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15화 (115/197)

# 11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15회

대학로에 위치한 6층짜리 건물 5층에 위치한 카페.

실내는 특이한 형태의 아프리카 전통 북, 기린 같은 동물 조각, 전통 포트와 커피잔 등 각종 소품을 이용해 인테리어를 꾸며놓아 아프리카의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강수야, 여기다.”

한 탁자에서 남색 계통의 정장을 입은 염진구가 팔을 들고 실내를 둘러보는 강수를 반갑게 맞았다.

탁자로 걸어간 강수는 염진구와 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잘 지냈어?”

“그래. 나야 과제 하느라 항상 비슷한 일상이지. 근데 너 요즘 왜 그렇게 잘 나가냐? 그림동화책은 베스트셀러고, 영화에 개인전 작품 완판에다 TV에 나오지 않나. 지금은 두 번째 개인전 준비하고 있다면서?”

“어. 9월 초에 두 번째 개인전 잡혀있어.”

“야, 굉장하다. 일 년에 개인전을 두 번이나 하고. 동기들이 모이면 요즘 네 얘기다.”

“동기들이 내 얘기를? 뭐라고 하냐?”

“뭐라고 하긴. 학교 다닐 때는 존재감 없다가 갑자기 뜨니까 부러워하는 거지. 아, 단체전은 무슨 얘기냐?”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목으로 넘긴 강수가 고소하고 쌉싸름한 맛을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진구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나라 미술계는 학교 졸업하고 활동하는 신인화가에게 너무 척박하고 심지어 배타적이지 않냐?”

“그건 오늘 어제 일이 아니지. 우리나라야 워낙 예술, 문화적 토대가 취약하니까. 그래서 동기들이 네 얘기 하면서 부러워하는 거다. 신인작가가 성공하기 힘든 열악한 미술계를 비웃듯이 단번에 떠버렸으니까. 생각해봐라. 첫 개인전에서 전시 작품이 완판되고, 팔린 그림값이 ‘억’ 소리 나는 4억이 넘었으니 동기들이 얼마나 놀랄지.”

강수가 가볍게 웃었다.

“하하. 운이 좋았던 거지.”

“운은 한두 번이지 연달아 운이 따라 주냐? 게다가 그림값이 아무나 못 사는 가격인데도 불구하고 다 팔렸으니 운이 아니라 실력이지. 네 그림 봐도 그림에서 후광이 나는 것 같더라. 내가 만난 몇몇 갤러리스트들도 네 개인전 소문을 듣고 관심 보이던데 갤러리에서 연락 못 받았냐?”

“몇 군데에서 초대전하자고 연락 왔었어. 한데 이미 선암갤러리하고 전속 계약해서 전부 고사했지만.”

“초대전을 고사할 정도라니 죽인다. 아, 딴 얘기 했네. 하던 얘기가 해라.”

“나는 운이 좋아 초대전도 하고 자리 잡았지만 보통 대학 졸업한 신인화가는 작품 팔리려면 적어도 세 번은 개인전 열어서 작품 활동하고 인지도 쌓아야 하잖아?”

“그야 미술판 관행이지.”

“신인화가한테 초대전 해주겠다는 갤러리가 있을 리도 없고, 결국 개인전은 자비 들여서 열어야 하는데 세 번이나 열기가 쉬운 일도 아니지. 결국 우리 또래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는 많은데 작품 팔기는 만만치 않잖아.”

“열악한 우리 예술계 현실인 걸 뭐.”

“그래서 단체전을 생각해본 거야.”

염진구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기존에도 청년 예술가를 대상으로 한 단체전은 꽤 있었지만, 대중이나 갤러리스트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는데?”

염진구가 뒷말을 흐렸다.

단체전을 또 열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었다.

“그랬지. 그러니까 이번엔 기존 단체전과는 차별적인 전시를 열어야지. 문화, 예술적으로 획기적인 이슈가 될 만한,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대규모 단체전을 여는 거야. 전시를 통해서 청년 예술가를 알리고 대중과 소통하고, 컬렉터, 갤러리스트에게 어필하고, 작품도 파는 거지.”

“그래? 획기적인 이슈가 될 대규모 단체전?”

회의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염진구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규모면 참가 작가는 몇 명이나 생각하고 있는데?”

“많으면 좋겠지? 다만 수준에 미달하는 작가를 참가시켜서 전시회의 질을 떨어뜨릴 수는 없으니까 어느 정도 재능 있는 예술가 백여 명 정도?”

염진구가 흠칫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뭐! 백 명이나! 흠, 뉴스가 될만한 규모긴 하다. 좋아. 그럼 한 작가 당 출품 작품 수는 몇 점이고?”

