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83회
겨울 해는 짧다. 오후 6시만 되도 거리는 어둑어둑 어스름이 깔리고 긴 겨울밤을 준비한다.
강수의 작업실이 있는 일성빌딩.
5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원피스에 반코트를 걸친 주하가 나왔다. 뭔가 들뜬 표정의 주하는 쇼핑백을 들고 강수 작업실로 걸어갔다.
이때 맞은편에서 190cm 정도 되는 신장에 검은색 양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걸어왔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내는 주하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씨발, 존나 예쁘네. 얼굴도 예쁜데 몸매까지 장난 아니란 말이야.’
세 번째 마주치지만 볼 때마다 심장이 가늘게 떨렸다.
‘저런 여자를 안으면 기분이 어떨까?’
여자의 벗은 몸을 상상만 해도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고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앞 사무실에 입주한 놈은 별 볼 일 없는 화가 같던데 왜 이런 여자가 밥을 싸 오는 거지?’
지난번 여자를 지나칠 때 쇼핑백에서 풍겨 나오는 음식 냄새를 맡았다. 분명히 저녁을 가져온 것이었다.
‘씨발, 어떻게 해치울 방법이 없을까?’
사내는 주하가 옆으로 지나가자 고개를 돌려 뒤태를 훑었다.
몸매는 반코트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지만 옷맵시와 매끈하게 드러난 종아리만 봐도 군더더기 없는 날씬한 몸매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이전에 원피스 위에 드러난 날씬한 모습을 본 적이 있어서 반코트 속에 감춰진 굴곡이 두드러진 육감적인 몸매를 상상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크, 죽인다. 엉덩이가 탱글탱글하겠구나.’
사내는 사무실의 출입문으로 다가가는 주하를 탐욕의 눈빛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앞에서 걸어오는 사내를 지나치자 주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파충류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위아래를 훑는 것이 징그럽고 영 재수 없었다.
삑, 삑, 삑, 삑!
신경질적으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른 주하는 출입문을 열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어휴, 뭐 저런 무례하고 짐승같은 인간이 다 있어.’
벌레가 몸을 기어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을 받은 주하는 기분이 상해 눈살을 찌푸렸다.
“주하 왔니?”
“네. 강수오빠.”
작업하고 있던 강수가 붓을 내려놓고 도시락을 들고 온 주하를 웃으며 맞이했다.
‘어? 얘 표정이 왜 이래?’
기분이 상한 것처럼 잔뜩 찌푸린 주하의 얼굴을 보고 강수가 물었다.
“주하야, 왜 그래? 안 좋은 일 있어?”
주하가 눈살을 펴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복도에서 재수 없는 남자를 보는 바람에....”
“재수 없는 남자?”
“헤헤. 별 건 아녜요. 신경 쓰지 마세요.”
강수는 주하가 무엇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놈이 주하를 기분 나쁘게 만든 거지?’
주하가 기분 상할 정도면 상품을 품평하듯 노골적으로 주하를 훑어보았을 것이다.
‘사람을 보는 것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지. 상대방이 기분 나쁠 때까지 쳐다보는 것은 비신사적인 짓이잖아.’
분명히 맞은편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내들 가운데 한 명일 것이다.
“주하야, 그 재수 없다는 사내는 어떻게 생겼니?”
“아니에요, 오빠. 상대할 가치도 없는 저급한 인간이에요. 괜한 일로 시비 일으킬 것 없어요.”
“시비를 떠나서 요즘은 사이코패스 같은 이상한 놈들이 많잖아. 주하가 기분 상할 정도로 쳐다봤나본데 어떤 친구인지 내가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경호원 임해영이 있어서 신변의 위협을 받은 적은 없지만 강수의 말투에서 자신을 지켜주려는 의도를 느낀 주하는 마음이 달콤해졌다.
“헤~ 음, 오빠 그 사람 무슨 운동하는 거 같아요. 키가 한 190은 되는 거 같고, 덩치는 헬스를 한 것처럼 우람해요. 머리는 올백으로 넘겼고, 생긴 건 광대가 좀 나왔고 눈매가 날카로웠어요.”
