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93회
3월 8일 월요일.
장영봉은 이강수의 마지막 작품 ‘무언의 약속’을 살펴보고 있었다. 비록 모니터 상으로 보고 있지만, 신뢰와 믿음으로 하나가 된 듯한 두 남녀의 모습에서 이유 모를 뭉클한 감동이 전해졌다.
이강수가 보내온 작품 요약에 의하면 ‘무언의 약속’은 200호 크기의 대작이었다. 원화로 200호 크기의 무언의 약속을 본다는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되었다.
‘이런 느낌의 작품이 200호라니! 원화를 보면 환상이겠다! 빨리 원화로 보고 싶군. 이제 작품이 전부 왔으니 팜플렛에 평론을 써 줄 비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누가 좋을까? 역시 최이석 평론가인가?’
이강수는 평론가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처지였다. 고료를 주면 아무나 평론을 써주겠지만 신경 써서 쓰지는 않을 것이다.
평론은 화가에게 호의적인 평론가를 섭외해야 제대로 애정 있는 글을 쓴다. 그런 면에서 최이석이 제격이었다. 최이석 평론가는 자발적으로 12인전에 참가한 이강수의 작품을 비평해주었다. 게다가 이강수의 작품을 높게 평가했다. 강수의 작품을 깊이 있게 평론해 줄 평론가로 제격이었다.
장영봉은 연락처를 열어 최이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끊겼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장영봉 큐레이터입니다.”
[장 부장? 오랜만이네. 장 부장이 내게 연락할 일이라면 개인전 평론 때문일 텐데? 맞나?]
“하하. 꼭 그렇지만은 않지만 정확하시네요, 4월 7일, 개인전 오픈하는 이강수 화가 팜플렛에 작품 평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시간 되시는지요?”
[이강수라고?]
“예. 교수님이 주간경제 미술계동향 코너에서 소개해 주었던 이강수 화가입니다.”
[오, 그래, 드디어 이강수 화가가 개인전을 여는군. 12인전 이후로 언제 개인전 하는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일세. 당연히 평론은 내가 써야지.]
“감사합니다. 이강수 화가에게 교수님 연락처 알려주고 곧바로 연락하라고 하겠습니다.”
[언제까지 써야 하나?]
“12일, 금요일까지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금요일까지면 이삼일 안에 작품을 바로 봐야겠군.]
“예. 일단 작품 사진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원화를 보기 전에 참고삼아 한번 살펴보십시오.”
[좋지. 보내주게.]
“예.”
전화를 끊은 장영봉은 이강수가 보내온 25장의 작품 사진을 최이석의 이메일로 보냈다.
‘작품 평론은 해결됐고, 작가 서문을 읽어 볼까?’
장영봉은 그림파일과 함께 온 텍스트파일을 열었다.
짤막한 부탁의 글 아래 작가 서문이 있었다.
-장 선배님, 작가 서문입니다. 검토해 주십시오.
<개인전 작품을 그리기 위해 갖가지 물감을 섞고 농도를 조절하고 빛을 버무려 캔버스에 물감을 입히면 가슴 깊은 곳에서 충만감이 차오릅니다.
서울의 삶, 그 인상.
제 개인전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강원도 촌놈이었던 저는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낯선 시간을 보내며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늦은 밤, 학교 실기실을 나와 어둠을 헤치고 자취방이 있는 어두운 골목길을 걸으면 보안등 불빛이 외로운 이방인을 포근하게 비춰주곤 했습니다.
화려한 불빛으로 빛나는 거리, 그 거리에 모여든 수많은 이방인을 따뜻하게 품은 도시, 커다란 공간에 스민 내 삶의 궤적을 쫓아서 물감을 칠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익명의 인물은 학교에서, 거리에서, 자취방이 있는 동네에서 나를 스치고 지나간 친구이고, 이름 모를 서울 시민이며 동네 어르신입니다.
대학에 입학 후 살아온 몇 년에 불과한 짧은 서울 생활이지만 서울의 삶이란 주제로 인상에 깊이 남아 있는 순간과 장면을 그리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현실을 직시하며 나를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들여 전시장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며 제 그림이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무난하군.’
감정을 절제하고 담담하게 개인전의 주제를 소개한 글이었다.
‘고칠 데가 없어. 평론만 나오면 초대장과 팜플렛을 바로 인쇄소로 넘기고, 인쇄물이 나오는 대로 고객리스트와 언론사. 인터넷 매체에 초대장과 함께 발송하면 되겠군.’
