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81회
'웃어봐'를 들으며 노래를 따라서 흥얼대던 강수는 문득 진하의 문자가 떠올랐다.
‘가만, 진하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싶어 했는데?’
강수가 실내에 걸린 조잡한 액자를 둘러보다 팔짱을 꼈다.
‘음, 핑크티티 초상화를 여기에 전시해 놓으면 어떨까? 진하도 굳이 작업실에 올 거 없이 언제든지 여기에 와서 보면 될 테고. 세나 초상화에 달린 댓글 중에 원화는 어디서 볼 수 있냐는 질문도 꽤 있었으니까. 민석 형님한테 물어봐야겠다.’
강수가 꾸덕꾸덕한 식감의 블랙 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다 비울 때쯤 노민석이 검은 봉지와 쟁반을 들고 2층으로 올라와 강수 자리로 왔다.
“형님, 마침 잘 오셨네요.”
“하하. 날 기다린 거야? 자, 이건 카페라떼야. 맛이 어떤지 마셔봐라.”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맛을 음미한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향도 찐하고 부드럽네요. 맛있네요.”
“연주가 특별히 만들어 준 거야.”
“아, 연주는 여기서 알바한다면서요? 알바 계속 하는 건가요?”
“아마 그럴 거야. 지금은 학원 다니면서 바리스타 과정을 배우고 있어. 손재주도 있고, 에스프레소를 잘 뽑아서 나중에 바리스타 과정 마치면 정식 직원으로 채용한다고 했어.”
“우아한 백조가 할 일을 찾았군요.”
“그런 셈이지. 한데 혹시 할 얘기가 있었나?”
잔을 내려놓은 강수가 그림을 가리켰다.
“형님, 저 그림들 카페 분위기에 안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림을 본 노민석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림이 볼품없지? 나도 알지. 한데 그림값이 너무 비싸서 선뜻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더라.”
“하긴 그림값 장난 아니죠.”
“그렇다니까. 사실 괜찮은 그림을 걸어놓고 싶어서 온라인 갤러리에서 대여도 알아봤거든. 적당한 크기에 마음에 드는 그림은 월 대여료가 십오만 원쯤 하더라. 6점을 대여하면 팔구십 만 원은 줘야 하는데 당장은 무리라 일단 싼 거로 걸어 놓은 거야. 나중에는 바꿔야겠지.”
듣고 있던 강수가 넌지시 말했다.
“형님, 핑크티티라고 하는 걸그룹이 있는데 혹시 아세요?”
“핑크티티? 알지. 요즘 웃어봐가 차트 역주행한다며 기사도 뜨고, 신촌이나 대학로에서 게릴라 콘서트도 한다고 하더라. 근데 핑크티티는 왜?”
“제가 얼마 전에 핑크티티 다섯 멤버의 초상화를 그렸거든요. 저 그림 대신 그 초상화를 걸어놓으면 어떨까요?”
“뭐?”
노민석이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핑크티티 초상화라면 나도 언뜻 들은 것 같거든.”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을 검색한 노민석이 강수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이 그림 네가 그렸구나?”
노민석이 보여준 그림은 세나의 초상화였다.
“예, 맞아요. 제가 그린 세나 초상화네요.”
“강수야!”
노민석이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강수를 불렀다.
“기사에도 나오고,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핑크티티 초상화를 카페에 전시해 주면 나야 정말 고맙지.”
문득 노민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도 공짜로 도움을 받을 순 없지. 강수야, 대여비를 줄 테니까 핑크티티 초상화를 아예 대여해다오. 부탁한다.”
강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님한테 무슨 대여비를 받아요? 대여비는 됐고요, 초상화는 월요일에 택배로 보내줄게요.”
“아니야. 사람이 염치없이 받고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온라인 갤러리만큼은 아니어도 성의껏 대여비 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 참, 기왕이면 머그잔에 그린 풍경화도 대여해 줄래? 네가 그린 풍경화를 보고 있으면 심신이 푸근한 게 너무 아름답더라.”
“예, 그것까지 같이 보내겠습니다.”
카페가 정신없이 바쁜데 자신이 노민석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강수는 일어날 준비를 했다.
“민석 형님, 카페에 사람이 많아서 크게 성공할 것 같은 감이 드는데요.”
