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09회
4월 20일 저녁 8시경.
삑, 삑, 삑, 삑!
작업실에서 몬스터를 막아라 인터넷 기사를 읽어보던 강수는 디지털 도어락 누르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입문이 열리고 캐주얼한 옷차림의 주하가 들어왔다.
“강수오빠!”
“어서 와. 해영 씨가 안 보이네?”
“볼일 보고 천천히 올라오겠대요.”
“늦은 시각에 어딜 갔다 온 거야?”
“헤헤. 별내동에 가서 땅 좀 보고 왔어요. 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좀 늦었어요.”
“아, 땅 보고 왔구나. 수고했어. 어떤 땅을 보고 온 거야?
“별내동 국사봉 아래 700평 정도 되는 땅이에요. 산자락에 인접해 있고 앞이 탁 트여서 전망도 괜찮아요. 나중에 같이 가서 봐요.”
“700평이면 딱 좋은데 별내동이면 땅값이 꽤 비싸겠지? 땅값은 얼마야?”
주하가 자랑하듯 짜랑짜랑하게 웃었다.
“호호. 그 땅 내 꺼예요. 땅값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강수가 입을 쩍 벌리고 주하를 바라보았다.
“뭐? 네 땅이라고? 땅도 가지고 있었어?”
“헤헤. 실은 할아버지가 땅이에요. 할아버지가 여러 곳에 땅을 갖고 있는데 서울 근교 별내동에도 있다는 게 생각났지 뭐예요.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별내동 땅을 달라고 매일 졸랐더니 증여해 주신댔어요. 그러니까 오빠는 언제든지 집도 짓고 작업실도 지으면 돼요.”
땅값이 못해도 10억은 넘을 텐데 며칠 졸라서 증여받다니!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고마워. 이렇게 빨리 땅을 구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내일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주하 땅 700평이 별내동에 있다고 하면 꽤 놀라겠다.”
“헤헤. 어머님, 아버님이 좋아할까요?”
“응?”
강수가 빙긋 웃었다.
“어머니야 당연히 좋아하겠지만 아버지는 고향을 뜨려고 하지 않아서 어떨지 모르겠다.”
“아버님은 시골을 좋아하시는군요.”
“그렇지. 아파트나 서울은 답답하시데. 그래서 서울 근교 땅을 알아보라고 한 거야. 땅 구했으니까 집 짓는다고 하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네. 참, 나는 후배들이랑 짬뽕에 탕수육 먹었는데 주하는 저녁 먹었어?”
“네. 출발할 때 먹었어요. 저기, 강수오빠.”
“응? 왜?”
“오빠 시간 나면 영화 한 편 보러 갈래요?”
“영화? 어떤?”
“저번 주에 개봉한 몬스터를 막아라요. 스토리도 재밌고 액션이 화끈하대요. 요즘 완전 흥행 돌풍에 관객몰이하는 영화에요.”
영화가 화제의 중심에 있는 몬스터를 막아라일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던 강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음, 몬스터를 막아라.... 그 영화에 내가 사귀었던 여배우가 나오는데.”
“어? 누구요?”
설희와 연인이었던 과거에 대해 주하에게 털어놓을 기회를 엿보고 있던 강수는 잘됐다 싶었다.
강수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화에서 몬스터로 나오는 설희라고. 원래 이름은 민종희야.”
“옛!”
깜짝 놀란 주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수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요? 정말 설희 씨가 오빠 전 애인이에요? 농담 아니고요?”
강수가 진지한 눈빛으로 주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농담할 게 따로 있지. 실없이 여배우랑 사귀었다는 농담을 뭐 하려 하겠어?”
“앗, 맞다. 예전에 사귀던 여자와 헤어졌다고 했죠? 그 여자가 바로 설희?”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랑 사귈 때는 주로 엑스트라나 단역에 출연했어. 무명이었지.”
“설희 씨, 악당 검사로 떴잖아요. 와, 성공할 것 같으니까 오빠를 찬 거구나.”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내가 무능해서 설희를 붙잡지 못했다고 봐야지.”
“네? 오빠가 무능해요? 호호. 오빠처럼 유능한 화가가 어디 있다고 무능하다는 거예요?”
강수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능한 거 맞아. 군대 제대하고 대학 3학년에 복학해서 알바로 일러스트 그리기 시작했어. 그게 작년까지 쭉 일러스트만 그리게 된 거야. 남 동화책에 그림이나 그려주는 흔한 일러스트레이터여서 사실 앞날이 불투명했거든.”
주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예전에는 지금처럼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는 말이에요?”
“그래. 설희와 사귈 때는 비전도 없는 평범한 일러스트레이터였어.”
“그랬구나. 음....”
