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66회
인적이라곤 없는 산중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짙은 녹음만이 끝없이 펼쳐지며 하늘을 가렸다.
심마니와 약초꾼이 다니는 산길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수풀이 자라고 있었다. 강수는 수풀이 침범하고 있는 비탈진 산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산길을 약 한 시간 가까이 달린 끝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오른편 있는 커다란 바위를 발견하고 수련하기 적당한 장소 같아 멈춘 것이다.
전신을 휘몰아치던 엔돌핀의 기운이 잦아들었다.
어둑했던 산중이 어느새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강수는 깊게 호흡을 하며 바위로 다가갔다. 바위 앞에 앉을 만한 공간이 있어서 수련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바위를 등지고 선 강수는 배낭에서 수건을 꺼내 몸에서 흐르는 땀을 대충 닦고 마나회로 수련을 시작했다.
산등성이에서 떠오른 태양은 걸음을 재촉하며 하늘로 솟아올라 은총처럼 가을 햇살을 비추었다.
가부좌하고 마나회로를 수련하던 강수가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후, 마나 축적이 생각보다 빠르다. 이 정도 속도면 괜찮아.’
마나회로 수련을 통해 마나는 약 15%를 보충했다.
기존에 남아 있던 10%를 더하면 약 25% 정도가 축적된 것이다. 완충하려면 6일 정도 걸린다는 계산이 나왔다. 2서클로 성장한 마나하트였기 때문에 마나 축적 속도는 생각보다 빠른 편이었다. 마법 수련은 내일로 미룬 강수는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지으며 기쁜 마음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올라온 도솔산의 경치를 구경하며 느긋하게 하산하던 강수는 전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뭐지? 노루는 아닌데.’
노루나 사슴은 주변에서 위험을 감지하면 빠르게 움직여서 타타탁 하는 급박한 소리를 낸다.
‘아버지가 멧돼지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설마 멧돼지인가?’
전방 왼쪽 수풀이 흔들리고 갈색의 털로 뒤덮인 거대한 물체가 나타났다.
‘헛! 진짜 멧돼지네.’
걸음을 멈춘 강수가 멧돼지를 살폈다.
수풀을 헤치고 나온 멧돼지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삐죽 솟았고, 150kg이 넘을 것 같은 우람한 덩치를 자랑했다. 그 위압적인 모습에 약간 긴장이 됐으나 떨리지는 않았다.
‘그냥 지나가라.’
강수의 바람과는 달리 이방인의 존재를 느꼈는지 멧돼지가 고개를 돌려 강수를 바라보았다.
산에서 조우하는 멧돼지는 굉장히 위협적인 동물이다. 덩치도 우람할 뿐만 아니라 커다란 머리와 어깨는 바위같이 단단해서 멧돼지에게 받히면 큰 부상을 당한다.
현재 맹수가 멸종해 천적이 없는 멧돼지는 농작물을 망치는 주범이자 야생의 포식자나 다름이 없었다.
강수를 발견한 멧돼지가 우뚝 서서 이마 아래 깊이 들어간 작고 검은 눈으로 강수를 노려보았다.
멧돼지의 전신에서 살벌한 기운이 뭉실뭉실 피어났다.
강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멧돼지의 눈을 마주 보며 주시했다.
예전이라면 몸을 피신할 곳부터 물색했겠지만, 지금은 멧돼지가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멧돼지와 맞닥뜨렸을 때의 대처법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멧돼지와 맞닥뜨렸을 때는 일단 움직이지 말고 침착하게 멧돼지를 쳐다보며 물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멧돼지를 위협하거나 자극하는 행위는 삼가야 하고, 섣부르게 뒤돌아 도망치면 안 된다. 뒤돌아 도망치면 멧돼지가 본능적으로 달려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거리가 떨어져 있을 때는 빠르게 나무나 바위 등의 뒤에 숨는 것도 괜찮다.
이때, 날벌레 몇 마리가 강수 얼굴에 달려들며 앵앵거렸다.
무의식적으로 팔을 흔들어 날벌레를 쫓았는데 강수의 손짓에 자극을 받았는지 멧돼지가 살짝 자세를 낮추고 달려들 태세를 갖췄다.
“뭐야, 한번 해보자는 거냐. 날 우습게 보았다간 큰 코 다칠 텐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나회로 수련을 통해 마나를 25%까지 회복했다는 점이었다. 1서클 마법을 캐스팅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드디어 준비를 끝냈는지 멧돼지가 강수를 향해 이빨을 번뜩이며 돌진했다.
강수는 재빨리 홀드를 캐스팅했다.
“홀드!”
홀드에 걸린 멧돼지는 2초 정도 정지하더니 몸을 부르르 털며 괴성을 질렀다.
꾸에엑!
