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99회
오프닝 시간에 맞추지 못한 사람들이 오프닝이 끝난 후에 찾아와 전시장은 순식간에 백 명이 넘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강수는 동문 선후배와 지인 등 오십여 명의 축하 인사를 받은 후에야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사람을 피해 구석으로 간 강수는 시간을 보았다.
‘네 시 삼십 분.’
4시쯤에 도착한다는 부모님이 아직 오지 않았다.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스마트폰을 꺼낸 강수는 단축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끊기고 스마트폰에서 아버지 이전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수냐?]
“예. 아버지. 어디세요?”
[지금 가고 있다. 곧 도착할 게야.]
“제가 지금 나갈게요. 종로2가 사거리에서 내려달라고 하세요.”
[오냐, 알았다.]
강수를 찾아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두리번거리던 주하가 구석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강수를 발견하고 다가걌다.
“오빠, 구석에서 뭐 해요?”
“주하구나. 부모님이 이제야 거의 도착했대. 종로2가 사거리에서 보기로 했어. 내가 나갔다 와야지.”
“아, 어머님, 아버님이 이제 도착하셨구나.”
문득 주하가 양팔을 꼬며 말했다.
“저기, 강수오빠. 나도 같이 갈까요?”
“어? 그래. 어차피 인사드려야하니까 같이 가는 게 낫겠다. 종대한테 얘기하고 같이 나가자.”
“네.”
강수는 출입구 책상에서 팜플렛을 나눠주고, 방명록을 받는 종대에게 다가갔다.
“종대야, 부탁 하나 하자.”
“뭔데?”
“동문이나 나 찾는 손님 오면 네가 접대 좀 해라. 부모님이 오셔서 종로에 나갔다 와야 해.”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갔다 와라.”
강수는 종대에게 전시장을 부탁하고 주하와 밖으로 나왔다.
강수의 부모님을 만난다는 부담감에 주하가 긴장되는지 길을 걸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런 주하를 보며 강수가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마. 시골에서 농사짓는 분들이라 무척 소탈하셔. 어려워할 거 없어. 오히려 어머니, 아버지가 주하 보면 너무 좋아서 입이 벌어질 거야.“
“헤헤. 정말요?”
“그럼. 어쩌면 당장 결혼하라고 할지도 몰라. 작년에도 빨리 결혼하라고 성화였거든.”
주하가 볼을 살짝 붉히며 속으로 생각했다.
‘두 분께서 빨리 결혼하라고 하셨으면 좋겠다. 그럼 얼른 강수오빠랑 결혼하고 싶다고 얘기해야지.’
주하는 슬그머니 강수의 팔에 팔짱을 꼈다.
종로2가 사거리에 도착한 강수는 택시에서 내려 인도에 올라서는 부모님을 발견하고 앞으로 달려갔다.
이전일은 세로줄이 있는 옅은 하늘색 양복 안에 주황색 니트를 코디해서 입었다.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렸지만 175의 신장에 군살 없이 균형 잡힌 몸에 맞춤처럼 잘 어울렸다.
김순옥 여사는 이전일보다 덜 검었지만 기초화장만 했는지 햇볕에 탄 얼굴 피부 그대로였다. 옷차림에 신경 썼는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주황색의 치마에 체크 무늬 블라우스, 남색 가디건을 걸쳤고, 굽이 낮은 발목까지 오는 부츠를 신었다. 패셔너블한 코디였고, 커플룩이란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옷차림에 각별히 공을 들였다. 아들의 첫 번째 개인전인 만큼 시류에 뒤떨어진 옷차림으로 아들에게 민폐를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마니, 아버지!”
“오냐, 때맞춰 나왔구나.”
강수가 부모님의 옷차림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와, 엄청 세련된 커플룩이네. 보기 좋은데요.”
“험, 그래? 네 엄마랑 신경 좀 섰다.”
“근데 왜 이렇게 늦었어요?”
“응?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조금 늦었다. 오프닝은 잘했고?”
“네. 시간 맞춰서 오픈했어요.”
김순옥 여사가 강수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김주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김순옥과 눈이 마주친 주하가 얼른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머님, 아버님.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
강수가 재빨리 김주하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제가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 김주하이에요.”
