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11화 (111/197)

# 11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11회

전인규의 얼굴에 거만한 표정이 어렸다.

“그래? 기대는 했지만 제법 고가 제품이라 1차만 완판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인기를 끌다니 재밌군.”

“예, 전무님. 이번 콜라보레이션으로 런칭한 여성 정장이 히트해서 앞으로 전무님의 사내 영향력도 더욱 공고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야. 수고했어. 나는 이제 퇴근 준비나 할 테니 박 부장은 나가보세요.”

50대의 박 부장이 30대 중반에 불과한 전인규에게 능구렁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예, 전무님.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즐거운 저녁 시간 보내십시오.”

새로 런칭한 고급 여성 정장이 대박 조짐을 보인다는 업무 보고를 끝으로 전략기획부 박규창 부장이 밖으로 나갔다.

박규창이 사무실에서 나가자 그제야 전인규가 미소를 지으며 기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하. 주윤혜의 디자인이 먹힌 건가? 반응이 폭발적이라니 의외로군.”

박 부장이 언급했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고급 여성 정장의 히트는 사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하게 하는데 한몫할 것이다.

‘흐흐, 요즘은 어떻게 된 게 내가 추진하는 기획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는구나. 몬스터를 막아라도 손익분기점을 진즉에 넘겼고, 고급 여성 정장의 1, 2차 완판. 이렇게 몇 건만 더 성과를 내면 사장 자리도 멀지 않겠지? 못해도 사장은 해야 유성바이오 같은 알짜 계열사로 가지. 언제까지 이런 하위 계열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지금처럼 성적을 내면 그룹의 중위권 계열사로 옮기는 것이 가시권이다.

‘처음에는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홈쇼핑 따위에서 뭘 할까 싶었는데 그래도 규모가 꽤 커졌단 말이지.’

문득 지난날을 돌이켜 본 전인규가 실소를 흘렸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전인규는 집안에서 내놓은 4남매의 막내자 집안의 골칫덩어리였다. 국내에서 노는 것도 지겨워져서 유학한답시고 간 뉴욕에서 한 2년은 스스로 변해보고자 착실하게 공부했다. 하지만 옛날 버릇 어디 안 갔다. 결국 쾌락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대마와 술, 여자에 빠져 방탕하게 지냈다. 결국 6년 전 한국으로 불려온 전인규는 유성그룹 부회장인 아버지 전준완에게 호되게 야단맞고 양자택일의 선택을 해야 했다.

유성그룹 계열사인 유성홈쇼핑 대리로 입사를 하든지 그것이 싫으면 모든 상속에서 제외된 채 멋대로 살든지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상속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전인규는 눈물을 머금고 그룹 내에서 하위권에 위치한 유성홈쇼핑 홍보부 대리로 입사했다.

입사 후 이를 악물고 회사 생활에 적응한 전인규는 집안의 후광을 업고 고속승진하며 단시간에 전무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번 주윤혜 콜라보레이션 여성 정장 런칭은 특이한 케이스였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

작년 겨울, 신상품 기획 차 참신한 디자이너와 콜라보레이션을 물색하기 위해 웅지패션 이사 배형태와 도쿄에 동행했다. 패션계 사교모임에서 배현태의 소개로 주윤혜를 만났다.

주윤혜는 도쿄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였지만 탑 디자이너는 아니었다.

하지만 주윤혜는 생각보다 젊고, 독특한 매력을 소유한 여자였다. 주윤혜에게 음심이 동한 전인규는 배형태에게 주윤혜를 추천했다. 웅지패션과 주윤혜의 콜라보레이션에 관한 논의를 끝내고, 자기가 의도했던 대로 자리를 호텔로 옮겨 주은혜와 뜨거운 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전인규는 염불보다 잿밥에 공을 들였는데 주윤혜의 고급 여성 정장이 히트까지 한 것이다.

‘적당히 매출만 올리면 됐는데 히트 상품이 됐어? 일이 술술 풀리는구나.’

전인규는 절로 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노트북을 종료하려다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몬스터를 막아라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개봉 2주 만에 관객 500만 명을 돌파했다. 블록버스터 외화가 개봉할 시기가 아니었고, 방화 역시 대작이 없었기 때문에 뚜렷한 경쟁작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몬스터를 막아라는 2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며 순항했다.

영화 흥행과 함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특히 남녀 주인공, 조한석과 설희는 각종 프로그램에 초청받아 출연했고, 스타급으로 급부상했다.

전인규가 몬스터를 막아라에 투자한 가장 큰 이유는 설희를 여주인공으로 데뷔시키기 위해서였다. 설희를 데뷔시킬 영화를 찾던 중 천만 관객을 동원한 바 있는 윤상일 감독의 차기작에 대한 투자 문의가 왔고, 전인규는 설희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는 조건으로 과감하게 투자했다. 영화 투자는 임원진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투자에 실패하면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밀어붙였고, 영화는 기대 이상의 흥행을 하고 있었다.

