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91회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작품성에 관해 물었을 때, "나의 작품을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며 대놓고 예술성의 부재를 공언했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은 수백억 원에 팔린단 말이지? 팝아트를 해야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는 건가?’
잡생각을 하던 강수가 피식 실소를 지었다.
팝아트를 한다고 아무나 앤디 워홀이나 제프 쿤스처럼 인기 작가가 될 수는 없다. 그들도 독창성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피라미드의 가장 위에 올라갔기에 인기 스타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이다.
‘앤디 워홀은 미술품을 누구나 손쉽게 살 수 있게 하겠다고 조수를 고용해 상품처럼 그림 공장에서 작품을 대량 생산했어. 하지만 인기가 치솟으면서 그의 작품 가격도 덩달아 치솟아 결국 아무나 살 수 없게 됐지. 대중의 인기가 뭔지 아이러니야. 가만, 나도 앤디 워홀이나 제프 쿤스처럼 팝아트 작품을 만들어서 대중의 관심을 끌어봐?’
팝아트나 키치아트 작품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앤디 워홀처럼 조수를 시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작품을 복제하고, 그 위에 물감을 덧칠해서 20개나 30개씩 만들어 에디션처럼 작품을 양산할 수도 있었다. 물론 판화 에디션과는 다른 개념이다.
‘못 할 거 없잖아? 상하이에서 스케치한 초현실 풍의 스케치를 아예 팝아트 양식으로 그려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어?’
강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로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다. 생각해 보면 고흐도 꽃병에 든 해바라기를 여러 점 그렸다.
‘첫 번째 개인전을 끝내고 나서 시험 삼아 유니콘 군마를 팝아트 양식으로 시도해봐야겠다. 만약 색을 다르게 칠해서 작품성과 예술성을 담보하면 팝아트 작품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자.’
강수는 생각을 정리하고 캔버스에 시선을 주었다.
‘제소부터 칠해놓고 작품 구상하자.’
강수는 평붓을 들고 제소를 칠하기 시작했다.
캔버스가 넓어 제소 칠도 만만치 않았다. 강수는 묵묵히 한 획 한 획 붓을 놀려 캔버스를 제소로 채워갔다. 아사 천 위에 하얀색의 제소가 칠해졌다.
‘마치 단색화 같군.’
한 획 한 획 칠한 붓 터치가 독특한 질감과 무늬의 흐름을 만들어내며 단색조 화풍을 연상케 했다. 제소를 칠해 놓고 몇 걸음 뒤에서 백색의 캔버스를 바라보던 강수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문득 아이디어 하나가 뇌리를 관통한 것이다.
‘약속!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마음으로, 느낌으로 알 수 있는 약속.’
작품의 제목은 ‘무언의 약속’
고결한 영혼의 빛깔 같은 순백의 눈이 광활한 공간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정경.
남자는 좌측에서 여자는 우측에서 발자국을 남기고 걸어와 캔버스 중앙에서 서로 마주보며 손을 잡고 서 있다.
제소를 칠한 캔버스에서 눈으로 덮인 광활한 남극의 느낌을 받은 강수는 무언의 약속, 변질하지 않는 순수한 약속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강수가 ‘무언의 약속’이라는 제목과 하얀 눈으로 뒤덮인 대지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는 사랑과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강수의 머릿속에서 작품 이미지가 조금씩 그려지며 전체적인 구도와 인물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강수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무언의 약속을 빠르게 그려나갔다.
머릿속에서 형상화 작업을 끝내고 강수가 눈을 떴을 때는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강수의 눈은 열의에 가득 차서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필을 잡은 강수는 캔버스 앞으로 걸어갔다.
‘좋아! 머릿속에서 형상화한 대로 스케치해 보자.’
연필을 쥔 강수의 팔이 캔버스 위에서 선을 긋기 시작했다.
*
예고편 영상과 시놉시스를 가지고 배급사를 타진한 하상덕은 국내 빅4 배급사의 한 곳인 엠카고와 계약을 맺었다. 순조롭게 배급사와 계약한 하상덕은 서정적인 풍경의 시골 마을을 담은 티저 예고편을 각종 포털사이트와 유튜브에 올려놓았다. 또한 홍보자료를 언론사와 인터넷 매체에 보내고, 어린이 관련 사이트와 벙어리 황구 죽돌이를 판매하는 온라인 서점에는 배너 광고를 내보냈다.
하상덕과 엠카고는 개봉 일주일 전에 언론배급 시사회를 열었다. 시사회가 끝난 후 시여 곳의 인터넷 및 언론 매체에서 기사를 내주었다.
‘비수기에 개봉하는 볼만한 영화 5편’
<2월, 3월은 개강, 개학과 맞물려 극장가 비수기다. 비수기 시즌에는 상업영화의 비중은 줄어들고 독창적인 메시지와 영상미를 품은 예술, 독립 영화들이 극장가를 노크한다. 특히 국내 영화들은 예술 영화, 다큐멘터리, 드라마, 어린이 영화 등 다채로운 장르로 관객들의 취향을 저격한다.
