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85화 (85/197)

# 8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85회

마나회로 수련을 마친 강수는 인적이라고는 흔적도 없는 적막한 산중을 천천히 걸었다.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등산화에 아이젠을 차서 걷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나뭇잎을 떨구고 앙상했던 나무는 두툼한 솜옷을 입은 것처럼 눈에 덮여 있었고, 가지에는 눈꽃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바람이 불면 은가루 같은 눈가루가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며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마치 설국에 초대받아 온 것 같았다.

“야, 눈에 잠긴 산의 경치가 이렇게 아름답구나. 주하랑 함께 보면 좋았을 걸.”

카톡!

마침 주하한테서 카톡이 왔다.

-오빠, 설마 오늘도 산으로 운동 갔어요? 왜 연락이 안 돼요?

수련 중에는 스마트폰을 매너모드로 해 놓는다. 연락을 몇 번 한 모양이었다.

-응. 운동하고 지금 하산하는 중이야.

-눈이 엄청나게 왔는데 산에서 운동하는 거 위험하지 않아요?

-매일 하는 거라 괜찮아. 그리고 하루도 빼 먹으면 안 되는 운동이거든.

-헤헤. 오늘까지 산에 갈 줄은 몰랐어요. 눈 오면 보기로 했잖아요. 어디서 만날까요?

-이쪽으로 올래? 눈 내린 산의 풍경이 환상적으로 아름답거든. 마치 설국에 온 것 같아서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주하랑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아, 산에요?

-등산을 좀 해야 하는데 힘 들 것 같으면 주하가 다른 장소를 정하고.

-음, 아녜요. 나도 눈 내린 산 구경하고 싶어요. 제가 갈게요. 우이동이죠?

-그래. 덕진대 앞 솔밭에서 만나자. 등산용 자켓 입고, 등산화에 아이젠은 꼭 갖고 와야 해.

-헤헤. 알겠어요. 도착해서 전화할게요.

-그래.

솔밭으로 내려간 강수는 한 시간 뒤 주하를 만날 수 있었다.

고급 브랜드 등산복에 고급 등산화, 장갑까지 완전 무장하고 온 주하가 미소를 지으며 강수 앞으로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왔다.

“오빠,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좀 전에 내려왔어. 등산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왔네? 등산 해봤어?”

“아뇨. 대학 때 몇 번 가 본 게 전부예요.”

“그래? 정상까지 올라갈 건 아니지만 두 시간 정도 산을 탈 텐데 괜찮을까?”

“많이 힘들어요?”

두 시간의 등산이 강수에겐 산책 코스겠지만 생전 등산을 해보지 않은 주하에겐 강도 높은 운동이 될 수도 있었다.

“글쎄? 눈이 발목까지 빠져서 평상시보다는 더 힘들지. 덕진대 교정도 볼만하니까 등산하지 말고 덕진대로 갈까?”

주하가 의외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아녜요. 등산복도 입고 왔고, 요즘 해영 언니랑 운동하고 있어서 두 시간 정도 등산은 괜찮을 것 같아요.”

“좋아, 그럼 올라가 보자. 아, 참. 내가 지나간 발자국 밟고 따라와야 한다.”

“알겠어요.”

근무복에 패딩을 입고 온 임해영은 차에 남기로 했다.

강수는 주하를 데리고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와, 눈이 엄청 쌓였다. 완존 눈밭이네.”

산길이 시작되는 길목에서 주하가 눈에 뒤덮인 주위를 보며 아이들처럼 신이 나서 소리쳤다. 주하는 희희낙락해서 호기심 왕성한 강아지처럼 주변을 둘레둘레 살피며 강수의 뒤를 쫓아 산을 탔다.

눈으로 뒤덮인 산을 오르기는 쉽지 않다. 1시간쯤 눈을 헤치고 올라갔을까? 주하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강수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물었다.

“힘들지? 그만 올라갈까?”

“헥, 헥! 아, 아네요. 이 정도는 끄떡없어요. 경치가 환상적이라고 한 곳까지 가요. 오빠랑 같이 멋진 설경을 구경하고 싶어요.”

“그럼 조금 더 올라가자. 힘들면 얘기하고.”

“네에.”

강수는 주하의 목소리에서 아쉬운 기색이 묻어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본심은 그만 올라가고 싶었으리라.

‘후후,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봐. 몸이 힘들면 힘들수록 휴식은 꿀처럼 달콤하거든.’

강수는 주하가 따라올 수 있는 속도로 올라갔다. 50분 정도 더 올라갔을 때 주하는 숨이 턱까지 차서 헐떡거렸다.

