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84화 (84/197)

# 84

그림 그리는 마법사 - 84회

12월 22일.

일성빌딩 5층, 강수의 작업실.

“루루룰루.”

오늘도 어김없이 작업실로 출근한 강수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마대걸레로 지저분한 바닥을 닦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늘은 아파트 집안을 청소하고 빨래도 하느라 좀 늦게 출근했다.

벌써 오후 5시가 넘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걸레질을 하던 강수가 구름이 낮게 깔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눈이 올까? 그럼 첫눈인데.”

집안 이를 끝내고 작업실로 오는 길에 하늘을 보니 구름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일기예보도 내일 3, 4센티의 눈이 내릴 것이라고 했다.

첫눈 내리는 날, 연인들이 그러하듯 주하랑 만나기로 했다.

띠링!

이때, 스마트폰에서 통장에 돈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통장에 돈 들어왔네?”

자신에게 돈 보낼 데는 한 곳. 강수는 짐작 가는 게 있어 달력을 보았다.

‘오늘이 22일. 인세겠지?’

마대걸레를 세워 놓고 스마트폰을 확인해보니 예상한 대로 인세가 입금되었다.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인세가 들어오니 무지개출판사에서 월급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완전히 월급이잖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언제까지 인세가 들어올까? 기왕이면 한 일 년 꾸준하게 들어오면 좋겠다.’

우웅!

이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무지개출판사 강 팀장이었다.

“안녕하세요? 강 팀장님. 인세가 들어왔네요?”

[예. 오늘 5쇄 인쇄에 들어가서 인세 보내라고 했습니다. 이 작가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요즘 개인전 작품 그리느라 정신이 없네요.”

[아, 개인전 오프닝 날짜는 잡혔습니까?]

“내년 4월 초입니다.”

[그렇군요. 이 작가님 그림이 너무 좋아서 아마 대박 날 겁니다. 벙어리 황구 죽돌이는 두 달 전부터 베스트셀러 1위를 고수하고 있거든요. 그뿐만 아니라 이 작가님이 그린 숲 속 다람쥐 가족은 아직도 2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하. 강 팀장님이 기획한 그림동화책이 베스트셀러 1, 2위를 차지하고 있네요. 저보다 강 팀장님이 잘된 것 같습니다.”

[하하. 그게 또 그렇게 되네요.]

강 팀장이 문득,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 이 작가님. 그림동화책 한 권 더 내면 좋겠는데 생각해 보셨는지요?]

“한 권 더요?”

[예. 당장은 아니더라도 시간 날 때 천천히 구상해서 차기작을 진행해 보시면 어떨까요? 저번처럼 편집팀이 전적으로 도와주겠습니다.]

인세가 월급처럼 매달 정기적으로 들어오면 생활이 안정된다. 인세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수입원이다. 인세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차기작을 낸다고 해서 또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그림동화책을 창작할 시간이 나지도 않았다.

“지금은 개인전 준비로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개인전 작품을 끝내고 나서 고민해보겠습니다.”

[당연히 개인전이 우선이죠. 개인전 작품 끝내고 차기작 구상하면 연락 주십시오. 그럼 연말연시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강 팀장님도 즐거운 시간 되세요.”

[예. 감사합니다. 그럼.]

‘차기작이라....’

통화를 끝낸 강수는 그림동화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야기만 준비할 수 있으면 일러스트 그리는 것은 일주일도 걸리지 않는다.

‘이야기가 문제네.’

강수는 그림동화책 일러스트 작업을 하면서 참고삼아 국내외 동화와 그림동화책을 상당수 섭렵했었다. 현재도 수많은 동화책이 끊임없이 출간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동화책은 창고에서 방치되거나 헌책이 되어 고물상으로 흘러가 사라진다. 아이러니하지만 수시로 재출간하고 있는 고전 명작동화의 생명력이 더 길다.

‘이야기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결국은 허구지. 공주와 왕자 이야기도 많지만,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같이 신분을 소재로 삼은 이야기도 있고.’

