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96회
지하철 성신여대역 출입구에서 유행이 지난 후줄근한 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20대의 청년이 올라왔다. 청년은 173 정도의 신장에 몸은 마른 편이었다. 평범한 인상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수척했고, 살짝 그늘이 져 있었다.
강수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고원철이었다.
고원철은 이강수가 보수로 최저임금 두 배 이상 준다고 해서 튀어나왔지만, 진담인지 농담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강수의 첫 개인전이 4월 7일 오픈이다. 보름 후에 열리는 개인전에서 그림이 얼마나 팔릴지 알지도 못하는데 실크스크린 인쇄로 100호짜리 75점이나 제작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만나서 다른 얘기 하면 오랜만에 얼굴 본 셈 치지 뭐.”
그는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란 걸 파악하고 기대를 접었다.
“휴-”
헛걸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걸어가던 고원철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 혁중이구나?”
뒤에서 살이 좀 찌고 얼굴이 동그란 서혁중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백팩을 맨 서혁중은 살이 찐 데다 고원철보다 신장이 3, 4센티 정도 커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니 체격 차이가 많이 났다.
“긴가아닌가 했는데 원철이 맞구나.”
“네가 돈암동엔 웬일이냐?”
“강수선배가 보자고 해서 왔지.”
“너도? 나도 강수선배 만나기로 했는데. 혹시 실크스크린 작업 도와 달라 그러던?”
“맞아. 너도?”
고원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면서 헛걸음하는 건 아닐까 했는데 너까지 부른 걸 보면 정말 작업할 건가 보다.”
“하하. 그래? 강수선배가 실없이 장난치는 사람은 아니지.”
“근데 일러스트 하던 강수선배가 어떻게 갑자기 회화를 그리지?”
“그게 뭐 어때서? 요즘 능력만 되면 조각, 설치, 사진, 회화 가리지 않고 다 하잖아.”
“일러스트로 돈 벌다 돈 안 되는 회화하기 쉽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다.”
“너 핑크티티 초상화 안 봤구나.”
“핑크티티 초상화?”
“그래. 핑크티티 초상화 봤으면 그런 말 안 했을 텐데. 다 왔다. 저 건물이다.”
고원철과 서혁중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위잉-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저속으로 올라가 5층에 도착했다.
“507호지.”
두 사람은 5층에서 내려 7호 쪽으로 걸어갔다.
서혁중이 천장과 바닥, 좌우를 살피더니 말했다.
“원철아, 건물이 의외로 깨끗하다. 작업실이 생각보다 번듯하겠다. 임대료도 장난 아니겠어.”
고원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건물은 작은데 비싼 마감재를 썼는지 고급스런 분위기가 난다. 이런 데서 작업실 내려면 꽤 비쌀 텐데.”
507호 앞에서 고원철이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간편한 작업복 차림의 이강수가 환한 얼굴로 나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보내요.”
“어? 둘이 같이 왔네?”
“역 근처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랬구나. 들어와라.”
작업실로 들어간 고원철이 실내를 둘러보곤 넓은 공간에 놀라 탄성을 질렀다.
“우와! 무슨 작업실이 이렇게 넓어요?”
강수의 작업실 인테리어는 단순했지만, 방문자는 의례 깨끗한 실내와 넓은 공간에 감탄한다.
고원철과 서혁중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혁중이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강수선배님, 이 작업실 혼자 써요?”
“그래. 혼자 쓰지. 당분간 너희하고 같이 쓸 텐데 불편하진 않겠지?”
“그럼요. 이렇게 넓고 쾌적한데 뭐가 불편하겠어요.”
서혁중이 무언의 약속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개인전에 출품할 작품이군요? 으아, 엄청나게 대작이다. 한 200호쯤 되나요?”
“맞아. 200호 정도야.”
서혁중을 따라서 작품 무언의 약속으로 다가간 고원철은 눈앞에 광활한 설원이 펼쳐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두 남녀 뒤에 저 멀리 있는 배경은 분명히 눈에 뒤덮인 도시였다.
고원철은 영롱하게 빛나는 눈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남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저렇게 아름답고 순결한 여성을 만날 수만 있으면 인생이 얼마나 행복할까? 저런 여성과 살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지?’
“선배님, 저 남자 캐릭터 혹시 선배님 아닙니까? 아무리 봐도 선배님 같은데요.”
서혁중의 말에 고원철이 강수와 그림 속 인물을 번갈아보았다.
‘정말 강수선배랑 비슷하잖아? 그럼 그림 속 저 아름다운 여자 캐릭터는 자기 애인을 모델로 한 건가?’
강수가 멋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꼭 나를 모델로 해서 그린 건 아닌데 무의식중에 내 모습이 부분적으로 반영될 수는 있겠지?”
“그럼 저 여성 캐릭터도 모델이 있겠네요? 혹시 선배 애인인가요?”
