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그림 그리는 마법사 - 80회
‘몬스터를 막아라’에 관한 기사를 보니 종희와 함께 지냈던 기억들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대학 4학년 때 연기자 쪽으로 진로를 확실하게 정한 때부터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자연적인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종희는 자신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지금 와서 그때를 되돌아보면 종희는 성공에 집착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의문이라면 종희가 자신을 멀리하면서도 막상 헤어지는 데 시간이 걸렸던 이유였다. 참 많이 고민해보았지만, 강수는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 미련일지도 모른다.
‘몬스터를 막아라가 흥행하면 네가 꾸던 꿈이 이루어지겠구나. 네 꿈을 위해 날 떠났지만 원망하진 않을게. 그때는 내가 지질한 인간이 분명했으니까. 욕할 자격도 없었으니까.’
강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기사로 시선을 돌렸다.
“윤상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몬스터를 막아라’의 촬영, 순조롭게 진행.”
<파주에 마련한 ‘몬스터를 막아라’ 세트장에서 스텝진과 배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촬영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해왕’의 명성이 무색하게 두 번째 영화 ‘갈증’과 세 번째 영화 ‘끝까지 간다’에서 흥행에 실패한 윤상일 감독은 이번 영화만큼은 성공을 자신했다. 윤상일 감독의 호언장담이 맞을지는 내년 4월에 판가름 날 것이다.
‘몬스터를 막아라’는 제목에서 풍기듯 액션 연기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한데 스턴트맨이나 대역을 쓰지 않고 배우들이 혼신의 액션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특히 설희가 맡은 배역은 고난도 액션 연기가 많다. 설희가 대역을 쓰지 않고 액션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해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맡은 배역을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다며 윤상일 감독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목드라마 악당검사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연기자 설희의 탄탄한 연기력이 ‘몬스터를 막아라’ 촬영장에서 호평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몬스터를 막아라’는 현재 절반 정도 촬영이 끝난 상태이며 내년 4월 개봉을 목표로 순항 중이다...>
‘내년 4월이라... 어떤 역할로 나올지 정말 궁금하네.’
궁금증을 유발하려는 마케팅의 일환인지 ‘몬스터를 막아라’는 모종의 프로젝트를 개발 중인 비밀 실험실에서 우연히 몬스터가 탄생했다는 내용 외에 줄거리나 배우의 배역, 역할에 대한 보도 자료가 없고, 비밀에 싸여 있었다.
종희를 떠올리면 아직은 가슴 한쪽이 아련하다.
종희를 깨끗하게 잊고 싶어도 종희의 모든 것이 강수의 뇌리와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감정은 무뎌지겠지만 추억과 기억은 평생을 두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묵묵히 컴퓨터를 끈 강수는 밖으로 나와 작업실로 향했다. 뇌리에 남아 있던 종희에 대한 잡념이 차창 밖에서 뒤편으로 흘러가는 가로수처럼 하나하나 망각의 늪으로 사라져갔다.
작업실에 도착한 강수는 어제 끝낸 네 작품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머릿속에 형상화되어 있는 그림이 화폭에 재현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유화라 그리는 데 시간은 좀 걸렸지만 그림은 괜찮네.’
“푸핫.”
문득, 강수가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실은 그전과 비교하면 그림 그리는 속도는 엄청 빨라졌는데 유화 그리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했다는 점이 우스웠다.
내년에 개인전에서 전시될 완성된 유화 4 작품.
어제는 작품을 완성했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었는데 오늘 다시 보니 몇 달 후면 첫 번째 개인전을 연다는 현실이 체감되었다.
지금 같이 의욕이 용솟음치고, 고양된 기분이면 하루, 24시간에 한 작품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거의 4주 만에 유화 4 작품을 끝낸 강수는 흥겨운 마음으로 미니 부스에 완성한 작품을 하나씩 걸어놓고, 유화물감과 오일, 팔레트 등을 정리해서 치웠다.
앞으로 한 달에 5 작품씩 끝내야 4월까지 총 24점을 준비할 수 있다.
‘작업하는데 지장 없도록 캔버스를 미리 주문해놓자. 제소도 칠해 놔야 하니까.’
책상에 앉은 강수는 종이에 스케치한 작품에 맞는 캔버스 사이즈를 정리한 후, 죽산화방에 10개의 캔버스를 주문했다.
‘이번엔 포트폴리오에 있는 작품을 그려야겠다.’
강수는 새 캔버스 네 개를 이젤에 걸고, 아크릴물감과 물통, 붓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포트폴리오 작품 네 점을 각각 이젤 옆에 세워두었다.