전인규는 퇴근하기 전에 500만 관객을 돌파한 몬스터를 막아라의 새로운 기사를 살펴보았다.

페이지를 넘기던 전인규의 손이 멈추었다.

“이거 뭐야?”

-생얼 설희, 인사동 갤러리에 모습 드러내다.

‘생얼로 인사동엘 왜 갔지?’

전인규는 기사를 클릭했다.

롱코트를 입고 그림을 감상하는 설희의 사진이 선명하게 화면에 나타났다.

<몬스터를 막아라 개봉 며칠 전, 설희가 인사동 한 갤러리에서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영화 개봉 전이라 그런지 설희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설희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그림을 관람하고 캐리커처 사인회에도 참석해 이강수 화가의 모델이 되어 초상화를 받았다.>

“이강수!”

전인규의 얼굴이 구겨진 휴지처럼 일그러졌다.

‘이 새끼 전시회에 갔다고?’

전인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개봉 2주 만에 500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몬스터를 막아라의 여주인공이자 극 중에서 재앙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힘을 보유한 몬스터로서 파괴적인 액션을 선보인 설희. 그녀의 미술품 관람은 영화 속에서와는 달리 그녀의 색다른 매력을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설희가 찾아간 갤러리는 선암갤러리로 이강수의 ‘서울의 삶, 그 인상’ 전이 열리고 있었다. ‘서울의 삶, 그 인상’ 전은 이강수 화가의 첫 개인전이다. 처음에는 화단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인화가의 첫 개인전에 설희가 왜 갔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곧 이강수 화가의 이력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강수 화가는 작년 겨울 차트 역주행으로 가요계에 화려하게 등장한 핑크티티, 다섯 요정의 초상화를 그린 장본인이었고, 그 당시 네티즌의 관심을 끌었었다.>

기사 중간에 사진이 한 장 더 나왔다. 이강수의 앞에 모델이 되어 단정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진이었다.

꽝!

전인규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강수 화가와 여배우 설희는 보는 사람이 질투할 정도로 외모가 출중한 선남선녀다. 연인이었으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언뜻 기자의 뇌리를 스쳤다.>

“이런 개새끼! 연인이었으면 잘 어울리겠다고?”

전인규는 쌍욕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말도 없이 옛 애인을 만나?”

고취되었던 기분이 급전직하했고, 급기야 오물로 뒤덮인 시궁창에 빠진 것 같이 더러워졌다. 영화 개봉 며칠 전이면 주윤혜와 밀회를 즐기기 위해 도쿄로 갔을 때였다.

‘이강수. 버러지같이 하찮은 새끼를 제 발로 찾아 가? 설마 잠자리까지 벌인 건가?’

이강수와 설희가 침대에서 알몸으로 뒹굴었다는 상상을 하자 눈에서 불똥이 튀고 가슴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강수, 이 새끼 가만두면 안 되겠군.”

전인규의 입술이 비틀리며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봄기운이 완연한 4월이다.

산중은 신록으로 우거지며 생명의 기운이 왕성해졌다.

자연의 일부가 된 것처럼 바위 위에서 가부좌하고 있던 강수가 눈을 떴다. 잠깐 현묘하고 정심한 눈빛이 번쩍이더니 사라졌다.

강수가 만족에 겨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후후. 3서클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속도는 올해 안에 3서클을 완성할 수도 있겠는걸? 엇차!”

마나회로 수련을 마친 강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강수의 목표는 마나회로의 3서클의 완성이다. 그 이상은 별 욕심 없었다. 사실 2서클 마법을 쓸 수 있는 지금 상태에서도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단지 치유마법을 원할 때 마음껏 쓸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그것 때문에 수련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셈이었다.

2서클로 펼치는 치유마법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치유의 범위도 국한된다. 3서클만 이루어도 마나 고갈을 걱정하지 않고 치유마법을 펼칠 수 있다. 3서클을 완성하고 나면 4서클 마나회로 수련은 운동 삼아 일주일에 서너 번만 할 생각이었다.

‘자랄 행성에서 포탈을 열고 오지만 않으면 3서클 이상의 마법은 필요 없어. 지금도 마법 쓸 일이 거의 없으니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이템을 만들지 못하는 점이다.

반지나 핸드백 등 특정 물건에 마법을 인챈트할 수 있는 아이템 제작은 흥미롭고 매우 유용할 것이 틀림없었지만, 아이템 제작은 4서클 마법이다. 인챈트 확률도 5% 미만이다. 아이템 제작은 멀고 먼 길이었다.

‘3서클도 멀었는데 4서클을 어느 세월에 완성해?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작업이나 하러 가자.’

