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75화 (75/197)

# 7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75회

강수가 먼저 노민석에게 물었다.

“형님,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그게··· 실은 한 가지 부탁 좀 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 오픈 행사에 쓸 사은품을 고르다가 마음에 드는 머그잔을 찾았는데 그림이 유치하더라. 그래서 강수한테 머그잔에 쓸만한 간단한 삽화 같은 그림을 부탁하려고. 미안하지만 삽화를 좀 그려 줄 수 있을까? 물론 그림값은 줄 테니까.]

“머그잔에 들어갈 그림이면 간단한 그림이네요. 물론 그려드려야죠. 그림값은 나중에 커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런데 형님, 어떤 그림을 원하세요?”

[고마워. 강수한테 매번 신세만 지는 것 같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게. 카페 이름이 ‘빈이네 이야기’인데 빈은 원두 콩을 이르는 말이야. 나야 그림을 잘 모르니까 강수가 알아서 그려주면 될 것 같은데? 삽화에는 카페 이름이 들어가야겠지? 내가 찾은 머그잔 이미지를 보내줄 테니까 참고해서 그리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메일 주소도 같이 보내주세요. 삽화 그려서 메일로 사진 파일 보낼 테니까요.”

[알았네. 바로 보내지.]

곧 사진과 메일 주소가 도착했다. 사진을 보니 일반적인 원통형 머그잔이 아니라 잔의 밑이 조금 좁았고, 잔은 전체적으로 미려한 곡선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이미지가 좋을까? 음, 고산지대에서 생산한 원두가 풍미가 있고, 향이 진하고, 맛이 좋다고 했지. 커피나무가 있는 고산지대 풍경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면 어떨까?’

2,000m의 고산지대에서 아스라이 펼쳐지는 풍경과 커피나무의 이미지가 강수의 뇌리에서 형상화되었다.

‘한 그루의 커피나무와 소녀, 그 아래 아스라이 펼쳐지는 풍경화가 괜찮은 것 같다. 우선 고산지대 커피 생산지를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자.’

아파트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온 강수는 곧장 작업실로 차를 몰았다.

작업실에 도착한 강수는 이틀 전 완성해 놓은 김대풍 어르신의 초상화부터 살펴보았다. 유화물감이 두꺼운 속까지 완전히 마르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표면은 어느 정도 말라 있었다.

‘이 정도면 됐군. 초상화는 시간 나는 대로 갖다 주면 되고.’

책상에 앉은 강수는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해 커피 산지를 이미지로 검색했다.

브라질, 과테말라, 페루, 에티오피아, 네팔 등 유명 커피 산지의 사진 이미지가 모니터에 가득 나타났다. 강수는 사진을 클릭한 후, 원문 보기를 클릭했다. 원문은 다양한 사진과 커피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사진을 보며 무심코 기사를 읽던 강수가 나직이 탄식했다.

‘하, 이런! 페루 커피 산지의 평균 기온이 2도 이상 상승, 유기농 재배 아라비카 커피가 병충해에 속수무책으로 사라지고 있다고?’

페루의 커피 산업이 기온의 상승과 병충해의 습격으로 인해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기사였다.

‘바나나도 파나마병 때문에 사라질지 모른다고 하던데 이젠 커피도 문제가 생기는구나. 민석 형님 때문에 커피에 대해 여러 가지 알게 되네. 이제 삽화 그려야지.’

강수는 삽화를 그릴 때 섰던 A3 크기의 켄트지를 꺼내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30분 만에 스케치를 끝내고,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을 시작했다. 켄트지의 왼쪽 구석에 한 그루의 커피나무가 형태를 갖추었다. 커피나무의 가는 줄기에는 발갛게 익어가는 커피체리가 한 알씩 탐스러운 자태를 드러냈다. 그리고 나무 밑에서 커피체리를 따는 소녀아이 한 명.