말하고 나니 인간 흉기같이 사납게 생긴 사내의 모습에 뭔가 불안해진 주하가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오빠, 그런 짐승 같은 사람하고 엮일 필요 없으니까 모른 채하고 상대하지도 말아요. 알았죠?”
주하가 말한 위압적인 덩치의 사내를 두 번 마주친 기억이 났다.
“그래. 알았다. 나도 두어 번 본 것 같다.”
나중에 보면 숙녀를 노골적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경고하리라 마음먹고 화제를 돌렸다.
“번번이 여기까지 도시락 가져오고. 주하한테 괜히 미안한데.”
“아녜요. 오빠랑 같이 저녁 먹으니까 나도 좋은데요, 뭘.”
“오늘 메뉴는 뭘까?”
“우럭회하고 초밥이요. 근처 횟집에서 사자마자 얼음팩 넣어서 달려왔는데 맛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이야, 우럭회구나! 살이 쫄깃쫄깃한 우럭인데 당연히 맛있겠지?
주하가 도시락을 들고 강수의 작업실을 오기 시작한 지 벌써 몇 주 째.
강수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저녁을 준비해 오는 주하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주하는 쇼핑백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반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았다.
“오빠, 그림 좀 봐도 되죠?”
“그럼. 얼마든지 봐.”
이젤 앞으로 걸어간 주하가 그림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와, 멋있다. 그림 네 개가 거의 완성된 것 같아요.”
“응, 다음 주면 끝날걸.”
“이 그림들은 한 점에 얼마씩 받을 거예요?”
“글쎄? 갤러리 하고 얘기해야겠지만 상하이에서 팔린 가격이 반영될 테니까 오십 호 기준으로 천이백 정도 하지 않을까?”
천이백이라는 말에 주하가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휴, 이런 멋있는 작품이 천이백이면 너무 싸잖아요?”
강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 가격이면 중견작가 작품에 버금가는 가격이라 싼 게 아니야. 오히려 나 같은 신인 화가의 그림값치고는 엄청 비싼 거지.”
“아닌데요. 제가 요즘 그림 공부도 하고, 미술관이나 전시장에 다니면서 그림 많이 봤거든요. 제가 봤을 때 천이백이면 절대 비싼 거 아니에요. 오빠 그림은 보통 그림하고 다르게 색 표현이 너무 조화롭고, 또 인물이 주는 뉘앙스와 그림에서 풍기는 느낌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비하고 특이해요. 뭔가 그림에 빠져들고, 심취하게 하는 마력이 있어요. 오빠 그림은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요. 근데 고작 천이백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에요.”
“뭐?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라고?”
자신의 그림 가치를 최고의 수식어를 써가면서 칭찬해주는 주하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허파가 간질거렸고 입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후후, 그림이 아무리 훌륭해도 어떤 작가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개인전을 통해서 주하가 얘기한 그 가치를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거야. 그런 과정을 통해서 차근차근 그림값이 올라가는 게 일반적인 관행이지.”
“관행은 그럴지 몰라도 오빠가 바로 그 특별한 경우라고요.”
“내가 왜 특별한 경우냐?”
“할아버지 젊었을 때 모습을 그린 초상화 있잖아요? 할아버지는 그거 서재에 걸어놓고 매일 보고 있어요. 내 초상화도 나중에 준다며 안 주고 있고요. 한 실장님이 그러는데 할아버지는 억 대가 넘는 그림도 몇 번 보고 말았데요. 이렇게 매일 그림 보면서 흐뭇해하는 건 처음이래요. 게다가 핑크티티 초상화가 카페에 전시되어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오빠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핑크티티 팬카페를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거든요. 내년 4월에 개인전 할 때쯤이면 이런 대중의 인기를 바탕으로 그림값을 높게 책정할 수 있을 거예요.”
“핑크티티 초상화 때문에 내가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고?”
그림에 대해 강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신났는지 주하가 재빨리 이어 말했다.
“그래요. 팬카페에 핑크티티 초상화 인증샷을 올린 회원이 백 명이 넘어요. 극성팬은 블로그나 포털에도 올리고, 각종 SNS에 게재하고 있는걸요. 오빠가 핑크티티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요.”