“하하. 고맙다. 사실 오프닝 효과겠지만 손님이 많긴 하다. 이 정도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거든. 카페 준비하면서 강수 덕을 많이 봤어.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제가 뭘 도와줬다고 또 그런 말을 하세요? 순전히 형님이 노력해서 이런 결과를 낸 거죠. 바쁘실 텐데 전 일어나겠습니다.”
“어? 벌써 가게? 좀 있으면 동호회 회원들도 올 것 같은데.”
“회원들은 다음에 보면 되죠.”
“알았다. 참, 이거 받아라. 머그잔이야.”
머그잔이 두 개 든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머그잔이 벌써 바닥났다면서 절 줘도 됩니까?”
“괜찮아. 500개는 사은품용, 100개는 지인들 나눠주려고 600개 주문했거든. 머그잔이 생각보다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나와서 너무 빨리 동이 났지만 어쩔 수 없지. 내려가자.”
“네.”
1층으로 내려온 강수는 노민석, 연주와 작별하고 작업실로 차를 몰았다.
*
월요일.
강수는 핑크티티 초상화와 액자에 넣은 풍경화를 안전하게 포장해서 용달을 불러 ‘빈이네 이야기’로 보냈다.
용달차가 정문 쪽으로 사라진 후, 아파트로 올라온 강수는 진하에게 카페 ‘빈이네 이야기’에 가면 초상화를 볼 수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이제 작업하자.”
강수는 본격적으로 그림 작업을 시작했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포트폴리오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그림을 어떻게 채색, 재구성할지 머릿속으로 점검했다. 인물의 위치와 구도를 정하고 바탕색, 그리고 인물과 사물에 칠할 색을 결정했다.
거의 20여 분을 의자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작품을 구상하며 가상으로 그려나갔다.
머릿속으로 입체적인 재구성 작업을 끝낸 강수는 팔레트로 쓰는 투명아크릴판에 몇 가지 물감을 쏟고 평붓을 잡았다. 아크릴물감을 듬뿍 찍은 강수는 캔버스에 거침없이 바탕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한창 바탕색을 칠하던 강수는 스마트폰의 진동을 듣고 붓을 멈췄다.
‘누구 전화지?’
발신자는 뜻밖에도 진하였다.
‘초상화 때문에 전화했구나.’
“여보세요? 이강수입니다.”
[강수오빠, 저 진하예요. 문자 봤어요. 카페가 성수역 근처면 카페 거리에 있나 봐요?]
“그래. 성수역에서 멀지 않아. 찾아가는 데는 어렵지 않을 거야.”
[알겠어요. 근데 왜 그 카페에 우리 초상화를 갖다 놓은 거예요?]
“아는 형님이 오픈한 카페야. 카페 개업 때 갔는데 진하가 원화를 보고 싶다고 한 게 생각났어. 그리고 세나 초상화에 달린 댓글을 보면 진하처럼 원화 보고 싶다는 글이 좀 있더라. 카페도 오픈 했겠다 마침 잘됐다 싶었지. 진하도 언제든지 가서 볼 수 있으니까.”
[아항, 그랬구나. 원화를 꼭 보고 싶었는데 고마워요. 요즘 무지 바쁘지만 시간 내서 가볼게요.]
“그래.”
[팬카페에도 우리 초상화 볼 수 있다고 글 올릴게요. 그럼 수고해요, 강수오빠.]
“응. 들어가라.”
강수는 그림에 관심 있는 몇 사람만 ‘빈이네 이야기’를 방문할 것으로 생각했다.
‘초상화를 보겠다고 일부러 카페까지 찾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그림 감상이나 미술 쪽 취미는 소수의 사람이 누리는 고급문화라고 할 수 있다. 비엔날레 같은 대규모 행사가 아닌 이상 일부러 카페까지 찾아갈 사람은 드물 것이다.
진하와 통화를 끝낸 강수는 바탕색을 칠한 캔버스로 시선을 돌렸다.
거친 질감으로 칠한 바이올렛과 카드뮴 옐로의 바탕색이 강렬하게 느낌을 뿜어냈다.
강수가 그릴 포트폴리오의 작품은 ‘갈림길’이다.
길모퉁이에 있었던 한옥에서 자취하던 대학 시절, 자췻집인 한옥을 중심으로 길이 좌, 우, 중앙으로 갈라지는 골목길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물감이 마르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구나. 다음 작품 바탕색을 칠해야겠군.’
강수는 두 번째 이젤 앞으로 갔다. 그리고 이젤 옆에 놓인 그림 한 점.