커피나무 아래는 안개 낀, 신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은 계곡이 펼쳐졌고, 고산지대의 숨 막힐 듯이 고요하고 적막한 풍경이 붓끝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강수의 손놀림은 빠르고 거침없이 움직였다.

2시간 후, 강수는 머그잔에 쓸 삽화의 채색을 끝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스타일리시한 글씨체로 카페 이름을 그렸고, 자신의 이름은 어두운색의 커피나무 밑동에 작게 적은 후 붓을 내려놓았다.

‘물감칠하는데 두 시간 정도 걸렸네. 역시 그림 그리는 속도가 꽤 빨라졌어. 회화 작업을 계속하니까 물감칠하는 게 더 능숙해졌어. 어쩌면 개인전 작품을 빨리 끝낼지도 모르겠구나. 음, 일단 사진을 찍어서 보내고 그림이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물어보자.’

강수는 사진을 찍어 노민석의 이메일로 보내고, 문자를 했다.

-형님, 메일로 삽화 보냈습니다. 어떤지 보세요.

-그래 잠깐만.

잠시 후 문자가 아니라 전화가 왔다.

강수는 전화를 받았다.

“보낸 그림 봤어요?”

[그래. 근데 이건··· 이건 정말 뭐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멋진 풍경화다. 그림 보고 있으니까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같다. 강수야, 원래 머그잔은 300개만 제작하려고 했는데 그림이 너무 좋아서 500개 주문해야겠다. 정말 고맙다.]

“하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빈이네 이야기’ 이번엔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성공이라···.]

노민석이 답답한 마음을 토해내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사실 이번만큼은 실패할 수 없다는 강박감 때문인지 카페 준비하는 내내 긴장으로 정신적으로 녹초가 됐어. 그래서인지 잠도 잘 오지 않더라. 어쩔 땐 왜 사업을 벌이고 돈을 벌어야 하는지 회의가 들 정도야. 그럼 안 되는데.]

역시 노민석은 카페 개업하면서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거칠고 쉰 듯한 목소리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하게 묻어났다.

“형님, 카페를 차리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미 화살은 떠났으니 다 잊고 무조건 성공한다는 생각만 하세요.”

[그래. 나를 위해서 그리고 도움을 준 많은 지인을 위해서도 강수가 말한 대로 성공을 향해 뛰어야지. 참, 카페 오픈은 2주 뒨데 그때 올 거지?]

“물론 가야죠. 날짜하고, 위치, 시간 알려주세요.”

[알았네. 그럼, 수고해.]

카페 ‘빈이네 이야기’의 오프닝에 관한 문자가 금방 도착했다.

‘성수역 카페 거리 근처구나. 27일 금요일 오후 한 시네. 마나회로 수련을 마치고 가면 좀 늦겠군. 좀 늦는 거야 괜찮겠지?’

강수는 탁상 달력에 카페 오프닝 날짜와 시간을 메모했다. 메모하다 보니 윤창수 선배의 오픈 날짜가 눈에 띄었다.

‘가만, 다음 주 수요일에 윤창수 선배 개인전 오픈이구나. 종대 말로는 회화도 하고 설치미술도 한다고 했는데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 궁금하네. 좋아, 나도 개인전 작업해야지.’

강수는 죽산화방에 주문해서 받아놓은 변형 사이즈 10개의 캔버스 가운데 4개를 이젤에 하나씩 걸었다. 유화물감을 사용해 네 작품을 동시에 그릴 생각이었다.

아트페어 상하이에 출품한 작품은 30, 40호 사이즈를 사용했었다.

개인전 작품은 소재에 맞게 약간 변형된 사이즈의 40, 50, 60호 캔버스를 사용할 계획이었고, 자신의 개인전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최고의 작품으로 꼽을 만한 작품은 120호 규격으로 그릴 생각이었다.

60호가 130*90(가로*세로)의 크기고, 120호가 194*112 정도라 120호 정도의 크기면 작지 않았다.

