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98화 (98/197)

# 98

그림 그리는 마법사 - 98회

임해영이 탕비실 전자레인지로 덥혀온 소불고기를 서혁중과 고원철이 탐욕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와, 냄새 죽인다. 고맙습니다. 해영누님.”

임해영이 표정 변화 없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주하 아가씨가 산 거예요. 나야 전자렌지에 돌리는 것뿐인데 나한테 고마워할 건 없어요.”

“형수님한텐 항상 고맙죠. 해영누님이 따뜻하게 덥혀주니 감사한거구요. 그렇지 않냐, 원철아?”

“그럼. 두말하면 잔소리지.”

고원철이 코를 벌름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잘 먹겠습니다.”

식욕을 자극하는 소불고기의 냄새와 탁자 위에 차려진 음식의 비주얼을 더 참지 못하겠는지 서혁중과 고원철이 합창하고 행복에 겨운 얼굴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으아, 살살 녹는다. 최곱니다. 형수님!”

소불고기 맛이 최고라는지 김주하가 최고라는지 아니면 둘 다 최고라는지 묘한 어법으로 말하며 서혁중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고원철이 질 수 없다는 듯이 양손 엄지를 세웠다.

“이렇게 맛있는 불고기는 처음 먹어봅니다. 죽입니다. 형수님!”

“호호. 맛있다니 다행이다. 많이 먹고 힘내세요.”

서혁중이 소불고기를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옙, 형수님! 많이 먹고 열심히 작업하겠습니다.”

김주하가 일회용 접시에 불고기를 덜어서 강수 앞에 놓았다.

“오빠도 드세요.”

“그래. 잘 먹을게.”

한 술 든 강수가 주하에게 식사를 권했다.

“주하는 왜 안 먹어? 같이 먹어야지.”

흐뭇한 얼굴로 강수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주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저를 들었다.

서혁중과 고원철이 양껏 먹었는지 배를 두들길 때쯤 뭔가 생각났는지 주하가 강수에게 물었다.

“참, 오빠. 전시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준비는 다 했어요?”

“응, 전시 계획은 다 짜놨어.”

“그래요?”

주하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본 강수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후후, 실은 내가 준비할 게 거의 없어. 선암갤러리에서 다 해주거든. 난 전시 오픈 전날 디피랑 방문자 접대용 다과만 조금 준비하면 돼.”

“다과요? 오프닝 리셉션 안 해요?”

“사람이 얼마나 온다고 거창하게 리셉션을 해? 음료수하고 다과면 충분하지 않겠어?”

만족스러운 얼굴로 불룩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고 있던 서혁중이 끼어들었다.

“거창하게 할 건 없지만 조촐하게라도 리셉션 하면 좋죠. 파티 분위기도 나고. 그렇지 않냐, 원철아?”

“좋긴 한데 와인도 준비해야 하고, 음식도 전문업체가 만들어 와야 하니까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드는 게 부담이지.”

서혁중이 주하를 슬쩍 바라보았다.

주하가 서혁중의 눈짓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오빠는 디피하려면 바쁘잖아요. 오프닝 음식은 내가 준비하면 안 돼요? 오빠가 말한 대로 단출하게 준비할게요.”

“주하가?”

“예. 오빠가 오프닝 음식 같은 사소한 거로 시간 뺏기느니 그런 건 내가 준비하는 게 낫잖아요.”

“주하가 도와주면 일 하나 주니까 고맙지. 한데 맨날 주하한테 도움만 받고. 그럼 미안한데.”

“뭐가 미안해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오프닝 음식은 제가 준비하는 거예요?”

“그럼 오프닝 음식은 주하한테 부탁할게. 그 대신 간단하게 해야 해?”

“헤헤. 알았어요.”

주하는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할지 감을 잡았다.

‘강수오빠는 거창하고 번잡한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음식을 조금만 준비하는 대신 고급으로 주문해야지. 와인도 마실 만한 거로 50병 정도 준비하고. 음식은 채빈이네 레스토랑에 부탁하자.’

이채빈은 주하의 대학교 단짝 친구다. 오너 셰프인 이채빈의 아버지가 서초동에서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와인과 어울리는 디저트용 음식을 주문하면 맛과 비주얼은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

4월 5일 월요일.

강수의 첫 번째 개인전 오픈 이틀 전이다.

강수와 두 후배는 25점의 작품을 트레이싱지와 완충재인 에어캡으로 정성 들여 포장하고 있었다.

우웅! 우웅!

강수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김종대의 전화였다.

“종대구나.”

[그래. 강수야, 내일 디피해야지? 작품 포장은 끝났냐?]

“그렇지 않아도 지금 포장하고 있다.”

[작품이 커서 혼자 포장하려면 손이 많이 가지 않냐? 가서 도와줄까?]

“괜찮아. 혁중이하고 원철이가 도와주고 있어서 오래 안 걸려.”

[혁중이, 원철이? 걔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네 작품 포장을 도와주고 있냐?]

