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그림 그리는 마법사 - 78회
강수 일행은 2m 높이의 ‘부활의 탑’이라는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부활의 탑’은 화려한 색으로 빛나고 있지만, 색깔과 어울리지 않게 기괴한 형상의 탑이었다.
“폐품을 가공해서 재료로 썼어. 정크아트네. 그래서 두 번째 탄생이라고 주제를 정한 모양이지? 강수야, 폐품을 이용한 작품 어떤 거 같냐?”
“글쎄? 폐품을 재활용해서 예술 작품으로 화려하게 승화시킨 점은 높이 살 만한데 재료의 한계로 인해 예술적 가치는 좀 떨어지지 않나 싶다.”
이동석이 맞장구쳤다.
“그런 걸 태생적 한계라는 거지. 재벌 자식도 서자로 태어나면 어둠 속에서 숨어 살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지.”
“뭐, 서자? 넌 비유를 해도 꼭 그런 식으로 하냐?”
“뭘? 느낀 대로 말한 것뿐이다. 생각해 봐. 기왕에 예술 작품 창작하는 건데 재료가 좋으면 작품도 좋을 것 아냐? 폐품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노력은 가상하고, 작품성과 사회비판 의식은 인정하지. 그렇지만 투자 목적이 아닌 이상 감상용으로 개인이 소장하거나 기업이 사서 로비 같은 곳에 전시하기엔 우중충한 분위기가 부담되는 작품들 아니냐? 뭐, 재활용회사 같은 데는 컨셉이 맞으니까 괜찮기는 하겠다.”
“크, 하여튼 말은 그럴듯해.”
언제부터인가 몇 명의 관람객 사이에서 반코트를 입은 사내가 ‘부활의 탑’을 살펴보며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이동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의 제기했다.
“근데 이 작품들, 전체적으로 영국 영 브리티쉬 아티스트 작가들의 엽기적인 작품과 비슷한 분위기가 풍기지 않냐?”
“네 말을 듣고 보니 ‘철의 독수리’나 ‘꿈꾸는 에덴동산’ ‘부활의 탑’ 같은 작품은 그런 분위기가 나는데?”
강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본래 완벽한 창작품이 어딨냐? 모든 예술 작품이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발전해 왔는데. 과거부터 명작을 따라 그린 화가도 많았고, 작가들끼리 예술적인 교류를 나누기도 하잖아. 어차피 모방은 창작의 길잡이야. 모방하되 얼마나 창의적인가가 문제겠지.”
“바로 그거야. 이 작품들이 과연 창의적인 모방인가 하는 점은 비평가가 진단하겠지.”
인상을 찌푸리며 ‘부활의 탑’을 유심히 관찰하던 반코트를 입은 30대 중반의 사내가 강수 일행을 힐끗 한차례 훑어보고 다른 작품 쪽으로 걸어갔다.
따가운 시선을 느낀 강수가 고개를 돌려 반코트의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누가 들으면 괜히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만하고 작품 감상하자.”
“그래.”
띠링!
이때 통장에 돈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무슨 돈이 입금됐지? 돈이 들어올 데라곤 인세밖에 없는데?’
스마트폰을 확인한 강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벙어리 황구 죽돌이’ 4천 부에 대한 인세였다.
“강수야, 무슨 소식인데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냐?
“어, 인세가 입금됐네.”
“인세? 언제 책 냈었어?”
“몇 달 전에 ‘벙어리 황구 죽돌이’라는 창작 그림동화책 한 권 냈는데 잊을 만하면 인세가 들어온다. 이번엔 4쇄 인세가 들어왔어.”
이동석이 부러운 눈으로 강수를 쳐다보며 푸념처럼 말했다.
“일러스트하더니 그림동화책도 냈구나. 너는 재주도 많다.”
종대가 핀잔을 주었다.
“부러워하지 말고 너도 시간 내서 그림동화책 한 권 창작해서 공모전 같은 데 응모해봐. 아이들이 읽을 만한 이야기 한 편 쓰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잖아?”
이동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동화책 창작이 네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 그림 그리는 것이야 문제 될 게 없지만, 동화를 창작한다는 게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할 수만 있으면 공모전 응모도 괜찮지. 두세 달 작업해서 대상을 받을 수 있으면 가장 효율적인 작업 아니겠어?”