이 작품은 신촌역 민자 역사를 배경으로 구 신촌역사의 풍경과 그 앞을 지나가는 몇몇 젊은이를 그린 ‘교차’라는 작품이었다.
강수는 첫 번째 캔버스에 칠한 물감이 마르는 동안 작품 ‘교차’의 바탕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
카페 ‘빈이네 이야기’가 오프한 지 일주일.
3일간의 오프닝 동안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노민석은 오프닝 기간이 끝난 지금 씁쓸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예상은 했으나 오프닝이 끝나고 메뉴를 정가에 판매하자 3일 만에 매출이 1/5로 곤두박질쳤다.
2층에서 탁자를 정리하던 노민석은 핑크티티 초상화를 감상하는 두 명의 남자 손님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핑크티티 초상화와 풍경화에 관심을 준 손님들은 그림이 풍기는 매력에 빠져 한동안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노민석은 그림 애호가도 아니고, 그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평범한 서울 시민이다.
하지만 용달을 받아 포장을 제거하고 핑크티티의 초상화와 고산지대를 묘사한 풍경화를 보았을 때 그림에서 풍기는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매료되어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이강수의 그림이 자신의 감정을 흔들 정도로 뛰어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놀란 마음을 추스른 노민석은 기존의 액자를 떼어내고 핑크티티 초상화와 풍경화를 걸었다. 초상화를 걸어놓고 보니 실내조명이 흐려서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려웠다.
노민석은 곧바로 조명가게로 달려갔다. 가게 주인에게 전시용 등기구를 문의해 자바라 등기구를 사서 설치했다. 그림을 걸어놓은 뒤 핑크티티 초상화를 누가 그렸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물어보는 손님이 여럿 있었다. 그는 아예 화가 이름과 핑크티티 멤버 이름을 적은 명찰을 만들어서 그림 옆에 붙여놓았다.
이때,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네 명의 여자애들이 소란을 피우며 2층으로 올라왔다.
“야, 초상화 저기 걸려있다.”
“와, 조명까지 설치했네.”
“근데 원화가 왜 여기 전시되어 있는 거지?”
“그야 이강수 화가한테 구입해서 걸어놨겠지. 얼른 가보자.”
여자애들은 음료수, 사이드 메뉴를 탁자에 내려놓고 그림 앞으로 몰려갔다.
주문한 음료수는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그림부터 감상하는 여자아이들을 보며 노민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설마 뭘 마시러 온 게 아니라 초상화를 보러 온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음료수와 허니 블레드, 핑크 케이크, 초코 프라푸치노를 팽개치고 그림 앞으로 갈 리가 없었다. 노민석은 의문이 가득 찬 눈빛으로 여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여학생들이 그림 앞에서 깜찍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보나 마나 인증샷이었다.
순간 한 줄기 전율이 정수리를 관통해 등골로 흘러내렸다.
‘이, 이거 뭐지? 설마 유명 맛집처럼 한 번쯤 방문해봐야 하는 카페가 되는 것 아냐? 그럼 대박인데?’
순간적으로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헛된 기대를 품고 있으면 실망이 큰 법이다. 그림이 훌륭하긴 하지만 미술관 같은 곳에 전시된 명화도 아니고, 죽기 전에 가서 맛을 봐야 할 유명 맛집도 아닌데 누가 그림을 보겠다고 일부러 자신의 카페를 찾아올까? 그저 몇몇 핑크티티 팬이 찾아와 인증샷을 찍을지는 몰라도 일반인이 수고스러운 발걸음을 할 리 만무했다.
‘풋, 꿈 깨자.’
핑크티티 다섯 멤버의 초상화에서 인증샷을 찍어대는 여학생들을 지켜보며 미소 짓던 노민석은 탁자 정리를 끝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챔스뮤직 순위에서 ‘웃어봐’가 29위에 랭크되어 생방송 ‘챔스뮤직 TOP FIFTY’에 핑크티티가 첫 출연했다. 시청률은 높지 않아도 공중파 생방송에 출연한 효과는 상당했다. 음원 챠트에서 웃어봐의 순위가 상승한 것은 물론이고, 각종 프로그램에 핑크티티 멤버가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웃어봐’의 방송 노출 빈도가 많아졌고, 대중의 주목을 받으면서 핑크티티의 인기는 가파르게 상승 곡선을 그리며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