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97화 (97/197)

# 9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97회

강수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옆 작업실로 갔다.

두 후배는 각자의 이젤 앞에서 작업지시서에 적힌 내용대로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군마를 채색하고 있었다. 작업실 한쪽 구석에는 합판으로 만들다 만 제판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미완성 제판기를 힐끗 쳐다본 강수가 실소를 짓고 말았다.

강수는 두 후배와 제판기를 제작하다 포기했다.

100호짜리 실크스크린 제판기를 수제 제작하기에는 전문성이 부족했다. 형광등을 너무 많이 설치해야 했고, 감광 유액을 고르게 바르고 굳히려면 암실까지 필요했다. 화장실에서 감광 유액을 씻어내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강수는 15장의 군마를 실크스크린 전문 업체에서 1도 인쇄하여 가져왔다. 군마 15장을 인쇄한 후 원본 필름은 폐기했다.

실크스크린 제판기를 제작하다 실패한 강수는 현재의 작업실에서 대형작업을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장은 그리 불편하지 않지만 규모 있는 작업을 하려면 공장식 작업실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일지 미정이지만 때가 되면 공장식 작업실로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무지개출판사 강승호 팀장이었다. 강수는 전화를 받았다.

“이강숩니다.”

스마트폰에서 쾌활한 웃음과 함께 활기 넘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 이 작가님, 별일 없으시죠?]

“예.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시끄러운 소리가 여기까지 나네요. 인쇄소인가 보죠?”

[그렇습니다. 공주를 구해줘 인쇄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귀염둥이 죽돌이도 10쇄 인쇄 들어갑니다. 공주를 구해줘는 초판 3천 부, 죽돌이는 7천 부 인쇄합니다. 만 부에 대한 인세는 오늘 중으로 입금될 겁니다.]

“만 부나요? 항상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죽돌이는 증쇄가 빠른데요? 9쇄 인세를 얼마 전에 받았는데 벌써 10쇄 인세네요. 영화 때문인가요?”

[하하. 맞습니다. 죽돌이는 영화가 흥행하면서 판매 속도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부수도 7천 부로 늘린 겁니다. 영화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이 작가님. 오늘까지 벙어리 황구 죽돌이 관객 수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아뇨. 한 열흘 전에 손익분기점 돌파했다는 하 감독 전화는 받았습니다. 상영관도 늘었다고 들었습니다.”

[수민 씨가 그러는데 오늘 70만 돌파했다고 합니다. 예매율은 떨어졌지만 10위 권을 지키고 있어서 80만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고 합니다.]

“전수민 씨가요?”

[영화 흥행에 우리 팀원들이 한몫했을 겁니다. 전수민 씨하고 허상배가 각종 사이트에 영화 평점 만점 주고, 감상평 써서 올리고, 댓글 사정없이 달고. 하여튼 퇴근해서 영화 홍보하는데 굉장히 열심히 했거든요.]

‘두 사람이 영화 홍보를 열심히 했다고?’

의문이 들었으나 이유를 금방 캐치할 수 있었다. 벙어리 황구 죽돌이를 통해서 얻은 이익의 10%를 편집기획팀에 준다고 했다. 영화에 투자한 5천 가운데 10%는 편집기획팀 몫인 것이다.

“하하. 그랬군요.”

[하하. 그리고 원작자인 이 작가님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급상승하고 있다며 신가은 씨가 신나합니다.]

“신가은 씨는 또 왜 신나하죠?”

[이 작가님이 유명해지면 공주를 구해줘 판매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다들 보너스 챙기려고 열심입니다.]

강수가 멋쩍게 웃었다.

“하하. 제가 유명해지는 거 하고 책 판매량하곤 별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문득 강수는 강 팀장이 공주를 구해줘의 판매 성적을 어느 정도 예상하는지 궁금해졌다.

그것은 자신이 우려했던 점이기도 했다.

“강 팀장님, 이번 공주를 구해줘는 판매가 신통하지 않을 것 같은데 강 팀장님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네?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직원을 대상으로 모니터링한 결과 선호지수가 높았습니다. 우리는 공주를 구해줘도 히트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어쨌든 잘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참, 이 작가님 개인전 오픈이 얼마 안 남았죠?]

“예. 일주일 정도 남았네요.”

[전시장에 작품 구경하러 가겠습니다. 그때 뵙죠.]

전화를 끊은 강수는 전시회가 코앞에 닥쳤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보니 전시회 오픈이 일주일 남았구나.’

작품 디스플레이는 전시 전날, 화요일에 하면 된다. 이미 이삿짐센터에 연락해서 화요일에 1t 탑차를 예약해 놓았다.

‘개막 리셉션은 할 것 없고, 간단하게 음료수하고 다과 정도 준비하면 되겠지? 근데 몇 작품이나 팔릴까?’

