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92화 (92/197)

# 9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92회

김종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농담이다, 농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미안하잖냐? 해영 씨, 동석이가 보기와는 다르게 순수하고 인성 됨됨이가 진국입니다. 정말 괜찮은 녀석입니다.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요즘 이런 진실한 남자 보기 힘듭니다.”

김종대가 해명하며 칭찬해주자 이동석의 얼굴에서 금방 웃음이 피어났다.

“보세요. 농담이라니까요.”

임해영이 금방 기분이 좋아서 얼굴이 밝아진 이동석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남자가 농담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고 그래요?”

“동석이가 원래 마음속에 감정을 담아놓지 않고, 뒤끝도 없이 솔직하거든요.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자기표현이 분명한 친구죠.”

“사회 생활하려면 싫어도 좋은 척해야 하고, 억울해도 참을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직장이든 모임이든 기분 내키는 대로 표현하며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잖아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동석이는 전업 화가가 어울리는 직업인 거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짓고 있던 강수가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창밖 거리에서 소란스러운 기미를 느꼈다. 강수가 창밖에 시선을 주자 일행도 강수를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 거리에서 십 수 명의 사람들이 고함과 비명을 지르며 명동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동시에 식칼 든 사내가 영화관의 스크린 같은 창밖에 툭 뛰어나와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여자를 덮쳤다.

여자는 미친 듯이 카페 안으로 들어와 구석으로 도망치며 외쳤다.

“미치광이예요. 살려주세요.”

꽝!

식칼 든 사내가 문을 부술 듯이 밀어 재끼며 카페 안으로 여자를 따라 들어왔다.

캬아악!

우당탕!

카페에 있던 20여 명의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출입문의 반대쪽 구석으로 몰려갔다. 허둥대며 구석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의 몸에 걸려 의자가 넘어지고 탁자가 엎어졌다.

평화로웠던 실내가 순식간에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고, 놀라서 도망치는 사람들로 인해 난장판이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사내가 입술을 비틀며 비릿하게 웃었다.

“낄낄낄.”

중간 자리에 앉아 있던 강수 일행이 눈에서 광기를 흘리는 사내와 대면했다.

임해영이 일행의 앞으로 성큼 나섰다.

강수는 자신의 뒤에 숨어있는 주하를 뒤로 밀며 말했다.

“주하야, 뒤로 물러나 있어.”

“오빠, 같이 피해요. 저 사람은 해영언니가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아냐. 해영 씨 혼자 칼을 든 사내를 상대할 수는 없어. 내가 도와줘야지. 빨리 가있어.”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던 주하가 별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오빠, 조심해요.”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물러나 있어라.”

강수가 김종대와 이동석에게 말했다.

김종대가 고개를 저었다.

“해영 씨가 싸우는데 어떻게 물러나 있어? 나도 도와야지.”

이동석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의자를 집어 들고 임해영 앞을 가로막았다.

“해영 씨, 저놈은 칼을 갖고 있어 위험합니다. 뒤로 피해 있으세요.”

“저리 가요. 내가 처리하겠어요.”

임해영이 허리에서 전기충격기를 꺼냈다.

“안됩니다. 맨손으로 칼 든 미치광이를 어떻게 상대합니까? 제발 피해 있으세요. 잘못하면 크게 다칩니다.”

임해영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동석을 가상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여자라고 해도 위험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여자를 지켜줄 남자는 흔하지 않았다.

“씨발년이 놀고 있네. 사이좋게 둘 다 죽여주마.”

사내가 자신을 서로 상대하겠다는 임해영과 이동석을 보며 살기를 뿜었다.

이동석이 사내를 노려보며 목청껏 외쳤다.

“놈은 혼자입니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들고 싸우면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이동석의 외침에 물러나 있던 남자 몇 명이 주춤거리며 의자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사내가 피 묻은 식칼을 혀로 핥더니 벼락처럼 고함치며 광기를 폭발시켰다.

“덤벼라, 씹새끼들아. 한 새끼는 확실하게 목을 그어버릴 테니까.”

식칼을 허공에 한차례 휘저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왔다.

의자를 들고 나왔던 남자 몇 명이 칼을 든 사내의 위협적인 행동에 두려운 얼굴을 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꽈당!

캬아악!

사내가 탁자를 걷어찼고 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씨부럴, 좆같은 것들. 전부 저승으로 보내주마.”

사내가 이동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빠르고 망설임 없는 단호한 몸놀림이었다.

이동석의 왼쪽 반걸음 뒤에 있던 강수는 홀드마법을 영창해 메모라이즈 해놓고 있었다. 상대방의 움직임에 맞춰 시동어만 캐스팅하면 즉시 마법이 시전 된다.

목숨도 불사하겠다는 결연한 표정의 이동석이 달려드는 사내를 향해 의자를 후려쳤다.

