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14회
강수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주하에게 전화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신호가 끊겼다.
[강수오빠!]
“응.”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오빠가 먼저 했네. 어젠 바빴나 봐요?]
“그래. 좀 바빴어. 부모님께 내 얘기해 봤어?”
[헤헤. 당근 얘기했죠. 참, 5월 2일에 할아버지가 출국하세요. 드디어 해외여행 가세요.]
“2일에 출국하시는구나.”
[네. 그래서 할아버지 배웅한다고 전날 가족이 한남동 집에 전부 모이기로 했어요.]
“가족이 전부?”
[네. 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그리고 사촌들도 다 모여요. 오빤 1일에 시간 돼요? 식구한테 오빠 소개하기 딱 좋은 기회인 거 같아요.]
“나야 프리랜서라 시간 돼지. 근데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내가 가도 될까?”
[호호. 되고말고요. 오빠하고 결혼할 사이라고 친척하고 사촌한테 다 얘기했는걸요. 그랬더니 오히려 오빠 보고 싶다고 데려오랬어요.]
“그랬어? 어차피 어르신 배웅도 해야 하니까 한 번에 인사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한남동에 몇 시까지 가면 될까?”
[6시에 저녁 식사할 거니까 그전까지 오면 돼요.]
“알았어. 한 30분 일찍 갈게.”
[헤헤. 그럼 오빠도 참석한다고 식구한테 얘기할게요. 오빠, 수고.]
[그래.]
5월 1일이면 나흘 뒤, 토요일이다.
‘준비할 게 있을까? 음, 그래도 주하네 가족이 전부 모인 자리인데 그럴듯한 슈트 정도는 입고 가야겠지? 내일 백화점에 들러봐야겠다. 이제 작업하자.’
강수는 내일 백화점 매장에 들리기로 하고, 고원철이 완성해 놓은 그림을 이젤에 걸었다.
덧칠하기 위해 그림을 살피건 강수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 색감이 괜찮은데?’
고원철이 작업해서 준 그림은 이전에 채색한 작품과는 상당히 달랐다. 투박한 느낌의 색감과 거친 붓질이 캔버스에 살아 있었다. 고원철만의 개성적인 미적 감각이 작품에 녹아 있었다.
‘흠, 좋은데? 이러면 굳이 덧칠하지 않아도 되겠어.’
냉정하게 판단하면 어딘가 한 단계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원철의 열정과 예술성이 고스란히 표현된 그림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이 그림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덧칠하지 않아도 가치가 충분했다.
강수는 속으로 기쁨의 웃음을 지었다.
‘하하. 덧칠하지 않으면 이틀을 버는 거네? 뜻밖인걸.’
덧칠하지 않기로 결정한 강수는 캔버스를 내려놓고 서혁중이 색칠한 캔버스를 이젤에 걸었다.
서혁중의 그림은 이전의 그림처럼 개성적인 감각을 배제하고 작업지시서에 충실해서 채색했다.
‘혁중이 그림은 변함없군. 혁중이도 원철이처럼 채색해 보라고 할까?’
아무래도 자기 발전을 위해서는 작업지시서에 충실해서 그리는 것보다 원철이처럼 자기의 감각을 작업지시서의 내용에 녹여내는 것이 낫다.
강수는 서혁중을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고원철이 있을 때 얘기하면 자칫 자존심이 상할 수 있었다.
‘나중에 단둘이 있을 때 얘기해보자. 가만, 혁중이도 원철이 수준의 퀄리티를 뽑아내면 내가 할 일이 없어지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강수는 문득 고원철과 서혁중이 어떤 작업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녀석들한테 무관심했구나.’
강수는 피식 웃었다.
‘아니지. 지금까지 내 앞가림하기도 바빴으니 녀석들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
두 후배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설희를 빼면 누군가의 삶에 간섭하지 않았고, 간섭할 일도 없었다. 타인에게 배 놓아라, 감 놓아라 할 수도 없거니와 자기 삶에 타인의 간섭을 허락할 사람도 없다.
핵가족으로 분화된 자본주의 사회는 공동체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어 유지하고 있지만, 타인은 타인이고 개인의 이익과 행복이 궁극적인 목표일 뿐이다.
물질 만능의 사회는 갈수록 각박해지고, 서로 권리만 주장하며,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발버둥치고, 상대방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경쟁하고, 암투를 벌인다.
강수도 돈을 벌기 위해 애를 썼고,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겠다는 목표를 추구하며 대한민국 청년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
타인의 삶에 관심 가질 이유도, 여유도 없었고, 도와줄 여력도 없었다. 각자가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는 명제만이 선이요, 진리라고 생각했다.
