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06회
펜을 잡은 강수의 손은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성숙한 여인과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앳된 소녀의 얼굴이 묘하게 어우러지며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약 50초가 지난 후, 여인과 소녀의 분위기가 어우러진 귀여운 얼굴의 성은지 캐리커처가 완성되었다.
1분 만에 그린 캐리커처였지만 성은지의 오밀조밀한 얼굴 특징과 독특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살려냈다. 공책을 받아 자기의 캐리커처를 본 성은지가 감격에 겨워하며 연신 허리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너무 예뻐요. 꼭 초상화 같아요. 고맙습니다.”
강수를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던 여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에 든 공책을 강수에게 내밀었다.
“선생님, 저도요.”
“저도 한 컷 부탁드려요.”
“선생니임~ 나도 그려주세요.”
“어?”
강수가 여학생들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알았어요. 관람객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이쪽으로 줄을 서세요. 모두 그려줄 테니까요.”
강수가 줄의 첫 번째 여학생이 내민 공책을 받았다.
이때 옆에 있던 김주하가 손가락으로 강수의 옆구리를 꼭꼭 찔렀다.
“응? 왜?”
김주하가 입구 쪽 책상을 가리켰다.
“서서 그리는 건 좀 불편하지 않아요? 저기 책상에 가서 그리는 게 어때요?”
“그게 낫겠다. 여러분, 저쪽 책상에서 그려줄 테니까 저리로 가죠,”
“네에~”
강수는 출입문에 놓여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열댓 명의 여학생들이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줄을 맞춰 강수를 따라갔다. 책상에 앉은 강수는 본격적으로 캐리커처를 그려주기 시작했다.
강수가 사인과 캐리커처를 그리기 시작하자 주변에서 관람하던 사람들도 여학생들 뒤에 슬그머니 줄을 섰고, 줄은 금방 길게 늘어났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핸디캠에 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근처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던 김도진 피디는 여학생들이 이강수에게 다가가 소란피우는 모습에 흥미를 느끼고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핸디캠을 꺼내 녹화 버튼을 누른 것이다.
갑자기 시작된 예정에 없는 캐리커처 사인회는 관람 시간이 끝나는 19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전시도우미가 다가와 관람 시간이 끝났다는 말을 해 주어서야 강수는 마지막 한 명의 캐리커처를 그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시간 삼십 분 동안 1분에 한 명씩 거의 90여 명의 캐리커처를 그렸다. 폐관 30분 전에 관람객 입장을 막아서 그나마 캐리커처 그리기를 폐관 시간에 맞춰 끝낼 수 있었다.
강수는 관람객이 몰려 정신없이 캐리커처를 그려야 했지만 자기의 그림을 보러 전시장을 찾아와 준 관람객에게 작은 선물을 줄 수 있어서 뿌듯했다.
이날, 강수와 사진을 찍거나 캐리커처를 받은 여학생 팬과 관람객들은 자기가 활동하는 커뮤니티에 캐리커처를 올렸고, 전시된 그림도 소개했다. 덕분에 각종 커뮤니티에서 이강수의 전시회가 알려진 것은 물론이고, 호기심 어린 발걸음이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주하야, 기다리느라 지루했지? 미안해. 갑자기 예정에 없는 캐리커처를 그리게 됐네.”
김주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오빠가 그리는 캐리커처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근데 강수오빠.”
“응?”
“그림을 어쩌면 그렇게 빨리 그릴 수가 있어요? 손놀림이 꼭 프로그래밍 된 기계 팔처럼 쉼 없이 움직이던데요?”
“하하. 그건 캐리커처 그리기 전에 머릿속에 사진을 찍은 것처럼 형상화를 끝내놓았거든. 주하 말처럼 컴퓨터에 프로그래밍해 놓은 거나 비슷하지. 게다가 줄도 길게 서 있어서 일초도 허비할 수 없어서 빨리 그리지 않을 수가 없었어. 평상시보다 몇 배는 빠르게 그린 것 같다.”
“와, 그랬구나.”
“이 작가, 고생했다. 팔은 괜찮은가?”
전시장 분위기를 점검할 겸 전시장에 내려왔다가 강수가 캐리커처 그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장영봉이 강수의 어깨를 다독이며 물었다.
“아, 선배님.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죠.”
