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그림 그리는 마법사 - 94회
“팀장님, 부르셨어요?”
“그래. 거기 앉아. 이 작가님이 직접 말씀하시죠.”
“공주를 구해줘! 그림동화책 스토리 구상하는데 여러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덕분에 내용이 풍부해졌고, 어색한 부분은 매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인세로 조금이나마 보상하려 합니다.”
진짜로 인세를 나눠줄지 몰랐던 전수민이 놀란 얼굴로 강수를 바라보았고 유가은은 탄성을 질렀다.
“와, 정말로 인세를 나눠주다니...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감격한 유가은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전수민도 얼른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 작가님,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편집기획팀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벙어리 황구 죽돌이를 출간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설사 출간했어도 독자의 사랑을 얻지 못했겠죠. 이게 다 편집기획팀의 아낌없는 도움 때문입니다. 공주를 구해줘는 제목까지 지어주었으니 제가 더 감사하죠. 강 팀장님, 세 분 각각 0.4%씩 넣어서 계약서 작성해 주십시오.”
“예.”
이강수의 단호한 성격을 체험한 강승호는 강수가 말한 대로 두말하지 않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네 사람이 각자 계약서에 서명하고 사본을 한 장씩 나눠 가졌다. 유가은과 전수민은 0.4%에 불과한 인세지만 계약서가 보물이라도 되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이제 두 사람은 나가서 일 보도록 하세요.”
계약서를 품에 안고 감격스러워 하던 전수민과 유가은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 작가님, 공주를 구해줘 작업은 얼마나 걸릴까요?”
“열흘 안으로 끝낼 계획입니다.”
“예?”
강승호가 놀라서 물었다.
“열흘이요? 벌써 어느 정도 작업을 해 놓았군요?”
“아뇨. 이제 시작해야죠. 예전에 비교하면 요즘 물감칠하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열흘도 넉넉하게 잡은 겁니다.”
투팍탈이 다친 머리를 치료해준 이후 강수의 회화 감각은 고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특히 머릿속에서 형상화를 끝내고 작업하기 때문에 구도나 색깔, 명암이나 물감의 질감 등 그림을 이루는 요소에 대한 고민 없이 집중해서 그림을 그렸다. 시간이 크게 단축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군요. 우리야 빨리 출판하면 좋죠.”
시종일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강승호가 표정관리를 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작가님. 공주를 구해줘 이후에는 스케줄이 있는지요?”
“예. 그려야 할 작품이 있습니다.”
“바쁘시군요.”
강승호가 뭔가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저, 이 작가님. 우리가 기획한 시리즈물이 하나 있는데 한번 검토해 보시겠습니까?”
“시리즈물이요?”
“예. 바로 이겁니다.”
강승호가 클리어 파일을 강수에게 건네주었다.
강수가 클리어 파일을 펼쳐 살펴보았다.
-멸종 동물을 지켜라!
시리즈물은 지구상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을 소개하고 멸종 위기 동물이 자연 속에서 터전을 마련해 살 수 있도록 다섯 명의 아이가 활약하는 내용이었다.
“멸종 위기 동물에 관한 시리즈물이군요. 의미 있는 기획물 같습니다.”
“이 시리즈물은 국내시장뿐만 아니라 해외시장도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 작가님이 시리즈물을 맡아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요?”
“이런 의미 있는 작품을 하면 좋겠죠. 한데 공주를 구해줘를 끝내면 바로 다음 작품을 계획하고 있어서 당장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강수는 개인전 때문에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자신의 창작물이 아닌 일러스트는 할 생각이 없었다.
“급한 기획은 아닙니다. 충분히 생각해 보시고 결정해도 됩니다. 그리고 보시면 알겠지만 우리는 자료를 준비하고, 기획만 잡았을 뿐 구체적인 스토리는 만들지 못했습니다. 스토리는 이 작가님이 구상해야 합니다. 물론 저자는 이 작가님이죠.”
“스토리를 제가 짜라고요?”
“예. 저희는 이 작가님이 작업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고, 작품 검토해주겠습니다.”
강수는 강승호가 원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지금처럼 자신이 스토리 초안을 만들고 편집기획팀에서 검토해 주면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번째 개인전이 먼저였다.
“제가 이 시리즈물을 한다고 해도 두 번째 개인전 작품을 끝낸 후에나 손댈 수 있을 겁니다.”
“두 번째 개인전 작품이요? 시간이 꽤 걸리겠군요?”
“예. 공주를 구해줘 끝내고 바로 시작해도 네다섯 달은 걸릴 겁니다. 날짜가 너무 늘어지니 다른 분을 알아보셔야겠네요.”
적어도 일 년쯤 걸릴 것으로 예상한 강승호가 놀라서 말했다.
