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82화 (82/197)

# 8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82회

여명이 밝으려면 아직 이른 밤하늘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도로는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빛의 터널 같은 도로를 스타렉스가 달리고 있었다.

스타렉스 안.

핑크티티 멤버들이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는 듯이 서로의 몸을 기대어 선잠에 빠져 있었다. 도로를 달리던 차가 잠깐 덜컹거렸고, 지영의 옆구리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진하가 눈을 떴다.

다시 고개를 지영의 옆구리에 기대려던 진하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운전하는 오태근을 향해 하소연처럼 말했다.

“태근오빠, 우리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녜요? 한 달 내내 하루도 못 쉬고 일하는 건 너무 심하다.”

웃어봐를 웅얼거리며 운전을 하던 매니저 오태근이 미소 띤 얼굴로 부드럽게 대답했다.

“노래 부르고 싶다고 행사라도 잡아달라고 하던 때가 엊그젠데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자기 적응이 안 되잖아요. 한 달에 한두 번은 쉬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널널하게 쉬면서 보냈는데 쉬고 싶다는 말이 나와?”

“아휴, 그건 아니죠. 우리가 로봇도 아닌데 너무 강행군하잖아요. 이렇게 무리하면 누구 한 명 쓰러져서 오래 못 갈 수도 있지 않겠어요?”

오태근이 피식 웃었다.

“내 걱정이 바로 그거다. 오래 못 갈 수도 있다는 거. 웃어봐가 희한하게 떴지만 단발성으로 끝나면 또 옛날로 돌아가는 거야. 이런 천금 같은 기회가 왔을 때 몸이 부서져라 뛰어야지.”

“휴, 그렇긴 한데....”

오태근이 울상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는 진하를 백미러로 힐끗 보았다.

“너 무슨 일 있냐? 왜 갑자기 하루 쉬려고 그러는데?”

“저기, 그게요. 사실은 성수동에 갈 일이 생겨서 그래요.”

“성수동? 거기서 무슨 일이 있는데?”

“카페에 가보려고요.”

“카페?”

“강수오빠가 성수동에 있는 ‘빈이네 이야기’라는 카페에 우리 초상화를 전부 전시해 놨대요. 그래서 초상화 보러 가려구요.”

“어! 그러냐?”

오태근은 이강수에게 근사하게 저녁을 사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허, 그리고 보니 이강수 화가에게 한 약속을 깜박 잊고 있었구나. 시간을 내서 저녁을 사야 하는데. 아무래도 하루 날 잡아야겠구나. 얘들 휴식도 취하고, 초상화도 구경하라고 하고 난 이강수 화가에게 저녁을 대접해야겠다.’

속으로 나름 결론을 내린 오태근이 말했다.

“조만간 하루 비울 테니까 그때 볼일 보도록 해.”

“정말요! 고맙습니다.”

“방송국에 거의 왔으니까 얘들 깨워라.”

“알았어요.”

활력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한 진하가 잠에 취해 있는 동료를 깨우기 시작했다.

“지영아, 일어나. 세나야, 너도 일어나고.”

“아우, 1분만 더 자자.”

“잠꼬대 말고 어서 일어나. 메이크업도 해야 해.”

핑크티티 멤버들이 눈을 비비며 한명씩 일어났다.

*

2020년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끝자락.

12월 4일 금요일 저녁.

오늘따라 북풍한설이 서울을 꽁꽁 얼려버리려는 듯이 세차게 몰아쳤다. 시베리아에서 밀려든 이른 한파가 유난히 기승을 부렸다.

이맘때가 되면 누구나 가는 해를 아쉬워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지만, 한편으로 곧 다가올 희망찬 새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한다.

곧 해가 지고 거리에는 어둠이 찾아왔으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 순식간에 어둠을 몰아냈다.

저녁이 되자 대학로는 갑자기 내려간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낮과는 다른 활기가 넘쳐났다. 이르긴 하지만 연말연시의 분위기가 거리를 서서히 달구고 있었다.

거리에는 이른 추위에 왕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금요일인 만큼 술집이나 음식점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렸다.

수십 개의 좌석이 놓여있는 꽤 넓은 예벤호프 2층에도 각양각색의 손님들로 절반가량 차 있었다.

실내의 한쪽, 창가의 탁자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 네 명이 치킨을 시켜놓고 이른 송년회를 하고 있었다.

“자, 주목.”

자주색 털스웨터를 입은 청년, 김종대가 좌중을 쓸어보고 생맥주잔을 들었다.

“올해도 다치고 병든 친구 한 명 없이 무사히 지나간 것을 감사하고, 우리의 희망찬 미래를 위하여 건배하자.”

옆에 앉은 청년, 청바지에 낡은 티가 나는 라운드 니트에 셔츠를 받쳐 입은 이동석이 맥이 빠진 목소리로 한탄했다.