3월을 여는 첫 주에는 하상덕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벙어리 황구 죽돌이가 4일 개봉한다. 하상덕 감독은 날아라, 왈패, 형과 함께 등 어린이 영화를 전문으로 제작 했다. 이번에도 어린이 영화를 가지고 부모를 동반한 어린이 관객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벙어리 황구 죽돌이는 작년 여름 출간되어 지금까지 2만 8천 부가 넘게 팔린 동명 베스트셀러 그림동화책이 원작이다. 어린이 독자에게 이미 인정받은 벙어리 황구 죽돌이는 탄탄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선사하는 만큼 하상덕 감독은 물론 배급사 엠카고는 흥행을 자신하고 있다.
상영관은 150여 개관이다.
두 번째 소개할 영화는 조안. 20대 직장 여성 조안의 평범한 일상을 밀착해서 감정선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는 영화다. 어느 날 조안은 자신의 일상을 불안하게 흔드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아이와 자폐 개의 우정이 주는 교훈”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름답게 승화된 죽돌이 이야기”
“서정적인 영상이 돋보이는 벙어리 황구 죽돌이”
제목만 보더라도 대부분 기사가 호의적이었고 악평은 거의 없었다.
기사를 살펴본 하상덕은 언론 평이 호평 일색이라는데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비수기에 개봉하지만 개봉관 수가 상당히 많아 크게 만족했다.
*
3월 4일 목요일.
벙어리 황구 죽돌이가 비교적 조용히 개봉했다.
어린이 영화 특성상 영화 상영 시간은 대부분 오전과 낮 시간대에 배정되었다.
충무로역 근방 멀티플렉스 영화관.
강수와 주하, 임해영, 김종대, 이동석이 참새처럼 시끄럽게 재잘대는 아이들과 섞여 영화관에서 나왔다. 강수는 주하와 친구에게 연락해 개봉 첫날 벙어리 황구 죽돌이를 관람한 것이다.
이동석이 옆에서 걷고 있는 임해영을 힐긋거리며 말했다.
“강수야, 영화 괜찮다. 부모하고 같이 온 어린이 관객이 꽤 되더라.”
김종대가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게. 어른도 볼만 하니까 입소문만 나면 아이 있는 부모들이 많이 올 것 같은데?”
“참, 강수야. 너 이 영화에 판권료 오천 투자했지?”
“그래.”
“잘 투자했다. 나오면서 보니까 아이들이 신나하더라. 아이 엄마들은 영화 잘 만들었다고 칭찬하던데.”
“글쎄? 본전만 건저도 성공이지. 31만 정도 관객이 들어야 손익분기점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과연 31만 명이나 관람할까?”
“음, 31만 명이면 쉽진 않겠다.”
강수 옆에서 팔짱을 끼고 걷던 주하가 말했다.
“아닌데. 내가 봤을 땐 영화 흥행할 것 같은데요? 그렇죠? 해영 언니.”
주하가 동의를 구하듯 임해영에게 물었다.
“응. 이야기도 감동적이고 죽돌이하고 종구가 너무 귀엽다. 조카가 셋인데 전부 데리고 와서 보여줘야겠어.”
이동석이 임해영을 자꾸 힐끔거리며 훔쳐보았다.
이동석의 시선을 느낀 임해영이 이동석을 째려보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 아닙니다.”
당황한 이동석이 고개를 홱 돌려 앞을 보고 걸었다.
“앗, 저기 카페다. 강수야, 저기 들어갈까?”
이동석이 어색했는지 팔을 들어 과장되게 외쳤다.
“그래. 괜찮아 보이네. 들어가자.”
일행이 카페에 들어갔다. 각자 커피와 간단히 먹을 것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 강수가 주하와 임해영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여자 친구 김주하. 이분은 주하 경호원 임해영 씨. 여기는 친구이자 대학동기, 김종대, 이동석이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영화관에서 통성명은 했었기 때문에 이름은 서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수가 말한 경호원이라는 단어가 이해되지 않았는지 김종대는 속으로 물음표를 던졌다.
‘주하 씨를 경호하는 경호원? 뭐야! 개인 경호원을 고용할 정도면 주하 씨 집안이 얼마나 부자인 거야? 대박이다!’
반면 이동석은 눈을 멀뚱히 뜨고 임해영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경호원이라고?”
임해영이 틈만 나면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이동석에게 톡 쏘아붙였다.
“경호원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이동석이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예? 알죠. 내가 바보도 아닌데 그걸 모르겠어요?”
비로소 강수가 말한 의미를 파악한 김종대와 이동석이 놀란 얼굴로 주하를 쳐다보았다.
주하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해영 언니를 제 경호원으로 고용한 거예요.”
“와,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경호원을? 할아버지가 어마어마한 갑부신가 봐요?”
“건물 몇 채 갖고 있을걸요. 생각처럼 어마어마한 부자는 아니에요.”
