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95화 (95/197)

# 9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95회

*

사무실이 있는 10층짜리 빌딩에 도착한 이필성은 우편함에 꽂힌 몇 개의 우편물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8층에서 내린 이필성은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10평 정도 되는 실내는 혼자 쓰는 데 전혀 불편이 없었다. 소파에 앉아 우편물을 살펴보던 이필성은 기다리던 우편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이강수 개인전! 스케줄대로 개인전을 여는구나.”

이필성은 묘한 흥분을 느끼며 봉투를 열었다. 팜플렛과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 팜플렛 표지는 하얀 배경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젊은 남녀의 아름다운 옆모습이었다.

‘크, 좋군.’

표지를 넘겼다. 뒷장에는 이젤에 놓인 캔버스와 함께 포즈를 취한 사진과 작가 프로필, 작가 서문이 있었다.

서문을 읽어보니 담담한 필치로 작가의 변을 풀어놓았다.

‘강원도에서 올라와 홍우대를 다니면서 느낀 서울의 인상을 작품에 녹여냈구나.’

팜플렛에는 10여 점의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갈림길, 내 안의 빛, 교차 등 기대했던 만큼 구도와 인물, 색감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팜플렛 사진은 참고일 뿐 원화를 봐야 작품을 평가할 수 있다.

이필성은 달력을 보았다.

‘4월 7일 4시 오픈이라.’

선암갤러리에 문의해서 오픈 날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초대장에 찍힌 오프닝 시각은 변경되지 않는 확정된 시간이다.

‘이번 작품들도 핑크티티 초상화처럼 AA급인지 궁금하군. 만약 AA급이면 석 점 정도는 살 수 있겠지.’

아트페어 상하이 웹사이트에서 이강수의 작품 가격을 확인해 두었다. 호당 24만 원이므로 그 이상 책정할 것이 틀림없다.

이강수는 신인화가다. 호당 24만 원은 분명 싼 가격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엄청나게 저평가된 가격이다.

‘여유 자금만 넉넉했으면 열 점 정도 사놨을 텐데 아쉽군.’

최근 마음에 드는 작품 몇 점 구입하면서 자금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여유 자금이 넉넉했으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

해왕식품 비서실장 박연경은 회장에게 전해줄 우편물을 정리하던 중 이강수 개인전 홍보물을 발견하고 옆으로 빼놓았다.

박연경이 자판을 치고 있는 신유라를 힐끔 쳐다보았다.

‘상하이에서 돌아온 다음 하고 다니는 게 달라졌어. 상하이에서 돈 많은 남자를 물은 모양이야.’

작년 겨울부터 입고 다니는 옷과 들고 다니는 핸드백이 명품으로 바뀌었다. 봄옷도 고가 브랜드로 월급 받아서 사 입기엔 출혈이 크다. 하고 다니는 꼴을 보면 은근히 배가 아팠지만, 언제까지 갈지 두고 볼 참이었다.

“신유라 씨.”

“예, 실장님.”

“지금도 이강수 그림에 관심 있어?”

“네. 이강수 화가 그림은 돈 모아서 한 점씩 꾸준히 사려고요.”

“선암갤러리에서 이강수 개인전 하는데 알고 있어?”

“아, 물론이죠. 제가 유일하게 관심을 쏟는 화가인데 개인전 오픈을 모를 수 없죠.”

“그래? 어떻게 알았어?”

“우편물이 왔어요. 작년에 그림 한 점 샀잖아요. 고객리스트에 올랐는지 홍보물이 자주 오더라고요.”

짐작했던 일이라 박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전시회에 가 볼 거야?”

“그럼요. 제가 좋아하는 화가인데요. 얼마 전에 핑크티티 초상화 그린 화가로 TV에도 나온걸요. 유명해져서 그림값 오르기 전에 한 점이라도 더 사놔야죠. 비싸지면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걸요. 실장님도 이번 기회에 작품 하나 마련하세요.”

“난 애들한테 들어가는 돈이 많아서 그림에 투자할 여유가 없어. 유라 씨도 결혼해서 애 키워보면 알 거야.”

신유라가 빙긋 미소 지었다.

“알았어요.‘

활짝 핀 한 송이 꽃 같은 신유라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린 박연경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돈 많은 남자 만나면 그런 걱정 할 일 없지. 그 대신 다른 걱정을 해야겠지만.’

*

‘몬스터를 막아라’ 예고편 반응이 포털 사이트는 물론이고 각종 커뮤니티를 후끈하게 달궜다. 화려하고 강력한 액션씬을 담은 예고편은 빠르게 조회 수가 올라갔고, 네티즌의 반응이 폭발했다. 특히 여성체 괴물이 누구인지 추측하는 댓글이 기사마다 수십 개씩 달렸다.