“몸만 건강하면 뭐 하냐. 단체전을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치룬 너나 강수랑 달리 난 애들 가르치느라 이룬 게 있어야 말이지. 희망찬 새해가 올 것 같지가 않다.”

맞은편에 앉은 블루 톤의 수트를 입은 사내, 장범일이 동조했다.

“동감이야. 나는 직장에서 죽어라 일만 하다 한 해가 다 갔다. 사는 게 뭐 이리 재미없냐?”

김종대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두 친구를 구박했다.

“자식들아, 젊음이 무기라는 말도 있잖아. 새파란 청춘에 무슨 죽는소리 하고 있어. 그

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죽는 소리가 아니라 현실이 척박하잖아. 너나 강수야 잘 나가니까 열심히 작업하면 그만이지만 나는 앞이 오밤중처럼 캄캄해서 미래가 안 보인다니까.”

“나도 너희랑 별반 다르지 않아. 단체전에서 작품이 팔리긴 했지만, 그래 봐야 이천만 원도 안 되는데 월급 꼬박꼬박 타는 범일이가 나보다 낫지.”

장범일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요즘 세상에 그림 팔아서 그만큼 번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 그만큼 네가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지. 지금은 내가 조금 더 버는지 몰라도 몇 년 지나면 내 연봉은 훌쩍 뛰어넘을걸? 전업 화가로 돈 버는 네가 부럽다.”

이동석이 강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눈빛에는 부러움이 가득 했다.

“누가 뭐래도 확실하게 성공 가도를 달리는 친구는 강수지. 일러스트로 돈 벌다가 12인전에 참여해서 완판, 아트페어 상하이에서도 완판, 거기에 그림동화책 인세까지 받고.”

이동석이 강수에게 물었다.

“강수야, 너 올해 얼마 벌었냐?”

고개를 끄덕이며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는 친구들에게 밤색의 폴라 니트를 입은 강수가 웃음을 지었다.

“후후, 글쎄? 계산을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이동석이 눈을 가늘게 뜨며 으르렁거렸다.

“뭐야, 그 기분 나쁜 웃음은! 대충 몇 천만 원인지 얘기하면 되지 누가 정확하게 말하래?”

“내가 얼마 벌었는지 그렇게 궁금하냐?”

“그래! 잘나가는 화가 양반이 일 년 동안 돈을 얼마나 긁었는지 궁금하다.”

“정 그렇게 알고 싶다면야 계산해 볼까?”

강수가 올해 번 수입을 대충 읊었다.

“일러스트 매절로 이천, 벙어리 황구 죽돌이 인세가 지금까지 천구백 정도. 12인전에서 사백, 아트페어에서 다섯 작품 팔린 가격이 약 이천, 의뢰받은 초상화 넉 점 그려서 이천팔백만 원 받았지. 그럼 전부 다 해서 얼마냐?”

강수가 수입을 말할 때마다 친구들의 눈이 커지며 입이 벌어지더니 급기야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동석이 얼빠진 얼굴로 더듬거렸다.

“구, 구천 삼백이다!”

“생각보다 많이 벌었군. 아, 벙어리 황구 죽돌이 영화 판권 오천만 원에 판매한 것도 있다.”

추가 오천만 원 소리에 세 친구의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이 커졌다.

“뭐? 영화 판권 오천만 원! 그럼 총 일억사천삼백만 원!”

“이거 실화냐?”

장범일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젠장, 너무 놀라서 턱 빠지겠네. 근데 영화 판권은 무슨 소리냐?”

강수는 하상덕 감독을 만나서 판권료를 투자하게 된 사연을 간단하게 얘기해주었다.

“그래서 판권료 오천만 원을 영화제작에 투자했다. 잘되면 본전이고 더 잘 되면 수익이 날 테고 영화 망하면 투자금도 날리는 거지.”

“하! 놀랍군.”

“헐! 현금 이천오백을 포기했단 말이냐?”

“포기가 아니라 투자지.”

“영화제작에 투자하는 건 생돈 날리는 거나 진배없거든. 통계를 봐도 우리나라에서 제작되는 대부분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해. 하여튼 넌 간도 크다.”

“투자라는 게 본래 리스크를 감수하는 거 아니냐? 솔직히 말하면 전작 두 작품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긴 기본이 탄탄한 감독이라 고민할 것도 없이 투자 쪽으로 결정한 거야. 최소 본전은 뽑아주지 않겠어?”

이동석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 정말 고민 없이 사는구나. 나도 너처럼 오천만 원을 고민하지 않고 마음껏 투자해봤으면 좋겠다. 참, 영화는 언제 개봉하는 거냐?”

“하상덕 감독 말로는 내년 이삼 월쯤? 저예산 영화라 최대한 빨리 찍어야 제작비를 줄일 수 있으니까 촬영 일수를 가급적 줄이고 후반 작업인 편집에 공을 들인다고 하더라.”