강수는 12월 안에 포트폴리오 6 작품을 끝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2월엔 각종 모임이 있긴 하지만 아크릴물감을 사용하고, 이미 완성된 작품을 재창작하기 때문에 시간상으로 가능할 것이다.
4 작품은 완성했고, 12월에 6 작품을 끝내면 14점이 남는다. 개인전이 예정된 4월 초까지 나머지 14점은 여유 있게 작업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으싸, 시작해 보자.”
강수는 두 주먹을 움켜쥐며 기합을 넣고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연필을 잡았다.
*
11월 말에 접어들면서 새벽 공기가 차가워졌다. 중산 아파트에서 수련 장소까지 뛰어가면 땀이 흐르는 건 매양 같지만 옷이 흠뻑 젖을 정도는 아니었다.
수련 장소에 도착한 강수는 등산복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쳐놓고, 수건을 꺼내 땀을 닦고 새 등산복으로 갈아입었다.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고 기분은 상쾌했다.
‘3서클 마나하트는 이론상 2서클 마나하트의 두 배의 마나가 축적되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길이 없군.’
두 달 전, 어떤 계기를 통해서 마나하트가 2서클 마나하트로 갑작스럽게 성장했다. 자신이 이룬 2서클 마나하트가 정상적인 수련을 통해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3서클 마나하트가 생성되는데 걸리는 대략적인 시간조차도 가늠할 수 없었다.
강수는 잡념을 떨쳐내고 쿠션 방석에 앉아 마나회로 수련을 시작했다.
초겨울의 찬 기운이 햇볕에 조금 따뜻해진 정오가 넘은 후에야 강수는 알람을 듣고 수련을 끝냈다.
‘3서클 마나하트는 아직 멀었구나.’
1서클 때와 비교하면 훨씬 많은 마나를 축적하고 있었지만 2서클 마나하트가 3서클 마나하트로 성장하려면 몇 개월의 수련으로는 턱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나가 풍부한 자랄 행성에서도 2서클 마법사가 3서클 마법사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평균적으로 2년은 꼬박 수련해야 한다. 그렇다고 아무나 3서클 마법사로 진화하는 것도 아니다. 2서클 마법사 가운데 50% 정도만 3서클 마법사로 진화하고 나머지 절반은 2서클 마법사로 남는다.
심장에 마나시드를 심고 약 8개월 만에 2서클 마법사가 된 강수의 빠른 성취를 자랄 행성 마법사가 알면 충격으로 자빠질 마법사가 수두룩할 것이다.
강수는 나무에 걸어놓은 등산복을 챙겨서 하산했다.
점심을 사 먹고 아파트에 도착해 몸을 씻은 강수는 벽시계를 보았다.
‘두 시네. 한 시에 오픈 한다고 했지?’
오늘은 27일 금요일, 카페 ‘빈이네 이야기’가 오픈한다. 강수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카페 ‘빈이네 이야기’에 갈 채비를 갖췄다.
‘개업 선물로는 화분이 무난하겠지?’
강수는 ‘빈이네 이야기’로 가는 길에 꽃집에 들러 소담하게 야생화가 피어 있는 화분을 하나 구입했다.
네비에 주소를 찍고 차를 몰아 ‘빈이네 이야기’ 근처 골목에 도착한 강수는 차에서 내렸다.
‘무슨 줄이 저렇게 서 있어?’
빈이네 이야기 매장 입구에서 70여 명이 뱀처럼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손님이 줄을 설 정도로 많은 거야? 대박인데?’
매장으로 걸어가던 강수는 줄의 후미에 줄을 서면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여성에게 쏘아붙이는 남자 목소리를 들었다.
“자기, 집에 머그잔 몇 개나 있잖아? 줄까지 서가면서 사은품으로 주는 이딴 머그잔 받아야 해? 보나 마나 나중엔 버릴 거면서.”
“내가 실물 봤는데 머그잔이 생각보다 고급이야. 그리고 머그잔에 그려진 풍경화가 얼마나 아름다운데 버리긴 왜 버려. 각자 머그잔 받게 내가 만 원어치 살 테니까 자기도 만 원어치 사. 알았어?”
“뭐? 커플 잔으로 사려고?”
“그래. 하나만 있으면 외톨이 같아서 싫으니까 잔말 말고 자기도 하나 받아.”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지금까지 질린다며 버린 머그잔만 해도 이십여 개다. 너 이런 사은품 모으는 것도 중독이야.”
“이건 절대 안 버릴 테니까 잔소리 말고 구입해.”
“자기가 그런 말 한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이젠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지 않아.”
30대로 보이는 두 남녀의 티격태격대는 대화를 뒤로하고, 매장 입구로 걸어가던 강수는 오프닝 광고 현수막을 볼 수 있었다.