“최소 10점 이상은 출품해야 하고 최대 30점 정도까지?”

“참여 작가 백 명에 한 작가당 평균 15점으로 잡으면 천오백 점!”

대충 계산해 본 염진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헐! 장난하냐? 그렇게 많은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전시장이면 갤러리는 안 되고, 대규모 전시장이 필요하잖아? 그런 곳은 몇 군데 없을 텐데?”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이면 되겠지? 아니면 코엑스도 있고. 전시 효과는 코엑스가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코엑스? 그 비싼 전시장 임대료를 누가 내냐? 스폰서라도 있는 거야?”

“기업체에서 후원 받으면 좋겠지. 스폰서 찾아봐서 없으면 내가 내야지.”

“네가?”

염진구는 강수가 ‘서울의 삶, 그 인상’ 전에서 2억 넘게 벌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허, 개인전으로 번 그 돈을 단체전 하는 데 허비하겠다고? 이 자식 사람 놀라게 하네?’

염진구는 강수의 무모함에 고개를 내저었다.

“강수야, 네 의도는 문화계에 몸담을 한 사람으로서 고맙고 가상한데 전시 망하면 돈만 날리지 않냐? 네가 그 큰돈을 대서 단체전 할 이유가 있을까?”

“실패할지 성공할지는 해봐야 아는 거니까. 해보지도 않고 실패한다고 단정 지을 건 없지.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시도해봤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겠냐?”

“그렇긴 하다만....... 좋아. 네가 그런 마음이라면 못할 것 없지.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냐?”

“네가 디렉터를 맡아주면 좋겠는데.”

“디렉터라고?”

“이번 단체전에 관한 전시를 기획하고 일정 잡고, 전시장 물색하고, 스폰서도 섭외하고 모든 걸 다 해야지.”

염진구가 문득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헐헐. 야, 그건 큐레이터가 할 일이잖아? 나는 한 학기 쉬어서 이번 학기에 박사논문 준비 중이라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데 어떻게 디렉터를 하라는 거냐?”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준비하면 된다.”

“급하지 않아? 전시 개막은 언제쯤 하려고?”

“올해 가을이나 내년 봄도 괜찮아. 하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다.”

“가을이면 지금부터 준비해도 6개월 뒤네? 그 정도 기간이면 할 만한 것 같다. 작가 선정 기준은 있고?”

“작가 선정 기준은 개인전 3회 이하로 개최한 작가이면서 최근까지 작품 활동하는 예술가로 하자. 개인전 3회 이상 개최한 예술가는 작품도 팔리고,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갖췄다고 볼 수 있으니까 굳이 단체전에 참여할 이유는 없을 거다. 네가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예술가 리스트를 작성해서 주면 내가 면담해서 참가 작가를 섭외하지.”

“일일이 작가 만나서 면담하는 일도 시간 많이 필요한데 네가 그 부분을 맡아주면 일이 줄겠군. 근데 단체전 주제는 정했냐?”

강수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 염두를 굴린 강수가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 봤는데 한국 청년 예술가의 초상, 어떻냐?”

뭔가 해볼 수 있다는 흥미를 느낀 염진구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건 좀 처지는 분위기가 나는데? 유망한 청년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대규모 전시인데 활기 넘치고 희망적인 제목으로 하는 게 낫지 않겠냐?”

“그렇군. 그럼 한국 청년 예술가여, 미래를 던져라는?”

“큭큭, 한국 청년 예술가의 초상보다는 훨씬 낫다.”

“그럼 ‘한국 청년 예술가여, 미래를 던져라’로 하고 전시 기획안 짜볼래? 아, 보수 얘길 안 했네.”

“뭐? 보수?”

염진구가 멀뚱히 강수를 쳐다보았다.

“전시를 총괄 감독하는데 당연히 보수를 줘야지. 아무렴 무보수로 부려먹을까? 한 달에 얼마 받으면 되겠냐?”

염진구가 뒤통수를 긁었다.

“보수라....”

강수가 개인전으로 억대의 돈을 벌기는 했지만, 단체전을 하려면 큰돈이 들어간다. 당연히 무보수로 도와줄 생각이었다.

“네 돈으로 대규모 단체전 열려면 돈이 꽤 들어갈걸. 스폰서가 지원하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무보수로 하마.”

강수가 빙긋 미소를 띠었다.

“무보수로 하겠다니 고맙다. 하지만 무보수로 대충 일하는 건 원치 않아. 정당하게 보수 받으면서 내가 원하는 만큼 일을 해주는 게 좋겠다. 학위 때문에 바쁘면 그만큼 잠자는 시간을 줄이면 되잖아? 월 이백오십만 원 어때? 일은 단체전 끝날 때까지 하는 걸로 하고.”

