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77화 (77/197)

# 7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77회

강수의 눈짓에 담긴 의미를 대번에 파악한 주하가 인상을 쓰며 투덜댔다.

“아휴, 할아버지는 내가 노처녀로 늙어서 혼자 살기를 바라나 봐. 정말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아녜요?”

주하의 푸념을 들은 한동제가 정색해서 말했다.

“아가씨, 회장님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괜히 더 역정만 내실 테니까요.”

“흥, 역정 내면 누가 겁낼 줄 알아요?”

주하가 강수에게 고개를 돌려 눈을 찡긋했다.

“강수오빠, 금방 갔다 올게요.”

“그래.”

강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주하를 지켜보다 뒷머리를 긁적였다.

강수는 김대풍 어르신이 발리 여행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다.

애지중지 키운 주하를 무명 화가에 불과한 자신에게 선뜻 맡기기가 내키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대놓고 주하와 발리 여행을 허락해 달라고 했으니 자신의 언행을 만용으로 여겼을 것이다.

강수는 소파에 앉아 식어버린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산뜻한 향이 날아가 버린 미지근한 녹차의 맛은 밍밍했다.

강수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이 녹차 맛처럼 내 존재가 미미해 보이는 거지.’

하긴 어느 누가 내면에 숨겨진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볼 수 있으랴.

대부분 사람은 상대방을 평가할 때 차려입은 옷이나 외모와 첫인상 등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평가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씨나 정신력, 의지나 지도력 등 내면의 가치는 차츰차츰 알아가는 수밖에 없다.

사기꾼이 사기를 칠 수 있는 이유가 내면의 사악하고 거짓된 마음을 멋들어진 겉모습과 꿀 바른 세 치 혓바닥으로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객관적으로 보면 자신은 고작 단체전 한 번 참여하고, 운이 좋아 아트페어 상하이에 초청된 초보 화가일 뿐이고, 김대풍의 눈에 비친 자신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하다.

서둘 필요는 없었다.

투팍탈을 만난 이후로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고 변화했다. 때문에 그 누가 자신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매일 마나회로를 수련하고, 꾸준히 작품을 그리면서 천천히 성과를 이루면 충분하다.

잠시 후, 강수는 생글생글 웃으며 2층으로 올라오는 주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주하야, 갈 때는 한바탕 싸울 것처럼 가더니 어르신하고 안 싸운 모양이다?”

“헤헤. 할아버지한테 대들어봐야 손해만 보는데 왜 싸우겠어요? 어깨 주물러주면서 애교 좀 떨었죠.”

“하하. 잘했다. 어르신이 뭐라고 하셔?”

주하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음, 그러니까··· 남자랑 가는 여행은 결혼해서 신랑이랑 가라고 하셨어요. 신랑하고 첫날밤을 보내야 영원히 서로 사랑할 거라고···.”

“신랑하고? 주하는 뭐라고 했어?”

“무조건 알았다고 했어요.”

“후후, 주하랑 여행 가려면 결혼부터 해야 한다는 거네?”

“치, 요즘 그런 게 어딨어요? 할아버진 내가 조선시대 여자처럼 되길 바라나 봐요. 시대가 어느 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난 강수오빠랑 발리에 가서 눈부신 백사장도 걷고, 노을이지는 바다도 보고 싶어요. 할아버지가 크루즈 여행 가면 우리도 발리에 가요. 알았죠?”

“알았다. 어르신이 여행 가면 우린 발리로 가자.”

발리에 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떠있는 주하에게 강수가 슬쩍 농담을 던졌다.

“참, 해영 씨는 어떡하지? 발리까지 따라가려고 할 텐데?”

주하가 입을 삐죽 내밀고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헹, 해영 언니가 같이 가면 무슨 재미? 해영 언니는 휴가 보내면 돼요. 휴가 주면 해영 언니도 좋아할걸요.”

‘녀석, 순진하긴.’

단순한 주하의 생각에 강수는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김대풍 어르신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여행을 가면 임해영에게 이곳에서 숙식하며 주하를 감시하라고 지시할 것이 분명했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문제고···.’

사실 강수로서는 임해영의 처리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슬립마법으로 잠재우고 떠나면 된다.

‘발리에 가려면 개인전 작품에 좀 더 속도 내야겠는데? 여기서 주하랑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빨리 가서 하나라도 더 끝내 놔야지.’

강수가 주하를 불렀다.

“주하야.”

“네?”

“내 첫 개인전이 내년 4월 초에 잡혀 있어. 너하고 발리에 가려면 지금 작업실로 가서 작품을 하나라도 더 그려놔야 하니까 난 이만 간다.”

“와, 내년에 개인전 여는구나. 헤헤. 알았어요. 오빠, 우리 나가요.”