서혁중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강수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글쎄? 그것보다 작품 얘기부터 하자. 차나 음료수는 탕비실에 있으니까 취향에 맞는 걸로 갖고 와라.”
“예.”
고원철과 서혁중이 커피 향이 은은히 풍기는 잔을 들고 소파로 와 강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작업은 내일부터 시작할거다. 작업 기간은 약 다섯 달 정도 잡고 있다.”
“다섯 달이요?”
“75점을 만들려면 한 달에 15점을 제작해야 하네요?”
“그렇지.”
“근데 제판기가 안 보이네요? 작업대도 없고요. 내일부터 무슨 작업을 하는 거죠?”
“그래서 너희를 부른 거야. 제판기, 작업대를 직접 만들 거다. 시중에서 파는 제판기는 너무 커서 여기에 들여놓을 수가 없거든. 우리가 제판기를 만들면 인쇄 품질이 떨어지겠지만 어차피 그 위에 물감을 입힐 거라 문제는 없어.”
서혁중이 고개를 갸웃하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100호 짜리 제판기를 직접 만들려면 보통 작업이 아닌데요?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쉽지 않겠지만 한번 만들어보고 정 안 되면 업체에 맡길 생각이야. 그것보다 너희 보수를 정하자.”
보수를 정하자는 강수의 말에 고원철과 서혁중이 기대 어린 눈으로 강수를 보았다. 최저임금의 두 배 이상을 준다고 했다. 그 말을 확인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두 가지 지급 방식을 생각해 봤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두 가지 지급 방식이요?”
강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 가지가 뭐냐 하면 첫 번째는 일당제야. 한 시부터 일곱 시까지 하루 6시간, 주 6일 근무. 시급은 삼만 원이다.”
시급 3만 원이라는 말에 고원철과 서혁중이 깜짝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강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급 3만원은 생각도 못한 금액이다.
“....”
고원철이 정신을 수습하고 재빨리 머릿속으로 보수를 계산했다.
일당은 하루 6시간 18만 원이다. 한 달, 25일 일하는 것으로 치면 450만 원.
‘으아, 월 450만 원!’
서혁중이 외치듯 말했다.
“삼만 원이요! 선배님. 시급 삼만 원 실화입니까?”
“단순노동이야 시급 적은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너희는 고급 예술가 인력인데 미술 계통 일을 하면 어딜 가든 그 정도는 받아야지.”
서혁중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일을 하든 현실은 시급 삼만 원 하고 굉장히 거리가 멀거든요. 시급 삼만 원이면 저희야 정말 감사하죠.”
“나는 삼만 원도 많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쨌든 두 번째는 러닝개런티 방식이다. 일하는 시간은 똑같고 시급 만 원에 작품이 팔리면 수익의 15%를 준다. 참고삼아 그림 가격은 오백만 원 정도 책정할 생각이다. 작품 하나 팔리면 칠십오만 원이네.”
‘러닝개런티 방식?’
고원철이 다시 머리를 굴렸다.
러닝개런티 방식은 일당 6만 원이고, 월 150만 원이다. 월 300만 원이나 차이가 나고, 다섯 달로 치면 자그마치 1800만 원이나 된다.
‘하지만 러닝개런티 방식은 작품이 팔리기만 하면 대박이다! 24점만 팔리면 일당으로 받는 보수와 같고, 그 뒤로는 한 점당 칠십오만 원씩 이득이잖아!’
“전 러닝개런티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서혁중은 고민할 필요 없다는 듯이 두 번째를 선택했다.
고원철이 놀란 얼굴로 서혁중을 힐끔 쳐다보았다.
‘헛! 이 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두 번째를 택한 거야? 막말로 10점도 안 팔릴 수 있는데.’
고원철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돈이 궁해서 일당을 선택하고 싶지만, 작품이 전부 팔릴 경우 4100만 원 정도 추가 수익을 날리게 된다. 일당을 선택하기엔 수익 차이가 너무 컸다.
강수가 고민하는 고원철을 바라보자 결국 고원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선배님, 지금 결정해야 하나요?”
결정하지 못하는 고인철을 보며 강수가 싱긋 웃었다.
“아니. 보수는 3월 말에 계산해 줄 테니까 그 전에 결정하면 돼. 그럼 내일부터 일하는 것으로 한다?”
“옛. 내일부터 나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알바도 이런 꿀 알바가 없다. 전공 분야인 그림 그리는 일이고, 오전에는 자기 작업할 시간도 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알바를 놓칠 수는 없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내일부터 출근하기로 한 고원철과 서혁중은 작업실 밖으로 나왔다.
고원철이 옆에서 싱글거리며 걷는 서혁중에게 물었다.
“야, 혁중아. 넌 무슨 배짱으로 고민도 안 하고 러닝개런티 방식을 선택했냐?”
고개를 돌려 고원철을 본 서혁중이 미소를 지우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마, 시급 만 원에 작품당 15%, 75만 원이나 받는데 뭘 고민해?”
