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그림 그리는 마법사 - 90회
2020년 경자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고 2021년이 환희와 희망을 품고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
이색지대 탐방에서 핑크티티 조상화를 그린 화가로 소개된 이강수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고 잠시 화젯거리가 되었으나 연말연시 분위기에 휩쓸려 자연스럽게 대중과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다만 미술계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몇몇 미술관계자나 컬렉터에게 이강수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40대 초반의 이필성은 미술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의 한 명이었다.
중후한 남성의 인상을 풍기는 이필성은 예술품에 투자하는 컬렉터이자 개인 사무실을 운영하며 예술품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가졌고, 기업가나 성공한 전문직 종사자, 자산가 등 고가의 미술품에 투자할 수 있는 부유층이 그의 주 고객층이었다.
이필성은 고객에게 투자할 만한 예술품을 고급 상품처럼 화려한 카탈로그나 자료를 통해 추천하고, 작품구매 의뢰를 받으면 고객의 취향과 요구에 맞는 작품을 찾아내 작가와 작품에 대해 자세하게 컨설턴트 해주고, 작품 구매 시 커미션을 받았다. 그의 데이터베이스에는 국내외 예술가 수천 명에 대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가능성이 엿보이는 새로운 화가나 예술가에 대한 자료를 꾸준하게 업데이트했다.
이필성은 포털사이트에서 기사를 검색하던 중 이색지대 탐방에서 다룬 핑크티티 초상화에 관련한 기사를 접했다. 기사 내용에 호기심이 생긴 이필성은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이강수라는 화가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데이터베이스에 한 명 추가될 수 있었다.
이필성은 이강수를 검색해 작가 이력과 작품 활동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음, 18년에 홍우대를 졸업하고 주로 일러스트 하느라 단체전 몇 번 참가한 경력 외에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않았군. 일러스트 하다 화가로 전향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이강수는 성공한 케이스로군.’
이강수는 작년 7월 한국청년화가 12인전과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하면서 갑작스럽게 출현한 신인화가였다. 그리고 핑크티티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필성은 조사한 기본적인 내용을 정리해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핑크티티 초상화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와 카페를 찾아갔다.
카페에 도착해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이필성은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20여 명의 손님을 볼 수 있었다.
‘커피 맛이 좋으니까 여기 오면 커피를 마시라고 했는데 역시 사람이 많군. 진짜 커피 맛이 좋은지 어떤지 에스프레소를 마셔봐야겠지?’
이필성은 뒷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차례가 줄어들었고, 미소를 띤 밝은 인상의 여직원과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 주문받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차례가 돌아오자 이필준은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순번이 찍힌 주문표를 받아 옆으로 물러났다. 잠시 후, 에스프레소를 받은 이필성은 빈 테이블이 없어 창문 쪽에 ㄱ자로 된 기다란 탁자에 앉았다. 먼저 에스프레소의 향을 깊이 음미하고 크레마를 맛본 후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다.
‘음, 향과 맛은 확실히 괜찮군.’
커피 맛에 흠잡을 데 없이 만족한 이필성은 뭔가 그림에 대한 기대도 높아졌다.
흡족한 기분으로 에스프레소를 마신 이필성은 천천히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맛있는 과자는 두고두고 조금씩 아껴 먹어야 제맛이다. 한꺼번에 다 먹으면 진정한 맛도 모를뿐더러 아쉬움이 크다.
기대를 품고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작품의 가치를 품평할 것이다.
이필성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섰다. 인터넷으로 핑크티티 초상화를 살펴보았지만, 원화를 보는 것과 모니터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2층에서 여자아이들의 하이 톤 음성과 사람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섰다.
‘사람이 많군.’
대부분 테이블에 사람이 앉아 있거나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초상화가 걸려 있는 벽에 모여 있었다. 이필성은 세나 명찰이 붙어있는 곳으로 가 사람 틈에 섞여 초상화에 시선을 주었다.
한참 세나 초상화를 바라보던 이필성이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으음.’
자신이 예술품 컨설턴트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와 예술성, 대중성을 꿰뚫어 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안목 때문이다.
자신의 안목으로 볼 때 세나의 초상화는 AA급이었다.
이필성은 예술품을 평가할 때 자신만의 독특한 기준을 적용해서 레벨을 분류 했다. 가장 높은 단계는 S급 세 단계이고, 그다음이 A급 세 단계, 그 아래는 B급, C급이다.
S급 세 단계 중 SSS급은 작품성과 예술성은 물론이고,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천상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흐나 고갱, 피카소, 자코메티, 클림트, 뭉크, 잭슨 폴락 등 전설적인 작가의 작품이 이 범주에 속한다. 작품 가격은 1억 달러 이상이다.