현수막에는 자신이 그려준 풍경화가 인쇄된 머그잔과 광고 문구가 쓰여 있었다.
<오프닝 기념 사은품 증정 행사. 1만 원 이상 구매 고객에게 이강수 화가가 그린 풍경화를 품은 머그잔 증정합니다-머그잔 500개 소진 시 행사 종료>
‘그럼 이 손님들이 머그잔을 받으려고 줄을 섰다는 건가?’
매장으로 들어가려던 강수는 안에서 나오는 연주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연주야, 너 여기서 뭐 하냐?”
“앗, 강수오빠! 지금 온 거예요?”
“그래. 볼일 좀 보고 오느라 좀 늦었어.”
“헤헤. 저 여기서 알바 하고 있어요. 아, 참. 전 번호표 나눠주고 올게요.”
“번호표?”
“사은품 머그잔이 얼마 남지 않아서 번호표로 끊어야 하거든요. 현수막도 철거하러 직원이 2층으로 올라갔어요.”
“한 시에 오픈했는데 벌써 머그잔 500개가 바닥난 거야?”
“아, 한 시는 너무 늦는 거 같다고 열 한 시에 오픈했어요. 손님이 본격적으로 몰려든 건 열두 시쯤이지만.”
“그랬구나. 수고해라. 난 매장에 들어가 볼게.”
“네.”
1층 매장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주문은 사은품을 주는 쪽과 필요 없는 쪽, 두 곳에서 받고 있었다. 사은품을 받으려는 손님은 매장 안에서도 약 15명이 줄을 서고 있었다.
오픈 기념으로 아메리카노가 1,500원, 카페라떼가 2,500원이었다. 그 외 메뉴도 30% 할인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강수 왔구나.”
노민석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형님, 오픈 축하합니다. 손님이 상당히 많은데요? 대박 나는 거 아닙니까?”
“이게 다 네 덕이다. 샘플 머그잔을 보고 그림이 좋다면서 손님들이 줄 선 것 봐라. 머그잔 인기가 너무 좋아서 벌써 행사를 종료해야 할 판이다. 이런 줄 알았으면 천 개 주문할 것을 실수했다.”
“잘됐네요. 이거 받으세요. 야생화 화분입니다. 일루션 회원들은 왔나요?”
“대부분 직장인이라서 회원들은 저녁에 올 것 같아. 화분 고맙다. 아, 참. 내 정신 좀 보게. 뭐 마실래?”
“아메리카노랑 블랙 케익 한 조각이요.”
“2층에 올라가 있어. 내가 갖다 줄게.”
“아뇨. 손님이 많아 바쁠 텐데 제가 가지고 가면 됩니다.”
“그럴래? 그럼 잠깐만.”
잠시 후 노민석이 아메리카노와 블랙 케익이 든 쟁반을 강수에게 주었다.
“전 2층으로 올라가 카페 구경할게요.”
“그래, 이따 올라갈게.”
25평 규모의 2층도 손님으로 거의 차 있었다.
강수는 실내를 둘러보며 인테리어를 살펴보았다.
조명이나 벽, 탁자 등 심플한 디자인의 제품을 사용해서 전체적으로 현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군데군데 벽에 걸린 6개의 그림은 인쇄물을 액자에 넣은 조잡한 그림이라 인테리어 수준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림만 좀 괜찮은 걸로 바꿔도 분위기가 더 나을 텐데 좀 아쉽구나.’
웬만한 화가의 그림은 한 점에 몇 백만 원은 한다. 무명화가의 작품도 최소 2, 3백만 원은 하기 때문에 원화를 사는 것은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강수는 2층을 한 바퀴 돌아보며 인테리어를 살핀 후 빈 자리에 앉았다.
이때, 음악이 끝나고 새로운 음악이 나왔다.
스피커에서 경쾌한 스윙 리듬과 리드미컬한 멜로디의 인트로와 함께 독특한 음색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웃어봐네.’
핑크티티의 화제의 곡, 웃어봐였다.
짜증나는 얼굴 하지 마.
신경을 긁는 날카로운 목소리 내지마.
길을 걷다 부딪쳐도 인상 쓰지 마.
눈이 마주치면 노려보지 마.
마음을 열고 인사를 나누면~ 웃어봐.
우리의 머리 위 하늘이 파라면~ 웃어봐.
바람이 너, 나를 스치고 지나가면~ 웃어봐.
햇살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면 ~ 웃어봐.
뒤를 봐, 위를 봐, 앞을 봐, 웃어, 웃어, 웃어봐.
위를 봐, 뒤를 봐, 앞을 봐, 웃어, 웃어, 웃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