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그림 그리는 마법사 - 67회
강수를 비롯해 강창호, 염진구, 배홍한, 조인호 등 다섯 명의 회원들 앞에 잔의 1/3만 채운 에스프레소가 놓였다. 세 가지의 원두를 품평해야 하므로 잔의 1/3만 채운 것이다.
염진구가 커피잔에 코를 가져가며 향을 맡았다.
“아, 커피 향 좋다. 어디 맛을 볼까?”
강수도 잔을 들고 맛을 보았다.
사실 강수는 이센셜아이로 가장 뛰어난 품질의 원두를 골라왔을 뿐 커피 맛을 보지는 않았다.
맛을 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봉지는 일부러 개봉하고 밀봉했다.
탁자에 둘러앉아 세 가지 원두의 에스프레소를 차례차례 맛본 회원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와, 이 커피 맛 죽이네. 산미가 상큼하고 향긋한 꽃내음이 나는 것 같다. 이건 예가체프 산이구나.”
“이야, 이건 웬만한 카페에서 마시는 것보다 훨씬 맛있네요. 이거 팔면 엄청 인기 좋겠어요.”
“정말 뭔가 깊고 입안에 꽉 차는 듯한 고소한 맛이 굉장하다. 산미도 부드럽고.”
세 가지 원두가 각각 독특한 맛과 향을 풍겨서 무엇이 낫다고 고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만 블렌딩과 원산지에 따라 풍미가 조금씩 달라서 취향에 따라서 고를 수밖에 없었다.
“와, 이 정도 맛이면 세 가지 다 최곤데요?”
3개 가운데 하나는 비싼 편이라 강수가 노민석에게 물어보았다.
“민석 형님, 세 원두 가운데 예가체프 G1은 200g에 이만 천원이라 좀 비싸지 않나요?”
“그래, 확실히 비싸지. 한데 맛이 좋으니까 이 커피 맛을 원하는 고객이 있으면 팔 수는 있어. 단지 수익이 줄어들 뿐이니까.”
“사실 가성비가 안 좋은 것 같아서 제하려다 가져왔는데 그래도 팔 수는 있군요.”
“그럼. 커피 맛이 무엇보다 일 순위라고 할 수 있어. 강수야, 원두 구입은 정말 중요했는데 좋은 정보를 얻는구나. 사실 커피 원가를 줄이려면 생두를 사서 로스팅을 직접 해야 하지. 하지만 그 로스팅이라는 게 쉬운 작업이 아니고 전문가인 로스터가 해야 원두 맛을 제대로 낼 수가 있지. 더구나 가성비 좋은 생두를 구해야 로스팅도 효과를 볼 수가 있고. 하여튼 이 두 업체 정도면 로스팅 솜씨가 좋은 것 같으니까 연락해서 의논해봐야지. 이것 때문에 고민했는데 강수야, 고맙다.”
“별말씀을요. 카페 오픈 때 불러주세요.”
“그래. 일루션 회원들은 전부 초청해야지. 그나저나 동아리 회장 맡을 사람이 없어서 좀 고민이 되네.”
염진구가 팔을 내저으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형님, 그런 걱정을 왜 합니까? 이 공간을 유지하면 좋겠지만 어차피 온라인 카페가 있으니까 괜한 걸로 심력 낭비하지 말고 카페만 신경쓰도록 하세요. 이번엔 꼭 성공하셔야죠.”
“맞아요. 일루션은 동호회고 카페는 생업이잖아요. 회장님 원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저도 회장님 카페가 잘 됐으면 좋겠어요.”
연주가 동조했고, 배홍한도 당연하다는 듯이 한 마디 했다.
“그럼, 그럼. 그리고 우리들이야 회장님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만나면 되는 일 아닌가? 한 달에 한번이든 두 번이든 날만 잡으면 되지.”
“그것도 괜찮네요.”
노민석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들 이해해 줘서 고맙다. 그만 둘 때 그만 두더라도 오늘은 공연을 해야지? 공연 준비해 볼까?”
“그래야죠.”
회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가서 마술 공연을 준비했다.
강수는 자신이 준비한 마술을 회원들 앞에서 선보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마술을 연습한지 몇 개월 되지도 않는데 뼈빠지게 연습해야 할 수 있는 고급 스킬과 트릭을 구사하면 의문에 빠질 것이 뻔했다.
‘쩝, 간단한 카드 마술이면 모를까 회원들 앞에서 함부로 프리즈나 아이스애로우 같은 마법을 펼칠 수는 없겠지?’
잠시 후, 회원들은 라이브카페로 마술 공연을 하기 위해 올라갔고, 강수는 포커 카드를 꺼내 마법을 연기했다.
*
아트페어 상하이는 전 세계 35개국, 230여 갤러리가 참여했고, 푸둥에 위치한 상하이 국제 컨벤션센터의 두 개 층을 사용하는 규모로 열렸다.