SS급은 역시 전설적인 작가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작품과 게르하르트 리히터, 로이 리히텐슈타인, 에곤 실레, 데미안 허스트, 제프 쿤스 등의 작품으로 수천만 달러 대의 작품이며 S급은 김환기, 박수근, 마그리트, 피터 도그이, 무라카미 다카시, 장샤오강 등 제법 많은 작가가 포진하고 있는 수백만 달러 대의 작품이다.
AA급은 AAA급 다음 레벨로 가격대만 적정하면 이유 불문하고 구입할 수 있는 작품이다. 금액으로 따진다면 최소 억대의 가치가 내재해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 작가의 명성에 따라 가치는 동반 상승한다.
자신의 평가가 100% 맞지는 않지만, 통계를 보아도 자신이 컨설턴트 한 작품은 60%가 넘는 확률로 가격이 몇 배로 상승했다. 하락한 작품도 있긴 했으나 10%에 불과했다
레벨은 이필성 개인적인 기준에 의한 분류이며 영업상의 노하우처럼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될 뿐 외부나 타인에게 언급할 일은 없었다.
‘이런 보물이 카페에 걸려 있다니!’
이강수의 작가 이력을 검색한 이필성은 핑크티티 초상화를 최고 A급 레벨로 예상했다. A급은 구매 추천 레벨로 작품성이 뛰어나 장기적으로 작품가가 올라가는 작품이다. 맛있는 과자는 아껴먹어야 한다는 이론도 잊고 그는 황급히 자리를 옮겨 다른 초상화도 살펴보았다.
‘이럴 수가!’
전부 AA급이었다.
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해도 컨디션이나 작품 아이디어, 채색, 구도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작품의 완성도는 천차만별이다. 피카소의 작품을 보더라도 작품에 따라 가격은 수백억 원 이상 차이 난다.
이필성은 데이터베이스에 즉각 이강수를 추가하고, 탁자를 치우고 있는 종업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가씨. 카페 사장님을 만나고 싶은데 어디 가면 볼 수 있을까요?”
“사장님이요? 아래층에 계실 거예요.”
“고마워요.”
아래층으로 내려간 이필성은 주문을 받는 주문대의 종업원에게 물었다.
“아가씨, 사장님과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요?”
“무슨 일로 그러시죠?”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거든요.”
여종업원이 뒤에서 에스프레소를 뽑고 있던 노민석을 바라보았다.
노민석이 여종업원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과 함께 에스프레소를 뽑고 있는 연주에게 말했다.
“연주야,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 수고 좀 해줘.”
“예, 사장님. 다녀오세요.”
이필성에게 다가간 노민석이 매장 한쪽에 위치한 사무실로 이필성을 안내했다.
“손님, 이쪽으로 오시죠.”
노민석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간 이필성이 먼저 양해를 구했다.
“바쁘신데 시간 뺏어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요?”
“예. 나는 이런 일을 합니다.”
이필성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노민석에게 건넸다.
‘아트 컨설턴트 이필성’
이필성이 미간을 좁히는 노민석을 보며 재빨리 말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핑크티티 초상화 혹시 판매할 의향이 있는지요?”
가끔 초상화의 판매 여부를 묻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노민석은 이필성의 용건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한데 이필성이라는 사내는 일반인이 아니라 예술품에 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다. 핑크티티 초상화를 예술 작품 전문가가 관심을 보일 정도면 작품의 가치가 높다는 얘기였다.
노민석이 미간을 펴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초상화는 제 소유가 아니라 대여한 작품입니다. 판매할 수 없습니다.”
“아, 대여한 작품이었군요. 혹시 누구에게 대여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노민석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 주인 이강수를 알려주면 이강수에게 연락해 그림을 사려고 할 것이 아닌가?
이전에도 두 사람이 초상화 판매 의사를 물었을 때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결국 이강수에게 그 사실을 알렸었다. 이강수는 대여를 끝내고 반환하기 전까지 초상화는 팔 생각 없으니 그런 사람이 와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었다.
그때 얼마나 고마웠던가?
노민석은 영업하는 사람답게 낯이 두꺼운 이필성을 노려보았다. 은근히 끓어오르는 노화를 참으며 노민석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림 주인을 말해주면 어쩌려고 그러시죠? 미안하지만 그림 주인은 대여가 끝날 때까지 초상화를 팔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볼일 끝났으면 바빠서 이만 실례하죠.”
“아, 잠깐만요.”
“볼일 끝났다고 말했을 텐데요?”
