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89화 (89/197)

# 8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89회

농아여성의 모습을 보며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인경 MC가 물었다.

“정진규 리포터.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고, 심지어 감정까지 움직이는 놀라운 초상화를 그려낸 화가는 누구인가요? 너무 궁금하네요.”

“그렇습니다. 시청자분들이 궁금해하실 그 점을 제가 조사해 보았는데요, 세나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이강수입니다. 저는 이강수 화가의 프로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놀랐다고요? 놀랄 만한 이유가 있었나요?”

“저는 초상화의 완성도가 뛰어나서 이름 대면 알 만한 중견작가가 그린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강수 화가는 1018년에 홍우대 회화과를 졸업한 신인화가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올해 초까지 화가가 아니라 어린이 그림동화책에 일러스트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습니다.”

화면에는 강수가 그린 그림동화책 몇 권의 표지를 패닝으로 보여주었다. 마지막에는 숲 속 다람쥐 가족과 벙어리 황구 죽돌이의 표지가 나왔다.

“이강수 화가가 본격적으로 회화 작업을 시작한 때는 올해 7월 선암갤러리에서 개최한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참여하면서입니다. 그리고 두 달 전 시월에는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하여 출품한 다섯 작품이 전부 팔려나가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화면은 핑크티티 멤버의 초상화를 차례차례 보여주었다.

“화가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군요. 정진규 리포터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뜻밖이네요.”

“그렇습니다. 아직 첫 개인전도 개최하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무명화가입니다. 이럴 때 흔히 쓰는 단어가 있는데요,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대형 신인화가가 혜성처럼 등장했다고요.”

“TV 화면으로 핑크티티 멤버의 초상화를 보는데도 손으로 만지면 색깔이 손에 묻어날 것처럼 선명하고 아름답네요. 정말 원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박인경 MC도 시간 나면 원화를 구경해 보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덤으로 따뜻한 커피 한잔의 향기는 추억을 더욱 뜻깊게 할 것입니다. 오늘 이색지대 탐방은 ‘웃어봐’의 차트 역주행의 시발점이 되었던 세나 씨 초상화가 전시된 장소를 찾아와 원화와 화가를 조명해 보았습니다. 저는 무척 만족스러웠던 탐방이었지만 시청자 여러분도 저처럼 만족했을지 궁금하네요. 그럼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정진규 리포터, 수고하셨습니다.”

강수는 정진규 리포터의 과분한 칭찬과 평가에 머리를 긁적이며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우우웅!

그리고 스마트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종대도 봤나?’

강수는 통화를 연결했다.

“종대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냐?”

[너 혹시 이색지대 탐방 봤냐? 네가 그린 핑크티티 초상화가 전시된 카페가 나왔는데.]

“주하가 보라고 해서 봤지.‘

[주하? 주하가 누구냐? 혹시 애인?]

“애인은 무슨. 지금은 편하게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야. 너도 곧 만날 기회가 있을 거다.”

[오, 그래? 하여튼 잘했다. 다음에 친구들 모일 때 소개해라. 그것보다 TV에 나온 거 축하한다. 정진규 리포터가 널 혜성처럼 등장한 대형 신인화가라고 하더라.]

“혜성처럼 등장했다니. 듣는 내 낯이 다 뜨겁더라.”

[정진규 리포터가 네 그림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던데? 그림 보는 눈이 있는 것 같더라. 방송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다뤘으니 넌 이제 뜨는 거 아닐까 싶다.]

“내가 가수도 아닌데 뜨긴 뭐가 뜨냐?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도 아닌데 잠깐 관심 끌다 말겠지.”

[아냐. 우리나라같이 존재감 없는 협소한 미술계에서 일반 대중이 핑크티티 초상화에 관심을 보일 정도면 엄청난 사건이야. 내 생각에는 핑크티티와 함께 너도 뜰 것 같은데? 너 개인전 하면 대박 날 거 같다. 아트페어 상하이에서도 완판 되지 않았냐? 뜨기 전에 네 작품이나 잔뜩 사놔야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헛소리 그만하고 밤이 늦었다. 얼른 잠이나 자라.”

[알았어. 너도 잘 자라.]

전화를 끊고 문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다시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이건 누구야?’

밤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동창과 대학 동기들, 친한 선후배 몇 명, 사촌 등 거의 20여 통의 전화를 받았다. 문자는 더 많이 왔다. 방송에 출연한 것도 아니고 핑크티티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 소개되었을 뿐인데도 축하 전화와 문자에 시달려야 했다.

‘허, 시청률 낮은 방송임에도 불구하고 이럴진대 시청률 좀 나오는 프로그램에 출연이라도 하면 난리 나겠군. 벌써 1시네. 잠 좀 자자.’