14일에는 VIP 고객을 위한 ‘프리뷰’ 행사가 열렸고, 15일 개막했다.
일반적으로 미술품은 에디션 작품을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단 한 점만 존재하므로 프리뷰는 VIP 고객에게 원하는 작품을 먼저 구매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실제로 프리뷰에는 세계 유수의 미술관 큐레이터, 주요 컬렉터, 업계 전문가, 잠재적 컬렉터 등 유명 인사들이 대거 방문해 주요 작품을 선점한다.
15일 오후 2시경 상하이시 푸둥남로.
네이비색 슈트가 어울리는 훤칠한 체구에 호감 있게 생긴 사내와 마른 듯이 보이는 늘씬한 체형의 연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인파로 북적대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의 늘씬한 몸매와 잘생긴 외모가 눈길을 끄는지 지나가는 거리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두 사람을 훔쳐보곤 했다.
두 남녀는 투숙 중인 구룡호텔을 나와 아트페어가 열리는 상하이 국제 컨벤션센터 전시장으로 걸어가고 있는 강수와 박해나였다.
박해나가 강수를 힐끔 살펴보고 말을 걸었다.
“근데 오전에는 밥도 안 먹고 어디 갔었나요? 개막식에도 보이지 않고, 우리 부스에서도 볼 수 없던데요.”
“헬스클럽에서 운동했어요. 매일 운동하는 게 버릇이 됐거든요.”
강수는 새벽에 일어나 출입문 바깥 손잡이에 방해하지 말라는 DND 표지를 걸고 오전 10시 30분까지 마나회로 수련한 후, 헬스클럽에 가서 달리기를 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마나회로 수련을 거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치유마법을 써 본 결과 3서클이 되면 제대로 된 치유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하루도 마나회로 수련을 거르고 싶지 않은 이유다.
“운동을 얼마나 좋아하면 개막식도 안 오고 헬스클럽에 있었어요? “
“사실 운동한 지는 몇 달 안 되는데 꾸준히 하다 보니까 매일 하게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중독된 것 같네요.”
“운동도 중독되나 봐요? 작업을 열심히 하려면 운동이 필요한 것 같긴 해요. 나도 운동을 해야 할까 봐요.”
“해나 씨도 운동해보세요. 무슨 일을 하든 체력이 중요하잖아요? 그림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운동은 많이 할 것도 없이 하루에 한 시간만 꾸준히 하면 돼요. 한 달만 해도 몸이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낄 겁니다.”
“귀국하면 헬스장을 알아봐야겠어요.”
잡담을 나누며 거리를 걸은 두 사람은 35층 높이의 웅장한 국제 컨벤션센터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아트페어 전시를 홍보하는 5m는 될 것 같은 용을 상징하는 커다란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강수와 박해나는 사람들 틈에 끼여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트페어 상하이는 갤러리스, 뉴 인터페이스, 뉴 비젼, 투데이스 아트, 상하이스 아이 등 5개 섹션으로 기획되어 전시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다.
섹션마다 섹션의 주제에 맞는 전시가 이루어졌다.
근래 들어 국제 미술계의 행사에서 각 영역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비엔날레 작품, 아트페어 작품이라는 분류가 가능할 만큼 각 미술계 행사마다 주목 받는 작품 유형이 존재했다.
비엔날레 작품은 대규모의 설치, 조각, 필름,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로 이루어져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다루기도 하고, 예술의 한계를 깨는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에 반해 아트페어는 전시 공간이 정형화된 작은 부스인 탓에 일반 전시 공간에 비해 작품 전시에 제약이 따랐다. 그런 이유로 아트페어는 회화, 판화, 사진 같은 평면적인 작품이 주를 이룬다. 한데 몇 년 전부터 이러한 구분이 점점 사라지면서 아트페어에서 조각, 설치, 영상 매체를 활용한 작품의 비중이 높아졌다.
아트페어 상하이에서도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뉴 인터페이스, 뉴 비젼 섹터는 대규모의 설치미술과 조각, 디지털 아트, 퍼포먼스 등 실험적인 작품이 전시되었다.
2층 전시장 입구로 올라가니 탁 트인 중앙 홀에 ‘무릉도원을 기리며’ 설치미술이 관람객을 맞이했다.
약 15평 정도의 넓이에 복숭아가 탐스럽게 열린 복숭아나무와 산, 계곡, 복숭아를 따 먹는 인간 등 무릉도원을 형상화했다.
중국 최고 조각가의 한 명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리우밍의 이 작품은 위에서, 혹은 뒤로 물러나 감상하면 누워있는 여성의 형상이 드러난다. 무릉도원과 여성성, 대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이미지를 결합한 것이다.
강수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와, 역시 대륙의 작가답게 스케일이 장관이네요. 아름답기도 하고.”
