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08회
책상 앞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언밸런스의 헤어스타일에 갈색 머리카락과 선글라스가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선글라스가 가리지 못한 갸름한 턱과 도톰한 입술, 깨끗한 피부만 봐도 미인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여인은 검은 바지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밝은 밤색의 롱코트를 걸쳤다.
여인을 눈에 담은 강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종희!’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외침을 간신히 참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는 볼일 없을 줄 알았던 민종희 아니, 이제는 주목받는 신인여배우 민설희였다.
설희가 선글라스를 벗고 의자에 앉았다. 작은 얼굴에 그린 듯한 눈썹, 곧고 미려한 콧날, 도톰한 입술. 이목구비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설희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입술 꼬리가 잘게 떨렸다.
“오랜만이네. 개인전 축하해.”
설희의 등장은 강수에게 놀라움과 충격으로 다가왔다. 설희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지만 강수는 놀라움에 휩싸여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강수는 순간적으로 휘몰아치는 격정에 사로잡혔다.
이별 문자를 받고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끝없는 상실감과 절망에 얼마나 몸부림쳤던가? 여자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자기 모습이 얼마나 초라했던가?
문득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강수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강수는 가슴에서 휘몰아치는 격정을 수습하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너한테 축하를 다 받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좀 놀랐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꼭 못 올 데를 온 것처럼 말한다.”
“못 올 곳은 아니지만 내 앞에 불쑥 나타난 건 현명한 일은 아니지.
순간적으로 격정에 휩싸였다가 차분하고 냉정하리만치 무표정해지는 강수의 변화를 보며 설희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핑크티티 초상화 그렸고, TV에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잖아. 어떤 초상화인지 너무 궁금하더라. 결국 성수동 카페에 가서 핑크티티 초상화를 봤어. 그리고 얼마 전에 개인전 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네 그림을 너무나 보고 싶었어. 그래서 전시장에 올 수밖에 없었어.”
강수는 싸늘한 눈빛으로 묵묵히 설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강수는 전신을 휘감은 격정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몸 밖으로 흩어지는 걸 느꼈다. 설희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랐을 뿐 밉다거나 주체 못 할 분노가 치솟거나 증오스러운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시간이 약이 되었는지 설희로 인해 받았던 고통과 절망마저 희미한 감정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강수는 언젠가는 한번 설희를 만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날이 오늘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설희를 눈앞에서 직접 만나고 보니 그녀에 대한 감정이 싸늘하게 식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지쳐 보였는데 지금은 몸도 탄탄한 것 같고 무척 건강해 보이네. 보기 좋다.”
설희에 대한 자기의 감정을 확인한 강수는 기분마저 풀리고 심신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남남이 된 설희에게 원수 보듯 냉대하며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운동을 열심히 한 덕분에 예전에 비교하면 몸이 아주 건강해졌어. 그보다 네 남자가 여기 온 걸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닌가?”
“내 남자라고?”
“그래. 그 전인규라는 재벌 집 후손.”
“그 사람이 내가 여기 올 걸 신경이나 쓸까?”
“무슨 소리지?”
“나 말고도 가진 게 많은 남자거든. 내가 어딜 가는지 신경 쓸 시간도 없을걸?”
설희는 표정도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전시 작품 전부 봤어. 그림이 너무 좋더라. 핑크티티 초상화도 보고 놀랐지만, 전시 작품 보니까 이전 그림하고 색감이나 표현 기법이 너무 다르더라? 어떻게 보면 네 작품 같지 않아서 사실 무척 놀랐어. 그전에는 왜 이렇게 그리지 못했어?”
“그전에는... 왜 이렇게 그리지 못 했냐고? 그건....”
“....”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강수는 핑계 댈 수밖에 없었다.
“변화는 원한다고 내 맘대로 일어나지 않으니까. 변화는 어느 순간 각성처럼 찾아왔거든.”
설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각성? 예술적인 깨달음이니?”
“그래.”
“너무해. 내가 널 포기하니까 변화가 찾아오다니. 우리가 사귈 때 이렇게 그렸으면 얼마나 좋았니?”
설희의 목소리에서 진한 아쉬움이 전해졌다. 사귈 때 각성이 찾아왔으면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긴 감정의 편린을 느끼고 강수는 내심 씁쓸했다.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은 이상일 뿐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 앞에서 무력하다. 가진 것 없으면 사랑은 사치고, 신기루 같은 꿈이다. 현실은 갈수록 각박해지고, 결혼 연령은 갈수록 높아져 30대 넘어 결혼하는 만혼이 사회 풍토가 됐다.
만혼뿐만 아니라 혼자 편하게 여유를 누리며 살겠다는 1인 가구가 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남녀가 결혼할 수 있는 건, 이상은 이상으로 남겨두고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상대를 만나기 때문일 것이다.