강수는 벨소리를 음소거로 해 놓고 침대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새벽에 알람을 듣고 일어난 강수는 피곤이 덜 풀렸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잠자리에 늦게 든 탓에 몸이 찌뿌둥했다.

“회복”

강수는 마나회로 수련을 위해 회복마법으로 몸의 피곤을 씻어냈다. 회복마법은 가능하면 쓰지 않았지만 필요할 때 가끔 사용해 피로를 풀었다.

가뿐해진 몸으로 침대에서 일어난 강수는 스마트폰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새벽 한 시 이후에도 문자는 물론이고,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방송 좀 탄 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연락하지 않던 고등학교 동창 놈들까지 전화했네?’

강수는 스마트폰을 배낭에 넣고 아파트를 나섰다. 아파트 후문으로 나온 강수는 뿌연 보안등 불빛이 밝혀져 있는 골목길을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

마을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마을 뒤는 산으로 둘러싸인 배산임수의 아름다운 마을 파주 장성리.

삼십 여 호가 삶의 터전을 자리 잡고 있는 장성리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또한 이곳은 하상덕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벙어리 황구 죽돌이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해가 산등성이 위로 솟아오르고 마을을 비추었다.

영하 10도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이른 아침부터 연출 스태프, 배우 등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죽돌이와 종구 가족이 지내는 세트장에 모여 서성이고 있었다.

세트장의 한쪽에 세워진 헛간에서 죽돌이의 짝 은비가 출산을 앞두고 부른 배를 핥으며 낑낑대고 있었다.

하상덕 감독은 은비가 출산하는 장면을 한 시간 전부터 촬영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종구 아빠, 종구 엄마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새끼를 낳기 위해 애쓰고 있는 은비를 지켜보고 있었다.

“은비야, 힘내! 넌 할 수 있어.”

종구 엄마가 작은 목소리로 은비를 응원했다.

종구 아빠가 종구 엄마의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인제 그만 들어가요. 이러다 탈 나겠어요.”

“아니에요. 이제 거의 낳을 때가 됐잖아요. 조금만 참으면 되는걸요.”

“은비 이 녀석은 낮에 낳으면 좋을 것을 왜 이른 아침에 진통할 게 뭐야.”

“출산이 어디 내 맘대로 되는 건가요? 몸이 준비되면 출산하고 싶지 않아도 출산하는 게 이치인걸요.”

“그렇긴 한데 당신이 고생하니까 하는 말이에요.”

마당에서는 죽돌이가 헛간을 한번 쳐다보고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또 한 번 쳐다보고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이때, 가옥의 문이 열리고 7살 남짓의 아이가 나왔다.

“죽돌아.”

잠에서 갠 종구가 눈을 비비며 마당으로 나오며 죽돌이를 불렀다.

죽돌이는 밖으로 나온 종구를 본채 만 체하며 자꾸 헛간을 바라보았다. 죽돌이를 따라 헛간을 바라보던 종구가 뭔가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참. 오늘쯤 은비가 새끼 낳는다고 했지? 엄마!”

종구가 엄마를 부르며 헛간으로 달려갔다.

“쉿! 조용히 해. 은비가 새끼 낳고 있단다.”

“정말이요!”

종구는 헛간 한쪽에 볏짚을 깔아 마련해 놓은 곳에서 새끼를 낳는 은비를 바라보았다.

“엄마, 우리가 안 도와줘도 돼요?”

“그래. 잘 보렴. 은비는 우리 도움 없어도 자기 힘으로 새끼를 낳는단다.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아야 새끼들도 엄마 젖 먹고 건강하게 자란단다.”

종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종구야, 은비가 세끼 세 마리를 낳았구나. 탯줄을 끊고 새끼들을 핥아주고 있단다.”

짝짝짝!

종구가 손뼉 치며 폴짝폴짝 뛰었다.

“와아, 드디어 죽돌이가 아빠가 됐네. 죽돌이는 좋겠다아.”

종구가 마당에서 서성이는 죽돌이에게 달려가 죽돌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죽돌아, 죽돌아! 새끼가 태어났어. 세 마리나 태어났대.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멍, 멍!”

종구가 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죽돌이가 꼬리를 흔들며 헛간을 보며 짖었다.

종구 아빠가 헛간 문을 닫고 죽돌이에게 다가왔다.

“죽돌아, 새끼가 보고 싶겠지만 은비가 기운 차릴 때까지 조금만 기다렸다 보자.”

“멍, 멍!”

죽돌이는 새끼를 빨리 보고 싶은지 자꾸만 헛간을 향해 짖었다.

“컷!”

하상독 감독이 컷을 외쳤고 촬영이 종료되었다.

“출산 장면은 NG 없이 잘 끝났습니다. 새벽부터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어.”

“촬영 감독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배우와 촬영 감독, 스태프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NG 없이 마무리된 것을 축하했다.

