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10화 (110/197)

# 110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10회

“하상덕 감독님, 안녕하세요?”

[이 작가님! 저번 주에 전시장에 갔었는데 안 계시더군요. 늦게나마 개인전 축하합니다.]

생기에 가득찬 목소리가 강수의 귓전을 울렸다.

“예.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림 보는데 환상적인 색감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군요. 작품도 아예 완판되었고요. 그림이 훌륭하니 완판되는 게 당연하긴 하죠. 죽돌이 그림책 보고 이 작가님 실력이야 출중한 건 알고 있었는데 회화까지 이렇게 잘 그릴 줄은 몰랐습니다. 하여튼 대단하시네요.]

“별말씀을요. 그렇지 않아도 벙어리 황구 죽돌이 최종 성적이 궁금했는데 전화 주셨네요. 죽돌이 흥행 성적은 어떻습니까?”

[하하. 그렇지 않아도 흥행 성적 알려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죽돌이 최종 관객 수는 팔십삼만 칠천육백 명 정도 됩니다. 제게는 인생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이게 전부 이 작가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 뭐 있다고요. 하 감독님이 노력해서 이룬 결과지요.”

[하하. 이 작가님의 베스트셀러 원작이 아니었으면 이런 결과를 낼 수 없었을 겁니다. 더구나 벙어리 황구 죽돌이가 흥행하면서 차기작까지 섭외 와서 투자사, 제작사 전부 결정되었습니다. 이 작가님은 제게 은인이십니다.]

“아, 차기작 결정됐군요. 축하는 하 감독님이 받아야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한데 차기작은 어떤 작품인가요?”

[하하. 감사합니다. 차기작 제목은 ‘키즈수사대’입니다. 실종된 애완견을 찾아 나서는 다섯 아이의 모험 이야기입니다. 아, 참. 제가 딴 얘기만 하고 있네요. 수익금 정산하고 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세금 제하면 투자금과 이익금 합해서 이 작가님 몫은 일억 이천 팔백만 원 정도 될 겁니다. 정산 끝나는 대로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아, 일억이 넘는군요. 대박인데요? 제가 탁월한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절 믿고 투자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정산명세서는 이메일로 보내드리고 이번 달 안으로 투자금과 이익금 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연락하겠습니다.]

“예, 감독님. 수고하셨습니다.”

전화를 끊은 강수는 허파가 간질거려 대소를 터트렸다.

“우하하하.”

한바탕 마음껏 웃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일억 이천 팔백만 원이라!’

현금으로 받았으면 이천 오백만 원에 불과한 영화 판권이 일억 삼천만 원 가까운 거금으로 불어났다. 인세가 초라할 정도의 수익이었다.

‘지금까지 받은 인세의 거의 세 배에 가까운 금액인데? 대박이다.’

이제 투자금 정산받고, 선암갤러리에서 돈을 받으면 주하가 마련해준 국사봉 아래 땅에 집을 지을 수 있다. 아버지 어머니가 서울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땅 구해서 집 짓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무척 놀랄 것이다.

부모님을 모셔올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강수 옆으로 고원철과 서혁중이 다가왔다.

“선배님, 무슨 기쁜 소식을 받았기에 호탕하게 웃으세요?”

강수가 두 후배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영화 판권료 이천 오백만 원 투자해서 칠 개월 만에 일억 삼천만 원으로 불어났는데 안 웃을 수 있냐?”

“헉! 저, 정말이요?”

“우와, 대박!”

고원철이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강수를 바라보았다.

대학 시절을 기억해보면 분명히 존재감이 낮았던 선배였다. 아싸는 아니었지만 과 활동도 소극적이었고, 일러스트 알바 때문에 바쁘다며 타 학교 미대와 교류전이나 단체전 등 전시 참석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나마 외모가 받쳐줘서 복학 후 여학생들이 관심을 보이고 꽤 따라다니긴 했다.

‘그때는 외모 외에 봐 줄 만한 게 없었는데 이 년 사이에 사람이 180도 달라졌어.’

체격이 좋아져서 그런지 외모도 더 빛이 났고, 그림은 대학 때 하고 차원이 다르다고 느낄 정도로 발전했다. 이 년 못 본 사이에 변해도 너무 변했다. 이강수를 보고 있으면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급격하게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될성부른 사람은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다.

홍우대에 입학했다는 사실만으로 비범한 자질이 있다는 방증이지만 뛰어난 인재가 모인 미대에서 강수 선배는 빛이 바래 있었다. 한데 역시 재능은 어디 안 가는지 이강수는 대학 졸업하고 놀라우리만치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뒤늦게 포텐이 터졌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도 강수 선배처럼 한순간에 빛날 수 있어.’

고원철은 이강수를 보면 자기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탁월한 투자를 하셨네요. 저, 한데 선배님.”

서혁중이 은근한 목소리로 강수를 불렀다.

