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79회
이때, 옆에서 누군가 다가와 걸걸한 목소리로 윤창수를 불렀다.
“윤 작가! 여기 있었구먼.”
윤창수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숙여 반갑게 인사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프닝 시간 맞춰 오려고 했는데 내가 늦었군? 갑자기 할 일이 생겨서 말이야.”
“늦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윤 작가 개인전에 내가 안 올 수가 있나? 몇 작품 보니까 설치 작품도 아주 뛰어나더군. 정크아트라고 해서 어떤 작품일지 궁금했는데 작품도 훌륭하고, 의미 있는 전시회야. 늦었지만 개인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회색 양복을 입은 풍채가 당당한 50대 중반의 남자는 홍한석으로 윤창수의 중학교 은사이다. 윤창수가 화가의 길을 갈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미술을 가르친 선생이었다.
홍한석이 강수 일행을 보며 말했다.
“손님이 있었네?”
“아, 이 친구들은 전시 보러온 대학 후배들입니다.”
“그럼 나는 작품 감상하고 있을 테니까 후배들하고 얘기 나누고 이따 보지.”
“아닙니다. 선생님은 제가 모셔야죠.”
윤창수가 고개를 돌려 강수 일행에게 말했다.
“후배님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자. 그럼 전시 재밌게 둘러보고 가게.”
“네, 선배님.”
“선생님, 이쪽으로 오시죠.”
윤창수는 강수 일행과 작별하고 홍한석 은사와 작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장영봉은 쌀쌀맞게 굴고 떠나는 창수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7시에 달맞이식당에서 뒤풀이 있으니까 오도록 해. 같이 밥이라도 먹자.”
종대가 말했다.
“네, 작품 둘러보고 시간이 되면 가겠습니다.”
“그래, 그럼 난 볼일 좀 볼게.”
장영봉이 돌아가자 종대가 입을 열었다.
“창수 선배가 동석이한테 어째 까칠하다? 너 뭐 밉보인 거 있냐?
“야, 오늘 처음 보는데 밉보일 일이 뭐 있어? 그게 아니라 내가 한 소릴 듣기라도 했나?”
“맞아. 언 듯 봤는데 아까 우리 옆에 있었어. 우리가 한 얘기를 들은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초면에 저렇게 냉대할 리가 없지.”
“임마, 그러니까 넌 말 좀 조심해.”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냐? 그 정도 비판은 심한 것도 아니구만. 윤 선배 보기완 달리 쪼잔하네.”
이미 왈가불가 해 봐야 소용없는 엎질러진 물이었다. 강수가 화제를 돌렸다.
“작품마저 보고 밥 먹으러 가자.”
“달맞이식당에 가려고?”
종대가 비아냥거렸다.
“왜? 찔려서 못 가겠지?”
“찔리는 건 없지만 대부분 안면 없는 고학번 선배들이 모이지 않겠냐? 창수 선배한테 밉보인 마당에 거기 갔다간 불편해서 밥이 제대로 넘어갈 것 같지 않은데?”
“음식은 편하게 먹어야지. 다른 음식점으로 가서 먹지 뭐.”
“하하. 역시 강수가 내 맘을 꿰뚫는다니까.”
강수 일행은 다시 관람을 시작했다.
윤창수의 개인전은 의외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대부분 작품이 전위적이고 독창성이 뛰어나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또한 전시 작품들뿐만 아니라 디스플레이도 작품의 성격에 맞게 연출되어 시너지 효과를 냈다.
강수 일행은 전시를 더 둘러본 후 밖으로 나와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
캔버스에서 붓을 땐 강수는 뒤로 물러나 이젤에 걸린 네 작품을 차례차례 훑어본 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주면 네 작품은 끝낼 수 있겠다. 나머지 작품은 아크릴물감으로 그려야지.’
건조제 시카티브를 썼어도 유화물감은 마르는 시간이 꽤 걸렸다. 남은 20점의 작품을 그리려면 아무래도 아크릴물감을 써야 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자정이었다.
‘메시지가 왔었네?’
메시지가 온 소리도, 자정이 된 줄도 모르고 그림에 빠져 있었다.
강수는 파란색 led가 깜박이는 스마트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서린: 강수오빠, 우리가 출연한 카운터펀치 봤죠? 우리 어땠어요? 예쁘게 나왔죠?
-서린: 어? 답장이 없네. 바쁜가 보네요?
-서린: 우와, 나 씹힌 거야?
-서린: ㅠㅠ 밉다.