“몇몇 팬들이 각종 매체에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동영상 퍼 나르는 거야 일반적인 현상 아니니? 그걸로 내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는 건 오버 아냐?”
“관심이 핑크티티 팬카페에 국한된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이젠 일반 사람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거죠.”
“일반 사람들이?”
“네. 일반인도 핑크티티 초상화를 퍼서 자신이 활동하는 카페나 포털에 올리고 있거든요. 그리고 오빠가 누군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아요.”
강수는 주하의 말이 실감 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문득, 강수가 의아한 얼굴로 주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넌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예? 그야....”
주하는 핑크티티의 극성팬은 아니지만, 카페에 찾아가 인증샷을 찍어서 여기저기 퍼트리고 있는 장본인이었다. 또한 인터넷을 검색해 강수의 그림과 관련 게시 글을 찾아 읽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주하는 강수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내가 얘기해줬어요.”
어느새 작업실에 들어온 임해영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팬카페에서 인증샷이 이슈가 되고 있는 거 맞아요. 어쩌면 강수 씨가 어느 날 갑자기 유명 화가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해영 씨가 얘기해 줬군요. 개인전 작업한다고 인터넷도 거의 못 봤더니 카페에 전시한 핑크티티 초상화가 그렇게 화제가 되는 줄은 몰랐네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대중적인 인기하고는 거리가 멀 겁니다.”
대중적인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지 않는 강수를 보며 주하가 말했다.
“인기 좀 있는 연예인이 그린 그저 그런 작품도 이삼천 하는 데 오빠 그림이 천이백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난 오빠 그림이 어느 정도 제값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하하. 알았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갤러리 측하고 얘기해 볼게.”
말로는 갤러리 측과 얘기해 본다고 했지만, 작품 가격을 높게 책정할 것 같지는 않았다.
주하가 내심 고개를 저으며 강수에게 물었다.
“이번 개인전에는 몇 작품 출품해요?”
“25점 정도 준비하고 있어.”
주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염두를 굴렸다.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예술가 데미안 허스트가 유명해진 계기는 데미안의 광기 번득이는 예술성을 믿은 찰스 사치의 전폭적인 후원과 과감한 투자가 결정적이라고 했어. 동물을 절단해 놓은, 기괴하고 끔찍하고 괴상한, 내 관점으로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그런 것을 말이지. 강수오빠가 비록 신인 작가지만 강수오빠 그림은 사람을 매혹하는 뭔가가 있는 작품이야. 만약 작품 한 점을 천이백만 원에 팔면 찰스 사치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25점 전부 사버리자. 강수오빠의 모든 작품이 개막일에 전부 팔리면 분명 세간의 주목을 받을 테고, 취재를 나오는 기자들도 있겠지. 그러면 강수오빠가 핑크티티 초상화를 그린 화가라는 걸 알게 될 테고, 개중에는 오빠 그림이 걸작이란 걸 알아보는 기자도 있지 않겠어? 그럼 데미안 허스트처럼 단번에 유명 화가가 될 거야.’
주하는 강수가 화가로 성공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임해영은 염두를 굴리며 미소 짓고 있는 주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25점 전부 구입할 무모한 일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텐데. 나중에 한 번 물어볼까?’
임해영은 이내 자기 생각을 접었다.
‘주하 아가씨가 물어보지 않는데 내가 주제넘게 간섭할 자리가 아니야. 25점을 전부 구입하든 말든 나는 그냥 지켜보면 돼.’
강수가 말없이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주하를 불렀다.
“주하야, 갑자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니?”
“아, 그냥요. 헤헤.”
강수의 개인전이 방송을 타고, 언론에 대서특필되어 요란 떠는 상황을 상상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주하가 실없이 웃더니 강수의 팔을 잡아 탁자 쪽으로 끌었다.
“오빠, 이제 회하고 초밥 먹어요.”
“그래. 배도 고픈데 회 좀 먹어보자.”
주하와 임해영이 쇼핑백에서 우럭회와 초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배가 고팠던 강수는 오랜만에 우럭회와 초밥까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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