강수는 주하의 숨소리를 듣고 주하가 거의 한계상황에 도달한 것을 알았다.

주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오기로 버티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주하는 간신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며 강수의 뒤를 따라갔다. 언제부터인지 주변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으로 뒤덮인 산을 타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젠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눈앞이 흐려지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아, 이제 더는 못 가겠어.’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대로 쓰러져 눈밭에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강수오빠, 나 쉬고 싶어.’

마음으로만 말할 뿐 쉬고 싶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주하는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으며 앞으로 엎어졌다.

쓰러지는 주하를 강수가 붙잡았다.

주하가 고개를 들어 강수를 쳐다보았다. 강수가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주하야, 힘들었지?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정말 대단하다.”

“아!”

강수의 따뜻한 칭찬과 격려의 말에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서러움이 눈물이 되어 가슴으로 녹아내렸다.

“오, 오빠.”

강수가 주하를 천천히 품에 안았다. 주하는 온몸의 기운이 쑥 빠져나가 강수의 품에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강수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주하를 가만히 안았다.

강수의 품에 안긴 주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과 행복을 느꼈다.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느낌 속에서도 거대한 희열과 격한 감정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몸이 살살 녹아내렸고, 까마득히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현기증과 함께 몸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주체하기 힘든 황홀한 기분이 전신을 덮쳤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강수가 주하를 품에서 떼어냈고, 아쉬움과 갈증을 느끼며 주하가 강수를 올려다보았다.

‘아!’

강수가 빤히 주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주하는 강수의 뜨거운 열망이 담긴 눈빛을 보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문득, 강수의 얼굴이 확대되면서 눈앞으로 커다랗게 다가왔다. 주하는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사르르 눈을 감았다.

입술에서 한없이 부드러운 감촉이 뇌리를 강타했다.

찌릿찌릿한 자극이 전신으로 노도처럼 퍼져나갔다.

퍼퍼펑!

동시에 머리에서 폭죽이 화려하게 폭발하기 시작했다.

몸이 폭죽이 터지는 공중으로 붕 떠올라 무중력 공간을 부유하는 것처럼 떠다녔다.

입안으로 물컹거리는 물체가 불쑥 침입해 들어와 혀를 살짝 건들었다. 순간 주하는 작살에 맞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 갔다. 갑자기 항거할 수 없는 막대한 흡인력에 혼백마저 어디론가 빨려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뇌전을 맞은 것처럼 전율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강수는 달콤하고 농밀한 입맞춤을 하고 난 후에 살포시 주하를 안고 있었다. 주하는 눈을 감고 강수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입맞춤의 감미로운 여운을 음미하고 있던 참이었다.

강수는 주하에게 재빨리 회복마법을 펼치고 슬그머니 물었다.

“주하야, 지금은 몸이 좀 어때?”

주하가 아쉬운 표정으로 강수의 품에서 떨어졌다.

“예? 뭐가요?”

“기운이 좀 회복됐어?”

“기운이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주하가 팔을 움직여보고 몸을 틀어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질렀다.

“어? 조금 전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서 있는 것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몸이 가볍고 전신에서 힘이 솟아나요.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아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강수가 시치미를 뚝 떼고 되물었다.

“뭐? 갑자기 힘이 난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 글쎄요? 갑자기 몸에서 기운이 넘쳐요. 왜 그러죠?”

강수가 뭔가 생각하는 척 심각한 표정을 지은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쩌면 입맞춤의 힘이 아닐까?”

“네? 입맞춤하면 기운이 회복 돼요?”

“뇌에서 분비하는 엔돌핀은 고통을 잊게 해주는 물질이잖아. 엔돌핀처럼 특별한 역할을 하는 물질, 그러니까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체력을 회복시키는 신비한 물질이 우리가 입맞춤할 때 분비됐을지도 모르지.”

주하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뭔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키스를 하고 나서 몸이 생생해졌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마치 딴 세상에 갔다 온 것 같은 그 황홀했던 순간에 체력이 회복되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헷갈려 하는 주하의 표정을 보며 강수가 쾌활하게 웃었다.

“으하하, 농담이야. 설마 그런 물질이 존재하겠니?”

강수가 자신을 놀렸다는 것을 알고선 주하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오빠! 난 정말 그런 줄 알았잖아요.“

“하하. 농담을 진담으로 듣다니 주하가 어린애처럼 순진하구나.”

“흥, 누가 어린애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뭐지? 왜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기운이 생생할까?’

의문을 품고 있는 주하를 보며 빙긋 웃은 강수가 양손으로 주하의 얼굴을 감싸서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주하야, 주위를 둘러봐. 경치가 정말 아름답지 않니?”

