유마법을 활용하든 시작과 과정은 다르지만, 최종적인 결과물은 손에 쥐어진 종이 쪼가리, 화폐다.
그러나 결과물은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
그림 그리는 행위는 단순한 몸짓이 아니고 바로 특별한 행위, 예술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술.
예술이란 무엇인가?
구석기시대 동굴벽화에서 시작된 자연과 형상의 모방이 예술의 시초라고 할 수 있으며, 자연과 형상의 모방은 오랜 시간 예술의 본질로서 군림해왔다. 그리고 단순한 모방은 서서히 기교적으로 발전해간다. 그림은 개인의 성향에 의해 기교와 표현 방식이 달라지고, 예술가의 심미적 요소가 작품에 반영되면서 더 높은 단계로 진화했다. 이러한 예술의 발전과 개념은 미술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음악, 조각, 문학 등 모든 예술 장르가 마찬가지다.
오늘날 예술은 고정 불변한 개념으로 묶여있지 않다. 미디어아트, 설치예술, 행위예술, 정크아트, 키치아트 등 예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양식과 사조를 끊임없이 양산하며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자신이 창작한 예술 작품과 함께 가난에 찌들어 고달픈 삶을 마감하는 수많은 예술가들.
‘그들이 자기만족 하겠다고 배고픔을 참아가며 그림 그리고, 시를 쓴 것은 아니지. 나 역시 마찬가지고.’
예술가가 예술을 추구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사회구성원에게 예술가로서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공에 이르는 길은 몇 사람 오르지 못하는 좁고 험한 길이다.
강수는 묵묵히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보이는 건 나무와 겹겹이 겹쳐진 산자락뿐이지만 저 산자락 뒤에는 갖가지 욕망이 용암처럼 들끓는 물질만능이 팽배한 사회가 펼쳐져 있다.
‘성공이라.... 성공해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을 벌면 무얼 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거대한 성공과 거대한 부를 이룬 사람이 있다.
스티브 잡스도 그런 사람의 한 명이다. 그는 2003년 췌장암에 걸려 투병했으며 그 와중에도 애플의 책임자로 일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겨 2009년 초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간이식 수술을 받았던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주식이 곤두박질 치자 그해 6월 말에 일선에 복귀해야 했다.
건강을 생각했다면 그는 애플을 떠나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퇴할 수 없었다. 아니, 떠나겠다는 사람 붙잡을 수 없으니 스스로 은퇴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2011년 8월 병세 악화로 스티브 잡스는 결국 애플 CEO직을 사임했고, 사임 후 2달이 채 지나지 않은 10월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 56세로 왕성하게 활동할 젊은 나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 하루 전, ‘아이폰 4S’의 발표 생중계를 병상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죽 소파에 앉아 시청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애플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10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 많은 재산을 두고 죽음 직전까지 회사를 떠나지 못하다니! 대체 무엇이 죽음을 앞에 둔 순간까지 애플을 떠나지 못하게 했을까?’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진 인간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에게 병을 치료해 줄 테니 재산의 반을 달라고 하면 줄까? 스티브 잡스처럼 병으로 죽음을 앞둔 재벌 총수나 대기업 회장 혹은 세계적인 부호에게 건강을 찾아줄 테니 재산의 반을 달라고 제안하면 수락할까?’
의문이었다.
‘그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궁금하네?’
문득 강수는 조 단위의 재산을 소유한 세계적인 부호나 국내 재벌 총수가 재산의 절반을 자기 목숨에 투자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분명히 재산의 절반을 허비하고 사느니 자기 삶을 포기할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냐. 재산 전부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절반만 달라는 건데 설마 싫다는 사람이 있을까?’
강수는 자기가 10조 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았다. 자기라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5조 원 기부하고 목숨을 구할 것이지만, 10조 원이나 하는 돈의 크기가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아마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자기와는 생각이 다를 것이다. 어떤 기사에 의하면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목표라고 한다. 마치 자본에 먹힌 경제 동물처럼 살아가는 그들의 마인드를 어떻게 서민으로 살아온 자기가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강수는 자기 수준에서는 절대 부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을 알 수 없음을 알았다.
‘한데 병든 사람 고쳐주고 돈을 받으면 불법의료행위라고 법의 잣대를 들이대겠지?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법망을 피해갈 방법은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면 돈을 받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재산의 절반을 받아야 하므로 복지법인을 설립해서 기부받으면 된다.
강수는 작년 일루션 회원들과 봉사활동 갔던 죽송보육원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자라 성인이 되면 사회에 진출한다. 작금의 한국 사회는 헬조선이라고 지칭될 만큼 각박하고, 살기 힘든 사회다. 집도 절도 없이 맨몸뚱이로 사회에 쫓기듯 나오면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며 대학 교육받은 아이들과 경쟁해야 한다. 과연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자기 영역을 구축하며 행복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몇몇은 기적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보육원 출신 대부분은 대학 진학은 꿈꿀 수 없다. 교육을 통한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그들은 사회 밑바닥을 전전하거나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할 것이다.