‘먹고 살기 어려웠을 때야 주위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지긴 했지.’
상전벽해.
동화책에 일러스트 그리던 초라한 자신과 그림동화책 두 권을 출간하고 첫 개인전을 개최한 현재를 비교하면 상전벽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한국의 예술계는 열악하다. 일부 유명 작가 외에는 작품을 팔지 못해 연봉 천만 원도 벌지 못하는 예술가가 수두룩하다.
대한민국은 보릿고개를 겪었던 최빈국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뤄냈다. 급격한 경제발전과 함께 물질적인 풍요는 이뤘으나 정신적, 문화적 소양은 물질적 풍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수백만 원, 수천만 원 하는 명품은 월급을 모아 살지 몰라도 돈을 모아서 예술품은 사지 않는다. 서민에게는 고가품에 속하는 예술품을 구매해서 향유하는 대중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예술품은 아직까지 소수 컬렉터나 경제적 부를 이룬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그 때문에 한국에서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구매력 있는 컬렉터와 예술관계자에게 인정받는 수밖에 없다.
한국 화단에서 인정받기 위한 그 방식과 과정은 인내를 요구하는 꽤나 험난한 여정이다.
‘해외 유학 가서 인정받거나 해외 경매를 통해서 작품이 팔리는 경우는 드문 케이스고.’
강수는 고원철과 서혁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한국 화단에서 인정받고 화가로 제 몫 하려면 무명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인내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실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작품이 팔리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대접받지 못하고, 작품도 인정받지 못하는 한국 미술계의 현실이 암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운이 좋았던 걸까?’
전시에 출품한 작품마다 완판되고, 단기간에 중견작가에 버금가는 높은 가격에 작품이 팔린 자신의 경우를 반추해보았다.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출품한 그림이 최이석 평론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박해나의 추천으로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할 수 있었던 점이 도약의 발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구나.’
물론 투팍탈을 만나 머리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색에 대한 본질에 눈을 뜨고, 창의적인 예술성의 각성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이 평범하면 최이석 평론가의 눈에 들 리도 없을 것이고, 박해나가 추천할 리도 없을 테니까.
‘결국 재능이 뒷받침되고, 도약을 위해 준비된 자만이 기회가 왔을 때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법이구나.’
한국 예술계에서 젊은 예술가로 선두 그룹에 위치한 작가는 화가로는 박해나, 김이연, 장동운, 조각가는 노순용, 설치미술가 양인서 등 이들 외에도 여럿 있다. 그들의 앞날은 창창하다. 그러나 몇 명을 뺀 대다수의 신진 예술가의 앞날은 불투명하거나 암울하다.
‘예술적 재능은 풍부하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친구들을 찾아서 단체전을 열어볼까? 데미안 허스트가 대학 친구들과 프리즈 전을 개최해서 침체한 영국 미술계를 부흥시킨 yba를 태동시켰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것 없잖아?’
서양미술사와 궤를 같이한 영국 미술계와 한국 미술계는 애초에 비교할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한다. 그 격차는 하루 이틀에 좁혀지지도 않는다. 한국에서 문화적 예술적 소양이 대중적인 토대를 마련하려면 긴 시간 서서히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강수도 한국 미술계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예외적인 상황도 있었다. 14년 전 2007년, 유례없는 경기 호황과 함께 서울옥션 경매에서 박수근의 ‘빨래터’가 45억에 낙찰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나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당시 경기 호황은 미술계에도 큰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미술품 구매가 재테크 대접을 받으면서 중산층이 미술품에 투자했고, 유명 화가들의 작품 가격이 나날이 치솟으면서 과열 양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아쉽게도 한국 미술계의 호황은 짧았다. 2008년 리먼 사태가 터지면서 세계적인 금융 불안이 야기되었고, 한국 미술계는 긴 불황의 늪에 빠진다.
‘몇 년 전부터 미술 시장이 회복하고 있지만 과거처럼 미술품이 재테크의 수단이 되고, 저변이 확대되려면 시간이 더 흘러야 할 거야.’
2018년 3월, 한국 미술 시장의 회복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서울옥션 경매장에서 고 이중섭 화백의 ‘소’가 47억 원에 낙찰되었다.
강수는 이 경매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2018년 졸업하고 나서 얼마 뒤 경매가 열렸고, 고 이중섭 화백의 최고가를 갈아치우는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미술 시장이 살아나고 있지만 저변으로 확대되지 않으면 그들만의 리그라는 한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미술 시장만 바라보며 호황기를 기다리고 있기에는 수동적이고 무력하다. 오히려 예술가가 참신한 기획전을 열어 대중의 관심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데미안 허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대중의 관심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겠지만 실패한다고 크게 잃을 것도 없으니까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고원철이 지금처럼 손이 안 가게 마무리 해준다면 발품 팔아 재능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단체전을 준비할 수 있다. 작품을 봐야 판단할 수 있지만 고원철과 서혁중도 단체전 참가 후보자의 두 명이다.
