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07회
김대풍의 질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강수가 흥미로운 눈초리로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김대풍에게 계획을 밝혔다.
“어르신, 저는 9월 초에 선암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기로 했고, 두 번째 개인전이 끝나면 곧바로 무지개출판사와 그림동화책 두세 권 출간할 예정입니다. 그림동화책 작업이 끝나면 바로 세 번째 개인전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그림 그리는 일로 스케줄이 꽉 잡혀 있군. 그게 단가?”
강수가 자세를 똑바로 하고 말했다.
“아닙니다. 올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강수의 단순한 스케줄에 흥미를 잃었는지 김대풍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중요한 일? 그게 뭔가?”
“어르신이 출국하기 전에 어르신과 주하와 저의 양가 친지를 모시고 주하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이때서야 김대풍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호오, 주하와 결혼하고 싶다? 아직 양가 상견례도 하지 않았는데 이번 달에 결혼 하겠다고?”
“그렇습니다.”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주하와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흥미가 생겼는지 김대풍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내 허락도 허락이지만 주하 아비, 어미는 만나 봤느냐?”
“아직 못 만났습니다.”
“주하 아비, 어미한테 인사도 안 했으면서 무슨 수로 한 달 안에 주하와 결혼하겠다는 건가? 자네 결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구먼.”
“죄송합니다. 어르신이 출국하면 일년 뒤에나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급한 마음에 드린 말이지 결혼을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긴 해도 내가 출국하기 전에 결혼하겠다는 것은 무리수 같구나. 나는 차치하고 주하 아비, 어미가 반대하면 어쩌려고 하느냐?”
“어렵겠지만 진실한 제 마음을 보여주면 허락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주하 부모님이 반대하면 그때는 어르신이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예. 어르신의 말을 거역하지는 못하겠지요.”
“그건 자네가 잘못 생각한 걸세. 그 애들은 날 싫어해서 오히려 내 맘대로 주하를 결혼시키려 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네.”
“그렇다면 주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결혼은 주하와 제가 하는 것이지 그 누가 대신해 줄 것이 아니니까요.”
“음.... 당장 결혼하겠다면 우리가 반대해도 주하가 자넬 선택할 수 있겠지. 하지만 가족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결혼은 그리 행복하지 못할 걸세. 더욱이 가족의 냉대와 외면을 받으면 주하는 심적인 부담이 클 것이야. 결혼한 두 사람과 양가의 가족 모두 행복해야 진정한 결혼 아니겠나?”
맞는 말이었다. 결혼은 두 남녀의 결합이지만 양가의 결합이기도 했다. 강수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의외로 강수가 순순히 수긍하자 김대풍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제안 하나 하지.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자네와 주하의 결혼을 승낙함은 물론이고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네.”
‘무슨 제안을 하시려고?’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제안이라는 말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 분명했지만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해보겠습니다.”
“좋아. 자네 개인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이 6천만 원이더군. 맞나?”
“예. 무언의 약속이 6천만 원에 팔렸습니다.”
“그래서 자네에게 그림 가격에 대해 제안하려고 하네. 내가 해외여행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자네 그림 한 점을 1억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하게.”
강수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네? 그림 한 점에 1억이요!”
“그래. 1억일세. 단, 친인척이나 지인 구매는 안 되고 컬렉터나 미술관, 기업같이 자네와 관련 없는 곳에서 구매해야 한다네. 그 대신 그림 크기는 상관하지 않겠네. 자넨 이미 200호를 6천만 원에 판매했으니 그림을 좀 더 크게 그리면 1억은 받을 수 있겠지. 그렇지 않은가?”
김대풍이 무언의 약속 판매가를 들먹이며 별 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그건....”
그림 한 점에 1억은 한국 화단에서 최고 클래스에 위치한 작가나 가능한 그림값이다.
무언의 약속 같은 경우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으로 6천만 원에 책정했지만, 보통 캔버스 사이즈가 커지면 호당 가격이 낮아져서 중견작가라면 4, 5천만 원 내외에서 책정할 것이고, 신인화가는 1, 2천만 원이 고작이다. 무작정 그림을 크게 그린다고 해서 그림값이 비례해서 높아지지 않는 것이다.
그림의 가치는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예술성이 녹아 있어야 가치가 올라간다. 물론 작가의 인기와 명성도 그림 가격을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다. 이 외에도 다양한 요인인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그림은 물론 예술품의 가치가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신인화가 강수에게 1년 안에 작품 당 1억에 팔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그림값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대풍은 미술계의 이 같은 흐름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김대풍은 이강수의 그림이 예사롭지 않고, 생각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인화가의 그림이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최소 수년, 길게는 십여 년의 시간이 걸린다. 결코 1, 2년 사이에 유명작가 반열에 올라 그림 한 점에 1억씩 팔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분야나 천재가 존재하듯 예외는 있다. 드물지만 하루아침에 스타 대접 받는 화가나 예술가는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작가 최소영은 청바지로 작품을 창작했는데 참신하고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인정받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호평을 받으며 성공한 케이스다.