강수의 평에 서 있는 김주하가 아들의 여자 친구일 것으로 감 잡고 있던 김순옥 여사가 기쁜 소식을 들은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오, 그래? 반갑구나. 김주하라고 했지?”
“예, 어머님.”
“아휴, 우리 강수가 어디서 이렇게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쁜 아가씨를 다 만났을까? 신통하네.”
“감사합니다. 어머님, 아버님하고 패션이 너무 잘 어울리세요. 패션 감각이 있으신가 봐요.”
“호호. 나이 먹어서 이렇게 입으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할까 봐 걱정했는데 괜찮다니 다행이다.”
“누가 손가락질해요. 너무너무 멋지세요.”
김주하를 소개받고 나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이전일이 강수에게 한소리 했다.
“이놈아, 여자 친구 소개하려면 조용한 장소에서 제대로 해야지 길가에서 이게 뭐여?”
이전일의 질책에 주하가 당황해서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강수오빠는 잘못 없어요. 제가 어머님, 아버님을 빨리 뵙고 싶어서 따라 나왔어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주하가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사죄하자 김순옥 여사가 이전일을 야단했다.
“그럴 수도 있지 당신은 왜 소리쳐서 애를 놀래키고 그래요. 우릴 보고 싶어서 마중 나온 게 소리 지를 일이에요.”
이전일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변명했다.
“내가 언제 주하에게 소리쳤다는 거요. 아무 생각 없는 이 녀석한테 뭐라 한 거 아니오?”
“그게 그거잖아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가에서 소란 피우는 강수 일행을 힐끔거리며 지나가자 강수가 얼른 상황을 정리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이따 카페에서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길에 서 있지 말고 전시장으로 가요.”
“험, 알았다. 어서 가자.”
더 얘기해 봐야 잔소리만 들을 것이 뻔했는지 이전일이 인사동 쪽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김순옥이 울상을 짓고 있는 김주하의 손을 꼭 쥐고 다독였다.
“아가, 괜찮아. 우릴 빨리 보고 싶어서 온 네가 무슨 잘못 있니. 난 오히려 네 마음이 고마운걸. 저이도 네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니까 언짢아하지 말아.”
김주하는 김순옥 여사의 따뜻한 위안에 불안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요, 어머님.”
“응. 난 주하처럼 어여쁜 아가씨가 강수 여자 친구라기에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어여 가자.”
“예, 어머님.”
강수가 주하 옆에서 걸으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주하야, 우리 아버지 성격이 본래 저렇게 한마디 하면 끝이야. 뒤끝이 없으시니까 걱정 마.”
“알았어요. 강수오빠.”
주하는 강수의 포근한 말과 김순옥 여사가 자기의 실수를 감싸주고 예쁘게 봐줘서
뛰는 가슴을 진정할 수 있었다.
*
연예인처럼 화려한 외모에 남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늘씬한 몸매를 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한 남성과 전시장으로 들어왔다. 황금색 줄무늬가 상의와 치마에 있는 디자인이 예사롭지 않은 투피스를 입은 여성은 모델 같은 몸매를 뽐냈다.
그녀와 같이 전시장에 들어온 남자의 키는 173센티 정도였고, 외모는 평범했다.
언뜻 보기에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 커플이었지만 남자가 입은 럭셔리한 아르마니 정장과 넥타이, 손목에 찬 고급시계가 남자의 평범한 외모를 커버해주었다. 관람객 가운데 몇몇 젊은 남자들이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전시도우미로 와인과 디저트 음식, 다과를 관리하는 서혁중도 그중 한 명이었다.
서혁중이 입안으로 웅얼거렸다.
“젠장할. 역시 남자는 경제력이 최고군. 키도 외모도 별 볼 일 없어도 저런 미인을 데리고 다니네. 남자는 성공하고 볼 일이라니까.”
사내, 양이명이 남자들의 질시어린 시선에 익숙한 듯 승자의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와인도 주나 본데요. 음식도 있고.”
“와인 한잔하실래요?”
양이명이 피식 웃었다.