연예 담당 기자들도 흥미로운 기삿거리를 찾았다는 듯 다투어 기사를 내보냈다.

-영화 ‘몬스터를 막아라’의 주인공 조한석과 민설희는 실험실에서 탄생한 몬스터의 폭주를 막을 수 있을까?

-여성체 몬스터의 정체는?

<‘몬스터를 막아라’ 티저 영상이 인터넷상에서 화제를 일으키는 가운데 여성체 몬스터의 정체를 놓고 궁금하다는 네티즌의 글이 쏟아지고 있다. 본 기자도 여성체 괴물의 정체와 결말이 궁금해 윤상일 감독에게 살짝 물어보았으나 영화관에서 확인해보라는 답변을 들었다.

티저 영상에서 여성체 몬스터는 초록 괴물 헐크에 맞먹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극 중 여성연구원 가운데 한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여성체 몬스터로 변형된 것은 확실하다.

여성체 몬스터의 정체도 궁금하지만 기자는 여성체 몬스터 앞에 놓인 운명의 추가 더 궁금하다. 사상 최강의 전투 병기를 연상케 하는 여성체 몬스터에게 기다리고 있는 운명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그리고 여성체 몬스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체 몬스터의 화끈한 액션이 돋보이는 몬스터를 막아라는 4월 15일 전국의 상영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연예부 심현정 기자 [email protected]>

-신인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몬스터를 막아라’ 4월 15일 개봉 확정.

<윤상일 감독의 신작 몬스터를 막아라가 1천여 상영관을 확보해 4월 15일 전국에서 개봉한다.

윤상일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은 몬스터를 막아라는 티저 영상에서 볼 수 있듯 화끈한 액션을 선보일 예정이다. 남녀 주연 배우는 신인 조한석과 민설희가 맡아 열연했다.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 배우도 대부분 신인배우 위주로 캐스팅하는 모험수를 던졌다.

윤상일 감독은 스타 배우의 출연료를 아껴 액션씬에 투자, 액션을 공들여 촬영했다고 밝혔다. 신인배우 캐스팅에 대해 우려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윤상일 감독은 배우의 연기력에 만족한다고 대답했다. 비록 신인배우들이지만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를 캐스팅했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다고 자신했다.

윤상일 감독이 던진 과감한 승부수가 통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스포츠비전 송장백 기자>

-윤상일 감독이 제대로 일냈다. 액션 장난 아니다.

-예고편 액션이 전부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영화도 전작처럼 죽 쑤지 않을까?

┗예고편은 예고편일 뿐. 진짜는 영화관에서 확인해라.

┗예고편이 액션 끝? 그럼 폭망이지.

┗천만 감독의 저력을 우습게 보네. 네가 하는 생각도 못 할까?

-여성체 괴물은 누구지? 여성 연구원 가운데 한 명일 텐데? 알 수가 없다.

┗나도 궁금한데 정보가 없네요. 개봉해야 밝혀질 듯.

┗청소원 아줌마 아닐까?

┗설희일 수도 있어.

┗너 같으면 여주인공을 괴물로 만들겠냐?

┗크크. 설희는 배역 안 가리니까 아니라고 말 못 하겠다.

┗젠장. 어차피 개봉하면 밝혀지는데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숨기고 있어.

-예고편에서 해왕 때의 포스가 느껴진다. 개봉하면 영화관으로 고고씽~

┗나도 간다.

┗미투.

*

강승호와 미팅을 가진 후 훌쩍 열흘이 지났다.

강수는 주하와 만나 데이트하는 시간 외에는 공주를 구해줘! 일러스트 작업에 매진해 열흘 만에 20장의 원고를 끝냈다.

퀵서비스를 부른 강수는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으로 원화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안전하게 전달하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원화를 받아 떠나는 퀵서비스 기사를 배웅하고 문들 닫은 강수는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했으나 한편으론 은근히 긴장되기도 했다.

‘이번 작품도 아이들이 재밌게 보면 좋을 텐데....’

공주를 구해줘는 왠지 불안하기도 하고, 자신이 서지 않았다.

첫 그림동화책 벙어리 황구 죽돌이는 독자의 반응에 대해 아무 생각 없었다. 그냥 잘 팔리면 좋고, 안 팔리면 그만이었다. 한데 출간 한 달 만에 놀랍게도 베스트셀러 20위 안에 진입하는 성적을 냈고,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다.

벙어리 황구 죽돌이가 예상 밖의 성적을 내고 나니 공주를 구해줘의 판매가 부담으로 다가온 것이다.

어쨌든 원고는 자신의 손을 떠났다. 얼마나 성적을 낼지 고민한다고 해서 바뀔 것은 없다. 독자의 심판을 겸허히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작업에서 해방된 강수는 기분전환 삼아 창가로 걸어가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낮은 건물과 담벼락이 이어진 골목길에 따스한 햇살이 비치며 봄기운이 스며들었다. 어느덧 담벼락에 늘어진 개나리 줄기에 노란 꽃잎이 피어났다. 혹독했던 추운 겨울의 기억이 아스라이 기억 저편으로 잊히고, 생기가 넘실대는 완연한 봄이다.