강수는 설희가 왜 자신을 떠났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래. 내가 무능했지. 5년이나 기회를 준 널 어떻게 욕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건 너와 헤어지고 나서야 투팍탈을 만났다는 거야.’
우습게도 설희가 이별 통보하지 않았다면 북한산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고, 산중에서 투팍탈을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설희가 떠나지 않았다면 자기는 오늘도 거의 온종일 책상에 앉아 일러스트 그리는 평범한 일러스트레이터였을 것이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미지의 힘의 작용으로 지금 전시장에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언제부터 회화를 그린 거야? 작년 초까지만 해도 회화는 그리지 않았잖아?”
“작년 초 지나서 이맘때쯤.”
“작년 이맘때? 하아, 회화 그린 지 일 년 만에 이런 개인전을 열어?”
주위의 관람객이 설희를 힐끔거리며 소곤거렸다. 누군가는 설희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인터넷 언론사 신세계뉴스 기자 엄종진은 몬스터를 막아라 개봉을 앞두고 설희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팔백만 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한 예고편이나 시사회 이후 기자들의 호평 기사, 네티즌의 폭발적인 반응 등 몬스터를 막아라는 흥행 가능성이 높았다. 설희가 지금은 비록 인지도 낮은 신인 여배우에 지나지 않지만, 영화가 흥행하면 단숨에 탑 여배우가 되어 대중의 관심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탑 여배우가 되기 전에 가십거리가 될 만한 사진을 찍어두면 언제든지 쓸모가 있다.
엄종진은 설희가 산다는 소문이 돈 금호동의 한 아파트 단지 앞에서 얼쩡거리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설희를 발견하고 뒤따라온 것이다. 그는 사람들 틈에서 설희를 열심히 찍었다.
강수가 도화지 한 장을 화판에 올려놓았다.
“널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괜찮은 거야?”
설희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작년에 반짝했을 때는 대중의 관심을 받긴 했지만, 영화 찍으면서 관심에서 멀어졌어. 지금은 영화 개봉 전이라 신경 쓸 정도는 아냐.”
강수가 설희를 똑바로 보았다.
엑스트라나 단역으로 활동할 때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던 설희였다. 지금은 무명이었던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의 인지도가 높다. 사람의 시선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의아할 지경이었다.
격동이 가라앉은 후에야 설희의 분위기에서 예전과 다른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던 강수는 미미하지만 얼굴에서 성형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눈은 깊어졌고, 콧방울이 날렵해졌고, 입술은 도톰해졌다. 전체적으로 과거 섹시 가수로 이름을 날린 박윤선의 젊었을 적 분위기가 났다.
강수가 자주색 파스텔 연필을 집으며 말했다.
“내 작품이 예전하고 다르다고 했지? 네 얼굴도 예전하고 조금 달라졌어.”
“어떻게?”
“조금 더 섹시해지고 인상이 날카로워. 반항적인 기질이 내재해 있다고 할까?”
“칭찬이지?”
“그래. 작은 변화인데 얼굴이 돋보이고, 외모에서 너만의 개성적인 분위기가 난다. 이제 얼굴은 손 안 대는 것이 나을 거야.”
“알았어. 가능하면 얼굴에는 손대지 않을게.”
“캐리커처 그린다.”
“그럴래?”
강수가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엄종진은 설희가 이강수와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의아한 얼굴로 훔쳐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학교 동창일 수도 있고,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일 수도 있고, 친척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째 느낌이 싸하다?’
처음엔 경직된 분위기였는데 좀 지나면서 부드러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둘 사이에 뭔가 있다는 기자의 직감이 발동했다.
‘선남선녀라고 해도 좋은 화가와 여배우라.... 무슨 사이지? 연인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엄종진은 캐리커처 그리는 이강수와 그 앞에서 다소곳이 앉아 모델이 된 설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1분이 아니라 약 5분간 정성 들여 그린 그림에 사인한 강수가 8절 도화지를 설희에게 내밀었다.
“도화지가 좀 커서 가져가는 데 불편하겠다.”
“걱정 마. 바로 액자 할 거니까.”
도화지를 받아 캐리커처를 본 설희가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이건 초상화잖아.”
도화지에는 선 몇 줄로 그린 캐리커처가 아니라 섬세하고 컬러풀한 아름다운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린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초상화였다.
설희는 초상화를 보고 자신에 대한 강수의 무심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가닥 애증이라도 남아 있으면 이렇게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설희는 욕을 먹고 최악의 경우 따귀 맞을 각오로 왔다. 한데 전 애인 이강수는 처음만 잠시 격동했을 뿐 자신을 타인 대하듯 했다. 자신에 대한 이성적인 감정이 한 톨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생각보다 무심한 강수의 태도에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고, 한편으로는 착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잘 간직할게. 이번에 찍은 영화는 내가 온 힘을 다해서 연기했어. 보러 와주면 좋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수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작별 인사를 했다.