강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며칠 전에 오늘 카운터펀치에 출연한다는 문자를 받긴 했지만 방송 봤냐고 확인 문자할 줄은 몰랐다.
‘어떡한다.’
작업하는데 빠져서 핑크티티가 출연하는 카운터펀치 본다는 것을 깜박했다. 벌써 자정이 넘어서 답장을 보내기엔 늦은 시각이라 약간 고민되었다.
‘자고 있으려나? 문자를 네 번이나 했는데 늦긴 했어도 답장은 해줘야겠지?’
결국 강수는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볼 수 있도록 서린에게 답장을 보냈다.
-늦게 답장해서 미안. 작업에 집중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서 문자 온 줄 몰랐네. 카운터펀치는 나중에 인터넷으로 볼게.
우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의외로 답장이 금방 왔다.
-서린: 헤헤. 작업하고 있었구나. 방송에서 우리가 재미난 이벤트를 했는데 봤는지 궁금했어요.
-어떤 이벤트?
-헤헤. 한번 보세요. 참, 우리 노래 39위까지 올랐어요. 이번에 순위가 더 오르면 다음 주엔 생방송 ‘챔스뮤직 탑피프티’에 나갈지도 몰라요. 이게 다 오빠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아니야. 내 그림은 잠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이고 노래가 좋아서 인기를 끄는 거지. 생방송에 꼭 나가길 바랄게. 밤이 늦었지? 잘 자.
-서린: 넹, 오빠도요.
‘방송에서 무슨 이벤트를 했기에 보라는 거지? 나중에 보면 알겠지.’
강수는 주변을 정리하고 작업실에서 나와 아파트를 향해 차를 몰았다.
*
다음날.
마나회로 수련을 마치고 북한산에서 아파트로 돌아온 강수는 샤워한 후,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을 켰다. 포털 메인 화면에서 핑크티티를 검색하려던 강수는 실시간 검색란에서 핑크티티를 발견했다.
“어? 핑크티티가 실검에 떴어? 카운터펀치에 출연한 것 때문인가?”
강수는 기쁜 마음으로 핑크티티를 클릭했다. 그러자 화면에 핑크티티 관련 게시글이 주르륵 올라왔다. 각종 온라인 매체의 기사와 블로그나 카페의 게시글도 있었다.
-핑크티티 멤버들의 액자 이벤트!
-핑크티티 카운터펀치에 출연, 액자 이벤트 선보여.
-눈부신 핑크티티의 약진!
-그림 같은 메이크업과 액자 이벤트로 웃음 선사한 핑크티티.
‘아, 액자 이벤트를 했구나. 그게 뭐지?’
‘개성 넘치는 메이크업과 몸을 사리지 않는 액자 이벤트의 핑크티티!’
강수는 ‘개성 넘치는 메이크업~’이란 기사를 클릭했다.
<금요일 10시에 방송된 카운터펀치에 중고신인 걸그룹 핑크티티가 출연했다. 이날 핑크티티 멤버들의 메이크업과 액자 이벤트가 네티즌들에게 화제다. 핑크티티는 그림 같은 독특한 메이크업을 하고 나왔다. 지영은 섹시한 분위기가 나는 메이크업을 했고, 세나의 메이크업은 상큼하고 발랄한 느낌을 주었다. 소냐는 미의 화신 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린은 편한 느낌을 주는 털털한 여동생 스타일, 진하는 깜찍하고 귀여운 소녀 느낌이 물씬 풍기는 메이크업을 했다.
독특한 메이크업에 대해 묻자 자신들의 초상화와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밝혔다. 진행자가 초상화를 볼 수 있냐고 물었고, 세나는 즉석에서 이강수 화가가 그렸다는 초상화를 태블릿으로 보여주었다. 핑크티티의 메이크업은 초상화와 매우 흡사해 패널과 방청객을 놀라게 했다. 핑크티티 멤버들은 각자의 개성을 살린 멘트와 언행으로 방청객과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특히 틀만 있는 액자로 자신의 초상화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 액자 이벤트는 패널과 방청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평균시청률 3%대의 카운터펀치는 이날 핑크티티 출연으로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 4%대로 소폭 상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수는 기사에 달린 댓글도 읽었다.
-소행성3872: 메이크업 진짜 죽인다. 말 안 하고 가만있으면 그림 같아. 분장사 초상화를 얼굴에 그리느라 고생했을 듯.
┗ssenguy: ㅋㅋㅋㅋ. 무지 열 받았을 것 같음.