강수는 두 번째 개인전 작품을 팝아트 양식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다.

“얘들이 내 작업을 도와주고 있거든.”

[어? 무슨 작업을 하길래 걔들이 네 작업을 도와주냐?]

“하하. 얘들이 색깔 감각이 좋잖아. 물감칠 좀 해 달라고 불렀지. 하여튼 전화로 얘기하기엔 길어지니까 내일모레 전시장에서 얘기해줄게.”

[알았다. 참, 강수야. 너 '몬스터를 막아라' 개봉하면 보러 갈 거냐?]

“당연히 가야지.”

[주하 씨랑?]

“그래. 같이 가려고 하는데?”

[주하 씨한테 설희 씨가 전 애인인 건 말했고?]

“그건... 얘기 안 했는데.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어째 그럴 것 같더라.]

“왜? 기분 나쁠까?”

[설희 씨가 전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평생 모르면 상관없겠지만 세상일이 그렇든? 전 애인이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아무 말 없이 보러 갔다는 걸 주하 씨가 나중에 알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별 것 아닌 일로 오해 살 수 있으니까 영화 보러 갈 거면 사실을 미리 얘기해줘라.]

“음, 생각해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 입으로,,,,”

문득 강수가 고개를 돌려 미니 부스 옆에서 작품을 포장하고 있는 고원철과 서혁중을 바라보았다.

‘혁중이 저 녀석은 입이 가벼운 놈이라 잘못하면 떠들어댈 수가 있지?’

강수가 작업실 구석으로 가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설희가 전 애인이었다고 밝히고 영화 보러 가는 것도 우습지 않냐?”

[영화 개봉하려면 시간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알려줄 기회를 만들어서 얘기하면 되지 않겠냐?]

“알았어. 네 말대로 괜히 오해 살 필요 없으니까 영화는 나중에 천천히 봐야겠다. 조언해줘서 고맙다.”

[알았으면 됐어. 오프닝에서 보자.]

“그래. 들어가.”

전화를 끊은 강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하 입장은 생각도 안 하다니. 나도 어지간히 무디구나. 종대 아니었으면 실수할 뻔했네. 다행이다.’

다시는 설희 볼일이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종대 말처럼 앞날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사소한 것일지 몰라도 주하가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도 있었다.

*

4월 7일 오후 4시.

선암갤러리 1층 전시장에는 70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30, 40대가 많았으나 개중에는 20대와 10대도 보였다.

중앙 단상에서 이강수의 개인전을 축하하는 선암갤러리 관장 조창석의 축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 이강수 화가의 독특하며 놀랍고 경이로운 색채 감각을 뭐라고 말로는 형용하기 어렵군요. 여러분은 제 말이 의례적인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오감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강수 화가의 멋진 작품을 관람해 보시기 바랍니다.”

와아-

짝! 짝! 짝!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가 전시장을 가득 울려 퍼졌다.

이강수, 조창석, 최이석 등 세 명이 개막 테이프를 가위로 끊었고, 전시장이 오픈되었다. 강수의 개인전 ‘서울의 삶, 그 인상’ 전이 드디어 선암갤러리에서 오픈한 것이다.

관람객이 다투어 그림 앞으로 몰려갔다.

김주하는 그 누구보다 빨리 선암갤러리 관계자로 보이는 정장을 입고 가슴에 명찰을 단 30대의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작품을 구매하려면 누구에게 말해야 하죠?”

“제가 담당입니다만.”

“그럴 것 같았어요. 무언의 약속을 구입하고 싶어요.”

한껏 부푼 기대를 안고 오프닝을 지켜보던 장영봉은 번개 불에 콩 구워 먹을 것처럼 빠른 구매자의 등장에 깜짝 놀라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성과 전시 공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심플하고 세련된 고급스러운 투피스 정장을 입은 눈부신 미모의 여성은 전시장으로 한 걸음도 떼지 않았다. 작품은 관람하지 않고 구매 의사부터 밝힌 것이다. 팜플렛에 소개된 작품을 보고 구매할 수는 있지만 그런 일은 유명작가에게도 드문 경우였다.

더구나 무언의 약속은 전시 작품 가운데 가장 비싼 6천만 원이다. 6천만 원이 아깝지 않은 뛰어난 작품은 분명했지만 가격이 상당히 비싸서 과연 팔릴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장영봉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질문했다.

“손님, 그림을 보지도 않고 무언의 약속을 구매하시려는 건가요?”

“이미 봤어요. 그것보다 대금은 카드로 결제하면 되죠?”

‘이미 봤다고? 팜플렛의 사진을 봤다는 소린가?’

결제를 하겠다는 말에 장영봉은 의문을 뒤로하고 대답했다.

“카드로 결제 가능합니다. 한데 작품 가격은 아십니까? 육천만 원입니다만.”

김주하가 실소를 지었다.

“풋, 물론 알고 있어요. 가격도 모르고 그림을 구입하겠어요?”