칼 든 자에게 무거운 의자는 방어용으로 써야지 공격하는 것은 무모하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이동석은 임해영을 지키겠다는 의욕만 넘쳐서 의자로 사내를 공격한 것이다.

강수가 나직이 마법을 캐스팅했다.

“홀드.”

맹수처럼 달려든 사내가 순간적으로 정지했고 이동석이 휘두른 의자가 사내의 왼쪽 어깨를 가격했다.

퍽!

동시에 강수는 사이클론윈드를 캐스팅해 이동석이 의자를 휘두른 방향으로 사내를 밀어냈다.

우당탕!

“윽!”

사내가 짤막한 신음과 함께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벽으로 굴러갔다.

벽에 처박힌 사내에게 달려간 이동석이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사내를 기합과 함께 의자로 다시 내리쳤다.

“이야압!”

문득 사내가 이동석 다리로 몸을 굴려 파고들더니 칼로 복부를 찔렀다.

“홀드.”

사내의 칼은 이동석의 복부를 찌르기 전에 멈췄고, 이동석의 뒤를 따라 달려간 임해영이 사내의 팔을 걷어찼다. 칼이 허공으로 날아가자 전기충격기로 사내의 목에 대고 버튼을 눌렀다.

찌리리릿!

전기에 감전된 사내가 부들부들 떨더니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했다. 임해영이 사내를 엎어놓고 팔을 뒤로 꺾었다.

강수가 재빨리 다가가 혁대를 풀러 임해영 옆에 앉았다.

“잡고 있어요. 이걸로 묶게.”

“고마워요.”

강수가 혁대로 사내의 양 손목을 결박했다.

창밖에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지나갔다. 사내가 들고 있었던 칼에 피가 묻어 있었던 것으로 보면 누군가 칼에 찔렸을 것이다.

“와아!”

짝짝짝!

사내를 제압하자 뒤에 물러나 있던 사람이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치며 근처로 다가와 기웃거렸다.

사내의 팔을 결박한 강수가 일어나서 말했다.

“됐습니다. 여기 있어 봐야 경찰서에 가서 참고인 진술도 해야 하고 골치만 아플 것 같은데 우린 뜨죠?”

임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강수 일행이 자리에서 뜨려고 했으나 경찰차가 카페 밖 도로에 달려와 정차하고 경찰관들이 내렸다.

“뭐 이렇게 빨리 와?”

“조용히 지나가기엔 그른 것 같네요.”

경찰봉을 든 경찰관 세 명이 곧장 카페로 들어왔다.

“칼을 든 괴한이 난동을 부린다는 신고 받고 왔습니다.”

카페에 들어와 외친 경찰관이 바닥에 엎어져 등 뒤로 팔이 결박된 사내를 보고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확인했다.

경찰은 경찰봉을 허리에 차고 강수에게 다가왔다.

“저 괴한을 제압한 분입니까?”

강수가 고개를 저으며 이동석과 임해영을 가리켰다.

“제가 아니라 여기 두 분이 제압했습니다. 난 옆에서 구경만 했죠.”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괴한을 제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께서는 서에 동행해서 참고인 진술을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우린 일행인데 같이 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같이 가시죠.”

결국 강수 일행은 인근 경찰서로 가서 참고인 진술을 하고 헤어졌다.

*

다음날, 강수는 포털사이트에서 용감한 커플이라는 기사와 사진을 접할 수 있었다.

카페에서 칼을 든 괴한을 이동석과 임해영이 제압하는 광경을 누군가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것이다.

충무로에서 식칼로 시민을 무작위 공격한 괴한, 최학인에 관한 기사도 올라왔다.

최학인은 돈 문제로 동거녀와 다툰 후 홧김에 동거녀를 살해하고 말았다. 자신의 신세를 비관한 그는 식칼을 들고 밖으로 나가 충무로에서 무작위로 시민을 공격한 것이다. 그의 공격으로 두 명이 중태, 두 명이 경상을 입었다. 카페 난입으로 더 큰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었으나 용감한 커플이 최학인을 제압해 더 이상의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동석이가 유명해지겠는데?’

이동석이 임해영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최학인을 상대해서 마법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도 이동석과 임해영에게 쏠려서 마법을 사용한 데 대한 부담도 없었다.

‘어제 일로 해영 씨에게 호감을 샀을까?’

강수도 임해영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강수가 겪은 임해영은 직업의식과 책임감이 투철하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여성이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탄탄하고 늘씬해서 모델을 해도 통할 것 같은 몸매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뛰어난 신체 능력과 비주얼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임해영의 경호원으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의문일 정도였다.

‘주하 말로는 직장이나 조직 속에서 사람과 부대끼는 걸 싫어한다고 하긴 했지. 어쨌든 둘이 잘됐으면 좋겠다.’