강수는 펜을 집어 뇌리에 떠오른 단어를 종이에 적어보았다.

‘공주와 나무꾼’

공주와 나무꾼이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허구 속 이야기는 가능하다.

‘어떻게 풀어나갈까? 공주가 신비의 숲에 있는 폭포를 구경하고 싶다고 왕을 조르면 될까? 한데 폭포가 있는 숲에는 외눈박이 괴물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어서 왕은 거절하고. 상심한 공주가 웃음을 잃고 우울해하자 왕은 어쩔 수 없이 호위병과 함께 신비의 숲으로 가지만... 거대한 외눈박이 괴물이 나타나 호위병을 물리치고 공주를 잡아간다. 흠, 뭐야? 도입부는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은데?’

이후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될 것 같았다.

국왕은 공주를 구해오는 용감한 용사에게 공주와 결혼시키겠다는 방문을 나라 방방곡곡에 붙인다.

방문을 본 용감한 청년들과 이웃 나라 왕자까지 너도나도 공주를 구하겠다고 커다란 산, 신비의 숲 어딘가에 있는 외눈박이 괴물을 찾아갔지만, 공주를 찾지 못하고 모두 빈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세상 물정에 어둡고 순박해 보이는 나무꾼이 등장하지.’

왕국의 변방 마을에는 순박하고 우직하게 생긴 나무꾼이 살고 있었다. 나무꾼은 방문을 보고 공주를 구하겠다고 성으로 간다.

‘나무꾼은 신비의 숲으로 들어가 당연히 공주를 구출해야지. 나무꾼과 공주가 서로 도와 위기를 극복하는 중에 둘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싹트고. 둘은 우여곡절 끝에 외눈박이 저택에서 탈출해 왕국의 성으로 돌아가야지. 한데 국왕이 나무꾼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 싶겠어?’

국왕은 약속을 어기고 음식에 수면제를 탄다. 나무꾼이 잠든 틈을 타서 외딴 마을로 보내 병사에게 지키게하고 서둘러 이웃나라 왕자에게 공주를 시집보내려고 한다.

공주가 그 사실을 알고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국왕은 억지로 결혼식을 강행한다.

그리고 결혼식이 열리는 날.

‘반전은 어떻게?’

동화의 일반적인 흐름을 따라서 공주와 나무꾼의 줄거리를 써본 강수는 피식 웃었다.

‘줄거리는 간단하게 짰지만, 문제는 매력적인 캐릭터의 구현과 구체적인 사건과 그럴듯한 이야기란 말이지....’

공주와 나무꾼을 그림동화책으로 그리면 그림이 이야기를 상당 부분 대체할 수 있다. 즉, 그림동화책은 이야기를 빼고 그림만 봐도 대충 줄거리를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내친김에 스케치를 해볼까?’

강수는 물감칠을 뒤로 미루고 스케치북을 가져와 공주와 나무꾼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웅장한 성과 그 안에서 사는 아름다운 공주. 낙천적인 성격에 호기심이 많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말썽도 부리지만 명랑하고 격의가 없어 백성에게 사랑받는 캐릭터.

어느 날, 신비한 숲속에 있는 폭포를 보고 싶다며 국왕을 조르는 공주.

외눈박이 괴물이 산다며 고개를 휘휘 젓는 국왕.

강수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쓱쓱 스케치해나갔다.

역시 글을 쓰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것이 편했다. 강수의 머릿속에서 한 편의 동화가 한 장면, 한 장면 그림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강수는 의자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형상화된 그림을 미친 듯이 스케치했다.

탁!

마지막 엔딩까지 스케치를 끝낸 강수가 연필을 책상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끝났다!’

차기작이 될지도 모르는 그림동화의 스케치를 끝내고 가슴이 뿌듯해진 강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두두둑!

뼈마디가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으아아.”

기지개를 마음껏 켜고 시간을 보았다.

‘헉! 새벽 한 시!’

약 7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스케치를 했다.

스케치한 그림을 세어보니 모두 20장이었다.