해외 유학 가서 현지에서 성공을 거둔 경우도 있다. 고재권 화가는 호주에서, 서수경 화가는 독일로 유학 가 성공해 국제적인 작가로 성장했다.
이강수도 어느 날 갑자기 스타 작가가 되지 말란 법은 없지만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김대풍은 자기가 이강수와 손녀 주하를 갈라놓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혼을 반대해도 결국 결혼할 것을 안다.
이강수는 재능이 뛰어나고, 훤칠한 외모도 맘에 들지만 아직 무명화가라는 점이 거슬렸다. 그는 주변의 허영에 물든 속물들에게 주하가 겉만 번지르르한 무명화가와 결혼했다는 입방아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 작품에 1억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를 제시해서 결혼을 자연스럽게 뒤로 미룬 것이다.
김대풍과 강수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대풍은 어쩔 것이냐, 자신 있느냐는 물음으로 강수는 비현실적인 제안 아니냐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림 한 점을 1억에 팔라고? 1년 안에 가능할까?’
200호를 6천만 원에 판 것이 사실이었고,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면 그림값을 올릴 수 있는 여지가 있기는 하다. 김대풍 어른이 그 점을 집어서 얘기했는데 구차하게 못 하겠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무언의 약속 그림값을 지적한 김대풍에게 호승심마저 일어났다.
그림 한 점을 1억에 판매하려면 실크스크린 인쇄로 원화 하나당 15점을 인쇄한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불가능하다.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불가능하고 아트페어나 경매 같은 다른 판매 루트를 모색해야겠구나.’
“알겠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도전해보겠습니다.”
“허허허.”
김대풍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평범한 사람과 뭔가 다르군. 하긴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고, 실제로 성공을 이루기 위해 꿈꾸는 것이 아닌가? 기대 하지. 주하가 기다리겠군. 이제 나가봐도 된다네.”
“예, 어르신. 편히 쉬십시오.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소파에서 일어난 강수가 김대풍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와 2층으로 올라갔다.
초조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던 주하가 발딱 일어났다.
“앗, 오빠.”
강수에게 달려간 주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는지 대뜸 물었다.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세요?”
“어르신이 5월 초에 한 일 년 정도 세계를 둘러보시겠대.”
“어? 할아버지가 세계 여행 가시는 거예요?”
강수가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왜? 농담 같아?”
“아이, 오빠아~”
주하가 강수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간지럽혔다.
“하하. 알았어. 그만해. 농담 아냐. 진짜 여행 가셔.”
“와, 할아버지가 드디어 여행 가시네. 헤헤, 1년이나 해외 여행한다니 놀랍다.
주하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리고요? 다른 말씀 없었어요?”
“앞으로 계획이 뭐냐고 물으셨어. 그래서....”
말을 끊은 강수가 마치 무언의 약속 속의 두 남녀처럼 주하의 양손을 잡고 주하와 눈을 맞추었다. 강수의 눈을 바라보는 주하는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심장이 뛰고 마음이 설레었다.
주하는 강수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를 참으면서 강수의 말을 기다렸다. 드디어 강수의 입이 열렸다.
“어르신이 5월 초에 출국하면 1년 뒤에나 입국하시잖니? 그래서 어르신이 출국하기 전에 어르신을 모시고 주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어.”
쿠쿵!
결혼하고 싶다는 단어가 천둥소리처럼 주하의 귀를 울렸다.
“아!”
탄성을 지른 주하가 서서히 확대되는 강수의 얼굴을 보며 사르르 눈을 감았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순간, 한줄기 전율이 몸을 꿰뚫었다. 머릿속에서 무수히 폭죽이 터졌고, 중력이 사라진 듯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라 허공을 떠다녔다.
머나먼 지평선처럼 아득하고, 꿈결처럼 감미롭고, 끝없는 충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발이 땅에 닿아 있다는 중력을 느끼며 주하가 눈을 떴다.
“강수오빠.”
주하가 얼굴을 붉히며 나직이 강수를 불렀다.
“주하야, 소파에 앉을래?”
“네.”
소파에 앉은 강수가 김대풍과 나눴던 얘기를 해주었다. 그림 한 점을 1억에 팔라는 김대풍의 제안은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기 때문에 얘기하지 않았다.
“그럼 할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오셔야 결혼도 할 수 있네요?”
“그래. 어르신이 귀국하면 양가 부모님, 친지 모시고 우리 결혼하자. 주하는 어때? 나와 결혼할 거지?”
“네. 내 마음엔 오빠밖에 없는 걸요.”
작은 목소리로 수줍게 대답했지만 주하는 마음 한편에서 할아버지 김대풍을 원망했다.
‘결혼식 준비하는데 한 달이 뭐가 짧다는 거야? 바보 할아버지.’
