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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마법사-76화 (76/197)

# 7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76회

강수와 단둘이 있게 됐다는 사실이 너무 기쁜 주하는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강수에게 물었다.

“오빠, 뭐 마실래요?”

“녹차 마시지 뭐.”

“2층 거실에 올라가 있어요. 금방 가져 갈게요.”

“왜? 아주머니한테 부탁하지 않고?”

“헤헤. 그냥 내가 만들어가고 싶어서요.”

강수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주하를 보았다.

주하는 머리카락을 가르마 타서 왼쪽 머리카락은 귀 뒤로 넘겼고, 오른쪽 머리카락은 어깨로 내렸다. 그리고 큐빅이 촘촘히 박힌 헤어밴드로 머리카락을 고정했다. 붉은빛이 은은하게 도는 머리카락에 오른쪽 얼굴이 살짝 가려져 오늘따라 유난히 예쁘고 섹시해 보였다.

강수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팔을 들어 주하의 어깨에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쓸어서 귀 뒤로 넘겼다.

강수의 손길이 주하의 보드랍고 발그레한 볼을 스쳤다.

‘흡!’

짧은 순간이었지만 강수의 손이 볼에 닿는 순간 주하는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세차게 뛰었다. 그리고 따뜻한 감촉과 함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한 자극이 물결처럼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그 짜릿한 자극과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래? 알았어. 빨리 가져와.”

“예에.”

강수가 뒤돌아 2층으로 올라가자 주하는 아쉬운 기분을 떨쳐내고 주방으로 들어갔다.주하는 작설차를 준비해 쟁반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강수 옆에 앉은 주하가 우러난 작설차를 찻잔에 따라서 강수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강수오빠, 할아버지가 세계일주 여행 가실까요?”

찻잔을 받은 강수는 주하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짓궂게 반문했다.

“왜? 할아버지가 해외여행 갔으면 좋겠어?”

“당연하죠. 꼭 좀 해외로 나갔으면 좋겠어요. 경호원에 통금에 내 사생활이 없어요. 할아버지 간섭이 너무 심하니까 오죽했으면 주익오빠도 참지 못하고 2년 전에 독립해서 나갔다고요. 유산이고 뭐고 나도 주익오빠처럼 독립할까 봐요.”

“하긴 어르신이 너무 엄격하기는 해. 하지만 주하를 사랑하니까 돈 들여서 경호원도 채용한 거고, 밤늦은 시각엔 위험하니까 통금도 정했을 거야. 어르신 마음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는데.”

“치, 그래서 아직 못 나가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언제까지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하면서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요.”

“그래? 음, 내가 보기엔 어르신이 해외여행에 필이 꽂힌 것 같으니까 조금만 참아. 아마 주하가 원하는 대로 될 것 같다.”

“그렇죠?”

강수는 찻잔에서 퍼지는 그윽한 향기를 맡으며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저기, 강수오빠?”

“응?”

주하가 강수에게 살짝 밀착하면서 말했다.

“나도 해외여행 좀 가보면 원이 없겠어요. 친구가 그러는데 발리 해변 물색이 보석처럼 아름답다고 하더라구여. 발리 해변에서 보석 같은 바닷물에 지는 노을을 보면 얼마나 멋있을까요?”

“주하는 발리에 안 가봤구나?”

“네. 여자가 외국에 나돌아다니면 위험하다고 할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아서 해외여행은 한 번도 못 가봤어요. 몇 번씩 해외에 나갔다 와서 자랑하는 친구들 얘기 듣고 있으면 짜증 엄청나요. 아휴,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여행도 맘대로 못 가는 게 말이 돼요?”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김대풍 어르신이 주하를 과잉보호하는 것이 맞았다.

“실은 생각해보니 나도 해외라곤 제주도 밖에 못 가봤네.”

“호호. 제주도가 무슨 해외예요? 그러지 말고 할아버지가 해외여행 가면 우리 발리로 여행 가지 않을래요?”

‘발리 여행 가자고? 해영 씨도 동행하는 거겠지?’

강수는 해영 씨도 당연히 동행할 것으로 여기고 대답했다.

“비행기 타면 되는데 발리에 가는 게 뭐 어렵겠어? 어르신이 없을 때 몰래 갈 것 없이 발리에 여행 가도 되냐고 물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주하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오빠랑 단둘이 가는 해외여행을 할아버지가 허락하실 리가 없을 건데요?”

강수가 흠칫 놀라서 주하를 쳐다보았다.

‘뭐! 둘이 가자는 얘기였어? 하, 난 그것도 모르고 실수할 뻔했네. 그나저나 여행 가면 남녀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 줄 빤히 알 텐데? 설마 잠자리까지 각오했다는건가?’

호텔에서 단둘이 잠만 잘 리가 없지 않은가?

주하의 속마음을 알아버린 강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갑자기 옆에 붙어 있는 주하가 새롭게 인식되면서 배에 힘이 들어갔다.

강수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럼 발리에 보내 달라고 내가 어르신께 허락을 구해볼게.”

“저, 정말이요?”

놀란 얼굴로 강수를 바라보던 주하가 갑자기 시무룩해서 말했다.

“근데 할아버지가 허락 안 하면 못 가는 거네요?”

“음, 어르신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땐 차선책을 생각해 보지 뭐.”

“예? 차선책이요? 뭔데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주하를 보며 강수가 씨익 웃었다.

“글쎄?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주하 말대로 어르신이 해외로 나간 뒤에 갈 수도 있고.”

“아!”

주하의 가슴이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강수와 단둘이 붉게 노을이지는 발리 바닷가를 걷는 상상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말 나온 김에 지금 얘기하고 올게. 잠깐 기다리고 있어 봐.”