“손에 무리 가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이 작가가 캐리커처 그리는 속도 보고 나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라. 놀라운 건 그런 엄청난 속도로 그린 그림 퀄리티가 캐리커처가 아니고 거의 초상화 수준이었다는 거지. 고생 많았네.”
“웬걸요. 저도 관람객에게 작은 선물을 준 것 같아 기분이 좋더라고요. 선배님, 전시장에 올 때마다 아니, 며칠 남지도 않았으니까 금, 토, 일 삼일만이라도 캐리커처 사인회 하면 어떨까요?”
“물론 캐리커처 사인회 하면 좋지만, 이 작가가 부담되지 않겠어?”
“한 시간 정도 캐리커처 그려주는 건 부담되지 않죠.”
“그럼 캐리커처 사인회를 하도록 하지. 행사는 몇 시에 할 텐가? 낮에는 좀 한가할 것 같고, 저녁은 오늘처럼 사람이 몰릴 것 같군.”
‘음, 북한산에서 바로 인사동으로 가는 것이 낫겠구나.’
북한산에서 마나회로 수련한 후 곧장 전시장에 와서 캐리커처 사인회를 하고 작업실로 가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오후 2시에서 3시까지 하죠.”
“알겠네. 플랜카드 걸어서 홍보하고, 몇 군데 온라인 매체에 3일 동안 캐리커처 사인회를 한다고 게제하지.”
“고맙습니다. 별일 없으면 저는 일이 있어 가보겠습니다.”
“그래. 폐관 시간도 지났는데 들어가야지. 수고했어.”
“예. 내일 뵙겠습니다.”
강수와 주하는 장영봉과 전시장을 정리하는 선암갤러리 직원, 전시도우미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밖 거리는 상점과 건물에 붙은 간판에서 번쩍이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불빛이 명멸했다.
강수는 냉큼 팔짱을 긴 주하에게 물었다.
“주하야, 좀 늦었는데 김대풍 어르신 뵈러 가도 될까?”
“괜찮아요. 할아버지한테 전시장에서 일이 생겨서 좀 늦는다고 전화했어요.”
“그럼 얼른 가자.”
“해영언니한테 낙원상가 옆으로 오라고 전화할게요.”
주하가 걸으며 임해영에게 전화했고, 두 사람이 낙원상가에 도착했을 때 임해영이 차를 몰고 와 크락숀을 울렸다.
차에 올라탄 주하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해영언니, 미안해용. 전시장에서 갑자기 일이 생겨서 늦었어요.”
“미안합니다. 해영 씨.”
“아니에요. 뭐가 미안해요? 그게 내 일인데요. 어디로 가죠?”
“집으로 가요.”
“네. 아가씨.”
부우우웅!
묵직한 엔진음을 토해낸 랜드로버가 육중한 차체를 뽐내며 미끄러지듯 도로 위를 달려나갔다.
주하가 슬그머니 강수 옆으로 와서 강수의 왼팔을 껴안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강수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향긋한 체향이 강수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왼팔에서 몽실몽실하고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이 찌르르하고 느껴졌다. 왼팔 뿐만 아니라 매끈한 주하의 허벅지가 다리에 밀착했다.
“흐흡, 후우-”
강수가 숨을 깊이 마시고 천천히 길게 내쉬었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심볼에 피가 몰리는 것을 감지하고 욕망을 누른 것이다.
차가 흔들리면서 주하의 몸이 강수의 몸을 리드미컬하게 자극했다. 다시 피가 하부로 몰리고 눌렀던 욕구가 꿈틀거리자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강수가 주하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이 무슨 얘길 하려고 날 불렀을까? 주하는 아니?”
머리를 강수의 어깨에 기대고 발그스름하게 상기한 얼굴을 하고 있던 주하가 고개를 들었다.
“음,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는데요.”
김주하도 할아버지가 왜 강수를 불렀는지 궁금했다.
처음엔 별내 땅 얘기를 하려고 부른 줄 알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그런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자기와 관련한 일일 수도 있었다.
‘약혼 하라는 얘기일까? 히, 그랬으면 좋겠다.’
이강수와 약혼한다는 생각만 해도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 녀석 가슴이 왜 이렇게 두근두근 뛰지?’
강수는 팔뚝에서 전해오는 팔딱팔딱 뛰는 심장의 고동을 느꼈다. 평상시보다 아주 빨리 뛰었다.
‘하긴 내 심장도 빨리 뛰긴 하니까.’
