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86회
[문자가 왔습니다.]
문자 알리미의 사무적인 목소리를 들은 강승호는 검토하고 있던 그림책 자료를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엇? 이 작가다! 작품을 검토해 달라고?’
이강수에게 차기작을 고려해 달라고 전화한 것이 이틀 전이었다. 이강수는 시간이 없다며 개인전 작품 끝내고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한데 오늘 작품을 검토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무슨 작품을 검토해 달라는 거지?’
일단 메일에 접속에 이강수가 보낸 파일을 확인했다. 하나의 압축파일이었다.
압축파일을 풀어보니 20여 개의 jpg 파일이 나왔다.
‘jpg 파일이면 그림 파일인데? 설마 개인전 작품을 봐달라는 건가?’
자신에게 개인전 작품을 검토해 달라고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의문을 품고 그림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그림 파일을 한 장 한 장 확인하는 강승호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아, 새 작품이 맞았네! 설마 어제, 그제 이틀 동안 이걸 전부 구상하고 그린 거야?’
믿기지 않았지만, 자신의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기다리던 작품이었지만 기쁨보다 놀라움이 더 컸다. 이강수의 새 작품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헐, 놀랍군. 크리스마스 선물인가? 하여튼 새 작품 샘플이 나왔으니 검토해봐야지.’
강승호는 20장의 그림 파일을 4장씩 인쇄 명령을 내렸다.
사무실 구석 한쪽에 설치된 복합기가 작은 기계음을 내며 출력을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승호가 팀원에게 소리쳤다.
“모두 주목.”
기획편집팀 인원이라고 해봐야 강승호를 포함해서 전부 4명. 그것도 한 달 전 경력사원 유가은이 합류해 식구가 한 명 늘어난 것이다.
전수민 대리, 사원 유가은, 사원 허상배가 무슨 일이냐는 듯한 얼굴로 강승호를 바라보았다.
팀원을 훑은 강승호가 입가에 느글느글한 미소를 흘렸다.
“흐흐.”
전수민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팀장님은 희소식만 있으면 저런 흉한 미소를 짓는단 말이야. 그냥 통쾌하게 웃으면 좋을걸.’
“드디어 이강수 작가가 새 작품을 검토해 달라고 보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식에 놀란 전수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탄성을 질렀다.
“와, 정말이요.”
“작품 제목이 뭐예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팀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물어보았다.
문득, 전수민이 열심히 출력물을 뽑아내고 있는 복사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저게 이 작가님이 보내온 거군요.”
강승호가 팔을 들었다.
“자자, 진정하고. 상배야, 출력하고 있는 거 가져와라.”
“예.”
후닥닥 복사기 앞으로 가서 출력물을 본 허상배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우와! 그림도 있네?”
허상배가 출력물을 정리해서 4부로 만들어 가져와 한 부씩 나눠주었다.
“자, 요즘 가장 핫한 이 작가의 따끈따끈한 새 작품, 공주와 나무꾼이다. 이 작품부터 검토할 거니까 하던 일 중단하고 회의실로 모여라.”
“네.”
우렁차게 대답한 편집기획팀 직원 3명이 회의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
강수는 공주와 나무꾼 이야기를 강승호에게 넘기고 후련한 마음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머리를 식힐 겸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뭔가 부족한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현 상태에서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완전히 잊고 있다가 한두 달 뒤에 보면 혹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는 몰라도 지금은 불가능했다. 진척이 없는 이야기를 붙잡고 머리를 싸매느니 무지개출판사 편집기획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보니 벙어리 황구 죽돌이 때도 편집팀한테 도움을 꽤 받았는데 고작 식사 한 끼로 때웠구나. 내게 도움을 준 만큼 베풀었어야 했는데 그 생각을 못 했네.’
강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는 첫 창작 그림동화책을 출간한다는 기쁨에 들떠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챙겨줘야겠다.’
강수는 벙어리 황구 죽돌이의 출간과 관련해 편집기획팀이 기여한 공로를 따져보았다.
‘일단 인세에서 그림 50%는 전적으로 내 몫이지. 이야기 50% 가운데 편집기획팀의 조언과 아이디어는... 약 5% 정도일까? 아니면 10%? 5%는 너무 적으니까 10%로 하자.’
편집기획팀의 도움을 수학처럼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었고, 대략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약 이천의 인세를 받았으니까 10%는 이백만 원이네. 직원이 세 명이니까 한 명당 육십육만육천 원? 아예 칠십만 원씩 책정해야겠구나. 만약 공주와 나무꾼 그림동화책을 출간하게 되면 계약서 작성할 때 아예 편집기획팀 직원에게 인세를 나눠줘야겠다. 그럼 속 편하지.’