“저예산 영화면 그래야겠지. 이삼 월이라... 가만, 몬스터를 막아라가 삼사 월에 개봉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잘하면 종희 씨 영화랑 겹치겠네? 윤 감독이 천만감독이라 개봉이 겹치면 안 되는 거 아냐?”

이동석이 종희를 언급하자 김종대와 장범일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강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강수는 무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아니. 벙어리 황구 죽돌이는 어린이용 가족영화잖아. 장르가 완전히 달라서 동시 개봉을 해도 별 영향은 받지 않을 거다.”

“그런가?”

의외로 무덤덤한 모습의 강수를 쳐다본 종대가 속으로 안도하며 손뼉을 쳤다.

“야야, 일단 건배부터 하자. 잔 들어라.”

김종대가 화제를 돌리려 한다는 의도를 눈치챈 장범일이 재빨리 잔을 들었다.

모두 잔을 높이 들자 종대가 외쳤다.

“모두의 건강과 성공을 위하여.”

“위하여!”

쨍!

네 개의 생맥주잔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네 명의 청년이 제각각의 성공을 빌며 맥주를 목으로 넘겼다.

탁!

소리 나게 맥주잔을 내려놓은 장범일이 이동석에게 말했다.

“동석아, 너 윤 선배 개인전에서 충격 좀 받은 것 같던데 요즘 작업은 잘 되냐?”

이동석이 미간을 구기며 짜증을 냈다.

“아, 씨. 그때 일은 왜 꺼내.”

“큭큭. 내가 볼 땐 윤 선배가 옳은 말 했어. 추상은 나이 먹어서 하고 지금은 구상을 해라.”

장범일의 말에 이동석이 인상을 쓰더니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김종대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윤 선배 말에 깨달은 게 있었는지 동석이 요즘 구상화하고 있다.”

“어? 구상한다고?”

잔을 내려놓은 이동석이 소리를 꽥 질렀다.

“야, 깨닫긴 뭘 깨달아. 공모전에 출품하려면 구상을 그려야 하니까 그런 거지.”

“하하. 알았다. 열 받지 마라.”

문득, 이동석이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휴, 내가 마크 로스코 전시회에 갔다가 필이 꽂혀서 추상표현을 해보겠다고 한 삼 년 파고들었는데 실수한 것 같긴 해. 추상표현은 구상화로 나만의 작품 세계를 확립한 후에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더라.”

“동석이가 정신 차렸구나. 윤 선배 전시회 가길 잘했네.”

문득, 이동석이 옆구리를 문질렀다.

“그나저나 올 겨울은 얼마나 추우려나. 벌써부터 옆구리가 시렵구나.”

이동석이 종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날 왜 보냐?”

“종대야, 지연 씨 친구 아무나 좀 안 되겠냐?”

“안 돼.”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민도 하지 않고 단칼에 자르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니냐?”

“네 앞가림도 못 하고 있으면서 지금 소개팅 받을 처지는 아니지. 넌 자급자족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스스로 해결해라.”

듣고 있던 장범일이 헛웃음을 짓더니 혀를 찼다.

“쯧쯧, 소개팅을 바라? 거울을 보고 얘기해라, 짜샤.”

“내가 어때서. 180이 넘는 키에 이 정도면 훈남 아니냐?”

장범일이 비웃음을 날렸다.

“착각도 어지간하다. 네 키 183이지. 키로 간신히 커버하면 뭘 하냐? 강수처럼 남자다운 얼굴도 아니고, 번듯한 직장 없으면 집안이라도 갑부여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정안제처럼 최연소 교수가 될 정도의 능력자야? 아니지. 유머감각이 뛰어나? 아니지. 너는 그림이나 좀 그리는 무명화가 자나. 그러니까 여자는 그림으로 성공하고 나서 찾아라. 그게 정신건강에 이로워.”

“이 자식, 존나 정떨어지게 말하네. 넌 뭐 잘난 거 있나?”

“없지. 나야 주제 파악 하고 혼자 잘살고 있지 않냐?”

“그래, 너 잘났다.”

가볍게 웃은 강수가 한마디 충고 했다.

“후후, 동석아. 머리카락부터 단정하게 자르고, 옷은 깔끔하게 입어라. 후줄근하게 하고 다녀서야 어떤 여자가 너한테 눈길을 주겠냐? 넌 체격이 좋으니까 외모만 좀 꾸며도 여자 사귀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크으, 역시 날 알아보는 친구는 강수밖에 없구나. 강수야, 한잔하자.”

쨍!

이동석이 서러움을 맥주잔에 실어 날려버리듯 강수의 잔에 자신의 잔을 세차게 부딪쳤다.

2020년 12월 첫 번째 주의 금요일 저녁은 매몰찬 추위와 함께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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