벙어리 황구 죽돌이의 촬영은 삼일 전에 엔딩까지 끝냈다. 다만 결말에서 가장 중요한 죽돌이의 2세가 탄생하는 순간 때문에 촬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은비의 진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상덕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은비의 출산을 애타게 기다렸다. 드디어 오늘 새벽 출산할 기미가 보인다는 연락을 받고 황급하게 촬영 감독을 깨워 촬영에 임한 것이다.

하상덕 감독이 세트장에 모인 배우들에게 나머지 촬영 일정에 대해 말했다.

“은비와 새끼들이 안정할 시간을 주고 오후 3시에 마지막으로 남은 씬을 찍을 겁니다. 그때까지 편히 쉬면서 각자 촬영 준비하기 바랍니다.”

스태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후 3시에 봅시다.”

현장에 남은 배우와 스태프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남은 한 씬만 찍으면 영화는 후반 작업만 남는다. 배우와 현장 스태프의 역할은 오늘로 끝난 것이다. 사람들은 섭섭한 마음을 뒤로하고 각자가 묵고 있는 민박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종구 아빠 역할을 맡았던 서글서글한 인상의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하상덕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하 감독님, 차기작 때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꼭 불러주십시오.”

“권도욱 씨? 하하, 물론입니다. 죽돌이 개봉 성적이 손해만 나지 않아도 곧바로 다음 작품 준비할 겁니다. 도욱 씨는 종구 아빠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주셨으니 차기작으로 구상하고 있는 키즈수사대도 같이합시다.”

“감사합니다.”

“날도 추운데 들어가 쉬시고 3시에 마지막 씬 찍읍시다.”

“예, 예.”

시원스러운 대답을 들은 권도욱은 환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숙소로 갔다.

하상덕은 키즈수사대 시나리오를 폐기하려고 했다가 벙어리 황구 죽돌이를 찍으며 아이디어가 떠올라 시나리오 수정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기존의 키즈수사대는 다섯 명의 아이들이 친구 집을 도둑질한 범인을 쫓는다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문제였다. 그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는 '실종된 친구의 애완견 발발이를 찾는다'였다.

추적 대상을 애완견으로 바꾸면 비현실적인 설정이라는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현실적인 설정이나 소재도 다둘 수 있다.

하상덕은 실종된 애완견 발발이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다섯 아이들이 겪는 모험으로 시나리오를 수정, 보완해서 투자사와 다시 미팅할 계획이었다.

‘후후, 그런 식으로 수정만 하면 투자 유치는 어려울 것 없어. 죽돌이 덕분에 사장될 뻔했던 키즈수사대가 빛을 보게 될 줄이야. 흐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나네 집에 가서 이강수 작가의 그림동화책을 발견한 것이 행운이었단 말이야. 이제 좀 쉬었다 마지막 씬을 찍어야지.’

하상덕은 스태프가 쉬고 있는 세트장으로 들어갔다.

*

작업실에서 작품 구상하고 있던 강수는 하상덕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하 감독님, 안녕하세요?”

[이 작가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잘 지내시죠?]

“예. 전 별일 없죠. 촬영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요?”

[하하. 그렇지 않아도 촬영 끝나서 보고 드리려고 전화 한 겁니다.]

“아, 벌써요? 상당히 빨리 끝냈네요?”

[저예산으로 영화 찍으려면 촬영 일수를 최대한 줄여야 하거든요. 이번 작품은 다른 작품에 비교하면 촬영 기간이 두 배나 더 걸려서 사실 빨리 끝난 건 아닙니다. 다른 감독들에 비해 빠른 것이지 제겐 그냥 무난한 수준이죠.]

“네. 그렇군요.”

[연말연시라 신정 지나면 후반 작업에 돌입합니다. 후반 작업도 특수효과 같은 장면이 없어서 두 달 안에 마칠 계획입니다. 후반 작업 시작하면 각종 매체에 홍보 자료 배포하고, 배급사 타진하고 개봉 날짜 조율할 겁니다. 내년 이삼월이면 영화계가 비수기라 상영관 잡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네. 흥행에 꼭 성공하면 좋겠네요. 그래야 저도 투자금 회수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하. 물론입니다. 이번 영화는 스토리가 워낙 탄탄해서 말아먹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럼 수고하시고 다음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강수는 피식 웃었다.

저예산 영화를 만들어본 이력답게 촬영 속도가 빨랐다. 특수효과가 한 장면도 들어가지 않아서 후반 작업도 막힐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상덕 감독 말대로 후반 작업이 진행되면 벙어리 황구 죽돌이 개봉이 멀지 않은 셈이었다.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괜히 궁금하네. 뭐, 때가 되면 개봉하겠지. 내 일이나 하자.’

속도전으로 영화를 찍은 하상덕 감독처럼 하루빨리 개인전 작품을 끝내야겠다고 강수는 결의를 굳게 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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