주하가 목덜미를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래층으로 내려간 강수는 서재 앞에서 노크했다.

똑똑!

“누군가?”

“어르신, 저 이강수입니다.”

“들어오게.”

강수는 문을 열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김대풍이 손짓을 했다.

“거기 앉게나. 한데 무슨 일인가?”

“어르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하가 지금까지 해외여행 한 번 못했다며 발리에 꼭 가고 싶다고 합니다. 한데 해외여행은 위험하다며 어르신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해영이가 동행한다고 해도 여자끼리 해외로 나가면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나? 그런 위험한 곳에 어떻게 손녀를 보낼 수가 있는가? 그럴 수는 없지.”

여자끼리 해외여행을 간다고 범죄의 표적이 된다는 말은 억지나 다름없었다. 김대풍은 그저 주하가 자신의 눈에서 벗어나는 것이 싫을 뿐이었다.

강수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어르신, 주하가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제가 보살피겠습니다. 저와 주하가 발리에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실 수 있는지요?”

“뭐라고? 주하와 발리에 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김대풍이 황당한 표정으로 강수를 보았다. 주하가 이강수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은 대충 짐작했지만 여행을 같이 갈 정도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김대풍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네가 한 말에 어떤 속뜻이 있는지 알고나 하는 얘긴가?”

“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얘기하기 쉽겠군.”

김대풍이 강수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허락할 수 없네.”

김대풍이 단칼에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강수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못미더운 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가 있지. 자네 주하와 만난 지 얼마나 됐는가?”

“경포대에서 처음 만났으니 두 달이 넘었습니다.”

“나와 본 지는 한 달이 좀 넘었고 오늘이 두 번째 얼굴 보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것이 이유네. 주하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여행을 가겠다는 게야? 서로 좋아서 사귀는 것이야 뭐라 할 수 없지만 결혼한 것도 아닌데 같이 여행 가겠다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네.”

“남자로서의 명예를 걸고 어르신이 우려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허락해주실 수 없는지요?”

“허, 사고를 치지 않겠다고? 그 말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지? 남자의 명예를 걸겠다고 했는데 자네 처지에 내걸 만한 명예가 있는가?”

물론 있다. 자신은 인류 유일의 마법사가 아닌가? 하지만 마법사의 명예를 걸 수는 없었다.

“제 말을 믿고 안 믿고는 어르신이 판단할 문제겠지요. 그리고 말씀드리기 외람되지만 솔직히 일을 치르고자 한다면 굳이 발리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강수의 도발적인 발언에 김대풍이 눈살을 찌푸렸고,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자신만만하구나. 내 허락이 필요 없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일이지 굳이 내 허락을 받으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김대풍은 강수를 좋게 보고 있었으나 막무가내 같은 자신에 찬 태도에 기분이 상했다. 자신감도 적당해야지 주제에 맞지 않게 드러내면 오만과 다르지 않다.

강수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김대풍을 응시했다.

김대풍이 강수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고, 스파크가 튀길 것만 같았다. 김대풍의 눈빛이 사나워지며 점점 차가워졌다.

강수의 맑고 투명하고 깊은 눈빛은 한 점 흐트러짐 없어 마치 명경지수 같은 호수를 보는 것 같았다.

김대풍은 그 눈빛에 한 점 거짓이 깃들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강수의 눈빛을 마주 보고 있으려니 자신이 속 좁은 소인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한 번 입 밖으로 낸 말을 번복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고얀 놈 같으니. 네까짓 놈이 감히 날 이기려 들어?’

김대풍은 속에서 슬금슬금 노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문득 강수가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저 때문에 어르신의 심기가 불편했다면 죄송합니다. 어르신의 허락을 받고 발리에 가고 싶었지만 허락해 주시지 않으니 어쩔 수 없네요.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강수가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가려 하자 김대풍이 다급하게 강수를 불렀다.

“잠깐 섯거라.”

“예? 하실 말씀이 있는지요?”

“그래서 어쩔 생각인 것이냐? 주하와 여행을 가겠다는 게야? 말겠다는 게야?”

“제 의사는 좀 전에 분명히 밝혔습니다. 가고 안 가고는 주하의 의사에 따를 생각입니다.”

‘이런 고얀 놈.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구나. 그래,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

김대풍이 거친 목소리로 한동제를 불렀다.

“한 실장!”

“예, 회장님.”

“당장 주하를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강수는 한 실장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거실로 나온 한동제가 옆에서 따라오는 강수에게 혀를 차며 말했다.

“쯔즛, 이 작가. 회장님이 자네를 좋게 보고 있었는데 사람이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친구로 봤는데 의외로 답답한 구석이 있구먼. 그냥 간단하게 회장님이 원하는 대로 따랐으면 주하 아가씨나 자네에게 좋았을 텐데 말이지.”

강수가 가볍게 웃으며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실수한 것 같군요.”

“큰 실수를 했지. 나는 주하 아가씨 편이야. 주하 아가씨가 자넬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네만 자네가 주하 아가씨와 사귈 마음이 있으면 회장님의 의중에 거스르지 말게나.”

“예, 알겠습니다.”

2층으로 올라간 한동제가 주하에게 말했다.

“주하 아가씨, 회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잠깐 서재로 내려가시죠.”

주하가 한동제와 강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강수오빠, 무슨 일 있었어요?”

강수가 주하의 손을 잡아 꼭 쥐었다.

“어르신이 주하랑 여행 가는 걸 허락하지 않으시네. 주하야,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든 토 달거나 거역하지 말아. 알았지?”

강수가 오른쪽 눈을 찡긋 감아서 신호를 주었다. 김대풍 어르신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차선책을 쓰자는 의미의 눈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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