강수는 배낭을 메고 하산을 시작했다.

강수의 걸음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빨랐다. 등산로조차 끊기고 인적 험한 산중을 벗어나 중간쯤 내려갔을 때 건장한 체격의 두 사내가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한 사내는 사각 턱이 도드라진 각진 얼굴에 목이 굵고 상체가 두툼했다. 다른 사내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무난하게 생긴 밋밋한 인상의 얼굴이었지만 날렵한 몸매에 눈매가 날카로웠다.

산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의 등산객이었지만 그것은 순간적으로 스쳐지나는 인상일뿐 깊이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등산하는 두 사내와 강수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등산로는 바위나 돌부리가 튀어나와 있어서 하산할 때는 항상 아래를 주시하며 발이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강수는 아래를 보며 내려가다 앞에서 올라오는 사내와 스칠 때 옆으로 조금 비켜섰다.

툭!

그럼에도 불구하고 굵은 목의 사내와 어깨가 살짝 부딪쳤다.

“뭐야, 씨팔!”

목이 굵은 사내의 입에서 대뜸 욕설이 튀어나왔다.

사내가 손가락으로 강수의 가슴을 쿡 찔렀다.

“이봐, 똑바로 다니지 못해?”

강수가 뒤로 반걸음 물러나며 앞을 막고 있는 두 사내를 훑었다. 먹이를 노리는 듯한 번들거리는 눈빛의 두 사내에게서 의도적인 접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두 사내의 눈에서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강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실드마법을 영창했다.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한 걸음 성큼 내디디며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어차피 팰 거 개수작할 것 없잖아.”

말이 끝나는 순간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강수가 실드마법을 미쳐 캐스팅하기 전에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의 주먹이 강수의 안면을 강타했다.

퍽!

강수는 눈앞에서 번득이는 주먹을 보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혔으나 사내의 주먹을 피할 수는 없었다.

벽돌이 얼굴을 내리친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던 강수가 뭔가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코가 깨졌는지 입으로 찝질한 액체가 흘러들었다.

“실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강수는 즉각 실드를 캐스팅했다.

퍽! 퍽! 퍽! 퍽!

쓰러진 강수의 몸 위로 두 사내의 발길질이 쏟아졌다.

실드로 몸을 보호한 탓에 두 사내의 발길질은 강수에게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팔을 들어 얼굴을 막는 척한 강수는 얼굴을 가격당한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코가 부러진 건가?’

코에서 계속 피가 흘렀고 골이 흔들릴 정도로 코가 욱신거렸다.

‘이거 기습적인 공격을 당하면 피할 수가 없네. 한데 왜 날 무턱대고 공격한 거지? 가만, 저놈이 어차피 팰 거라고 했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는 말인가?’

“팔을 부러뜨려. 그럼 몇 개월 병원 신세 지겠지.”

“네, 형님.”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의 말에 목이 굵은 사내가 강수의 팔을 짓밟았다.

강수는 실드마법을 유지하며 두 사내가 얼마나 폭력을 행사하는지 조금 지켜보기로 했다. 두 사내는 약 2분 정도 폭력을 행사했다.

“씨팔, 팔이 부러진 거야 안 부러진 거야?”

“그만하자. 이러다 디지겠다. 근데 왜 발이 아프지?”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그렇죠? 형님. 나도 차다 보니까 발이 아파서 짓밟기만 했습니다.”

“야, 사진이나 찍어라.”

"예, 형님."

굵은 목의 사내가 스마트폰을 꺼내서 피범벅이 되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강수를 몇 컷 찍다 놀라서 외쳤다.

“뭐야, 저 새끼?”

“어?”

두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강수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들의 상식을 벗어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어안이 벙벙해진 것이다.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 박일모는 섬뜩한 기분과 함께 전신에서 소름이 돋았다. 수십 번의 경험으로 미루어 봐도 전치 6주 이상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정도로 두드려 팼다. 실신해도 모자랄 판에 안정된 자세로 일어선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일모는 피범벅이 된 얼굴의 사내에게서 위화감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경우는 무슨 경우야?”

“그, 글쎄요? 황당한데요. 어쩌죠? 더 팰까요?”

“일단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

자세를 똑바로 한 강수가 거두절미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시켰지?”

강수의 질문에 박일모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알바 없고 넌 괴물이냐? 그렇게 처맞고 어떻게 멀쩡할 수 있지?”

여유를 찾은 강수가 차갑게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흐흐, 어딜 봐서 내가 괴물로 보이냐? 대답은 천천히 듣기로 하고 신나게 발길질 세례를 받았으니 이젠 받은 만큼 돌려줘야겠지?”

“뭐?”

“이 미친 새끼가 아직 덜 맞았구먼.”

목이 두꺼운 사내, 황상오가 강수에게 냅다 주먹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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