강수와 주하는 현관문을 나와 화초가 아름답게 피어있는 정원으로 나왔다. 청명한 초겨울의 하늘이 푸르게 펼쳐져 있었고,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신의 은총처럼 화초와 아직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 위에서 부서져 내렸다.

“와, 날씨 좋다.”

주위를 둘러본 강수가 말했다.

“날씨만 좋은 게 아니라 3층 집도, 아기자기한 정원도 엄청 멋지다.”

“호호. 강수오빠, 우리 집 한 바퀴 안 돌아봤죠?”

“그렇지. 그럴 기회가 없었네.”

“지금 한 번 돌아볼래요?”

“그럴까?”

주하가 양손으로 슬그머니 강수의 팔을 잡고 끌었다.

“이리 오세요.”

강수는 팔에서 주하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면서 주하가 끄는 대로 걸었다. 기이한 형태의 소나무와 키 작은 단풍나무, 갖가지 정원수가 있었고, 수많은 화초와 꽃, 진기한 바위가 어우러진, 전문가의 손길이 세심하게 스며있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저택을 한 바퀴 걸으면서 강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뭐 이렇게 넓어? 도대체 부지가 몇 평이나 되는 거야?”

“원래는 여기에 집이 세 채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전부 사서 허물고 이 집을 지었거든요. 그래서 집터가 좀 넓어요. 음, 오백 평이 조금 넘을 걸요?”

금싸라기 땅, 한남동에서 오백 평짜리 집이라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하. 몇 채를 소유했는지 모를 빌딩에 이런 집까지. 할아버지가 부동산 갑부시구나.”

“헤헤, 할아버지는 부동산 쪽으로 엄청나게 성공했어요. 할아버지가 부동산학과 가라고 해서 난 부동산학과 졸업했어요.”

“그랬구나. 어르신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주하도 부동산 쪽으로 일가견 있겠네?”

“그럼 좋겠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공부한 거랑 실전 투자는 다르잖아요.”

“어르신 피가 어디 가겠어? 주하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호호. 고마워요.”

저택을 한 바퀴 돈 강수와 주하는 청석이 깔린 정원을 지나 육중한 대문 밖으로 나왔다.

주하가 운전석에 올라타는 강수에게 물었다.

“오빠, 가끔 맛있는 거 사서 작업실에 가도 돼요?”

“그럼. 맛있는 거 들고 오면 환영이지. 그 대신 밥 먹고 나면 난 그림 그리느라 바빠서 혼자 놀아야 할 텐데? 그것도 괜찮으면 언제든지 와도 돼.”

“킥킥. 걱정 마요. 오빠 작업하는 데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요.”

주하의 배웅을 받으며 강수는 작업실로 차를 몰았다.

*

며칠 후, 강수와 종대, 이동석은 윤창수의 개인전을 함께 관람하기 위해 종각역에서 오후 6시에 만났다.

셋은 인사동 거리를 걸어서 선암갤러리로 향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인사동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했고, 사람들은 초겨울의 선선한 날씨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강수가 종대에게 물었다.

“종대야, 넌 창수 선배 잘 아냐?”

“아니. 창수 선배는 워낙 학번이 높은 선배라 나도 기회가 닿지 않아서 만나보지 못했어.”

“이번 개인전이 몇 번째나 될까?”

“내가 알기로 국내서 다섯 번은 했을걸. 뉴욕에서는 모르겠고.”

“와, 맨날 그림만 그리나? 작품 활동이 엄청 왕성하네.”

“강수야! 뭣 좀 물어보자.”

옆에서 이동석이 강수를 불렀다.

“어? 뭔데?”

이동석이 한숨을 내쉬더니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번에 네 작업실에 갔을 때 미니 부스가 비어 있어서 하는 부탁인데 미안하지만 네 작업실에 내 그림 좀 보관하면 안 될까? 우리 작업실은 더 놔둘 공간이 없기도 하고, 반지하라 캔버스 보관 상태가 안 좋아서 그대로 두면 작품이 훼손될 거 같거든.”

“아, 그래. 너희 작업실이 비좁긴 하지. 작품이 몇 점이나 되냐?”

“한 40점 정도. 필요 없는 건 시골집으로 보냈는데도 대학 때부터 그려온 거라 그래.”

강수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다 갖다 놔라. 작품이 훼손되게 놔둘 수는 없지.”

이동석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작품 보관 때문에 고민 많았는데 정말 고맙다.”

“앞으로 네 그림은 다 보관해 줄 테니까 작품 열심히 그리도록 해. 참, 종대야. 넌 개인전 작품 몇 점 그렸냐?”

“열다섯 점. 앞으로 열 작품 더 그리는 게 목표인데 시간이 빠듯하다.”

“네 작품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전부 내 작업실로 가져와라.”

종대도 작품 보관이 필요하긴 마찬가지였다.