“왜?”

“대박 이익을 터트렸는데 축하 파티 같은 거 안 하나요?”

“축하 파티? 그딴 걸 왜 하냐? 너라면 나 돈 벌었다고 광고하겠냐?”

“하하. 저처럼 소인이야 절대 안 하죠. 하지만 선배님은 타인의 시선 정도야 연연하지 않는 대인이지 않습니까?”

“푸하하. 내가 대인?”

어이없는 얼굴로 웃음을 터트린 강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행기 태우지 마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하는데 보다시피 나도 날개가 없거든. 하지만 날 대인으로 치켜세워주니 한턱 안 낼 수는 없지. 돈 받으면 최고급 식당에서 한턱낼 테니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물색해 놔라. 됐냐?”

“옛, 감사합니다. 선배님, 저희는 이만 작업하겠습니다. 원철아, 작업하자. 이번 작품은 손이 많이 간다.”

“그래. 작업해야지.”

고원철은 자기의 이젤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뭔가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뜨거운 욕망 덩어리를 느꼈다.

자신이 이강수보다 못한 것이 뭔가? 학교 다닐 때는 분명히 자기 그림이 나았다. 각종 공모전에서 입상도 했고, 성적장학금도 받았다. 그에 반해 이강수는 그림만 잘 그리고 예술적 감각이 떨어졌기 때문에 실기에서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대학 내내 성적 장학금조차 받지 못한 강수 선배도 해냈잖아. 강수 선배는 중하위권, 나는 상위권이었어. 나도 성공할 수 있어.’

욕망의 심지에 불이 붙었고, 의욕이 타올랐다. 성공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이강수 선배처럼 첫 개인전으로 단번에 화단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보낸 지난 육 개월이 너무 아까웠다.

‘한다, 한다! 할 수 있다.’

고원철은 새로운 작품이 놓여있는 이젤 앞에서 주먹을 굳게 쥐었다.

‘이 작품은 군마와 마찬가지로 초현실적인 소재의 작품. 어떤 의미로 이런 형상을 그린 걸까?’

약 140*120cm 크기의 캔버스 중앙에 나선 구조의 선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형체가 놓여 있다. 제목이 ‘잠재의식 안에서 깨어나는 DNA 남녀’라서 그렇지 언뜻 보면 DNA 나선 구조로 이루어진 옆으로 누운 타원형의 물체로 보인다. 하지만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남녀가 기이한 형태로 뒤엉켜 있는 형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캔버스 상하, 좌우에서 DNA 구조의 사슬 수십 가닥이 공중에 부양해 있는 남녀에게 뻗어 나가 종국에는 실처럼 가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DNA 남녀는 인체 구조상 불가능한 자세와 나체의 모습으로 허공에 부양해 있는, 물리법칙을 무시한 초현실적인 그림이다. 하지만 DNA 나선이 뒤엉켜 있는 모습은 전혀 선정적이지 않았다. 그림을 유심히 보면 여자는 좌측에 있고, 고개를 돌려 뒤의 남자를 향해 있다. 남자는 우측에 있고, 고개를 돌려 뒤의 여자에게 향해 있다. 팔과 팔, 다리와 다리는 뒤엉켜 있다. 서로를 바라보는 듯 서로를 갈구하는 듯하지만 기이한 형태로만 엉켜 있을 뿐이다.

‘남자와 여자. 생물학적 근원에 내재한 이성에의 갈구는 아닐까? 하지만 현실은 갖은 제약이 남녀를 가로막고 있지. 남녀를 완전히 반대로 향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한 걸까?’

단순하게 보면 서로가 뒤엉켜 하나로 융합된 것 같기도 하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가 되어야 궁극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어떤 색깔을 칠하는가에 따라 내포한 의미가 달라질 여지도 있다. 군마를 작업하면서 그것은 이미 겪어보았다.

고원철은 그림에 대한 자기의 해석을 바탕으로 이젤에 놓여 있는 작업지시서를 집었다.

B4 복사용지에 그려진 DNA 남녀에는 바탕과 남녀, DNA 사슬의 색상, 명도, 채도까지 언급되어 있다.

작업지시서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적어 놓아서 자기의 의도는 반영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고원철은 작업지시서에 따르되 자기의 색채 감각을 표현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덧칠로 내 표현은 죽겠지만 상관없어. 내 작품을 창작한다는 마인드로 색을 넣어보자.’

고원철이 작업지시서를 내려놓고 붓을 들었다.

*

강수는 스마트폰을 들고 복도로 나갔다.

스마트폰에서 단축번호 2를 눌렀다. 신호음이 끝나고 통화가 연결되었다.

“아버지, 저예요.”

[오냐, 무슨 일로 전화했냐?]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나요? 그냥 안부 전화할 수도 있지.”

[우린 네가 안마해 준 뒤로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잘 있다. 됐냐?]