강수는 개인전 작품 아이디어를 스케치해 놓은 스케치북을 펼쳤다.

‘어떤 것부터 그릴까?’

강수는 스케치북을 한 장씩 넘겨보며 먼저 그릴 네 개를 골라서 한 장씩 뜯어내 이젤 옆에 놓았다. 그리고 ‘희망의 공간’ 이라고 제목을 붙인 작품부터 50호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

‘밤일 자제하고 운동을 열심히 했나 보구나.’

한남동 김대풍 어르신 저택으로 초상화를 가져온 강수는 서재에서 김대풍을 일견하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김대풍 어르신을 만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사이 정양에 힘 썼는지 김대풍의 얼굴에서 혈색이 돌았다.

“허허허. 좋군, 좋아.”

김대풍은 강수가 가져온 자신의 초상화를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다 결국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김대풍이 강수에게 말했다.

“강형구 화백이 그린 내 초상화는 푸른 색감이나 얼굴의 표현이 비현실적이었다네. 초상화라고 하기보다는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지. 한데 자네 그림은 마치 내 젊었을 때 패기와 도전적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만 같아. 잘 그렸네. 마음에 들어”

“아, 감사합니다.”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짓고 강수 옆에 있는 주하가 김대풍을 불렀다.

“할아버지.”

“응? 왜?”

“강형구 화백이 그린 초상화보다 강수오빠가 그린 초상화가 더 낫죠?”

“허허. 글쎄다. 각자의 화풍이나 표현 기법이 달라서 어떤 초상화가 낫다고 하긴 어렵겠지. 하지만 나는 이 작가가 그린 초상화가 마음에 드는구나.”

“저도 강수오빠 초상화가 훨씬 마음에 들어요. 히히.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이렇게 미남인 줄은 몰랐다. 여자한테 인기 많았겠다.”

“인기? 허허. 인석아, 옛날은 지금하고 달라서 여자한테 인기 있어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어. 젊어서는 여자 만날 시간도 없었고.”

“힝!”

코웃음을 친 주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치, 바람 피우고 다닌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엄마한테 다 들었다고요.’

김대풍이 주하의 표정을 살피고선 슬그머니 강수에게 물었다.

“이 작가. 자네가 보기에 내 몸상태가 어때 보이는가?”

“예, 그 전에 비교하면 건강해 보입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신 것 같습니다.”

“허허. 자네 말대로 운동을 해서 그런지 요즘 기운이 넘친다네. 꼭 회춘한 것만 같아. 한데 운동만 하니까 재미가 없어.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추천할 만한 게 있는가?”

강수가 즉각 대답했다.

“세계일주 여행은 어떤지요? 어르신이 세계일주를 하려면 크루즈 세계일주 여행이 괜찮을 겁니다.”

“뭐? 세계일주 여행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수의 제안에 집사 한동제와 김대풍이 황당한 표정으로 강수를 쳐다보았다. 주하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강수를 힐끔거리며 보았다.

김대풍은 속으로 웃었다.

‘허허, 정말 엉뚱한 녀석이군. 한데 크루즈 세계일주라···. 이거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김대풍이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세계일주 여행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3년 전, 자식에게 부동산 사업체를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오로지 사업을 위해 삶의 대부분을 투자하지 않았던가.

‘그렇군. 내 나이 칠십 팔.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는가? 아직은 움직일 수 있는 기력이 남아 있으니 죽기 전에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둘러봐야겠군. 왜 진작에 그런 생각을 못 했지? 가만, 내가 여행을 가면 주하는 누가 돌보지?’

주하를 끔찍이 아낀 김대풍은 주하가 행실이 좋지 않은 아이들과 함부로 어울리지 못하게 통제해왔다.

김대풍이 주하에게 임해영을 붙여서 통제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그리고 지금 세 자식 가운데 제대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자식이 없었다.