주하의 스킨십 때문에 강수의 한숨이 깊어질 때쯤 랜드로버가 한남동 주하의 집에 도착했다. 랜드로버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 정차한 후에야 주하가 아쉬운 얼굴을 하고 강수에게서 떨어졌다.
‘붙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휴우- 고문이 따로 없군.’
임해영이 없었으면 분명히 일을 치렀을 것이다. 이럴 때는 그림자처럼 주하에게 붙어 있는 임해영이 얄미웠다.
‘으음, 이러다간 결혼해서야 첫날밤 보내는 거 아닐지 몰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입에서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차에서 내려 서늘한 공기를 마신 강수는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달아오른 심볼을 식혔다.
“오빠, 피곤해요? 내가 안마해 줄까요?”
‘성난 심볼을 식히려고 스트레칭 하는데 안마를 해 준다고? 으, 속이 터지는구나.’
강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몸이 좀 찌뿌둥한 것뿐이야. 이젠 괜찮아. 어르신께 가자.”
“네.”
강수와 주하는 주차장을 나와 김대풍 서재로 향했다.
똑! 똑!
“할아버지, 저예요. 강수오빠하고 같이 왔어요.”
“들어오너라.”
서재로 들어간 강수가 책상에 앉아 있는 김대풍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어르신. 별래무양 하신지요?”
“그래. 나야 자네 덕분에 건강하지. 듣자 하니 개인전 작품이 다 팔리는 성과를 거두었더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주하야.”
“예, 할아버지.”
“너는 차 좀 가져오너라.”
“예. 할아버지는 무슨 차 갖다 드려요?”
“대추차가 좋겠다. 자네는 뭘 마시겠는가?”
“커피로 하죠.”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하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가자 김대풍이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 앉게나.”
“예, 어르신.”
강수와 김대풍이 소파에 앉았다.
김대풍은 평온한 얼굴로 강수를 바라보았고, 강수는 김대풍의 눈을 잠시 마주 보았다가 슬쩍 시선을 피해 서재를 둘러보았다. 서재 왼쪽 벽에는 자신이 그려준 주하의 초상화와 김대풍의 20대를 그린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초상화가 아주 좋아. 매일 봐도 질리지 않더군. 자네는 그림에 특출한 재능을 타고난 것이 틀림없네. 축복받은 재능이지.”
“아, 감사합니다.”
“자네의 재능이면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냈을 법도 한데 그러지 못한 게 이상한 일이지.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었는가?”
강수는 김대풍의 정확한 지적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요.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지는 않고요. 단지 작년 이맘때쯤 색의 본질에 대해 깨우침을 얻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림이 발전한 것 같습니다.”
“음, 그랬군.”
이때 문이 열리고 주하가 쟁반을 들고 실내로 들어왔다.
주하가 대추차와 커피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강수 옆에 앉자 김대풍이 주하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강수하고 할 얘기가 있으니 주하는 잠깐 나가 있거라.”
“예?”
주하가 강수와 할아버지 김대풍을 번갈아 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밖으로 나갔다.
대추차를 한 모금 음미한 김대풍이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나는 오월 초에 긴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여행이요?”
“더 나이를 먹어 거동하기 힘들기 전에 네가 얘기한 대로 일 년 정도 세계를 둘러볼게야.”
“아, 예.”
“너는 무슨 계획을 세워 놓았느냐?”
강수가 잠시 김대풍이 한 질문의 요지에 대해 염두를 굴렸다.
5월 초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세계 여행을 떠나면 1년 후에나 한국에 돌아온다는 말이었다.
여행을 가기 전에 자기 계획을 물은 이유가 무엇일까?
‘내년 5월이나 되어야 국내 들어온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강수는 요즘 들어 꽤 오랜 금욕 생활로 인한 욕구불만으로 아침마다 곤혹스럽고, 괴로운 지경에 처해 있었다. 일어나서 움직이면 욕구는 사라지고 말지만, 가끔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김대풍 어르신이 해외로 나간다면 쌓인 욕구를 자연스럽게 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대풍 어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욕구를 풀면 사나이답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강수가 주하와 사랑을 나누고자 한다면 못 할 것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김대풍에 대한 반발심, 혹은 떳떳하고 당당하게 주하를 품에 안겠다는 자존심 때문이라고 할까?
김대풍은 소파에 몸을 묻고 생각에 잠겨있는 강수를 지긋이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