아트페어 상하이에서는 출품작이 전부 팔렸지만, 고작 5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번 개인전은 전시작이 25점이나 되고, 작품 크기가 커서 가격은 상하이보다 거의 두 배나 된다. 가장 작은 50호만 해도 1300만 원이다. 직장인은 사겠다는 엄두조차 내지 못할 테고 결국 컬렉터가 주 고객이다.

‘그건 그렇고. 영화 관객 70만을 돌파했다고? 손익분기점의 두 배가 넘었구나.’

단순하게 계산해도 돌려받을 투자금과 이익이 1억을 넘었다.

‘후후, 대박이군!’

하상덕 감독의 경력과 열의를 믿고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을 하고 투자했다. 투자금만 회수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1억 이상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대박이 아닐 수 없었다.

강수가 혼자서 실실 웃는 모습을 본 서혁중이 강수에게 물었다.

“선배님, 무슨 소식인데 그렇게 즐거워합니까? 손익분기점 얘기하는 걸 보니 무슨 영화에 투자라도 했나요?”

“어? 하하. 벙어리황구 죽돌이에 투자 좀 했지.”

“아, 맞다. 선배님이 원작자라고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 영화에 투자까지 했군요?”

“저예산 영화라 별로 기대하진 않았는데 70만 명 돌파했다고 하더라. 그 정도면 흥행에 성공한 거지.”

“70만이면 손익분기점은 한참 넘었을 텐데 축하합니다.”

“나중에 수익금 배당받으면 근사하게 한 턱 쏘지.”

“하하. 감사합니다. 그 말 잊으면 안 됩니다. 참, 오늘 형수님 오겠죠?”

강수가 미간을 좁혔다.

김주하가 이틀에 한 번꼴로 저녁을 가져왔다. 고원철과 서혁중은 두 사람 사이를 눈치채고 장난삼아 김주하를 형수님이라고 불렀다. 형수 호칭을 들은 김주하는 뛸 듯이 좋아했다. 주하는 다음 저녁 식사부터 5인분을 가져왔다. 밖에서 사 먹는 음식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 식단의 저녁 식사를 맛본 고인철과 서혁중은 김주하에게 아예 형수라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쓰면서 갖은 아부를 떨었다.

“야,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자꾸 형수라고 부를래?”

“어? 주하 아가씨하고 결혼하지 않을 겁니까?”

“결혼이 내 뜻대로 되는 거냐? 아직 집안 어르신끼리 상견례도 못했거든.”

“에이, 쌍방 당사자가 좋으면 된 거죠. 양가 어르신에겐 기회 봐서 인사드리면 되고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

어느새 옆으로 온 고원철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선배님, 형수님 절대 놓치지 마세요. 주하 아가씨야말로 삼박자가 완벽하지 않습니까?”

“삼박자?”

“얼굴 예쁘고, 마음씨 곱지. 거기다 갑부집 따님 아닙니까? 삼박자가 완벽한 형수님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겁니다.”

“참나 별걱정을 다 하네. 연애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작업이나 하지?”

“옛, 작업해야죠.”

서혁중과 고원철이 작업 중인 캔버스로 걸어가며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오늘은 김주하가 저녁 식사를 가져오는 날이었다. 김주하가 준비해 온 음식은 시켜 먹거나 나가서 사 먹는 음식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강수선배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부럽다, 부러워.’

김주하가 싸 온 푸짐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는 것이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경호원을 쓸 정도의 갑부집 딸과 사귀고 있는 이강수가 너무나 부러웠다.

둘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강수가 이름을 부르라고 해도 꼬박꼬박 형수 호칭을 쓰는 두 후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하 부모님이야 각자 살림 차려서 살고 있고, 김대풍 어르신이 키우다시피 했으니 허락받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김대풍 어르신께 허락받는 게 쉽지 않단 말이지.’

김대풍 어르신은 경호까지 고용해서 주하를 애지중지 키웠다. 작년에 해외여행 건으로 미움을 받은 이후로 두 번 찾아가 인사했으나 볼 때마다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냉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게 보지도 않았다.

‘결혼은 시기상조고, 나도 작업해 볼까?’

결혼은 아직 여유 있다고 생각한 강수는 자신의 이젤 앞으로 갔다.

째깍! 째깍!

벽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개울에 흐르는 물소리처럼 리드미컬하게 작업실을 채우고 있었다.

강수의 작업실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하지만 실내에는 강수를 비롯해 고원철 서혁중이 각자의 캔버스 앞에서 똑같은 그림, 군마를 각각 다른 색깔로 채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꼬르륵!

서혁중의 배에서 빈 배를 채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때가 된 것 같은데?’

서혁중이 습관처럼 벽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6시 45분.