종대가 반색해서 물었다.

“내 것까지 갖다 놔도 괜찮겠어?”

“너도 빈 부스 봤잖아. 당연히 괜찮지.”

이동석이 껄걸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강수야, 너 때문에 우리가 산다. 건물주한테 잘 보여서 거기서 절대 나가지 마라.”

“계약 기간이 오 년이라 오 년은 문제없지. 그 뒤는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하하. 오 년이면 충분하다. 그 뒤는 걱정할 필요 없지.”

종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오 년 안에 성공할 자신이라도 있는 거야?”

“뻔한 걸 묻냐?”

이동석이 말한 의미를 깨달은 종대가 실소를 지었다.

“허, 넌 그때도 강수 신세 질 생각이야?”

“누군 신세 지고 싶어서 지냐? 뜨지 못하면 별수 없이 친구 잘 둔 덕을 보는 거지.”

“넌 낯짝도 두껍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낯짝이라도 두꺼워야 하지 않겠냐? 야, 윤창수 선배 전시회 현수막이다. 전시회 타이틀이 ‘두 번째 탄생을 위한 연가’네.”

“두 번째 탄생을 위한 연가? 두 번째 탄생이 뭐지?”

“글쎄? 작품을 봐야 알겠지.”

잡담을 나누며 어느새 선암갤러리에 도착한 강수 일행은 뉴욕에서 돌아온 윤창수의 개인전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전시실로 들어갔다.

윤창수 개인전은 1층 전시실에서 열렸다. 전시실 입구에는 축하 화환 10여 개와 각종 화분이 서 있었고, 전시실 안에는 꽤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이야, 사람들이 꽤 많구나.”

종대의 감탄에 이동석이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오프닝인데 이만큼도 안 오면 망하는 거지. 진짜 성적표는 내일부터 나올걸.”

“크크.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게 전시 오프닝에서 할 말이냐?”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지. 하여튼 작품이나 감상하자.”

셋은 뭉쳐 다니면서 작품을 감상했다.

윤창수의 작품은 설치 작품 25점과 각종 자동차 보닛에 바탕색을 입혀 캔버스로 활용한 작품 1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설치 작품을 살핀 강수는 작품의 재료가 깨진 전구, 몸통 없는 고양이 두상, 망가진 장난감, 부서진 작은 자동차, 레고 조각, 지구본 등 버려진 폐품이고, 정크아트 작품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각각의 폐품은 예술가의 손길로 재탄생해 특이한 미술 재료가 되었다.

깨지고 비틀어진 독특한 형태를 그대로 이용해 섬세하고 기이한, 때로는 그로테스크하고 초현실적인 형상의 작품을 창작했다. 윤창수는 망가지고 버려진 폐품들을 가공해 예술품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다리가 부러진 나무 의자는 마치 장애인을 연상케 하듯 이질적인 형태의 나무를 덧댄 후, 고딕 양식의 삐죽삐죽한 무늬를 새겨 화려하게 탄생했다.

망가진 장난감과 부속품은 조화를 이뤄 샹들리에가 되었다.

각종 폐품을 절묘하게 쌓아 만든 탑은 ‘부활의 탑’이란 작품인데 마왕이 살고 있을 법한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부활의 탑’에서 3m 떨어진 곳에는 ‘철의 독수리’라는 작품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스프링과 , 철근, 금속 조각 등을 이용해 날개를 활짝 펼친 거대한 철로 된 독수리는 마치 탑을 향해 날아가는 듯했다.

특이한 점이라면 ‘철의 독수리’는 내부 장기를 그대로 드러낸 섬뜩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사납고 용맹한 포식자의 모습이 아니라 병들고 노회한 분위기를 풍겼다.

정크아트는 1950년, 196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전통적 조소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전위적 미술 경향으로 이런 정크아트의 출발점은 팝아트 작가인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 <모노그램> 같은 ‘컴바인 페인팅’ 작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현대 도시 문명의 폐기물인 콜라병, 인쇄물, 신문조각, 금속, 천은 물론 박제된 동물이나 라디오, 선풍기, 전구 등의 폐품을 캔버스에 융합해 회화와 조소의 중간 형태를 창조해냈다.

회화와 오브제를 결합한 그의 ‘컴바인 페인팅’ 작업은 화단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컴바인 아트’라고 부르는 일련의 작품들은 ‘회화와 조소’, 2차원과 3차원을 동시에 수용하는 새로운 예술양식을 탄생시켰다.

그는 전통과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상상력을 실험적인 작품으로 표현했고, ‘컴바인 페인팅’ 작업을 통해 예술의 본질이나 소재의 순수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도시 생활과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을 부각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이후 폐품에서 작품의 재료를 얻으려는 작가들이 생기면서 정크아트가 본격적으로 하나의 미술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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