팔짱을 끼며 잠시 생각에 잠긴 주하가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에요. 성공할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성공 못 할 거 같으니까 떠난 거잖아요? 그리고 성공 못 하면 어때요? 꼭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직장을 다니든지 아니면 자기 일 가지고 사회생활 하면서 살면 충분하다고 봐요. 대부분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기도 하고요.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고, 성공 못 했다고, 비전 없다고 떠나는 건 너무 비인간적이고 매몰차요.”
“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주하의 말이 틀리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강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질문을 던졌다.
“주하가 설희 같은 입장이라면 주하는 남자를 몇 년이나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
“저요? 헤헤. 나는 남자가 뭘 하든 열심히 자기 일하면서 살면 더 바랄 게 없는데요? 성공보다 사랑하는 사람하고 같이 사는 게 더 중요하죠.”
“쩝!”
강수가 입맛을 다셨다.
상류층의 풍족한 삶을 살아온 주하에게 자신의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돈이 없어서 손바닥만 한 고시원에서 살고, 찢어진 속옷을 기워 입고, 난방비 아끼기 위해 보일러를 함부로 틀지 못하는 가난한 자의 심경을 주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할 테니까.
“알았어. 영화는 언제 보러 갈까?”
“근데 전 애인 나오는 영화 봐도 돼요? 보기 싫으면 안 봐도 돼요.”
“아니, 괜찮아. 이젠 남남인걸. 영화가 재미있다고 하니까 보러 가자.”
주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강수를 올려다보았다.
“저엉말 괜찮아요?”
“그렇다니까? 헤어진 지가 언젠데.”
주하가 뽀루뚱한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삐진 것 같았다.
‘얘 얼굴이 왜 이래? 역시 보러 가면 안 됐나?’
강수가 부푼 주하의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었다.
“아얏!”
“왜 심통 난 얼굴하고 있어? 내가 무슨 미련이라도 남았을 거 같아서 기분 상한 거야?”
“치, 설희 씨 보고 싶어서 영화 보러 가는 거 아니에요?”
강수가 정색해서 말했다.
“뭐? 재밌는 영화니까 보러 가는 거지. 날 버리고 다른 남자한테 가버린 여자한테 무슨 좋은 감정이 남아 있어서 설희를 보고 싶겠어? 설마 옛 애인을 질투하는 거야? 그런 거구나.”
“질투 아니거든요. 근데 설희 씨가 다른 남자한테 갔다고요?”
“그래. 기업체 무슨 전무인가 하는 사람하고 사귄다고 스캔들도 났잖아. 단순한 전무가 아니고 기업체 오너 집안 자식이라고 했어. 얼마나 부자인지 상상도 안 되네.”
설희가 기업체 전무와 스캔들 났었다는 말에 주하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헤실거렸다.
“흥, 제가 옛 애인이나 질투하는 못난이인줄 알아요? 히히, 설희 씨랑 헤어졌는데 왜 질투를 해요? 근데 설희 씨가 오빠 떠나지 않았으면 나하고 오빠하고 만날 일 없었겠죠?”
강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한 거 아냐.”
“아휴, 얼마나 다행이야. 나중에 설희 씨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지.”
“왜 고맙다고 인사를 해?”
“설희 씨가 강수오빠 만나게 해 준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헤헤. 지금 생각해보니까 고마운 거 있죠.”
“참나, 주하가 설희를 만날 일이 있을까? 어쨌든 영화는 보러 갈 거야?”
“그럼요, 가야죠.”
“잠깐 기다려. 외출복으로 갈아입을게.”
옷걸이에 걸린 콤비를 잡은 강수는 문득 지난 금요일 선암갤러리에 찾아온 설희가 생각났다.
‘얘기해야 하는 거야 안 해도 되는 거야?’
전시장 안에서 설희와 대면했던 때의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장 선배가 설희냐고 물어볼 정도였고, 관람객 중에는 설희를 알아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자기가 누구를 만났는지 일일이 얘기할 건 없지만 아무래도 옛 애인 설희는 예외라고 봐야 한다.
‘나중에 설희가 전시장에 와서 캐리커처 그렸다는 사실이 주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말 나온 김에 밝히는 게 낫겠다.’
콤비를 입은 강수가 주하 앞으로 가서 입을 열었다.
“참, 한 가지 할 얘기가 생각났다.”
“예? 뭔데요?”
“설희 얘기가 나와서 생각난 건데 저번 금요일에 설희가 선암갤러리 전시장에 왔었어.”
놀란 주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 설희 씨가요? 왜요?”
“나도 몰랐는데 캐리커처 행사하는 줄에 서 있었어.”
“와, 얼굴도 두껍다. 오빠를 찰 때는 언제고 캐리커처 그려달라고 줄을 서요? 그래서 그려줬어요?”