한국 사회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만약 부호의 병을 고쳐주고 절반의 재산을 기부받는다면 복지법인은 천문학적인 자산을 보유하게 된다. 그 돈으로 소외 계층에게 자립할 수 있게 주거를 제공하고,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하는 등 크나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유일의 마법사면서도 마법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생각해보지 않고 지냈다. 사실 그동안 자기 앞가림하기 바빴지 마법의 활용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다. 지금도 두 번째 개인전 전시 작품과 단체전 작품 준비로 바쁘긴 하다. 다만 마감에 쫓겨 작품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은 아니다.
두 번째 개인전 작품은 두 후배가 도와준 덕분에 계획보다 더 많은 작품을 완성했고, 단체전 출품작은 40여 작품을 완성해 놓았다.
‘작년 이맘때 쯤 마나하트를 완성했으니까 마법사가 되고나서 1년이 지났구나.’
마법이라는 거대한 힘을 썩히고, 자신이 가진 재능을 그림 그리는데 전부 허비하는 것은 재능 낭비일지도 모른다.
마법을 써서 한국 사회의 그늘지고 음습한 음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이제 마법을 활용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나의 길을 찾았다.
강수는 복지법인을 설립, 치유마법을 활용해 소외 계층을 지원해보기로 했다.
‘복지법인 설립이 간단하진 않겠지? 무엇보다 기본 재원이 필요할 텐데.... 복지법인을 설립하면 법인 이사장은 누가 맡으면 좋을까?’
치유마법을 활용하면 아마도 천문학적인 자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재단을 투명하게 운영할 양심적이고 청렴한 법인이사장이 필요하다.
강수의 뇌리에 존경하는 교수 이름이 떠올랐다.
‘양진태 교수님! 그분이라면 마음 놓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분이지.’
양진태 교수를 떠올린 강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양진태 교수는 홍우대 철학과 교수로 평생 자원봉사의 길을 걷고 있다. 가족 때문에 자원봉사활동을 소홀할까 봐 결혼조차 하지 않은 독신주의자다. 하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자녀는 아니지만, 그분이 거두어 보살핀 아이들이 십 수명이나 된다.
‘법인 이사장은 교수님이 최고 적격자지. 복지법인 설립 절차를 알아보고 준비되면 교수님에게 부탁해야겠다.’
복지법인 설립은 급하게 서두를 일이 아니지만 일단 소규모의 복지법인이라도 설립해야 기부를 받을 수 있다. 강수는 최소 규모의 복지법인 설립에 대해 알아보고 때가 되면 천천히 준비하기로 했다.
시회복지법인 설립이라는 웅대한 결심을 한 강수는 배낭을 챙기고 하산했다.
*
일성빌딩 강수 작업실.
반팔 티를 입고 작업하던 고원철과 서혁중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수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늘은 등산 하고 오나 보네요.”
“어, 그래. 북한산에 올라갔지.”
“등산하기엔 덥지 않나요?”
“난 더위에 강하거든. 참, 단체전에 출품할 작품은 그리고 있지?”
강수는 두 후배에게 단체전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15점씩 새 작품을 그리라는 과제를 주었다.
서혁중이 한숨부터 내쉬었다.
“휴우, 15점이 애들 낙서도 아니고, 주말에 꼼짝 못 하고 정말 죽어라 그리고 있습니다.”
“원철이는?”
고원철의 눈에서 욕망의 열기가 번득였다.
“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근데 선배님. 참가 작가는 몇 명이나 선정했습니까?”
“지금까지 백 명 정도 돼. 앞으로 한 달은 더 접수할 거라 참가 작가는 더 늘 거야.”
서혁중이 탄성을 질렀다.
“이야, 벌써 백 명이나 됩니까? 이거 장난 아닌데요?”
“이번 전시회에서 컬렉터, 갤러리스트에게 눈도장 받고 뜰 수 있는 근사한 작품 만들어봐. 너희 둘 실력이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봐.”
서혁중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선배님은 역시 안목이 높다니까. 두고 보세요. 이번 전시회에서 선배님처럼 완판을 기록할 충격적인 작품을 만들고 있으니까요.”
뭘 믿는지 서혁중이 큰소리쳤다.
“충격적인 작품? 하하, 그 기백 마음에 든다. 그래서 몇 작품이나 완성했냐? 구경하게 완성한 작품 출력해서 가져와 볼래?”
“앗! 선배님이 평가해 준다면 감사하죠. 새로 그린 것은 다섯 작품인데 내일 출력해서 가져오죠.”
강수가 고원철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저도 내일 가져오겠습니다.”
강수의 팝아트 작품을 채색하며 은근히 경쟁하고 있는 고원철과 서혁중이 매서운 눈초리로 마주 바라보았다.
강수가 책상으로 가며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선의의 경쟁은 발전을 위한 토대이기도 하지. 요즘은 그림 손볼 데도 거의 없고. 두 후
배와 작업한 건 운이 좋았어. 탁월한 선택이었지.’
강수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