“작품에 욕심이 나서 무례한 질문을 했네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이필성이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사죄를 구한 이필성이 우려의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그림에 대해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습니다.”
“예? 걱정되는 점이요?”
“지금이야 소문을 듣고 나처럼 호기심에 찾아와 감상하는 차원이지만 그림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림에 욕심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잘못하면 도난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 생각에 도난 방지를 위해 뭔가 조치해 놓는 것이 좋겠네요.”
노민석도 도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지만 설마 하고 가볍게 넘겼었다. 이제 전문가가 도난에 대해 지적하니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설마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점은 제가 소홀했네요. 그림에 안전 장치해 놓겠습니다. 알려주어서 고맙습니다.”
“강화유리 상자를 제작해 벽에 고정하고 그 안에 그림을 보관하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노민석과 사무실 밖으로 나온 이필성은 선암갤러리에 찾아가 이강수 화가의 개인전 일정을 문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
강수는 연말은 주하와 연초는 시골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어느덧 2월 마지막 주 화요일.
지난주 우수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의 차가운 공기가 심술을 부리듯 가끔 남하해 한파를 뿌리곤 했다.
하지만 한기가 물러나고 나면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에서는 봄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성큼 다가왔다.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 벽두부터 작품 창작에 집중한 강수는 개인전에 출품할 작품 24점을 끝냈다.
강수가 남겨 놓은 마지막 작품은 200호 크기의 대작.
주문한 변형 200호(265*170) 캔버스를 기다리고 있지만, 캔버스가 도착해도 작품 구상을 해놓지 못해 작업할 수는 없었다.
‘음, 아이디어 스케치 하러 어디 가면 좋을까? 남산을 올라가볼까? 아니면 한강 둔치로 나가볼까?’
삐리 삐리리리!
무얼 그려야 할지 어디 가서 스케치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초인종 벨소리가 울렸다.
‘캔버스가 왔구나.’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는 두 명의 배달 기사가 캔버스를 들고 서 있었다.
“계단으로 올라오느라 힘들었죠?”
“아니요. 계단이 넓어서 생각보단 쉬웠습니다. 캔버스 걸 곳이 어디입니까?”
강수가 오른쪽 벽을 가리켰다.
“저쪽 받침대 위에 올려놓으면 됩니다.”
강수는 오른쪽 벽에 이젤 역할을 할 수 있는 높이 조절이 가능한 받침대를 제작해 놓았다. 캔버스를 작업 받침대에 올려놓은 두 배송 기사는 아래로 내려가 물감과 제소, 오일, 평붓 등 주문한 화구를 가져왔다.
“주문 내용 맞는지 확인 부탁합니다.”
물품을 살펴본 강수가 대답했다.
“제대로 왔네요.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두 배송기사가 깍듯이 인사하고 돌아갔다.
강수는 문을 닫고 캔버스 앞으로 걸어갔다.
“이야, 200호가 크긴 크구나!”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엄청난 크기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캔버스가 광활한 대지 같았다.
‘200호가 이렇게 큰데 300호, 500호는 얼마나 거대하겠어. 다른 작가가 그린 작품 볼 때는 피부에 와 닿지 않았는데 직접 그리려고 하니 장난 아니군.’
캔버스가 얼마나 큰지 약간 막막함마저 느꼈다.
문득 강수는 300호가 넘는 크기의 커다란 작품을 아트페어 상하이에 출품한 제프 쿤스의 그림과 몇 개의 키치 작품이 떠올랐다. 제프 쿤스는 앤디 워홀의 뒤를 이은 가장 성공한 현존하고 있는 팝아트 작가이며 키치아트의 제왕이라고 불린다.
바나나 다발, 포도송이, 체리 다발 등 과일을 풍선강아지처럼 거대하게 확대해서 고광택 크롬 도금으로 반짝거리는 색을 입힌 작품과 몇 점의 초현실 풍의 그림을 전시한 그의 작품은 예술성이나 작품성을 떠나서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고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팔렸다.
한마디로 팝아트 작품은 예술성과 작품성보다 톡톡 튀는 상상력, 이름값과 대중적인 인기가 그림값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팝아트의 대표작가 앤디 워홀은 대중의 인기에 집착했고, 유명해지기 위해서 늘 유명인사와 사진을 찍었다.
특히 앤디 워홀은 대중매체에 나타난 스타의 이미지에 마약처럼 탐닉했다.
워홀은 19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인 재클린 케네디와 메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으로 재현했고, 존 레넌, 무하마드 알리, 클린트 이스트우드, 발렌티노, 다이애나 빈, 마오쩌둥 등 그의 그림 ‘공장’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유명인사는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를 작품의 소재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