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87화 (87/197)

# 8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88회

*

계획대로 경자년이 지나가기 전 포트폴리오 6작품을 끝낸 강수는 마지막으로 마무리 지은 작품을 미니 부스로 옮겼다.

‘3월까지 15점을 끝내려면 한 달에 5 작품씩 그리면 되는군. 지금 속도면 한 달에 7점은 끝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별일만 없으면 3월 중순에는 공주와 나무꾼을 그릴 수 있겠구나.’

20여 장에 이르는 그림동화책을 그리려면 빠르면 일주일, 넉넉잡아 열흘 정도 걸릴 것이다. 회화 작업을 하다 일러스트를 그리면 회화 작업의 흐름이 끊어진다. 개인전 작업을 끝내고 이어서 일러스트 작업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느새 창밖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열한 시.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시간 참 빠르게 흐르네.’

우웅!

스마트폰이 울었다.

‘주하 전화구나.’

강수는 통화를 연결했다.

“오빠! 지금 바빠요?”

“아니. 하던 작업 마무리 지어서 지금은 한가해.”

“그럼 열한 시에 하는 DBC 연예가 이색지대 탐방이라는 프로그램 봐요. 오빠 그림에 대해 다룬대요.”

“내 그림을?”

“핑크티티 초상화를 취재한다고 하니까요. 오빠 그림이죠.”

“나보다는 핑크티티를 비중 있게 취재하는 것 아닐까? 하여튼 봐 볼게. 전화 끊는다.”

“넹. 광고 끝나가요. 얼른 틀어요.”

“알았어.”

강수는 컴퓨터를 켜고 방송국의 TV 프로그램을 찾아 열었다.

화면에 세련된 오피스룩을 입은 서구적인 외모를 한 미모의 진행자 박인경이 나타났다.

"시청자여러분, 안녕하세요? 연예가 이색지대 탐방의 박인경입니다. 오늘은 차트 역주행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핑크티티와 관련해서 이색지대를 탐방합니다. 그곳이 어디냐고요? 정진규 리포터와 함께하시죠. 정진규 리포터!"

"예, 정진규입니다."

화면이 바뀌고 20대 후반의 깔끔한 외모에 시원스럽게 생긴 정진규가 밝게 웃으며 나타났다.

MC 박인경이 멘트를 했다.

“현재 핑크티티의 노래 ‘웃어봐’가 차트 역주행으로 각종 음원 차트에서 5위 안에 랭크되어 정상 등극을 사정권에 두고 있는데요, 굉장한 일이죠?”

“그렇습니다. 핑크티티는 EXID의 닮은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핑크티티는 2014년 차트 역주행으로 단숨에 정상급 걸그룹으로 발돋움한 EXID를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당시 무명 걸그룹 EXID는 ‘하니’를 찍은 직캠이 시발점이 되어 ‘위아래’가 차트 역주행으로 1위까지 치고 올라가며 대세 걸그룹으로 화려하게 등장했죠. EXID가 최초로 걸었던 길을, 배턴을 이어받은 핑크티티가 ‘웃어봐’로 그 길을 가고 있는데요, 아쉬운 점이라면 1위 문턱에서 주춤거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진규 리포터는 ‘웃어봐’가 음원 차트 1위까지 올라갈 것으로 보시나요?”

“‘웃어봐’는 언제든지 1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저력이 있지만 저번 주에 이어 이번 주도 각종 음원 차트 5위 내외에서 머무는 현재의 흐름으로 판단해보면 정체의 상황이고, 부분적으로 하향세 기미가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1위는 좀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요. 어쨌든 핑크티티는 EXID보다 더 긴 5년 동안 무명 시절을 보낸 끝에 화려하게 대중 앞에 등장했잖아요? 이제 무명 생활은 끝났다고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대부분 멤버가 각종 예능프로그램에 초청되어 타고난 예능감을 선보이며 대중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어서 EXID의 뒤를 이을 대형 걸그룹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말 기대되는 걸그룹이 출현한 것 같습니다. 오늘 찾아간 이색지대는 핑크티티와 관련 있는 곳이죠?”

“네. 핑크티티와 밀접한 물건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제가 바로 그 장소를 찾아왔습니다. 핑크티티 역시 EXID 하니의 직캠처럼 차트 역주행의 시발점이 있는데요, 박인경 MC는 ‘웃어봐’의 차트 역주행이 시작된 시발점을 알고 있습니까?”