“됐습니다. 이런 행사에서 제공하는 와인이 마실만 하겠습니까?”
“이런 행사에서 와인을 맛으로 마시나요? 분위기로 마시는 거죠.”
여인, 신유라가 양이명의 손을 잡아 음식이 놓인 테이블로 끌었다.
신유라의 손에 잡혀 음식이 차려진 긴 테이블 앞에 온 양이명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 비주얼이 왠지 고급스럽다?’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신유라를 가까이서 본 서혁중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여인의 미모와 몸매는 멀리서 본 것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휴, 더럽게 이쁘네. 나도 이런 여성과 사귈 수 있을까? 죽었다 깨어나도 나한테 그런 일이 생기진 않겠지?’
“와인 두 잔 주시겠어요?”
“아, 예.”
멍한 눈으로 신유라를 바라보며 잡생각에 빠져 있던 서혁중이 정신을 차리고 와인을 따라 두 사람에게 주었다.
와인 잔을 받으며 와인 병을 슬쩍 살핀 양이명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강수. 이 친구 뭐야? 새파란 초짜 화가가 첫 개인전에 알마비바를 제공해? 음식값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허세가 센 건가 아니면 집안이 먹고 살만한 건가?’
칠레의 프리미엄 와인 알마비바는 짙은 퍼플 색을 띠고 있으며 블랙커런트, 플럼 등의 풍부한 과일 향과 오크 향 등 여러 가지 부드럽고 복합적인 향이 풍부해서 가끔 찾아 마시는 가격대비 풍미가 있는 마실만 한 와인이었다.
신유라와 양이명은 와인잔을 들고 그림 앞으로 걸어갔다.
'갈림길'이란 작품 앞에서 와인 향을 음미한 후 와인을 한 모금 입안에 넣고 맛을 본 양이명은 떫지만 잘 숙성된 부드러운 탄닌 맛과 입안에 꽉 차는 농밀한 바디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봐라. 이건 또 다른 맛인데?’
와인을 맛본 신유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무슨 와인인데 맛이 이렇게 떫고 묵직해요?”
“알마비바입니다. 이 와인은 오래 숙성됐는지 맛이 더 각별하네요. 한데 첫 개인전이라더니 관람객이 생각보다 많네요? 인기가 많은 건가요 아니면 인맥이 넓은 건가요?”
“이 사람 신인화가인데도 꽤 유명해요. 핑크티티 초상화 그린 화가로 알려졌고, 벙어리 황구 죽돌이란 영화도 이강수 화가가 원작자예요.”
“벙어리 황구 죽돌이 원작자?”
“영화 원작이 그림동화책인데 이강수 화가 작품이거든요. 관객도 80만 명 정도 들어서 어린이 영화치고는 엄청나게 흥행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은 친구인가 봅니다.”
전시장을 둘러보며 대화를 나누던 신유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빨간 스티커가 많이 붙어 있어요. 네 시에 오픈했을 텐데 벌써 팔린 게 많은 데요.”
“그렇네요. 오픈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팔렸죠? 저기 제일 큰 작품도 팔렸네요.”
삐진 표정의 신유라가 양이명을 흘겨보았다.
“더 늦었으면 못 살 뻔 했네. 그러게 시간 맞춰 나오자고 했잖아요.”
양이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뭘요? 아직 살 게 있으면 됐죠.”
“한 점 사는 건데 기왕이면 마음에 드는 걸로 사고 싶단 말이에요.”
“절반 정도 남았는데 그중에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 없겠습니까? 안 팔린 작품 중에 살만한 게 없으면 그저 그런 화가일 겁니다. 그럼 굳이 살 필요 없지 않겠어요? ”
“아휴, 이럴 땐 얄미워 죽겠어. 알았어요. 빨리 사서 나가요. 아마 박 실장이 올지도 몰라요.”
“박 실장 만나면 어때서요? 월차 냈잖아요.”
“박 실장 만나면 사내 소문날 게 뻔하고 괜히 구설에 오른다고요.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면 기분 나쁘니까 그렇죠.”
“그럼 얼른 하나 고르세요.”
신유라는 작품 감상은 미루고 구매할 그림을 살피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