이동석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모전에 응모해서 대상을 덥석덥석 받는다면야 왜 안 하겠어. 한데 대상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경쟁이 장난 아닐 텐데. 이래저래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구나.”
종대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마, 어디라도 응모해야 입상이라도 받을 기회가 있는 거지. 도전할 생각은 않고 포기부터 하는 거냐?”
강수가 쳐진 동석의 어깨를 툭 쳤다.
“추상만 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으니까 공모전에 참여해 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넌 학교 다닐 때 구상도 잘했잖아? 네 실력이면 공모전에서 좋은 성적을 낼 것 같은데?”
잠시 생각에 빠진 이동석이 모종의 결론을 내렸는지 결의의 눈빛을 빛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작업을 한동안 중단하는 한이 있더라도 앞으로 일 년 동안 공모전이란 공모전은 전부 참여해보마. 학원 강사만으론 먹고 살기 힘들기도 하니까.”
“잘 생각했다.”
“짜식, 진작에 그럴 일이지.”
강수 일행이 다시 작품을 감상하는데, 남색 계열의 정장을 입은 장영봉이 전시장으로 들어왔다.
실내를 둘러보던 장영봉은 강수를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강수 일행을 향해 다가갔다.
“너희들 왔구나? 왔으면 왔다고 연락을 하지!”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작품 먼저 보고 인사하려고 했어요.”
“장 선배님, 오랜만에 뵙네요.”
“영봉 형, 이번 창수 선배 전시회 작품이 정크아트 작품인 줄은 몰랐네요. 작품들이 하나같이 독특하고, 색다르고, 심지어 크로테스크한데요?”
“하하. 그래? 창수가 한 가지 경향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창작 방법을 시도하고 있거든. 이번 개인전은 정크아트를 천착한 결과물이자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 뭐 잘 알다시피 정크아트의 본질이 문명비판에서 출발하고 있으니까.”
말을 마친 장영봉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창수가 조금 전에 관람객 반응을 살펴본다고 전시장에 내려왔는데 어딨지? 너희는 작품 구경하고 있어라. 내가 창수 찾아서 소개해 줄 테니까.”
“예, 선배님.”
장영봉은 전시장을 둘러보며 윤창수를 찾았다.
자동차의 보닛을 캔버스처럼 활용한 작품 근처, 관람객 사이에 서 있는 반코트를 입은 윤창수를 발견하고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여기 있었구나?”
“응? 영봉이구나.”
장영봉이 사람이 없는 빈 곳으로 윤창수를 데리고 갔다.
“관람객 반응이 어때?”
윤창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호불호가 갈리더라. 어떤 사람은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면서 예술을 쓰레기로 포장해봐야 쓰레기라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신기하다며 감탄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친구들은 폐품이 갖는 재료의 한계로 인해 예술적 가치가 좀 떨어진다고 평하기도 하더라. 그걸 태생적 한계라고 하는 놈도 있고.”
“태생적 한계?”
“재벌 자식이라도 서자로 태어나면 그 존재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나.”
“뭐? 어떤 녀석이 그런 몰상식한 말을 해?”
“정크아트를 씹어대는 재수 없는 친구들이었는데 일면 맞는 말 같기도 해서 여러 가지 고민이다.”
“얼토당토않은 말인데 뭐가 맞는 말이란 거냐?”
“재료의 한계가 갖는 부정적 측면이 존재하는 것 같긴 해. 폐품이라는 선입견을 독창성과 창의성으로 메꿔도 폐품을 재료로 썼다는 본질이 바뀌지는 않으니까. 아무래도 정크아트는 나한테 맞지 않나 보다.”
“그건 네가 고민할 문제이긴 하다만 관람객의 평가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어. 영국 예술가 해더 잰시는 바닷가에 떠밀려온 유목으로 말을 제작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 않았냐? 예술 작품은 작가의 철학과 정신세계, 그리고 손끝에서 탄생하는 거야. 대중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 소개해 줄 후배들이 있으니까 저쪽으로 가보자.”
“후배?”
“12학번 후배들이야. 마침 저기 있네. 따라와라.”
장영봉이 관람객 사이로 걸어갔다.
강수는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장영봉과 그 옆에 반코트를 입은 사내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저 사람이 윤창수 선배? 설마 아까 우리가 한 얘기를 다 들은 건 아니겠지?’