“아닙니다.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영화 개봉 전부터 벙어리 황구 죽돌이의 판매가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몇 달 동안은 벙어리 황구 죽돌이가 꾸준하게 팔릴 겁니다. 더구나 공주를 구해줘도 이 작가님이 그림만 넘겨주면 레이아웃 작업 끝내자마자 출간할 예정입니다. 때문에 멸종동물을 지켜라는 일정상 몇 달 후에 출간하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저희는 상관없으니 이 작가님만 괜찮으면 두 번째 개인전 이후 시리즈물을 해보시는 건 어떤지요?”
시간에 쫓기지만 않으면 팝아트 작품 끝내고 기분전환 삼아 시리즈물 작업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출판물의 장점은 역시 인세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보죠.”
“감사합니다. 이 작가님이 작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자료는 철저하게 준비해 놓겠습니다.”
이강수의 동의를 얻어낸 강승호는 승리의 환호성을 외치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미팅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강수는 편집기획팀과 작별하고 작업실로 향했다. 저녁에 최이석 평론가와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다.
*
무지개출판사에서 작업실로 돌아와 공주를 구해줘! 일러스트 작업을 하던 강수는 집에서 걸려온 아버지 이전일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저예요.”
스마트폰에서 생기가 넘치는 이전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수야.]
“예, 아버지.”
[통장에 삼백만 원이 입금됐더라. 무슨 돈이냐?]
3월 초에 부친 생활비를 이제야 확인한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생활비지요.”
[뭐어! 설에도 오백만 원이나 주더니 돈을 얼마나 번다고 생활비로 삼백만 원이나 부쳐? 혹시 복권에 당첨된 거냐?]
“복권에 당첨됐으면 제가 천만 원만 드릴 리가 있어요? 집을 새로 지어드리면 드렸지.”
[인석아, 멀쩡한 집을 왜 다시 지어?]
“그렇다는 얘기죠.”
[알았다. 잘 쓰마.]
“그리고 이번 개인전에서 그림 팔리면 매달 삼백만 원씩 생활비로 부칠 테니까 올해부터 농사짓지 마세요.”
[농사짓지 말라고?]
“네. 어머니, 아버지 평생 농사만 지으며 고생하셨잖아요. 앞으로 제가 생활비 꼬박꼬박 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농사 그만 지으세요.”
[생활비 부치는 건 고맙다만 농사를 짓지 않으면 땅을 놀리란 말이냐? 난 그렇게 못 한다.]
“아버지, 쉬엄쉬엄 우리 먹을 것만 지으세요. 제발 농약, 비료 쓰지 마시고요. 남는 땅에는 블루베리나 아로니아. 포도, 자두 같은 과일나무 심어서 따먹고요.”
[이놈아, 농약, 비료 안 쓰는 유기농이 쉬운 줄 알아. 약 치는 거보다 손이 더 많이 가.]
“벌레 먹으면 먹게 두세요. 그래도 우리 먹을 건 나오잖아요.”
[하여튼 알았다. 어차피 약 안치면 생산이 왕창 주니까 약 안 쓰고 퇴비 만들어서 지어보마.]
“참, 허리는 좀 어떠세요?”
[험, 네가 안마한 게 효과 있더라. 저녁이면 뻐끈하던 허리가 말짱해졌어.]
“이번에 서울 올라오시면 무릎도 안마해드릴게요.”
[무슨 안마가 무릎도 효과가 있어?]
“기를 응축시켜서 관절을 안마하는 수법이라 아마 효과 있을 거예요. 효과가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오냐, 알았다. 네 엄마 어깨도 멀쩡해지고 내 허리도 좋아진 걸 보면 네 안마가 신통하구나. 할 얘기 다 했으면 전화 끊으마.]
“참, 인사동 오실 때 서울에 도착해서 버스터미널에 내리면 택시 타고 오세요. 알았죠?”
[걱정 마라. 아비가 인사동 못 찾아갈까?]
잔소리 듣기 싫은지 곧바로 전화가 끊겼다.
‘잘 찾아오시겠지?’
개인전 오픈 전날 모시러 간다고 해도 바쁜데 그럴 필요 없다며 직접 온다고 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강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간을 보았다. 어느덧 최이석과 약속한 시각이 가까워졌다. 차 한 잔 마시며 기다리면 올 것 같았다. 탕비실로 들어간 강수는 홍차를 만들어 잔을 들고나와 책상에 앉아 머리도 식힐 겸 인터넷을 검색했다.
‘어! 티저 영상이다.’
몬스터를 막아라 예고편이 공개되었고 관련 기사도 상당히 많았다. 며칠 동안 ‘무언의 약속’ 마무리 작업에 집중하느라 인터넷을 보지 않았는데 그사이 예고편을 배포한 것이다.
강수는 기대에 부풀어서 예고편을 클릭했다.