이강수의 전시 준비를 어느 정도 마무리 지은 장영봉은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염두에 굴렸다.
바로 작품 가격이었다.
‘상하이에서 호당 약 24만 원대에 책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완판되었으니 최소 호당 24만 원은 받아야 한다는 건데....’
이미 상하이에서 판매한 선례가 있기 때문에 갤러리윤이 책정한 가격보다 2, 3만원은 더 받아야 체면이 선다. 그림을 판매하지 못하더라도 24만 원 이하로는 책정할 수 없었다.
‘24만 원 이하는 체면뿐만 아니라 이강수에게도 면목이 서지 않는단 말이지. 첫 개인전을 여는 신인화가인데 24만 원 이상은 너무 고가라 팔릴 수 있을까?’
장영봉은 온라인상에서 엄청난 화제를 뿌린 핑크티티 초상화를 떠올렸다.
‘핑크티티 초상화뿐만 아니라 지금은 영화 벙어리 황구 죽돌이가 호평받으면서 이강수는 원작자로 주목받고 있단 말이지.’
생각해보면 이강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다.
최이석이 논평에서 언급했고, 갤러리윤 소속으로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했으며 핑크티티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 TV에 소개되었다. 신인이지만 미술계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진 편이었다.
‘좋아. 호당 27만 원으로 가자.’
경력이 일천한 신인화가의 호당 가격 27만 원은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어쩔 수 없어. 갤러리윤도 이강수의 작품을 그만큼 높게 평가했고, 그 가격에 완판했어. 비록 상하이였지만 작품성이 수준 이하면 완판될 리 없어. 눈물처럼 뭔가 보는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완성도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완판된 것이 틀림없어.’
그림 가격을 결정한 장영봉은 수화기를 들고 이강수에게 전화했다.
곧 수화기에서 이강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이 작가?”
[예, 선배님. 이강숩니다.]
“이 작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네.”
[무엇을요?]
“혹시 작품 가격은 생각해둔 게 있나?”
[아, 그건... 딱히 가격을 정하진 않았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상하이에서 판매된 금액을 토대로 정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네. 갤러리윤에서는 호당 24만 원 정도 책정했더군. 한데 상하이에서 자네 작품이 전부 팔렸으니 가격을 좀 더 올리는 것이 나을 것 같네.”
[어느 정도요?]
“나는 호당 27만 원 정도면 어떨까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 정도면 적당한 것 같습니다.]
“그럼 호당 27만 원으로 하지. 그리고 한 가지 더. 간혹 그림 가격을 깎아 달라는 고객도 있네. 그런 고객에게 백만 원 정도 할인해 줘도 괜찮을까?”
[그건....]
잠시 후 강수가 대답했다.
[할인해서 파는 건 반대입니다. 첫 개인전인데 사람 차별하듯 가격을 달리해서 팔고 싶지 않습니다.]
“알겠네. 정가에 판매하는 것이 공정하고 확실하지. 그렇게 관장님께 보고하지. 그럼 수고하게.”
[예. 선배님.]
이강수와 작품 가격을 합의한 장영봉이 의자에서 일어나 관장실로 향했다.
이강수의 작품을 호당 27만 원에 책정했다고 보고하려는 것이다.
*
“후후!”
헬스장 안에서 두 시간 가까이 운동에 전념한 임해영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의자에 앉았다.
임해영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의 한 점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또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그게 뭐였지? 내가 헛것을 봤을까?’
카페에서 목격한 일이 믿기지 않았다.
이동석이 의자를 휘두를 때 칼 든 사내가 그 자리에서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만약 사내가 정지하지 않았다면 이동석은 칼에 찔렸을 것이다.
그 장면이 마치 만화의 한 컷처럼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것만이 아냐. 사내가 벽까지 굴러간 건 뭐였지?’
충격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 구르지 않은 이상 이동석에게 맞아서 벽까지 굴러갈 수는 없다. 그 순간을 떠올려보아도 사내가 스스로 구르진 않았다.
유튜브에 누군가 올린 영상을 봐도 주의 깊게 관찰하면 사내가 순간적으로 정지한 것을 느낄 수 있다. 댓글에도 사내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영상을 보고 이상하다고 할 정도면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또 한 번은 벽에서 반격하다 정지했다. 영상에서는 이동석과 자신의 모습에 가려 사내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지만 두 번이나 결정적인 순간에 사내가 정지했다.