노민석이 그림 대여비를 보냈듯이 도움을 준 편집기획팀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이 합당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약간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겼다. 옛날처럼 일러스트 하면서 여유가 없었으면 인세를 나눠준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서서히 어두워져 가는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벌써 크리스마스네. 주하에게 어떤 선물을 사줘야 하나?’
수백만 원짜리 선물인들 주하에게 감동을 주긴 어려울 것이다.
‘비싼 선물보다는 정성 깃든 선물이 좋을 텐데....’
머리를 굴려 봐도 마땅히 떠오르는 선물이 없었다.
‘인터넷 검색해봐야 하나? 일단 화장실부터 갔다 와서 검색하자.’
강수는 복도로 나가 화장실로 걸어갔다.
마침 화장실에서 거구의 사내가 나와 강수 쪽으로 걸어왔다.
‘어라, 저자는!’
화장실에서 나와 걸어오는 당당한 체구의 사내를 보고 씩 미소 지었다. 며칠 전, 주하의 기분을 상하게 한 자였다.
‘음, 제때 만났으니 경고는 해줘야겠지?’
덩치가 있는 만큼 자신의 경고가 먹히지 않겠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강수는 사내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사내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으며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거구의 사내, 장창열이 강수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앞 사무실의 그림쟁이가 자신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비웃듯 입가를 말아 올린 것이다.
‘기생오라비 같은 새끼가 날 비웃어?’
장창열이 저음의 거친 목소리로 강수에게 쏘아붙였다.
“이봐, 뭘 꼬라봐? 내가 우습게 보이나?”
시비 걸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강수가 피식 웃었다. 역시 사내는 덩칫값을 하려는지 참을성이 없었다.
강수가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실소를 날렸다.
“훗, 왜? 내가 쳐다보는 게 기분 나쁘냐?”
장창열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강수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자신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대꾸하는 인간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한데 고작 그림쟁이가 성질을 돋우면서 도발하고 있었다.
“이게 눈에 뵈는 게 없나?”
장창열이 험악한 기세를 뿜으면서 성큼 강수 앞으로 다가왔다.
“가자미눈으로 쳐다보면 기분 좋을 리가 없지. 너, 돼지고 싶냐?”
덩치가 있어서 그런지 인상을 쓰면서 앞으로 다가서는 기세가 위압적이었다. 물론 강수에게는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내가 훑어보니까 기분 안 좋지? 당신이 며칠 전 바로 이 장소에서 본 여성분도 당신이 가자미눈으로 훑어봐서 기분이 나쁘다고 하시거든. 남자면 신사답게 행동하시지. 생긴 대로 논다고 건달처럼 굴지 말고.”
‘개자식이 감히 날 훈계해?’
장창열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음험한 미소를 흘렸다.
“흐흐, 내가 여자를 훑어보든 핥아보든 네놈이 참견할 일이 아닐 텐데?”
“경고하는 거요. 한 번만 더 그런 일이 생기면....”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쩔 건데?”
“글쎄? 그건 그때 가서 몸소 보여주지.”
장창열이 히죽 웃으며 이죽거렸다.
“미친놈, 보여주긴 뭘 보여주겠다는 거냐? 정 보여줄 게 있으면 지금 보여주시지.”
인간은 자신보다 왜소한 자에게 신체적인 우월감을 갖고 있으며, 언제든지 폭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법과 사회질서가 인간 내면에 잠재된 본능적인 폭력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다.
강수가 차가운 눈빛으로 장창열을 노려보았다.
‘역시 말로는 안 통하는군. 자신이 신체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길 테니 당연하지.’
맹수같이 살기 번뜩이는 장창열의 눈빛과 강수의 차가운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 새끼 봐라? 내 눈을 마주 보고도 여유를 부려?’
장창열의 거구에서 폭발할 것 같은 살벌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잘하면 한 대 치겠군.”
강수의 비아냥에 장창열의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렀다.
느닷없이 장창열이 팔을 뻗어 강수의 멱살을 잡았다. 번개 같은 손놀림이라 강수는 대응할 틈도 없이 멱살을 잡혔다.
강수는 장창열의 빠른 움직임에 흠칫 놀랐다. 장창열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마법을 펼칠 틈이 없었다. 운동 신경이 일반인을 까마득히 상회하는 것을 보면 운동을 전문적으로 했던 친구 같았다.
마법을 적시에 제대로 쓰려면 상대방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라기는 했으나 별 감흥은 없었다. 멱살이 잡힌 채 강수는 사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았다.