세 자식 모두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방탕하게 살고 있었다.

물론 세 자식이 방탕하게 살게 된 원인은 전부 김대풍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0대에 부동산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쥔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여자에게 관심을 두었고, 젊은 여자에게 빠진 김대풍은 따로 살림을 차려 살았다.

그 당시 김대풍에게 아내와 자식은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존재에 불과했다.

가정을 지키지 않은 김대풍은 자식들이 온갖 사고를 치고 제멋대로 살아도 아버지로서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서야 자식들이 방탕하고 나태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뒤늦게 후회했으나 너무 늦은 후회였다.

자식 농사를 망친 김대풍은 손녀 주하만큼은 올바로 자라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랐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경호원이었고, 불량하고 행실 나쁜 친구들과 사귀지 못하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것이다.

주하가 반항하면 유산 상속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창 혈기왕성할 때라 유산 상속 약발이 먹히지 않을 만도 하건만 주하는 기특하게도 반항하지 않고 잘 따라와주었다. 그것이 너무 고마워서 대학 졸업선물로 작은 건물 한 채를 물려준 것이다.

김대풍이 힐끗 강수 옆에 서 있는 주하를 보았다.

강수를 보는 주하의 눈빛과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음, 주하가 강수를 꽤 좋아한다 말이지. 이참에 주하를 강수에게 맡겨?’

김대풍은 강수를 두 번째 보지만 임해영의 보고를 통해서 강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음, 아직은 너무 일러. 둘이 잘 어울리긴 하다만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어.’

김대풍이 별 말 없이 생각에 잠겨있자 주하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

“할아버지, 크루즈 세계일주 여행 안 해보셨죠?”

“응? 물론 안 해봤지.”

주하가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두 손을 모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크루즈 타고 오대양을 누비면서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 얼마나 환상적이고 신날까? 도쿄도 가고, 홍콩도 가고, 하와이도 가고. 그렇죠, 할아버지?”

주하가 눈빛을 반짝이며 김대풍을 바라보았다. 주하의 눈빛은 낭만적이고 멋진 크루즈 해외여행을 떠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김대풍이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이 녀석이 날 해외로 내보내려고 아예 작정을 했구나.’

“그래. 낭만적이고 환상적이겠지. 할아비도 세계일주 여행에 구미가 당기는구나.”

“할아버지, 세계여행 해보세요.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해외로 나가보겠어요?”

“네 말이 맞아. 나도 이젠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때가 아니면 언제 해외여행을 가겠느냐? 그래서 말인데 주하야. 할아비 혼자 몇 달씩이나 여행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또 너무 적적하고, 심심해서 못 갈 거 같다.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크루즈 세계일주 여행, 주하가 할아비랑 같이 가면 좋겠구나. 그렇지 않니?”

김대풍이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크루즈 세계일주 여행’을 특별히 강조해서 또박또박 말했다.

“네?”

예상하지 못한 반격에 당황한 주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떠듬떠듬 말했다.

“그, 그게··· 무, 무슨 말씀이에요? 왜 저랑 가요?”

김대풍이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주하를 째려봤다.

“왜? 설마 할아비랑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크루즈 세계일주 여행 가기가 싫은 게냐?”

“그, 그게 아니고요. 전 건물도 관리해야 하고, 할 일도 많단 말이에요. 그리고 할아버진 젊은 할머니 있잖아요? 할머니랑 가셔야죠. 저랑 가면 진짜 심심할걸요?”

주하가 자신의 약점을 짚고 넘어가자 김대풍이 슬쩍 한발 물러섰다.

“험, 싫다면 할 수 없지.”

더 말해봐야 역효과만 날 것 같은지 주하가 재빨리 말했다.

“할아버지, 강수오빠랑 전 나가서 차 한잔 마실게요.”

“알았다. 나가보거라.”

“어르신, 편히 쉬십시오.”

강수는 김대풍에게 인사하고 주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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