“말이 칠십오만 원이지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작품이 오백만 원에 팔린다는 보장이 어딨어? 게다가 전시장 대관 안 하고 선암갤러리에서 초대전하면 천만 원이란 얘기잖아. 천만 원에 몇 점이나 팔리겠어? 작품 안 팔리면 손해잖아.”
“네 말이 틀린 건 아냐. 개인전 한 번도 안 한 신인화가 작품, 그것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작품이 천만 원이면 싼 건 아니지. 하지만 난 꽤 팔릴 것 같은데?”
“꽤 팔린다고? 무슨 근거로?”
“너 강수선배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 같다?”
“대학 때부터 일러스트 알바 했고, 졸업해서도 일러스트 해 왔고, 작년에 선암갤러리에서 단체전 한 번 한 건 알지. 또 뭐 있어?”
“내가 말하면 입만 아프니까 집에 가서 직접 이강수 검색해봐. 일당으로 할지 러닝개런티로 할지 결정하는 데 도움될 거다.”
고원철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든 고원철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이강수를 검색해 보기로 했다.
*
3월 31일.
북한산 강수의 수련 장소.
겨울내 헐벗고 칙칙했던 나무에 초록의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삭막하기만 했던 주위가 산뜻한 초록색으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생명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다.
해는 이미 중천에 솟아올라 따가운 봄볕을 부렸다.
고요하고 적막한 산중에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고, 자연의 일부처럼 미동하지 않고 가부좌한 강수가 눈을 떴다.
눈에서 순간적으로 강렬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하하. 드디어 시작이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강수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요지부동 변화하지 않던 마나하트에 약간의 변화가 감지됐다. 새로운 서클이 옅은 안개처럼 희미하게 나타났다. 2서클 완성 이후 아무리 마나회로 수련을 해도 연못에 던진 돌멩이처럼 흔적도 남지 않았다.
드디어 오늘, 흔적이 남은 것이다. 얼마나 더 긴 수련을 해야 할지 몰라도 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기운이 났다.
3서클 마법에서 가장 필요한 마법은 치유마법이다. 서클이 높을수록 치료의 범위가 넓어지고, 치료의 효과가 크다. 무조건 서클을 올려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강수는 배낭을 메고 하산했다.
돈암동에 도착한 강수는 주거래은행으로 들어갔다. 고한철과 서혁중에게 오늘까지 8일 치 보수를 보내주기 위해서다.
‘사십팔만 원씩이군. 한데 뭘 믿고 러닝개런티방식을 선택한 거야?’
실크스크린 인쇄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업체에 주문 제작한 군마를 15점 복제해서 채색하고 있지만, 자신조차 팝아트 작품의 판매를 자신하지 못했다. 한데 두 후배가 러닝개런티 방식인 두 번째를 선택해서 금전적으로 부담이 없었다.
강수는 ATM기기에서 두 후배의 통장으로 48만 원씩 계좌이체하고 작업실로 올라갔다.
“어서 오세요. 선배님.”
먼저 와서 강수가 지정해준 색으로 캔버스에 채색하고 있던 고원철과 서혁중이 작업실로 들어오는 강수를 반갑게 맞았다.
“그래. 오늘까지 쳐서 8일 치 알바비 사십팔만 원씩 부쳤다.”
“앗,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고원철과 서혁중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비록 돈은 얼마 안 됐지만 제때 보수를 받았다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한 구석은 나중에 목돈을 챙길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75점이 다 팔리면 5600만 원이고, 절반만 팔려도 2800만 원이다. 웬만한 직장인 연봉이나 다름없었다.
고원철은 보수를 일당으로 받겠다고 했다가 이강수가 마무리한 군마를 보고 며칠 전 러닝개런티로 바꾸었다.
자신과 서혁중이 작업지시서에 맞게 색칠해 놓은 군마를 이강수가 덧칠해 완성했다. 고원철은 자신이 물감칠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라진 완성된 군마를 보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강수가 덧칠해 끝낸 군마는 마치 화룡점정처럼 영혼 없는 군마들이 영혼을 얻어 살아난 것 같았다. 또한 각각의 작품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진홍색이 바탕인 군마는 군마의 앞에 거대한 적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진홍의 색조만큼이나 비장한 느낌이 들었고, 황금색 바탕의 군마는 신성한 존재가 재림하는 듯한 장엄한 기운이 느껴졌고, 은색 바탕의 군마는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자신은 이강수가 건네준 작업지시서의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고 색을 칠했으나 선배 이강수의 손길이 더해진 작품은 생동감에서 차이가 났다.
‘차이 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고원철은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군마’의 창작 의도와 색의 표현, 작품 세계는 이강수 선배의 머릿속에 존재한다. 자신은 작업지시서에 따라 캔버스에 색을 입혔을 뿐이다. 창작에 대한 열정과 예술혼, 작가 마인드가 결여된 채 기계적으로 물감을 칠했으니 차이가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작품 ‘군마’는 이강수의 붓끝에서 생명력을 받아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