장영봉이 강수 일행 앞으로 다가와 윤창수를 소개했다.
“후배님들, 인사하지? 내 동기 윤창수 작가야.”
“안녕하십니까? 12학번 김종대입니다. 작품 잘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12학번 이동석입니다. 선배님의 독창적이고 특이한 작품을 보니 정크아트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대단한 작품입니다.”
강수 일행을 본 윤창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헐, 이 자식. 서자처럼 태생적인 한계라고 하더니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군.’
“이강수입니다. 개인전 축하합니다.”
‘재료의 본질적인 한계를 지적한 후배로군.’
강수는 윤창수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한 얘기 다 들었군. 표정을 보아하니 기분 나쁜가 보네.’
윤창수는 고개를 까닥이며 시답잖은 눈빛으로 강수와 종대, 이동석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래. 만나서 반갑네. 후배들은 작품 활동 열심히 하고 있나?”
옆에서 장영봉이 대답했다.
“종대는 내년 3월에 두 번째 개인전을 열 계획이고, 여기 강수는 내년 4월에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지. 동석이는 추상표현 미술을 하고 있어. 내가 몇 작품 봤는데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더군.”
추상표현 미술을 한다는 말에 윤창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피식 실소를 지었다.
“추상표현 미술? 추상표현 미술을 해서 인정받으려면 보통 십 년 이상 파고들어야 하는데 이동석 후배는 젊은 나이에 굉장히 난해한 미술을 하네? 자네가 마크 로스코 같은 천재라도 되나? 자네들도 알겠지만 마크 로스코는 처음부터 추상 작품을 하지는 않았지. 구상화를 그리며 자신의 철학과 예술 세계를 확고하게 다진 후 추상으로 발전했어. 그뿐만 아니라 추상표현 작품은 모 아니면 도야. 즉, 작가로 인정받기 전까지 자네가 그린 그림은 창고에 쌓아 두어야 할 거야. 잘해보게.”
“아, 예.”
윤창수의 신랄하고 가시 돋친 말에 이동석이 얼빠진 얼굴로 강수와 종대를 힐끔거렸다.
장영봉이 딱딱한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듯이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창수가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얘기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아. 추상표현주의 미술도 자기만의 색깔을 구축하기 시작하면 판매도 가능하니까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진 말고 작업 열심히 하게.”
“예, 알겠습니다.”
추상미술은 피카소 이후 현대미술의 강력하고 주된 흐름으로, 객관적인 대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데에서 벗어나, 작가의 순수한 구성을 독특한 색채나 형태로 표현한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유파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추상미술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고, 추상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다.
추상표현주의 미술은 추상미술과는 또 다르다.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 미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무참히 죽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잔혹한 시대 상황을 목격한 미술가들은 새로운 미술 표현 방식을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잭슨 폴록과 몇몇 작가에 의해 추상표현주의 미술이 태동하게 된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는 무의식을 활용하여 불안한 시대와 정서, 감정을 화폭에 표현하는 새로운 경향의 미술이었는데, 형식적으로 추상적이고, 내용적으로 표현주의적이란 의미에서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추상표현주의 미술가들은 격렬한 동작으로 붓을 휘두르듯이 그리거나, 캔버스를 바닥에 깔아놓고 물감을 뿌리고 흘려서 작품을 창작했다. 또 어떤 미술가는 커다란 캔버스에 물감을 스며들게 하는 기법을 썼다.
추상표현주의 미술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끌어낸 선구자인 잭슨 폴록은 커다란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사방을 돌며 캔버스 위로 물감을 뿌리고, 끼얹고, 쏟아 부으면서 몸으로 그림을 그렸다. 캔버스에 뿌려진 물감이 켜켜이 쌓이면서 화면의 밀도가 생성되고, 작가의 다이내믹한 제작 행위와 흔적이 화폭에 기록처럼 담겨서 이를 ‘액션 페인팅’ 혹은 드리핑기법이라 불렸다.
잭슨 폴록의 작품 No.5는 2006년에 데이비드 게펜이라는 소장자가 다른 개인 컬렉터에게 1억 4000만 달러에 팔았다고 한다. 그림값이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인 가격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꼽을 때 고흐나 피카소의 그림과 함께 수위를 다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