박인경 MC가 고개를 꺄웃하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웃어봐’의 차트 역주행 시발점이 된 계기가 따로 있는 건가요?”

“아마 핑크티티 팬들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겠지만 대부분 일반 시민은 잘 모르실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시발점을 명확하게 알려드리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본 리포터는 핑크티티 ‘웃어봐’의 차트 역주행 방아쇠를 당긴 시발점, 세나의 초상화가 전시된 장소를 찾아왔습니다. 제 뒤에 보이는 거리는 바로 성수동 카페거리입니다.”

“아, 세나의 초상화가 차트 역주행의 시발점이었군요?”

“그렇습니다. 세나의 초상화가 차트 역주행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시죠?”

“초상화라면 그림인데요, 뮤직비디오도 아니고, 직캠도 아니고 그림이 ‘웃어봐’의 인기를 견인했다는 점이 믿기지 않네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세나 초상화가 ‘웃어봐’ 차트 역주행의 시발점이 된 것이죠?”

“저 역시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는데요, 핑크티티 팬카페에 올린 세나의 초상화에 ‘웃어봐’를 링크해 놓았고요, 그것이 팬카페에서 이슈가 되면서 SNS를 비롯해 각종 매체로 퍼져나갔죠. 허니의 직캠이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듯이 세나의 초상화와 초상화에 링크된 ‘웃어봐’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나의 초상화가 어떤 그림이고, 누가 그린 그림이기에 대중의 관심을 끌었는지 지금 그 의문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화면은 카페거리를 걷는 리포터 정진규를 따라갔다. 정진규는 한 카페 앞에 멈춰 섰다. 카메라는 카페 전경을 화면에 담았다.

“이 카페에 세나의 초상화는 물론이고 나머지 네 멤버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상당히 많은 손님으로 매장이 붐비고 있습니다. 이렇게 손님들이 붐비는 이유는 많은 분이 핑크티티 다섯 멤버의 초상화를 감상하려고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초상화를 감상하기 위해 카페를 찾아왔는지 제가 직접 손님과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정진규리포터가 젊은 두 여성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시도했다.

“안녕하세요. DBC 연예가 이색지대 탐방의 정진규 리포터입니다.”

카메라가 다가가자 두 여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정진규 씨다. 반가워요.”

“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절 알아보시는 걸 보니 이색지대 탐방을 자주 시청하시는군요.”

“네. 자주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시청해 주실 거죠?”

“네. 물론이죠.”

정진규의 너스레에 두 여성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한데 두 분께선 이 카페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했거나 커피가 맛있어서 오셨나요?”

정진규의 질문을 받은 여성은 진녹색의 패딩을 입어서 몸매를 가렸지만 마르고 연약해 보였고, 아담한 신장에 눈이 유난히 컸다. 가냘픈 몸에 사슴처럼 순수해 보여 남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성이 수줍게 미소를 짓더니 옆의 여성을 보며 손가락으로 뭔가를 표현했다.

“아, 수화인가요?”

“예, 맞아요.”

“이분이 뭐라고 했습니까?”

보통 키에 적당한 체구의 단발머리 여성이 소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친구가 볼만한 그림이 있다고 추천해서 오게 됐어요, 라고 얘기했습니다.”

“볼만한 그림이요? 카페에 대중적으로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라도 걸려 있나요?”

이번엔 단말머리 여성이 직접 대답했다.

“유명 화가의 그림은 아니고요. 이 카페에 핑크티티 다섯 멤버인 세나, 지영, 소냐, 서린, 진하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어요. 친구가 그러는데 그림의 색감과 인물의 분위기가 독특하고 환상적이라면서 가서 보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왔어요.”

“그러니까 커피를 마시러 온 것이 아니라 초상화를 감상하러 카페를 찾아왔다는 말씀이군요.”

“맞아요.”

정진규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1층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초상화라고 할 만한 그림이 보이지 않습니다. 초상화는 2층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아메리카노 한 잔 주문해서 2층으로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도 같이 가실까요?”

“네. 좋아요.”

화면이 주문대 앞으로 걸어가는 정진규와 두 젊은 여성을 쫓아갔다. 잠시 후 주문 차례가 된 정진규와 두 여성에게 여직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2층은 자리가 다 찼습니다. 1층에서 드시겠습니까?”