-지앨: 난 방송에서 액자 이벤트 봤다. 틀만 있는 액자를 얼굴에 대서 초상화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건데 정말 웃겼음. ㅋㅋㅋㅋ.
┗-Su지1004: 완전 대박!
┗gomad88: 빵 터짐. 액자 이벤트 개웃겼다.
┗위너유: 얘네들 뭐냐! 엄청 존잘이네. 얼굴도 개성적이고, 노래도 잘 부르고, 완존 매력덩이야. 오늘부터 팬이다.
┗빠직빠직: 액자 이벤트 꼭 봐라. 안 보면 후회한다.
-너를담다: 소냐는 여신급! 가슴이 설렌다.
-jeaha: 와, 섹시퀸 등장, 지영이 쵝오!
-Redrabit: 뭐니, 가루상이 단체로 나온 줄 알았잖아. 아, 토 나와.
┗삐딱이: 어떻게 가루상하고 비교를 할 수 있지? 니 눈 동태눈 인정? 오, 인정.
┗걍제리: 오크녀는 찌그러지지. 나대봐야 욕만 처먹거든.
┗퇴끼: 자뻑하고 있네.
┗홀리쉐: 엿다, 관심. 마이 묵어라.
-한송이꽃으로: 유튜브나 핑크티티 팬카페가서 핑크티티 초상화 사진보고 액자 이벤트 봐라. 개소름 돋는다.
-미니미: 이강수 화가 누구? 처음 들어 봄.
┗튀기니: 폭풍검색 결과 18년에 홍우대 졸업한 초짜 화가로 확인. 하지만 초짜임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참가, ‘아트페어 상하이’ 갤러리윤 소속으로 참가했음. 놀라운 점은 아트페어 상하이에 출품한 5작품이 완판되었다고 하는군요. 무명의 젊은 작가치고는 잘나가고 있네요.
┗미니미: 오오, 감사. 나도 확인해 보겠습니다.
┗엑스트라a: 유튜브에서 확인했는데 초상화 짱이다. 링크한 노래도 괜찮아. 핑크티티 실력 있는 걸그룹이었어. 팬카페 가입해야지.
┗엑스트라b: 나도 확인했음. 그림도 노래도 굿!
-지영홀릭: 지영 언니, 사랑해!
-티티돌이: 설마 음원순위 1위까지 올라가는 건 아니겠지?
댓글을 읽는 강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댓글 많이 달렸네. 액자 이벤트? 후후, 누가 그런 참신한 아이디어를 냈지?’
틀만 있는 빈 액자를 얼굴에 대고 초상화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킥킥, 방송에서 웃겼겠다. 이렇게 이슈가 되고, 순위가 조금만 더 오르면 대박 나겠는데? 근데 나도 제법 관심을 받는구나?’
강수는 핑크티티의 방송 출연과 함께 자신까지 덩달아 네티즌의 관심을 끄는 것이 희한했다. 묘한 흥분을 느끼면서 다른 커뮤니티 글들을 이것저것 클릭해서 읽어보았다. 유튜브에 올라 있는 핑크티티의 초상화를 링크한 블로그와 카페 게시글이 상당수였다.
결국 강수도 유튜브에 찾아가 자신이 그린 핑크티티의 초상화를 하나씩 클릭해서 확인했다. 각각의 초상화에 링크된 노래가 달랐다.
기존에 발표한 두 장의 앨범에 수록된 곡 가운데 각자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곡을 선곡해서 링크한 모양이었다.
세나는 원래대로 ‘웃어봐’가 링크되어 있었고, 지영은 ‘날 기다리지 마’, 소냐는 ‘문 러버’, 서린은 ‘너의 기억으로부터’, 진하는 ‘열여덟에’였다.
일렉트로닉 댄스곡 ‘날 기다리지 마’, 달달한 발라드 ‘문 러버’, 각각의 매력적인 음색이 돋보이는 감미로운 곡 ‘너의 기억으로부터’까지 핑크티티는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소화해 냈다.
가창력도 훌륭해서 ‘문 러버’ 같은 경우 애절한 목소리로 감정을 녹였다가 쭉쭉 뻗는 고음으로 시원하게 터트려주었다.
노래를 전부 들어본 강수는 다시 포털 사이트 기사를 살펴보았다. 연예계란에 올라온 다른 기사도 대부분 비슷한 내용의 복제 수준이었다.
인터넷을 끄려던 강수는 멈칫 했다.
‘몬스터를 막아라’에 관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