한 번이라면 살인에 대한 두려움과 정신적인 갈등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두 번 연속 벌어진 현상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머리만 혼란스러웠다.
‘이런 걸 미스터리라고 하는구나. 아니면....’
칼 든 사내를 해치운 이동석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동석 씨가 초능력을 쓴 걸까? 설마 이동석 씨가 초능력자?’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하지만 그때 현상을 규명할 힘은 초능력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운동신경이나 신체 능력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은 꽤 존재하지만, 초자연적인 힘을 쓰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초능력이 아니면 그때 현상이 설명 안 돼.’
이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이동석 씨?’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초능력이라는 의문이 통화를 연결했다.
[해영 씨, 이동석입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죠?”
[저기, 내일 쉬지 않나요?]
“그런데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주저하는 듯한 어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혹시 약속 없으면 잠깐 만날 수 있을까 해서요.]
“내일 조카들하고 영화 보기로 했거든요. 시간이 안 되네요.”
[아, 그럼 영화 끝나고 만나면 안 되겠습니까?]
“영화 보고 나선 조카들하고 외식할 거예요.”
[외식이요? 내가 아이들이 좋아 할만한 곳을 아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요?]
임해영은 이동석이 정말 초능력자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마침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니 응하기로 했다.
“좋아요. 영화 끝나고 보죠.”
스마트폰에서 당장 기쁨에 넘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로 몇 시까지 가면 됩니까? 시간 맞춰 가겠습니다.]
“이수역에서 네시 반에 보면 되겠네요.”
[예, 그럼 내일 이수역에서 뵙겠습니다.]
“그러죠.”
전화를 끊은 임해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이동석의 태도를 모를 수가 없었다. 김종대 말처럼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순진한 건지, 어리숙한 건지 종잡을 수가 없어. 하는 행동을 보면 초능력자 같진 않은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한데 초능력 테스트를 어떻게 하지?’
마땅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음, 무슨 방법이 있겠지.’
임해영은 잡념을 버리고 샤워실로 걸어갔다.
*
봄기운이 완연한 3월 10일.
강수는 심플한 디자인의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파트를 나섰다.
두 번째 그림동화책 공주를 구해줘의 계약 건으로 무지개출판사를 향해 차를 몰았다.
“이 작가님,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유가은이에요.”
“예, 반갑습니다. 이강수입니다.”
편집기획팀 직원들이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강수를 반겼다. 강수를 처음 보는 유가은이 훤칠한 모습의 강수를 눈빛을 반짝이며 살폈다.
“차는 뭐로 하겠습니까?”
“녹차요.”
“가은 씨. 녹차 두 잔 부탁해. 이 작가님, 회의실로 가시죠.”
강승호가 두툼한 서류파일을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유가은이 강승호를 따라가는 강수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와, 무슨 배우인 줄 알았네. 아니, 저 정도 마스크면 배우해도 되겠다. 그렇지 않아요?”
유가은이 전수민을 보며 동의를 구했다.
“뭐, 비주얼만 따지면 배우해도 되겠지.”
“그렇죠?”
감탄하며 탕비실로 가는 유가은을 힐끗 쳐다본 전수민이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우리랑은 어울리지 않는 남자거든. 일치감지 마음 접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텐데.’
회의실 탁자에 앉은 강승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저번엔 정말 감사 했습니다. 직원들이 감동하면서 보너스 받은 기분이라고 하네요.”
“얼마 되지 않지만 제가 받은 만큼 드리는 것뿐인걸요. 그리고 저번에 얘기한 대로 이번엔 계약서에 각각 인세를 기재하겠습니다. 편집기획팀 직원도 오라고 하시죠.”
“알겠습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유가은이 녹차를 들고 왔다. 그녀는 탁자에 녹차를 놓으면서도 눈은 강수를 곁눈질로 훔쳐보고 있었다.
“가은 씨, 가은 씨하고 전수민 씨도 회의에 참석하도록 해요. 수민 씨 불러와요.”
“예? 예, 팀장님.”
강승호가 두 사람만 부르자 강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허상배 씨는 왜 안 부르죠?”
강승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상배는 배가 아파 죽으려고 합니다.”
“배가 왜? 체하기라도 했나요?”
“상배는 개인적인 볼일 있다면서 이번 수정작업에서 스스로 빠졌습니다. 그래서 인세 계약에 제외했습니다. 이 작가님이 인세 나눠준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주 배 아파 죽으려고 합니다.”
“하하, 그런가요?”
문이 열리고 유가은과 전수민이 회의실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