‘와, 스무 장이나 스케치 했는 줄은 몰랐네.’

강수는 스케치한 그림을 한 장씩 살펴보았다. 러프하게 한 스케치였지만 부분적으로 디테일한 묘사를 하기도 했다. 이야기만 풍성하게 보충하면 한편의 그림동화로 부족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얼마나 잘 쓰느냐가 문제구나.’

스케치를 끝내놓고 보니 문득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작가가 써준 이야기를 토대로 스케치를 했는데 이건 반대로 창작하는 셈이네?’

강수가 동화책 일러스트를 그릴 때는 언제나 작가가 쓴 이야기를 받아서 이야기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공주와 나무꾼은 간단한 줄거리를 토대로 스케치를 먼저 완성했다. 먼저 완성한 스케치에 이야기를 써넣으면 된다. 스케치를 보면서 보충하듯이 이야기를 쓰기 때문에 막막하기만 했던 동화 창작이 생각보다 쉬울 것 같았다.

강수가 일러스트레이터라 가능한 방식이었다.

‘이것 봐라? 이런 식으로 거꾸로 동화를 창작할 수도 있는 거였네? 좋아. 스케치도 완성했으니 내일은 스케치를 보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강수는 회화 작업을 잠시 미루고 동화를 쓰기로 했다. 만약 이런 식의 거꾸로 창작하는 방식이 먹힌다면 그림동화책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출간할 수 있었다.

물론 회화 작품이 지금처럼 그리는 족족 잘 팔리기만 한다면 굳이 그림동화책을 그려서 돈을 벌 필요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창작한 그림동화책을 아이들이 재밌게 보고, 좋아한다면 돈을 떠나서 그림동화책을 계속 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작업실을 정리한 강수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오밤중이라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지하주차장은 괴괴한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부아앙!

강수의 SUV가 요란한 엔진음을 토해내며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밤이 깊었으나 술집의 네온사인 간판은 아직도 휘황한 형형색색의 빛을 뿜으면서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네온사인 불빛 속에서 목적지를 찾아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지른 고성과 또 누군가가 터트린 웃음소리가 고적한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강수는 간판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취객을 피해 천천히 차를 몰았다.

다사다난했던 대망의 2020년, 경자년이 차창 뒤로 흘러가는 밤 풍경처럼 어두워져 가는 역사 저편으로 묻히고 있었다.

*

여명이 밝으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하는 시각.

겨울이 깊어가며 수온 주는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새벽에 일어난 강수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매일 하는 마나회로 수련을 위해 등산복을 입었다.

‘눈이 온다고 했는데 정말 왔을까?’

어제 기상예보가 생각난 강수는 손전등을 들고 발코니로 나갔다.

“아, 눈이다!”

손전등 불빛이 지나가는 공간에 새하얀 눈송이가 춤을 추듯 휘날렸다. 크리스마스이브를 하루 앞둔 날에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 내려서 주하가 좋아하겠구나.’

대부분의 연인들이 첫눈 내리는 날 뜻깊은 추억을 남기고 싶어 한다. 강수와 주하도 첫눈이 내리는 날 연인처럼 추억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눈이 더럽혀지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순백의 눈밭을 주하와 같이 걷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장소가 없었다.

서울에서 7년을 살았지만, 강수의 행동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다.

모교인 홍우대 주변과 자취하던 연희동, 종로와 인사동, 대학로, 수유동 근방 외에 서울 지리는 잘 모른다.

‘주하는 알려나? 이따 만나서 물어보자.’

강수는 헤드랜턴을 머리에 쓰고, 아이젠 등 몇 가지 물품을 배낭에 챙긴 후 밖으로 나갔다.

눈은 이미 소복히 쌓였으나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꽤 쌓였는데 일기예보보다 눈이 더 오려나 보다.’

외등이 뿌연 불빛을 뿌리고 있는 아파트를 빠져나온 강수는 수련 장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훅훅, 훅훅.”

허연 입김을 뿜으며 흩날리는 눈발 속으로 강수의 신형이 서서히 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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