“아, 예. 카드 결제는 사무실에서 하면 됩니다. 올라가실까요?”

“그러죠.”

장영봉은 3층 사무실로 올라가며 흥분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오픈하자마자 가장 비싼 그림에 빨간 딱지를 붙인다. 가장 비싼 무언의 약속이 팔린 것은 컬렉터의 관심을 끌 것이고, 어쩌면 경쟁적으로 작품이 팔려나갈 수도 있었다.

‘고작해야 스물 두셋으로 보이는데 6천만 원짜리 그림을 구매한다고?’

생각할 것도 없이 상류층 출신이 분명했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월급쟁이가 6천만 원짜리 그림을 구입할 수는 없다.

‘설마 이강수와 무슨 관계있는 여성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간 장영봉은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지긋이 억눌렀다. 고객에게 속물적인 모습을 보이면 신뢰가 떨어지는 한낱 장사꾼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사무실에서 구매계약서를 작성한 후 카드로 6천만 원을 결제하고 나서야 장영봉은 무언의 약속이 판매되었음을 실감했다.

“감사합니다. 카드 여기 있습니다.”

“수고하세요.”

김주하라는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에서 나갔다.

무언의 약속을 구매한 김주하의 뒷모습을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바라보던 장영봉은 빨간 스티커를 챙겨서 전시장으로 내려갔다.

장영봉은 무언의 약속 앞에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약속은 25점의 전시 작품 가운데 메인 작품이니만큼 집중적인 감상이 가능하도록 하나의 벽면을 전부 할애해서 전시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관람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명판 앞으로 간 장영봉은 작품이 팔렸음을 알리는 빨간 스티커를 붙였다.

명판에 빨간 스티커가 붙자 누군가 탄성을 질렀다.

“우와, 무언의 약속이 팔렸다!”

“뭐야! 오픈 10분 만에 팔린 거야?”

6천만 원이나 하는 무언의 약속 명판 위에 빨간 스티커가 붙자 주위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오픈하자마자 팔리다니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어?”

“팔릴만한 작품인데 뭘. 누군지 몰라도 안목이 뛰어나군.”

“누가 샀지?”

관람객이 저마다 놀랍다는 듯이 한 마디씩 떠들었다. 장영봉은 주위에 모여있는 관람객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 가볍게 웃었다.

‘후후, 나도 놀랐는데 다들 황당하겠지?’

빨간 스티커를 붙이고 돌아가려는 장영봉 앞에 당황한 표정의 중년 사내가 다가왔다.

“장 부장님, 잠깐만!”

사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려 나왔다.

“예? 아, 이필성 사장님 오셨군요.”

“무언의 약속은 내가 사고 싶었는데 정말 팔린 겁니까?”

“예. 보시다시피 팔렸습니다.”

“아니, 언제 오픈했다고 벌써 팔릴 수 있지요? 대체 누가 산겁니까?”

“죄송합니다. 누가 샀는지는 알려드릴 수는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해본 소리지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었다.

이필성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의 약속은 자신의 평가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AA급, 아니 최종적으로 AAA급 레벨로 판정을 내렸다.

처음 무언의 약속을 보았을 때는 과도한 화이트의 사용에 의문이 들어 A급 판정을 내렸다. 좀 더 살펴본 후에는 두 남녀의 풍부한 표정과 서로 마주 보는 눈빛에 내재한 의미가 화이트 색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는 판단이 섰고, AA급으로 격상했다.

200호 크기의 작품으로 AA급 레벨의 작품성을 담아낼 수 있는 한국의 작가는 드물다. 캔버스의 크기가 큰 만큼 드넓은 공간 안에 독창적인 구도와 작품의 의도를 구현하는 채색, 예술성, 작가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그려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이 올바로 판정했는지 무언의 약속을 진지하게 감상하던 이필성은 갑자기 크게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놀랍게도 어느 순간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은 환상을 겪은 것이다.

이필성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AAA급이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당장 사야 한다.’

자신의 기준으로 AAA급 레벨은 십억 이상의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을 놓치면 잠도 잘 수 없을 것이다.

이필성이 흥분해서 자리를 뜨려고 할 때 장영봉이 빨간 스티커를 가져와 명판에 붙인 것이다.

절망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쉰 이필성이 자신도 모르게 넋두리처럼 한탄했다.

“휴우-- 눈앞에서 AAA급을 놓치다니 망했군. 망했어.”

“예? 무슨 말씀인지요?”

“아, 아닙니다. 혼잣말입니다. 그보다 ‘갈림길’, ‘거미와의 식사’, ‘지는 해와 한강 철교 사이’ 이렇게 세 작품을 구입하죠. 세 작품은 안 팔렸겠죠?”

“예?”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장영봉이 얼른 대답했다.

“아직 안 팔렸습니다. 사무실로 가서 계약서 작성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가시죠.”

이필성은 눈앞에서 AAA급을 놓쳤다는 패배감에 젖어 어깨가 축 처져서 장영봉을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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