“건강하시다니 다행이네요. 다름이 아니라 서울 인근에 700평짜리 땅을 구해서 전화한 거예요.”

[...? 땅을 구해? 땅값이 한두 푼도 아니고 무슨 돈이 있어서 보름 만에 땅을 샀다는 것이냐?]

“그게.... 실은 주하 땅이에요. 할아버지한테 상속 받았대요. 주하가 그 땅을 쓰라고 해서 거기에 집을 지으려고요.”

[... 허!]

탄식 같은 한숨 뒤에 이전일의 고함이 강수의 귓전을 따갑게 때렸다.

[인석아, 넌 염치도 없냐?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주하 땅에 짓긴 뭘 지어? 결혼하기 전에 그 땅에 집 지을 생각은 하지도 말아.]

귀가 따가워 스마트폰을 귀에서 땐 강수가 미간을 좁히며 하소연했다.

“아버지, 저 주하에게 청혼했어요. 주하도 좋다고 했고요. 그러니까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 주하 부모님은 만나 보았느냐?]

“아직이요.”

[이놈아,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야. 주하하고 결혼하고 싶으면 빨리 주하 부모님부터 찾아뵙고 주하와 사귀고 있다고 인사부터 드려. 결혼은 그다음에 얘기하거라. 집은 결혼한 후에 짓든지 말든지 하고. 알아들었냐?]

“어휴, 알았어요.”

[이만 들어가거라.]

뚜-

끊긴 신호음이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강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대 차이는 어쩔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 인척 관계가 없는 주하의 땅은 남의 땅이다. 남의 땅 위에 집 짓는 행위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집이나 작업실 짓는 일은 시급한 사안이 아니다.

강수는 아버지 말씀대로 순서를 지켜서 천천히 진행하기로 했다.

‘주하 부모님부터 찾아뵙고 인사드려야겠다.’

강수는 주하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헥헥. 오빠, 저예요.]

“운동하니? 숨넘어가는 것 같다?”

[후우- 맞아요. 해영언니랑 운동해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구나.”

[헤헤. 오빠는 매일 새벽에 운동하잖아요? 오빠처럼은 못 해도 일주일에 네 번 이상 운동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저기, 주하야.”

[예?]

“음, 내가 주하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싶은데 주하는 어떻게 생각해?”

[어머, 좋아요. 근데 두 분이 한 자리에 만나는 건원치 않아서 따로 만나야 할걸요.]

“그럼 약속을 각각 잡아야겠지? 주하가 부모님께 연락해서 날짜 좀 잡아볼래?”

[알았어요. 날짜 잡아서 연락할게요.]

“그래. 난 이제 그림 작업 시작할거야. 작업 끝나고 전화할게.”

[네. 오빠, 수고해요.]

통화를 끝낸 강수는 작업실로 들어갔다.

고원철과 서혁중은 주변의 변화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몰입해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고 있었다.

작업에 대한 집중력이 처음과는 달리 굉장히 높아졌다.

‘후후, 열심이군.’

강수는 이젤 앞으로 가 두 번째 작품 ‘잠재의식 안에서 깨어나는 DNA 남녀’ 앞에 섰다. 1도 인쇄한 그림을 훑은 강수는 선뜻 붓을 들지 못하고 주저했다.

‘음, 제목을 명확하게 정해야 개념도 명확해지겠다.’

강수는 캔버스 속에서 엉켜 있는 남녀를 살펴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방팔방에서 뻗어 나온 DNA 사슬로 형상화된 남녀.

강수는 그림을 통해 인간의 본능에 내재한 남녀 간의 이끌림과 비밀스럽고 은밀한 속삭임, 원초적인 욕구, 다가가고 싶지만 무관심하고, 수줍어하고 부끄럼 타는 등 남녀의 본질과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 느낌은 물감이 캔버스에 입혀지면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좋아, 제목은 단순하지만 폭넓게 해석할 수 있도록 수식어를 빼고 DNA 남녀로 하자.’

제목을 정한 강수는 머릿속에서 형상화된 남녀를 떠올렸다. 깊고 짙은 물결이 흘러가는 듯한 느낌의 남색 바탕 위에 선명하게 부각되는 밝은 갈색과 뽀얀 살색의 ‘DNA 남녀’.

강수는 붓을 들었다.

*

유성홈쇼핑 전무실.

“.... ‘몬스터를 막아라’ 흥행 돌풍에 이어 전무님께서 주도적으로 런칭한 주윤혜 디자이너와의 콜라보레이션 여성 정장이 대박 조짐을 보입니다. 1차에 이어 2차 판매까지 완판이 되었고, 재판매에 대한 문의 전화가 오고 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유성홈쇼핑 전략기획부 박규창 부장이 전인규 전무에게 업무 보고하고 있었다. 얼굴에 살이 올라 있고, 배가 적당히 나온 박규창은 50대의 중년 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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