“건물 몇 채요?”
할아버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내키지 않은 김주하가 일부러 화제를 바꿨다.
“두 분은 화가겠네요?”
“네. 전업 화가로 생활하는 게 만만하지 않지만,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동석이 목소리에 힘을 줘서 말하며 임해영의 반응을 슬쩍 살폈다.
임해영은 표정의 변화 없이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있었다.
“강수오빠 친구는 처음 만나요. 만나서 반가워요.”
“동감입니다. 해영 씨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앞으로 자주 만나 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임해영이 사무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강수 씨 친구라니 보고 싶지 않아도 가끔 보겠네요.”
임해영의 사무적인 어조에 풀이 죽은 듯한 얼굴의 이동석을 본 김주하가 임해영의 쌀쌀맞은 태도를 무마하려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우리 앞으로 자주 봐요. 같이 밥도 먹고 이렇게 영화도 보고고요.”
임해영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 이동석을 보며 김종대가 피식 웃곤 주하에게 물었다,
“주하 씨는 대학생 같은데 맞죠?”
“예? 호호. 대학은 작년에 졸업했어요. 지금은 어엿한 사회 초년생이죠.”
“아, 너무 앳돼 보여서 대학생인 줄 알았지 뭡니까?”
“어머, 고마워요.”
“주하 씨, 강수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강수오빠요?”
주하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강수를 바라보았다.
주하와 눈빛을 맞춘 강수는 경포대에서 처음 보았던 수영복 입은 주하와 임해영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둘 다 엄청 날씬했지.’
문득 주하가 웃긴 기억이 떠올랐는지 웃음을 흘렸다.
“킥.”
“왜요?”
“경포대에서 만났는데 그때 얼마나 황당했는 줄 아세요?”
기운을 차린 이동석이 흥미를 보였다.
“경포대에서 무슨 일 있었나요?”
“해수욕 끝나고 강수오빠가 연필초상화 그려줬거든요. 고마워서 저녁이라도 사려고 했는데 강수오빠가 식사 초대를 거절하고 이장님 댁에 간다지 뭐예요.”
“이장님 댁이라뇨? 거길 왜 가죠?”
김종대가 생각났다는 듯이 무릎을 쳤다.
“그리고 보니 강수가 작업한다고 강원도에 가서 방을 얻었는데 거기가 이장님 댁인가요?”
“맞아요. 늦게 들어가면 이장님한테 미안하다면서 간 거 있죠?”
“헐, 이런 미녀 두 분과 저녁 식사를 마다하고 강원도 시골집 골방에 갔단 말이야. 도대체 넌 무슨 생각을 하며 사냐?”
“강수오빠가 너무 한 거죠?”
어이없다는 얼굴의 이동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연하죠. 주하 씨 같은 미녀가 저녁 식사 하자는데 어떤 남자가 싫다고 하겠어요. 하여튼 강수는 별난 친구라니까요.”
“그래서 강수오빠한테 관심이 생기고 더 끌렸던 거 같아요.”
“네? 자존심 상하거나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끌려요?”
주하가 긍정의 의미로 생긋 미소를 지었다.
주하는 자신의 저녁식사 초대를 거절하고 시골 이장 집으로 가는 강수에게 호기심과 호감을 느꼈다. 물론 눈길을 잡는 잘생긴 외모와 에너지 넘치는 강인한 육체에 끌리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부드럽고 예의 바른 행동과 여자에 대한 담백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이강수라는 사내는 한눈팔지 않는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동석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초록은 동색인가 봅니다. 주하 씨도 강수 못지않네요.”
이동석이 임해영을 보며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치듯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같은 색깔 여성을 만나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분명 어딘가 있을 텐데 말이죠. 옛말에 인연은 가까운 데 있다고 하는 데 정말 그럴까요?”
“나한테 묻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요. 그냥 혼잣말입니다.”
이동석이 왜 인연 타령하는지 뻔히 알고 있는 종대가 속으로 킥킥 웃으며 장난처럼 말했다.
“동석아, 네가 제부터 동색을 따졌어? 네 기준은 그냥 좀 예쁜 여자 아니었나?”
이동석이 눈을 크게 뜨고 임해영과 김종대를 번갈아 보며 펄쩍 뛰었다.
“야,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하지도 않은 말을 날조하고 그래.”
이동석이 임해영에게 팔을 저으며 해명했다.
“해영 씨, 아닙니다. 지금까지 연애도 제대로 한 번 못 해봤는데 종대가 장난치는 거예요.”
임해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사실이든 아니든 나하고 상관없거든요. 신경 끄세요.”
“아, 예.”
이동석은 영화관에서 임해영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이 순간, 이동석은 김동대가 뿌린 잿가루에 절망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이동석이 도끼눈으로 김종대를 째려보았다. 이동석이 눈으로 도끼를 발출할 수 있는 초능력자였으면 김종대는 반으로 갈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동석이 의외로 진지하다는 사실을 안 김종대가 멋쩍게 웃으며 재빨리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