강수는 컴퓨터를 절전모드로 해놓고 작업 중인 캔버스 앞으로 갔다. 작품 ‘무언의 약속’은 배경, 구도, 인물 등 구체적인 형상화 작업이 끝났고, 채색도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다.

‘남은 부분은 삼사일이면 끝낼 수 있겠다. 무언의 약속을 끝내서 장 선배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고, 공주와 나무꾼 작업을 해야겠지? 공주와 나무꾼 일러스트 끝내면 두 번째 개인전 작품을 준비하자. 음, 은근히 바쁜데?’

일주일 전 팝아트 작품을 해보자는 결정을 내린 뒤 강수는 두 번째 개인전에 대한 콘셉트를 이미 정해 놓았다.

상하이에서 스케치했던 군마, 남녀가 허공에서 DNA 나선 형태로 엉켜 있는 모습을 비롯해 초현실적인 그림 다섯 점.

실크스크린 제작 방식으로 한 점당 15개의 작품을 제작한다. 두 번째 개인전 출품 작품 개수는 총 75점.

작품 사이즈는 100호 내외.

그림값은 첫 번째 개인전 성적표를 토대로 선암갤러리와 협의해서 책정한다.

팝아트 작품의 두 번째 개인전이 성공하려면 첫 번째 개인전의 성과가 중요했지만, 개인적으로 새로운 양식에 대한 시도였기 때문에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팝아트 작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75점을 혼자 제작하려면 작업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기 때문에 앤디 워홀처럼 어시스턴트를 쓸 계획이었다. 어시스턴트를 고용해서 팝아트 작품을 제작한다는 사실이 괜히 설레었다.

당장 군마를 그려서 실크스크린으로 복제하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렸다.

원래 강수는 만화의 한 장면을 베껴 그리거나 복제 방식의 팝아트,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입체주의미술과 추상미술, 치기 어린 장난 같은 개념미술 등 작가의 예술혼이 결여된 장르의 작품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다만 소수 부유층이 소비할 수밖에 없는 고가의 예술 작품을 일반 대중도 소유, 감상할 수 있으려면 팝아트 양식의 대량 제작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은 공감했다.

일반 대중이 예술 작품을 감상하려면 미술관이나 화랑, 전시회를 찾아가야 한다.

마음에 드는 예술품을 집안에 두고 감상하려면 적게는 한두 달 치 월급을 털어 넣어야 하고, 많게는 연봉을 투자해야 한다. 독하게 마음 먹지 않으면 그림 한 점에 거금을 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저렴한 가격에 명화를 감상할 수 있는 복제화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중국에는 세계적인 명화의 모사품을 생산하는 마을이 있다.

중국 심천의 다펀 마을이다. 다펀 마을에는 수천 명의 화가가 수백 개의 화실을 운영하면서 명화의 모사품을 그려 판매하고 있다. 다펀 마을 화가들이 그린 명화 모사품은 저렴한 가격에 전 세계로 팔려나간다. 즉, 값싼 그림의 명화 모사품을 소장하려는 수요가 있는 것이다.

다펀 마을 화가들이 모사한 명화는 작품성이 저열해 예술품으로서 가치가 전무하다.

하지만 재능 있는 뛰어난 화가가 원작과 비견할 만큼 작품성과 예술성을 담아낸 복제화를 그린다면 그 복제화의 가치도 전무한 것일까? 원화에 비교하면 그림값은 의미 없을 정도로 낮겠지만 그림만 놓고 엄격하게 판단한다면 원화와 복제화는 다를 것이 없다.

차이라면 원작자가 다를 뿐이다.

복제화는 아니지만 앤디 워홀이 그것을 방증했다. 그의 1986년 작품으로 최후의 만찬을 소재로 제작한 ‘60개의 최후의 만찬’은 2017년 11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670억에 낙찰됐다. 쩡판즈의 가면 쓴 인물을 그린 '최후의 만찬'도 2011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50억에 낙찰되었다.

결국 원화와 복제화는 그림의 가치를 매기는 복잡한 시스템에 의해 가치가 달라질 뿐이다.

강수는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복제한 열다섯 점의 그림을 채색을 통해 각기 다른 의미와 분위기를 연출할 계획이었다.

유니콘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질주해 내려오는 군마를 예로 들면 웅장한 기상, 숭고함, 장엄함, 대지를 아우르는 부드러움, 신비스러움, 비장함, 대지를 짓밟는 폭발하는 기세 등이다.

실크스크린으로 복제한 작품이지만, 작품마다 다른 느낌을 풍기는 열다섯 점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같은 그림을 다르게 표현한다는 점이 뭔가 흥미롭고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만 같았다.

강수는 붓을 잡았다.

‘빨리 무언의 약속을 마무리 짓고, 공주와 나무꾼 일러스트를 끝내자. 그리고 군마를 제작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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