드디어 팝아트 작품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

강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어시스턴트가 있어야 하는데 누가 좋을까?’

색깔을 잘 쓰는 후배를 떠올렸다. 자신과 인연 있는 후배는 같이 수업 들었던 14학번과 바로 아래 15학번 후배다.

‘송이, 원철, 혁중.’

강수는 학창시절 박송이, 고원철, 서혁중의 실기 과제물 작품을 보았을 때 색채 감각과 표현력이 너무 좋아 내심 부러워했었다.

동기 중에는 이동석과 김종대가 색채 감각이 뛰어나다.

‘종대는 자기 작품 하느라 바쁠 테고, 동석이가 도와주면 딱 좋은데 학원 알바 때문에 시간 없겠지? 일단 후배에게 연락해보자.’

강수는 여자 후배인 박송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수선배님?]

“그래. 오랜만이지? 그동안 잘 지냈어?”

[아뇨. 일러스트 한다고 맨날 집구석에 처박혀 그림만 그리고 있는걸요.]

스마트폰에서 한탄 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박송이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일러스트에 치여 살고 있었다.

“일이 많구나. 돈은 벌겠네.”

[돈은 얼마 벌지도 못하면서 바쁘기만 해요. 아 참, 무슨 일로 선배님이 저한테 전화를 다 했어요?]

“응. 실크스크린을 이용해서 팝아트 작품을 제작해보려고. 작업 도와줄 어시스턴트가 있어야 하는데 네가 색 감각이 좋잖아. 네가 도와줬음 했는데 넌 바쁘니 다른 후배한테 연락해봐야지.”

[어? 팝아트 하게요? 선배랑 팝아트 작업하면 재밌을 건데 아깝다.]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원철이는 요즘 뭐하냐?”

[걔는 요즘 슬럼프에요. 그림으로 먹고살기 힘들다면서 고민이 많은가 봐요. 알바하고 있으니까 시간 될 거예요.]

“알았다. 참, 내 개인전에 올 거지?”

[그럼요. 선배님 첫 개인전인데 당근 가야죠.]

“그래. 전시장에서 보자. 잘 있어라.”

[예, 선배님.]

전화를 끊은 강수는 곧바로 후배 고원철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고원철입니다.]

“원철아, 나 이강수다.”

[어? 강수선배님이시네. 개인전 한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고맙다. 송이가 그러는데 너 요즘 그림 안 그리고 알바 한다면서?”

[후우- 제가 알바 하고 싶어서 하나요. 작품 해봐야 팔리지도 않고, 그림으로 먹고살기 어렵네요.]

[그런 열악한 미술판 현실은 뻔히 알고 전업화가 선택한 거 아니냐? 성공한 선배작가를 봐도 십 년은 자기 작업에 매진하지 않냐. 우리야 이제 겨우 4년 차인데 벌써 의욕이 꺾여서야 하겠어?]

[그림 그려서 생활비라도 벌면 어떻게든 버텨보겠지만 알바 한다고 시간만 뺏기고, 몸이 피곤하니까 그림도 귀찮아지는데요?]

“무슨 알바 하는데 몸이 힘들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해요. 공사장 노가다, 행사지원, 엑스트라 같은 거요.]

“그런 알바 하느니 너 혹시 내 작업 도와주지 않을래?”

[선배님 작업이요? 어떤 작업인데 제 도움이 필요하죠?]

“실크스크린 인쇄방식으로 75점 제작하려고. 100호 크기로 제작할 거라 혼자서는 일도 많고 어렵지.”

[100호 크기로 75점이나요? 어디 갤러리에서 초대작가전 하는 건가요?]

“그렇진 않아. 그건 제작하면서 알아볼 거다. 뭐, 얘긴 해봐야하지만 선암갤러리에서 열 수도 있겠지.”

[네에. 내가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아요. 다만 생활하려면 돈을 벌어야하는데요....]

고원철이 말끝을 흐렸다.

“물론 보수는 줘야지. 일당 얼마면 되겠냐?”

고원철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선배님도 어려울 텐데 최저임금만 줘도 돼요.]

“최저임금? 아니야. 원철이는 우리 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고급예술인력인데 헐값에 부러 먹을 순 없지. 보수는 최저임금 두 배 이상 줄 테니까 일할 생각 있으면 오늘 얼굴 좀 보자.”

[두 배 이상이요? 옛!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좋아. 주소 보내줄게 찾아와라.”

강수는 고원철에게 작업실 주소를 보내주고, 다른 한 명의 후배, 서혁중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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