‘흐흐. 곧 주하 아가씨가 맛있는 저녁을 들고 오겠구나.’

꿀꺽!

생각만 해도 입안에서 저절로 침이 고여 목으로 넘어갔다.

서혁중의 고개가 강수로 향했다.

‘으으, 지독한 선배. 저긴 꼭 딴 세상 같아. 저기 침범하면 큰일 날 것만 같단 말이지.’

서혁중은 강수의 집중력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캔버스에 붓질한지 벌써 5시간이다. 이강수는 작업 시작하면 면벽수도 하는 스님처럼 꼼짝하지 않고 채색만 한다.

‘저렇게 그림에 빠져야 작품이 나오는 건가? 저런 점은 본받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단 말이야.’

이강수의 작업 모습을 보고 자신도 집중적으로 작업하고 있으나 문자나 전화, 화장실 등 사소한 것들로 집중력이 깨지곤 했다.

‘앞으로 작업할 땐 스마트폰부터 매너모드로 해놔야겠다.’

강수를 바라보며 염두를 굴리던 서혁중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휴, 집중력이 좋긴 한데 사람이 쉬면서 작업도 해야지 저러다 쓰러질 수도 있잖아? 그럼 꿀 알바도 끝장나는 거고! 그럼 안 되는데.’

삑삑삑삑!

디지털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서혁중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서혁중의 고개가 자동으로 작업실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연예인 못지않은 미모가 빛나는 김주하와 임해영이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서혁중이 반색해서 튀어가 쇼핑백을 받았다.

“형수님, 해영누님 어서 오세요.”

“어머, 고마워요.”

“고마운 건 우리죠. 매번 이렇게 맛있는 저녁을 얻어먹는걸요. 그렇지 않냐? 원철아.”

어느새 고원철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럼. 두말하면 잔소리지. 형수님, 감사합니다.”

서혁중과 고원철이 형수라고 불러대자 기분 좋은지 김주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두 분도 강수오빠 도와주느라 고생이 많네요.”

서혁중이 고개를 내저으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우린 음료수도 마시고 쉬면서 작업하는데 무슨 고생을 해요. 고생은 강수 선배가 하죠. 보세요. 5시간 동안 캔버스 앞에서 면벽수련 하는 스님처럼 꼼짝 안 하고 있다니까요. 집중력도 좋지만 저러다 몸 상할 수도 있겠어요. 형수님이 좀 말려주세요.”

“알았어요.”

주하가 캔버스 앞에 있는 강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집중력이 흐트러진 강수가 마침 붓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주하를 보았다. 강수와 눈이 마주친 주하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강수 앞으로 토끼처럼 깡충깡충 달려갔다.

강수가 주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목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어서 와.”

강수의 따스한 손길이 주하의 목덜미를 스쳤다. 한 가닥 전율을 느낀 주하는 넓은 강수 품에 꽉 안기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어 가까스로 참았다.

주하는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강수오빠.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하세요. 5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리다 탈 나면 어떡해요?”

“어? 운동은 오전에 하니까 이정도 작업하는 건 괜찮아.”

“하여튼 중간중간 스트레칭하면서 작업하세요. 알았죠?”

“알았다. 중간에 스트레칭할게.”

강수가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주자 기분이 좋은지 헤실거렸다.

“헤헤. 팝아트 작품은 잘 돼요?”

“그럼. 원철이랑 혁중이가 도와줘서 계획대로 이틀에 한 작품씩 완성하고 있어. 주하가 저녁밥 싸 온 거야?”

“네. 한식당에서 소불고기 정식 가져왔어요. 해영언니가 금방 데울 거예요. 이제 저녁 먹어요.”

“고마워. 맛있게 잘 먹을게.”

주하는 강수와 함께 한정식 음식이 가득 차려진 탁자로 걸어가며 벽에 걸려 있는 무언의 약속을 힐끔 쳐다보았다. 200호 크기의 대작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작품, 무언의 약속을 볼 때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행복했다.

주하는 그림을 처음 본 순간 그림 속 두 남녀가 자신과 강수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작년 겨울.

온 세상이 눈에 덮이고, 설산으로 변한 북한산을 생전 처음으로 죽을 고생 하며 등산했다. 강수오빠에게 나약한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이를 악물고 눈밭을 헤치며 산에 올라갔다. 기력이 다해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강수의 마음을 확인했던 그 순간, 그 아득하고 황홀했던 순간을 그린 작품이 분명했다. 자기 생각이 틀릴 수도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무언의 약속을 보고 있으면 북한산에서 받았던 느낌이 되살아났고,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벅찬 감동과 폭발할 것만 같은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죽을 때까지 그날의 감동과 희열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저 무언의 약속은 개막하자마자 사야지. 아무에게도 뺏길 수 없어.’

주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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