“깝죽이지 마라. 한 대 맞고 골로 가는 수가 있으니까.”
장창열이 강수를 우악스럽게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자신의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비틀거리며 몸의 중심을 잡은 강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강수는 장창열을 따라갔다. 그리고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장창열을 불렀다.
“어이, 떡대.”
장창열이 인상을 구기면서 강수를 돌아보았다.
씨익 미소를 지은 강수가 사이클론윈드를 펼치면서 파리 쫓듯 팔을 휘저었다.
“엇!”
강창열은 갑자기 덮친 강대한 기운에 떠밀려 사무실 안으로 튕기듯 들어갔다.
장창열의 장대한 체구가 출입문 근처 책상에 부딪히며 나동그라졌다.
우당탕, 쿵!
“우왓, 뭐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사무실 안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소동이 벌어졌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이클론윈드의 회오리바람에 떠밀린 장창열은 책상을 밀치며 10m는 더 사무실 바닥을 뒹굴었다.
난장판이 된 사무실 안의 소동을 들으며 씨익 웃은 강수는 화장실로 향했다.
*
무지개출판사 회의실.
강승호가 직원을 둘러보며 감상을 물었다.
“다 읽었지? 감상평을 들어볼까?”
강승호가 전수민을 바라보았다.
전수민이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를 흠뻑 지으며 말했다.
“스케치한 그림인데도 굉장히 좋은데요. 역시 이 작가의 그림은 나무랄 데가 없는 것 같아요. 이야기는 왕과 왕국, 공주와 나무꾼이 등장하는 고전적인 소재지만 공주가 하녀로 전락해서 고생하는 부분이나 나무꾼이 숲의 나무를 베서 외눈박이 괴물을 유인하는 장면같이 참신한 설정이 재미를 주는 것 같아서 이번 작품도 히트할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한 달 전에 입사한 경력사원 유가은이 반론을 제기했다.
“참신한 설정이 돋보이긴 하지만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평이하고 무난한 것 아닌가요? 저는 줄거리가 밋밋한 느낌이 들어서 흥미를 자극할 만한 요소가 추가되면 더 좋겠어요.”
전수민이 대뜸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아이들이 보는 동화에 자극적인 내용이 왜 필요해?”
“이야기 흐름이 너무 정직하잖아요.”
“그게 동화의 미덕 아냐? 구름빵을 봐. 미루나무에 걸린 구름으로 빵을 만들어 먹으면 구름처럼 하늘을 떠다닐 수 있다는 얘기잖아. 거기에 어떤 자극적인 내용이 있기나 해?”
“공주와 나무꾼은 구름빵하고 소재가 완전히 틀리죠. 구름빵은 현대를 배경으로 고양이 가족이 등장하고, 구름빵이라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를 그리고 있죠. 하지만 공주와 나무꾼은 아주 먼 옛날, 어느 왕국이라는 고전적인 공간과 국왕과 공주가 등장하죠. 이런 고전적인 동화에는 흥미를 끌 만한 내용과 함께 완결적인 서사가 필요하잖아요?”“가은 씨는 이야기의 완결성이 떨어진다는 거야?”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수정할 곳이 있어요. 예를 들면 나무꾼이 졸리는 약초를 캐서 공주에게 주고, 공주가 음식에 넣어 외눈박이 괴물을 잠재우는 장면과 국왕이 수면제로 나무꾼을 잠재우는 장면은 중복이라 문제가 있지 않나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국왕이 나무꾼에게 굳이 수면제를 먹여 잠재울 필요도 없죠. 명령 한 마디면 될 텐데요.”
강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중복적인 부분은 다른 방법으로 대체하는 것이 나은 것 같다.”
허상배는 논쟁을 벌이는 둘을 힐끔 쳐다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쳇, 웃기네. 글은 작가가 알아서 쓰는 거지 우리가 글까지 고쳐 줘야 해? 그리고 부실한 이야기 검토해서 아이디어 내주면 우리한테 떨어지는 거라도 있어? 저번에도 고작 밥 한 끼 사고 말았는데.’
물론 공주와 나무꾼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매출이 늘어날 테니 회사에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어린이 그림동화책 한 권으로 회사 규모가 크게 성장할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베스트셀러가 쉽게 되는 것도 아니다. 원작이 부실하면 편집팀에서 백날 뜯어고쳐도 독자에게 외면받고, 어느 날 툭 튀어나온 신인 작가의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상배야, 네 생각은 어떻냐?”
강승호가 프린트물에 시선을 주며 불만에 잠겨 있는 허상배를 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