박해나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아름답긴 한데 꼭 여성적인 이미지를 써야 했을까요?”
“무릉도원은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이고, 그것의 근원은 풍요한 대지고, 대지는 여성성을 품고 있으니까요.”
“그런 뻔한 의미와 이미지를 드러내기보다는 숨기는 것이 더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예술적인 완성도 측면에서도 낫지 않을까요?”
“하하. 해나 씨 말도 맞네요. 한데 그 점은 오로지 예술가의 성향에 달려있으니까 작가의 의도를 존중해야겠죠.”
“존중은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강수와 박해나는 중앙 홀을 지나 오른쪽에 위치한 갤러리스 섹터부터 관람했다. 갤러리스 섹터는 세계 유수 갤러리들의 전시 공간으로 소속 작가의 작품과 소장 미술품을 전시했다.
이 섹터에는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는가 하면 어떤 갤러리는 3, 4m짜리 조각 대여섯 개로 부스를 채우기도 했고, 어떤 갤러리는 설치작품 몇 개로 부스를 가득 채웠다.
또한 다양한 기법과 형식의 회화와 판화, 팝아트, 오브제를 가공해 시각적 강렬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신개념미술 작품이 전시되었다.
개념 미술을 세상에 널리 알린 작품은 ‘샘’이다.
‘샘’은 1917년 미국의 독립미술가협회에서 주최한 <독립전시회>에 출품한 마르셀 뒤샹의 작품이다.
마르셀 뒤샹은 화장실에 설치되어야 할 소변기를 가게에서 사와 ‘샘’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외형의 변화 없이 소변기에 서명하고 샘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부여해 소변기를 예술 작품으로 창조했다.
그는 레디메이드(기성품) 아트로 불리는 ‘샘’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첫째, 오브제를 선택했고, 둘째, 그것에 새로운 명칭(샘)을 부여했으며 셋째, 원래의 실용적 기능을 제거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시켰다.”
이것은 미술사에서 혁신이며 개념 미술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뒤샹의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정신은 현대미술을 진일보시켰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가 되었다.
강수와 박해나는 팜메이갤러리 소속 보보트 작가의 ‘생존을 위해’ 연작을 둘러보고 있었다.
-벌레 먹은 사과를 반으로 절단해 사과를 파먹어야 생존하는 벌레의 존재 방식을 보여주는 작품.
-고깃덩어리로 변한 동물 사체에 달라붙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는 벌레들.
강수가 벌레를 가리키며 박해나에게 말했다.
“저 벌레들은 자신들이 정복자라도 되는 양 몸을 세우고 있네요?”
“자기 소유라고 선언문이라도 낭독하나 보죠?”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아도 빼앗아 먹을 놈들도 없을 것 같은데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교미 중인 수컷 사마귀의 머리에 이빨을 들이대고 있는 암컷을 클로즈업으로 확대한 작품.
-달리는 트럭에서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내리는 한 마리의 절박한 표정의 돼지.
-가죽이 벗겨져 거꾸로 매달려 있는 가축을 해체하는 한 남자의 무심한 얼굴.
박해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생명의 희생이 필연일까요?”
“아마도요. 본래 자연의 생존방식이 끝없이 먹고 먹히는 전쟁터나 다름없죠? 방식만 다를 뿐 인간도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투쟁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가끔 느끼지만, 인간은 불합리한 존재 같아요. 한편으로는 동물의 한계를 뛰어넘은 지성적인 존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보다 못한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인 존재에 불과하니까 말이죠.”
“사람 가운데 반사회적인 사람들도 있을 뿐이지 인간이 다 그런 존재는 아니잖아요?”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이 문제인 거죠. 개인이 모인 집단의 행태를 보면 야만의 끝을 보여주지 않나요? 전쟁과 학살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알 수 있죠.”
“하지만 그런 불합리성과 투쟁은 더 높은 존재로 진화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네요.”
“강수 씨는 불합리한 인간성과 사회구조가 바뀔 수 있다고 보는군요?”
“물론이죠. 인간은 분명 진화해서 인류를 위한 사회를 건설할 겁니다. 단지 시간이 좀 걸릴 뿐이죠. 짧으면 몇 백 년, 길어봐야 몇 천 년쯤?”
박해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훗, 과연 그럴까요? 인류는 수많은 국가와 민족, 종교와 이념으로 갈라져서 집단의 이익만 추구하고 있거든요. 인간은 영원히 투쟁과 경쟁 속에서 살아갈지도 몰라요.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욕심에 가득한 인간이 이상 사회를 이룬다는 것은 이상향에 대한 꿈 아닐까요? 무릉도원처럼.”
“그래요. 꿈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미래는 천천히 변화될 거로 믿고 있습니다.”
“음, 그럼 저도 그렇게 되길 기원해 보죠.”
두 사람은 다음 부스, 마니시안 갤러리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