“네? 2층에 좌석이 몇 개인데 다 찼습니까?”

“30개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정인규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30개 탁자가 준비된 2층 좌석이 매진됐다고 합니다. 장사가 너무 잘되고 있네요. 1층도 자리가 넉넉해 보이진 않기 때문에 일단 1층에 자리를 잡아놓고 2층으로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자 커피와 사이드 메뉴를 주문한 세 사람이 1층에 한 자리 차지했다.

“늦었으면 이 자리도 없을 뻔했습니다. 일단 자리를 차지했으니 커피 맛을 보고 2층으로 올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진규가 한 모금 커피를 마시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몇 모금 더 마셨다.

“오, 커피가 생각보다 맛있습니다. 커피 향이 은은하고 커피 본연의 쓴맛마저 달달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소하네요. 하지만 커피 맛을 보러 온 것이 아니죠? 이제 슬슬 2층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정진규가 블랙 케익을 먹고 있는 두 여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진규의 시선을 따라서 카메라도 움직여 두 여성을 비추었다.

“두 분도 초상화를 보러 왔다고 했으니 함께 올라가실까요?”

“좋아요.”

블랙 케익을 먹고 있던 두 여성이 아쉬운 듯 접시에 남은 블랙 케익과 에스프레소를 힐끔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진규가 앞장서서 걸어갔고, 두 여성이 정진규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핑크티티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는 2층에 올라왔습니다.”

2층으로 올라오면 실내가 한눈에 다 보이는 구조였다. 화면이 2층 실내를 천천히 패닝 하며 보여주었다.

“보시면 알겠지만 군데군데 사람들이 모여서 초상화를 감상하고 있습니다. 초상화 앞에는 편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조명을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테이블을 놓지 않았군요. 직접 보기로 하겠습니다.”

정진규가 대여섯 명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가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연예가 이색지대 리포터 정진규입니다. 실례 좀 해도 될까요?”

“어, DBC다. 와, 방송국에서 왔네.”

“핑크티티가 뜨니까 초상화도 취재하는구나. 대박이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저씨, 우리도 티브이에 나와요?”

정진규가 짖궂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생방송이 아니라 그건 나도 모른단다. 자리 양보해줘서 고마워.”

세 여학생이 비켜준 자리로 두 여성과 정진규가 들어갔다. 그 뒤를 카메라맨이 뒤따랐다.

“드디어 웃어봐의 차트 역주행을 촉발한, 세나의 초상화 앞입니다. 일단 그림부터 보시죠.”

카메라가 4K 화질로 세나의 초상화를 화면에 담기 시작했다.

나직한 감탄하는 목소리와 함께 정진규가 멘트를 시작했다.

“그림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전체적으로 색감이 마음을 편하게 하고, 세나의 미소는 절로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군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세나의 밝은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른 대지에 촉촉한 단비를 뿌려주는 듯 메말랐던 감정을 살아나게 해 주는 듯합니다. 취재 나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세나 초상화를 보았을 때는 이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요, 원화가 전해 주는 분위기는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느낌이 다릅니다, 한 마디로 초상화에서 후광이 비추는 듯합니다.”

카메라는 세나 초상화를 화면에 꽉 차게 담고 있었다.

“그림 한 점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냐고 하실 시청자도 계실 텐데요, 옆에 있는 분에게 소감을 물어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친구 말대로 오길 잘했나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림을 보고 있던 단발머리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친구 말이 맞았어요. 직접 보니까 세나 씨가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아요. 신기해요.”

이때, 화면이 움직였고, 카메라는 목소리를 잃어버린 농아여성을 비추었다.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클로즈업되었다. 말없이 세나 초상화를 바라보는 그녀의 사슴처럼 맑고 커다란 눈에서 물기가 차올랐다.

카메라는 눈에 맺힌 물방울이 한 방울 또르르 뺨으로 흘러내리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강수는 농아 여성의 뺨에 굴러 내린 한 방울의 눈물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왜 눈물을 흘리는 걸까?’

세나와 비교되어 자신의 처지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일 수도 있고, 세나 초상화에 감정이입 되어 흘리는 눈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행복해도 눈물이 날 수 있으니까.

강수는 순수한 모습의 여성이 행복한 감정을 느끼고 흘리는 눈물이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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