결혼식 올리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양가 부모님과 일가친지, 친구만 초청해서 한 달 안에 얼마든지 거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할아버지한테 달려가 강수오빠와 결혼시켜 달라고 조르고 싶었지만 떼쓴다고 상황이 바뀔 리 없었다.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할아버지가 미웠지만 일 년 후에 강수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뻤다.
“오빠, 저녁 차려줄 테니까 밥 먹어요.”
“그리고 보니 저녁을 못 먹었네?”
“어서 내려가요.”
주하가 강수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주하와 식당으로 내려간 강수는 한정식집에서 먹는 것 같은 푸짐한 저녁을 먹고 아파트로 돌아갔다.
*
개인전 오픈 날 전시 작품이 전부 팔려나간 이강수의 전시회는 SNS와 온라인 카페를 통해 네티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강수가 그려준 캐리커처를 자랑하며 올려놓은 초상화에 버금가는 퀄리티의 그림이 화제를 불렀고, 부럽다는 댓글과 캐리커처 사인회를 또 진행하냐는 질문이 달렸다.
네티즌의 정보력은 광범위하고 아주 빠르다.
누군가 선암갤러리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강수 화가 캐리커처 사인회 행사 소식을 댓글에 달아 놓았다.
금, 토, 일 3일 동안 오후 2시에서 3시까지 캐리커처 사인회 행사가 진행된다는 소식을 접한 네티즌이 인사동 선암갤러리를 찾아갔다.
장영봉은 2시가 되기도 전에 전시장 한쪽에 마련해 놓은 행사용 책상 앞에 줄 서있는 관람객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가한 낮에 행사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30명이나 되는 관람객이 줄을 서 있었다. 줄을 선 대부분이 고등학생이거나 20대의 젊은 층이었다.
어제 이강수가 캐리커처 그리는 속도로 볼 때 1분에 1명, 60명이 최대인원이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30명이나 줄을 섰으니 행사를 시작하면 줄은 더 빠르게 늘게 분명했다. 서비스 차원에서 마련한 행사인데 인원을 통제하지 못하면 자칫 욕먹을 수도 있었다.
‘일단 순번표를 준비해서 60명으로 제한해야겠다.’
장영봉이 스마트폰을 꺼내 사무실 직원에게 전화했다.
[예, 부장님.]
“미영 씨. 즉시 60번까지 순번표 출력해서 1층 전시장으로 가져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전시를 관람하던 사람들도 한 명씩 줄서기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장영봉은 시간을 확인했다.
‘1시 40분. 음, 이러다 시작하기도 전에 60명이 넘을지도 모르겠구나.’
잠시 후, 수수한 외모의 여직원 김미영이 순번표를 가져왔다.
“어머, 벌써 줄이 기네.”
김미영이 놀란 눈으로 책상 앞에 선 줄을 훑어보며 순번표를 장영봉에게 건넸다.
“부장님, 여기.”
“수고했어. 미영 씨는 올라가서 일 보세요.”
“예, 부장님.”
“선배님, 저 왔습니다.”
이때, 산뜻한 정장 차림의 강수가 강영봉 옆으로 다가왔다.
“아, 이 작가. 마침 잘 왔네.”
“줄이 꽤 긴데요?”
“이렇게 줄을 설 줄은 나도 몰랐네. 학생들이 많은 걸 보면 대부분 핑크티티 팬 같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순번표를 준비했네. 이 작가가 한 시간에 60명 정도 그리니까 60명으로 제한할 건데 괜찮겠지?”
“아뇨. 지금부터 그리면 15명 정도 더 그릴 수 있습니다. 75명까지 늘려주세요.”
“알겠네. 순반표를 나눠주면 시작하게.”
장영봉은 줄 앞으로 걸어갔다.
순번표를 나눠주는 일은 전시도우미를 시켜도 되지만 처음이니만큼 자기가 직접 나눠주기로 했다.
“여러분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목해주십시오.”
줄을 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일제히 장영봉을 주시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선암갤러리 디렉터 장영봉입니다. 관람객 서비스 차원에서 준비한 이강수 화가의 캐리커처 사인회 행사는 시간이 한정된 관계로 순번표를 배포하고, 순번표 순서대로 시작하겠습니다.”
“캬아!”
짝짝짝!
예정보다 빨리 행사를 시작한다는 말에 줄을 선 사람들이 손뼉 치며 환호했다.
행사용 책상에는 8절 크기의 도화지와 2B, 4B 연필, 파스텔 연필 세트 등 캐리커처를 그리기 위한 도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려요.”
강수가 순번표 1번을 내민 순박한 외모의 여학생에게 미소 띤 얼굴로 친근하게 말했다.
“잠시 날 바라보겠어요?”
수줍음을 타며 자신을 바라보는 여학생을 10초간 살핀 강수는 신들린 것처럼 연필을 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사가 시작되고 관람객이 몰려드는 바람에 이날도 강수는 시간을 더 늘려야 했다. 그리고 희고 손가락이 가는, 조각처럼 아름다운 손이 마지막 순번표를 내밀었다.
순번표를 받은 강수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