강수는 고원철과 서혁중부터 의사 타진 해보기로 했다.
“원철아, 혁중아.”
작업하고 있는 두 후배를 불렀다.
강수의 부름에 고원철과 서혁중이 강수를 돌아보았다.
“예?”
“잠깐 얘기 좀 하자.”
“무슨?”
“벌건 아니고 너희 개인전 작품은 준비하고 있냐?”
“작품은 하고 있지만 오라는 데가 없어서 못 하고 있죠.”
“저도 단체전은 몇 번 참가했는데 개인전은 불러주는 곳이 없어서 못 했어요.”
“전시할 작품은 있다는 거구나?”
“한 서른 점쯤 있습니다.”
“저는 단체전에 출품한 거 빼면 스물다섯 점 정도요. 근데 왜요?”
“대학 때 외에는 너희 작품을 본 적이 없어서 요즘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궁금해서 그런다. 그리고 실은 내가 생각해 본 게 있는데....”
강수는 재능 있는 젊은 작가를 중심으로 대규모 단체전을 해보면 좋겠다는 자기의 생각을 얘기해주었다.
“.... 세부적인 기획은 잡지 못했고 생각만 해 본 거야. 언제 추진할지도 아직은 미정이지만 이른 시간 안에 해보고 싶다. 세부적인 기획은 대학원 다니는 진구한테 맡기면 잘할 거다.”
서혁중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좋죠. 그런 기획을 실행해서 참신한 젊은 작가군이 대거 등장해서 구태의연한 화단에 혁신을 일으키면 원이 없겠네요.”
“저도 대찬성입니다. 그런 젊은 작가의 대규모 전시회를 통해서 대중과 만나서 소통하고, 작품성을 인정받아 yba 작가들처럼 확 뜨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나라에서 그런 전시회가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면 저도 참가하고 싶네요.”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를 떠나서 젊은 친구들과 함께 도전해 볼만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알았다. 내가 진구를 만나서 본격적으로 얘기해보마.”
“선배님, 꼭 해주십시오.”
“알았어. 내가 맘먹고 추진해 볼 테니까 대신 너희도 단체전에 참가할 수 있도록 작품 준비 열심히 해야 한다. 어영부영하면 후배라고 참가시키지 않을 테니까.”
“옛! 미친 듯이 준비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서혁중과 고원철이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것처럼 빛내며 열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틀 후.
강수는 마나 폭증 현상을 재현해보겠다고 알몸으로 이틀간 마나회로 수련을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알몸으로 수련한 것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마나회로 수련을 마치고 북한산에서 내려가던 강수는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010-7934-xxxx. 박일모?’
강수는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박일모다.]
“배후는 알아냈나?”
[그래. 너를 손봐달라고 사주한 자가 누구인지는 대단한 비밀도 아니니까 별일 아니지. 배후는 전인규란 자다.]
“허, 전인규란 말이지?”
[왜? 전인규를 알고 있나?]
“아니오. 내가 전인규를 어찌 알겠소. 뉴스에서 한 번 본 것뿐이오.”
[전인규가 누구인지 알아보니 유성그룹 직계에 유성홈쇼핑 전무란 자더군. 이런 자와 무슨 원한을 맺었는지 몰라도 저번 일은 잊어버리게. 자네가 상대할 사람은 아니야.]
“그건 내가 판단할 이일이지. 할 말 없으면 끊겠다.”
[자네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어쨌든 자네가 먼저 도발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들어가라.]
신호가 끊겼다.
예상대로 전인규였고, 질투에 눈이 먼 자였다. 설희가 자기의 개인전에 왔다는 이유로 화풀이를 한 것이다.
전인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생각해보았다.
‘한데 어린애도 아니고 뭐 이렇게 치졸한 자식이 다 있어?’
강수는 질투에 눈이 먼 치기 어린 전인규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몇 달 병원 신세 지게끔 사주했는지 몰라도 자기는 박일모에게 주먹 한 방 맞은 것이 전부였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낸다면 일을 크게 벌일 것 없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자기를 건드리면 그땐 못된 성품을 단단하게 고쳐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배후를 확인한 것이 허탈했지만 한편으론 전인규가 돈은 많을지 몰라도 치졸하기 짝이 없는 졸렬한 사내란 생각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할 말 없군. 진구나 만나러 가자.”
오늘 대학원 다니는 대학 동기 염진구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염진구를 만나 단체전 기획에 대해 논의해 볼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