등산한다고 주변 경치를 볼 경황이 없었던 주하는 이제야 마음 편히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주하는 강수의 팔을 양팔로 안고 천천히 주위를 보았다.

주하가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아!”

나무 위에도 눈, 발아래 계곡에도 눈, 옆을 보아도 눈, 뒤를 보아도 순백의 눈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신비롭고 장엄한 기운이 천지에 서려 있었다. 가슴으로 가득 차오르는 환희를 느끼며 눈 앞에 펼쳐진 경치에 넋을 빼앗겼다.

둘은 한동안 순백의 세상 한가운데 서서 웅장한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강수는 주하, 임해영과 한정식을 먹은 후, 주하의 차를 타고 아파트로 왔고, 주하는 몸은 생생하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하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늦긴 했지만, 강수는 SUV를 몰고 곧장 작업실로 갔다.

강수는 책상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쳤다.

‘이제 줄거리에 살을 붙여야 한단 말이지.’

스케치한 그림을 바탕으로 구체적이고 서사적인 이야기를 덧붙여나가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창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죽돌이 이야기를 썼던 경험 때문인지 글 쓰는 것이 한결 수월하긴 했다.

‘외눈박이 괴물은 공주를 잡아가서 청소, 설겆이 같은 집안 잡일을 시키지. 공주는 하녀로 전락해서 모진 고생을 하고.’

이야기를 쥐어짜던 중 스마트폰이 울렸고, 강수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으아, 안 하던 동화를 쓰니 머리에서 쥐가 나려고 하네. 누구 전화지?’

노민석의 전화였다. 휴식도 취할 겸 책상에서 일어나 작업실을 걸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민석 형님, 안녕하세요?”

쾌활한 웃음소리와 함께 밝고 활력 넘치는 목소리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하하. 강수야! 어떻게 지내야?]

“저야 개인전 작업 때문에 맨날 물감하고 씨름하고 있죠. 형님은 카페가 잘되고 있나본대요? 목소리에서 활기가 뚝뚝 넘치는데요.”

[하하. 강수가 족집게구나. 목소리만 듣고도 사업이 어떤지 알고 말이야. 네 말이 맞아. 카페가 의외로 잘 되고 있다. 그림 대여료 부칠 테니까 통장 번호 하나 불러다오.]

“그림 대여료 부친다고요? 오프닝 한지 얼마나 됐다고 대여료를 부칩니까?”

[하하. 강수가 시간 가는 줄 모르는구나. 카페 오픈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요? 근데 대여료는 카페 사정이 좋아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부쳐도 됩니다. 카페 오픈한 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부치려고요?”

[강수야, 사실 카페를 열면서 적어도 육 개월은 적자를 각오하고 있었다. 육 개월 이후부터 조금씩이라도 수익이 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지. 한데 놀랍게도 첫 달부터 상당한 수익이 났어. 순전히 네가 도와준 덕에 이런 꿈같은 일이 벌어진 거야.]

“저 때문에 수익이 나요?”

[그래. 머그잔을 사은품으로 제공한 것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핑크티티 초상화를 전시해 놓은 게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거든.]

“아, 그랬나요?”

[처음에는 인증샷 찍는 청소년이나 학생이 많았는데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서 소문이 났는지 순수하게 초상화를 감상하러 온 사람도 많아졌어. 덕분에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첫 달부터 수익이 난거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대여료를 안 줄 수가 있겠어. 빨리 통장 번호 말해봐.]

“그렇게 말씀하니 어쩔 수 없네요.”

강수는 통장 번호를 불러주었다.

[알았다. 바로 부치마. 바빠서 이만 끊는다.]

“예, 형님.”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후, 띠링 하고 알림음이 울렸다.

살펴보니 백만 원이 입금되었다.

‘백만 원이나? 너무 많이 입금한 거 아냐?’

온라인갤러리에서 대여하는 금액보다 좀 적게라도 주겠다고 했었는데 오히려 더 많이 부쳤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카페를 찾는 모양이었다.

‘장사가 잘된다면 대여비 받는 게 그리 부담되진 않지.’

원래는 카페가 자리 잡을 때까지 대여비를 준다고 해도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림 대여비는 예상하지 않은 수입이었다.

카페가 잘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고, 생각지도 않은 대여비를 받아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또한 자신의 그림이 일반인의 관심을 끌 정도라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일반인이 그림 보겠다고 특정 장소까지 찾아가는 건 매우 드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반인도 관심을 보인다더니 주하 말이 맞았네? 기왕이면 카페가 대박 났으면 좋겠다.’

강수는 공주와 나무꾼 이야기를 대충이라도 마무리 짓기 위해 다시 펜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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