“이, 이백오십? 좀 많다?”

일회성 전시의 디렉터 업무가 온종일 일거리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회사에 출근하는 것도 아닌데 이백오십만 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강수가 가볍게 웃었다.

“후후. 이백오십이 많으면 한 이백으로 깎아줄까?”

염진구는 강수의 웃는 모습에 새삼 얼마 전 개인전으로 2억 넘는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게다가 9월 초에 두 번째 개인전까지 연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때도 억대를 벌게 틀림없었다. 한데 이백오십이 많다고 했으니 스스로 한심하고 우습기 짝이 없었다.

염진구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 놀리냐? 깎긴 왜 깎아. 다 받으련다.”

“하하. 알았다. 이백오십이다.”

“참, 강수야?”

“왜?”

“작품 판매하면 수익은 어떻게 나눌 거냐? 갤러리야 화가와 5대 5로 나누는데 우리도 그렇게 나누든지 아니면 뭔가 기준을 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수익을 나누려면 개인사업자 등록이 필요할 거야.”

그 부분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림을 판매하고, 수익을 나누려면 사업자로 등록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음, 우리야 단발성으로 하는 기획전인데 수익을 5대 5로 나눌 수는 없지. 7대 3 정도로 하자. 그리고 개인사업자 등록 내는 거 복잡하냐?”

“아니. 공인인증서 있으면 인터넷 사이트 홈택스에서도 가능해. 사업장 주소는 네 작업실 주소로 하면 되고. 어려울 건 없어.”

“그럼 사업자등록 하지 뭐. 업무는 깔끔하게 모레 5월 1일부터 일하는 걸로 하자. 업무 보면서 공적으로 들어간 경비는 지급할 테니까 영수증 처리해서 날 주면 된다. 그리고 사무실 필요하면 돈암동에 있는 내 작업실로 와도 돼. 책상하고 컴퓨터는 제공할 테니까.”

“알았어. 필요하면 갈게. 아니, ‘한국 청년들이여, 미래를 던져라’ 전시기획안 작성해서 8일 토요일에 찾아갈게. 구체적인 얘기는 전시기획안 보면서 그때 하자.”

“좋아. 토요일에 구체적인 얘기하기로 하고, 시간 되면 저녁 같이 먹으러 가자.”

“그럴까?”

강수와 염진구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염진구와 저녁을 같이 먹고 헤어져 귀가한 강수는 콤비를 벗고 샤워를 했다.

“아, 개운하다.”

욕실에서 나온 강수는 몸에 남은 물기를 닦고 전등이 꺼져 어두운 거실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은 어둠의 장막이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고, 저 멀리 붉은 색이 조금 남아 있는 회색 구름 아래 북한산이 웅크리고 있었다. 북한산 위 하늘에서 별들이 하나씩 희미하게 흔들거리며 나타났다.

고향 집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고향의 밤하늘은 머리 위에서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찬란하고 신비로웠는데.’

서울의 밤은 밤하늘별보다 도시의 불빛이 휘황찬란하다.

‘내 사랑을 볼까?’

후배 고원철이 추천한 영화 내 사랑을 아직 보지 못했다.

‘마침 일찍 들어왔으니까 영화를 보자.’

실내복을 입은 강수는 컴퓨터를 켰다.

시간 날 때 보려고 영화는 이틀 전에 다운받아 놓았다. 동영상프로그램을 실행한 강수는 영화 내 사랑을 더블 클릭했다. 곧 화면에서 영상이 출력되었다.

32인치 모니터라 스펙타클한 영화가 아닌 이상 영화 보는 데 불편하지는 않았다.

잔잔한 배경음악이 흐르고, 클로즈업된 붓통에서 붓을 잡는 엉성한 손가락이 화면에 나타났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쏟아내는 젊은 예술가를 그린 영화와는 거리가 먼 ‘내 사랑’은 모디와 에버렛을 중심으로 잔잔하게 흘러갔다. 러닝타임 110분의 짧지 않은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다.

에버렛이 현관문을 닫고 화면이 검게 변해 영화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화가 모드의 실제 모습이 잠깐 화면에 나왔다. 그녀는 작고, 왜소하고, 손은 뭉툭하고 뒤틀렸다. 그녀는 마른 몸으로 좁은 방 나무 의자에 앉아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모디의 실제 외모를 본 강수는 손가락이 있는지조차 모호한 뭉툭한 손으로 섬세하고 서정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에 마음 한쪽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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