예고편 러닝 타임은 1분 20초.
극비의 연구기관에서 실험하는 십 수 명의 남녀 연구원들. 연구원 가운데 종희가 있었고, 그녀가 다루는 분야는 유전자 조작으로 변형된 바이러스.
변형된 바이러스를 신체 기능이 80%까지 상실한 흰쥐에 투여하고, 실험에 실패한 흰쥐의 사체를 폐기하는 주인공 수석 연구원 박성욱과 종희. 연구는 성공할 듯하다 실패를 반복한다.
성과가 없으면 프로젝트를 폐기하겠다고 통보하는 기관의 관계자.
피를 한 방울 바이러스에 투여하는 미지의 인물.
변형 바이러스에 노출된 흰쥐의 이상변이가 시작되고, 괴물로 변한 흰쥐의 공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실험실.
여성체의 괴물이 나타나 변형된 흰쥐와 격돌한다.
도시를 활보하는 여성체 괴물.
여성체 괴물을 추격하는 박성욱과 경찰, 특수부대원.
여성체 괴물과 특수부대 간의 엄청난 액션과 총격전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그리고 폭발하는 헬기와 함께 화면에 파편처럼 한 자씩 박히는 타이틀 몬스터를 막아라!
티저 영상의 액션씬은 화려했고, 흥미를 유발했다.
‘엄청난 액션이잖아. 이 정도면 흥행하겠는데?’
예고편 영상에 감탄하면서 몬스터를 막아라 관련 기사를 읽고 있던 강수는 벨소리를 듣고 출입문으로 나갔다. 출입문을 열자 복도에 회색 양복을 입은 미술평론가 최이석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강수 화가?”
“예. 이강수입니다. 들어오십시오.”
“그래.”
최이석은 강수의 개인전 작품을 평론하기 위해 강수 작업실을 직접 찾아왔다. 안으로 들어온 최이석이 한눈에 들어온 넓은 작업실을 보고 감탄했다.
“오, 작업실이 근사하군.”
오른쪽 벽에 걸려 있는 200호 캔버스를 발견한 최이석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무언의 약속이군.”
최이석이 자석에 끌려가는 것처럼 무언의 약속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앞에 섰다.
한참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최이석이 가느다란 신음을 토했다.
‘으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해. 마치 영혼이 그림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아. 마치 그림 속 설원에 서서 여인의 손을 잡고 있는 저 순결한 남자가 된 것만 같지 않은가?’
그림 속으로 혼이 들어간 듯한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체험은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이 작가, 다른 작품도 볼 수 있을까?”
“물론이죠. 다른 작품은 저쪽에 있습니다.”
강수는 최이석을 미니 부스로 안내했다.
“최 교수님, 차 한 잔 드리겠습니다. 커피, 녹차, 홍차 있습니다.”
“홍차가 좋겠군.”
“예. 알겠습니다.”
최이석은 미니부스에 걸린 작품을 한 점 한 점 면밀하게 살펴보며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작품의 완성도가 기복 없이 거의 비슷해. 작가의 능력이 일정 수준으로 올라섰다는 얘기지.’
최이석은 꼼꼼히 메모하며 작품을 살폈다.
*
이색지대 탐방 기획회의를 끝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정진규는 책상 위에 놓인 우편물을 정리했다. 각종 홍보자료가 대부분인 우편물은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필요 없고, 필요 없고, 이것도 쓰레기. 어, 가만. 누구 전시회라고?”
정진규는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은 우편물을 다시 꺼냈다.
‘이강수 개인전? 아, 핑크티티 초상화를 그린 이강수!’
그는 우편물을 개봉해서 초대장을 꺼냈다.
‘선암갤러리 4월 7일 오픈이군.’
초대장을 내려놓고 팜플렛을 살펴본 정진규는 흥미가 생겼다.
이강수는 자신이 직접 취재한 재능 넘치는 화가였다. 비록 신인화가지만 그림만큼은 신인과 거리가 먼 솜씨였다.
‘초상화를 그린 솜씨는 놀라움을 선사할 만큼 뛰어났어. 그 정도 실력에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 뜨는 화가가 확실한데 한 점 사 봐?’
정진규는 초대장과 팜플렛을 옆으로 챙겨놓았다.
첫 개인전을 여는 신인화가의 그림이 미술 시장에서 유통되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한다.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나도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풍문에 의하면 강형구 화백은 53세에 처음 그림을 판매했다고 한다.
부풀린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한국 미술 시장은 협소하고 열악하다.
‘하지만 이 친구는 시작부터 성과를 내고 있어. 이런 경우는 상당히 드물어. 이강수 이 친구는 뭔가 다르다는 거지. 좋아. 일단 전시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는지 살펴보고 살지 말지 결정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