“잘 가.”
“다시 한번 개인전 축하해.”
의자에서 일어나 선글라스를 낀 설희가 뒤돌아 또각또각 걸어 나갔다.
강수의 옆으로 장영봉이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설희의 뒷모습을 향하고 있었다.
“이 작가. 수고했어. 오늘은 거의 두 시간이나 꼼짝 안고 그리던데 손은 정말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손을 놀린 탓인지 70명쯤 그렸을 때 손목이 시큰거리며 무리가 왔다. 치유마법으로 재빨리 손목을 치료하고 캐리커처 행사를 계속했다.
“자네가 캐리커처 그리는 걸 보면 은근히 걱정된다네. 중간에 잠시 쉬면서 손목도 풀고 스트레칭이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이제 두 번만 더 하면 되는걸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데 마지막에 그려준 여성 말일세. 내가 보기엔 설희 닮았더군. 설마 설희는 아니겠지?”
“설희를 아세요?”
장영봉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지만 다음 주에 개봉하는 몬스터를 막아라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다는 건 알지. 예고편도 볼만하고 시사회 갔다 온 기자들도 호평해서 이 영화는 영화관 가서 볼 생각이네.”
“예. 저도 보고 싶네요.”
장영봉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강수의 어깨를 툭 쳤다.
“전시장 봐. 갈수록 사람이 많아지고 있어. 이렇게 많은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아온 경우는 참 드문데. 이 작가 인기가 보통 아니냐. 정말 놀랍군.”
“하하. 그런가요? 선배님, 전 이만 작업실로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아, 바쁠 텐데 얼른 가보게. 내일 보세."
"예. 수고하세요."
밖으로 나온 강수는 곧장 작업실로 향했다.
*
4월 15일 목요일.
몬스터를 막아라가 전국 영화관에서 일제히 개봉했다.
개봉과 함께 영화관을 찾은 관객은 충격에 빠졌다. 여성체 몬스터의 정체가 여주인공 설희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충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결말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반전을 선사했다.
각종 포털 사이트 영화 게시판, 인터넷 카페와 커뮤니티 게시판에 몬스터를 막아라 감상글이 쏟아졌고, 댓글이 달리면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윤상일 감독님, 2편도 빨리 찍어주세요. 제목은 ‘북으로 간 몬스터’가 적당한 듯.
┗ㅋㅋ 삼팔선 철조망을 뚫고 탈출했으니 평양을 박살내다오.
-무슨 몬스터가 북한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냐? 깬다 깨.
┗영화는 제대로 봤냐? 바이러스에 완전하게 침식되기 전 인간성이 남아 있을 때 살육하기 싫어서 북으로 갔구먼.
-긴말 안 한다. 영화관 가서 봐라. 돈 안 아깝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가 아닌데 재밌게 봤어요.
-민설희. 악당검사 때도 악역으로 나오더니 이번엔 몬스터야. 어쨌든 빌런 캐릭터는 잘 소화하네.
-두 시간 십여 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했다. 특수효과 티도 안 나고, 역대급 액션이다. 2편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윤상일 감독 실수했다. 헐크처럼 옷이 찢어지면 대박인데? 아마도 관객 수가 10%는 늘어날걸.
┗ㅋㅋㅋ
-몬스터가 북으로 탈출? 아, 개념 없는 이야기. 액션도 할리우드 액션에 한참 멀었고. 이게 무슨 한국형 블록버스터이란 말인가! 그다지 볼 거 없음.
-몬스터가 북한으로 간 건 뭐냐? 2편은 평양에서 찍을 건가?
┗크크. 추격을 피해 북으로 간 게 뭐가 어때서? 북한이 숨긴 좋잖아? 나는 멋진 결말이라고 봐.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단정 지을 수 없지 않냐? 비무장지대에 숨어 있다 다시 내려올 수도 있으니까? 사고 수준이 어째 다들 초딩들이냐?
┗맞아. 비무장지대가 얼마나 넓은데. 완전히 민설희와 동화해서 변이 완료하고 내려오면 된다.
┗인간의 모습을 한 완전체 몬스터면 슈퍼몬스터인데 2편을 찍을 이야깃거리는 있을까?
┗ㅎㅎ 베놈처럼 빌런 히어로물이 되는 거겠지. 플롯이 탄탄하니까 그것도 괜찮지 않겠어?
인터넷상의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몬스터로 변이하는 설희와 설희가 군경의 추격을 피해 비무장지대로 들어간 결말에 대해 설왕설래 댓글 전쟁을 벌였다. 이 댓글 전쟁에 동참하기 위해 사람들은 영화관으로 향했고, 개봉 첫 주 관객 수는 이백만 명을 넘겼다.
벌써 천만 관객을 예견하는 네티즌도 다수였고, 과연 윤상일 감독의 두 번째 천만 영화가 탄생할지 네티즌의 관심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