“줄 섰는데 어떡해. 이별 선물로 그려줬지. 고맙다고, 잘 간직하겠다고 하더라.”
“와, 뻔뻔해라. 그 여자가 무슨 얘기 했어요?”
“별 얘기 안 했는데. 그냥 개인전 축하한다고 했어. 그리고 한 가지 묻긴 하더라.”
“뭘 물어요?”
“자기랑 사귈 때는 왜 지금처럼 그리지 못 했냐고. 왜 자기가 포기하고 나서야 이런 그림을 그리냐고.”
“치, 그러니까 그림을 지금처럼 잘 그렸으면 오빠를 차지 않았다는 얘기잖아요?”
“그런 의미겠지?”
“흥, 성공할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성공 못 하면 언제든지 떠날 거면서. 너무 계산적인 생각이잖아요? 그 여자가 오빠를 사랑하긴 한 거예요?”
“한때는 사랑했겠지? 하얀색은 다른 색에 쉽게 물들듯이 사랑이란 감정, 특히 이성 간의 사랑은 영원불변한 건 아니니까. 남녀가 물질과 현실을 떠나서 오직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만날 수만 있다면 이상적인 만남이겠지만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그건 바랄 수 없는 일 아닐까?”
주하가 강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강수도 주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주하는 강수의 맑고 투명한 눈빛이 좋았다.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은 따스했고, 한없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 눈빛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쪽!
강수가 주하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사랑해. 알고 있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주하뿐인걸.”
귓가를 간지럽히는 강수의 달콤한 목소리에 주하가 눈을 감으며 입술을 살짝 벌려 움직였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주하는 ‘또요’라고 말했다.
주하는 입술에 와 닿는 감촉을 음미하며 자기가 마치 무언의 약속 속의 여자가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져들었다.
사물과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한 한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굉장히 긴 시간이 흘렀다는 느낌이 든 주하가 서서히 눈을 떴다.
강수의 품에 푹 안겨 있는 자기를 인식한 주하가 고개를 들고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헤헤, 강수오빠. 이제 영화 보러 가요.”
“영화가 끝나면 너무 늦을 텐데 해영 씨한테 같이 갈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우린 영화 보러 가니까 먼저 퇴근하라고 전화하면 돼요.”
“그럼 전화해 봐.”
“알았어요.”
주하가 스마트폰을 꺼내 단축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떨어지고 벨소리가 복도에서 들렸다.
삑, 삑, 삑, 삑!
디지털 도어락 버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네이비색 정장을 입은 늘씬한 몸매의 임해영이 들어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죠?”
“해영언니 왔네? 언니, 우린 몬스터를 막아라 보러갈 거예요. 끝나면 너무 늦으니까 언니는 퇴근해도 돼요.”
임해영이 표정도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몬스터를 막아라. 그 영화 나도 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같이 가도 되죠?”
영화 관람까지 동행하겠다는 임해영의 말에 주하가 난감한 얼굴로 강수를 쳐다보았다.
주하의 난처해하는 표정을 본 임해영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두 분이 가려고 했나요?”
“하하. 영화가 끝나면 너무 늦어서 해영 씨 먼저 퇴근해도 된다는 얘기죠. 늦어도 괜찮으면 같이 가도 상관없습니다.”
“죄송해요. 저는 아가씨를 집까지 모셔야 하는 책임이 있으니 강수 씨가 제 입장을 헤아려 주면 고맙겠네요.”
“하하. 물론입니다. 저도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있는 분을 존경합니다. 같이 가시죠.”
오래전부터 이런 상황은 다반사였기 때문에 주하는 임해영의 동행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잘 됐다. 해영언니, 같이 가요.”
“고마워요. 어디로 모실까요?”
“영화 끝나면 너무 늦으니까 한남동에서 가까운 영화관으로 가시죠.”
“그럼 용산 유맥스 영화관으로 모실게요.”
결국 강수와 주하는 단둘이 데이트하려는 생각을 접었다. 강수 일행은 작업실에서 나와 각자 차를 몰고 용산 복합영화관 유맥스로 달렸다.
*
우웅!
강수의 스마트폰이 떨었다.
강수는 첫 번째 작품 군마 15점을 끝내고, 두 번째 작품 가제(假題) ‘잠재의식 안에서 깨어나는 DNA 남녀’를 이젤에 걸어놓고 작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재의식 안에서 깨어나는 DNA 남녀’도 업체에서 15점을 실크스크린 1도 인쇄해 가져왔다.
북한산에서 마나회로 수련을 마치고 작업실에 와보니 두 후배 고원철과 서혁중이 작업지시서대로 2점을 완성해 놓았다.
‘하상덕 감독이네?’
강수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통화를 연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