2초 만에 홀드가 풀린 것이다.
“왜 이렇게 빨리 풀려.”
흥분한 멧돼지가 식식거리며 다시 몸을 낮추었다.
강수가 성이 난 듯한 멧돼지를 보며 여유 있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곱게 보내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다.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겠네.”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고 산중에서 파이어볼을 캐스팅할 수는 없었다. 잘못하면 산불이 날 수도 있지 않은가.
강수는 멧돼지가 달려들기 전에 다시 홀드로 붙잡아 놓았다.
꾸에엑!
2초 후, 홀드에서 풀려난 멧돼지가 괴성을 지르며 강수를 향해 미친 듯이 돌진했다.
강수는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멧돼지를 노려보며 사이클론윈드의 영창을 끝내고 있었다.
“사이클론윈드.”
2서클로 펼친 사이클론윈드는 꽤 강력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멧돼지를 휘감고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약 3m 높이까지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올라간 멧돼지가 회오리바람이 소멸하자 추락했다.
쿵!
쾍!
등으로 떨어져 내린 멧돼지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버둥거리더니 간신히 일어났다.
강수는 멧돼지가 정신 못 차리는 틈에 재빨리 머리를 겨냥해 아이스애로우를 연속으로 캐스팅했다.
퍽! 퍽! 퍽! 퍽! 퍽!
멧돼지의 머리가 얼마나 단단한지 아이스애로우가 산산이 박살 나서 흩어졌다.
하지만 멧돼지의 머리가 바위처럼 단단해도 아이스애로우에 적중당한 충격이 컸는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강수는 멧돼지 앞으로 걸어가 머리 앞에 앉아 원통형의 콧등을 톡톡 쳤다.
“이 자식,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시간이 많았으면 바비큐구이를 해 먹었을 거다. 감히 마법사를 몰라보고 덤빈다니 말이야.”
강수는 혼이 나간 것 같은 멧돼지의 까만 눈을 일별하고 집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멧돼지를 잡아가서 동네 어르신께 대접하고 싶어도 어떻게 잡았는지 물으면 할 말이 없어 골치만 아프다.
사냥개나 사냥총 없이 멧돼지를 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강수는 멧돼지를 상대로 펼친 마법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했다.
*
강수는 어머니가 싸준 김치와 밑반찬을 챙긴 후, 제주도 여행비용 200만 원을 따로 드리고 차를 몰아 아파트로 돌아왔다.
집으로 들어온 강수는 주방 앞까지 차지한 이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하. 이것 참! 혼자 사니까 이렇게 늘어놓을 수도 있고 편하긴 하다만···.”
어째 궁상스럽고 뭔가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수는 김치와 밑반찬을 냉장고에 넣고 옷을 갈아입었다.
건조제를 넣어서 초벌 칠해놓은 바탕은 시골집에 갔다 온 사이 말라 있었다.
‘오늘이 7일. 14일에 출국, 18일 입국인데···. 5일이나 허비할 순 없으니 적어도 하루라도 일찍 귀국해야겠다.’
핑크티티 인물화를 3주 안에 끝내고 김대풍 어르신의 초상화를 작업해야 한다.
‘김대풍 어르신 초상화를 끝내면 개인전 작품 끝낼 때까지 다른 일은 웬만하면 하지 말아야지.’
스케줄을 정리하던 강수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쳤다.
“아, 이런! 민석 형님한테 원두를 골라준다고 했지? 깜박했네. 원두 좀 보자.”
강수는 곧장 쇼핑몰에 접속해서 원두 판매를 검색, 평이 좋은 원두 위주로 8개 업체에서 약 30여 제품을 주문했다. 가격은 2만 원 대에서 고급품인 4만 원 대까지 골고루 섞어서 주문했다. 원두 판매자가 너무 많아서 샘플을 고르는 것조차 간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문한 가격만 백만 원이나 됐다.
“하하. 몇 개월 전만 해도 절대 이런 황당한 짓은 하지 않았겠지?”
원두를 백만 원어치나 주문한 사실이 생각할수록 너무 웃겼다.
“하하. 재밌네. 어쨌든 민석 형님 카페가 성공할 수만 있다면야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음, 평이 좋은 것만 골랐으니 30개 정도면 괜찮은 원두 몇 개는 나오겠지?”
비록 백만 원을 원두 사는 데 썼지만 좋은 원두를 고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약간 흥분이 되고 기분이 좋았다.
‘후후, 이제 핑크티티 인물화 작업을 시작해야겠다.’
강수는 모니터에 핑크티티 멤버를 띄워 놓고 한 명 한 명 세심하게 훑었다.
메인 보컬 지영. 눈매가 날카롭고 브이라인이 확실할 정도로 턱이 뾰족했다.
비주얼 담당 소냐. 백인 혼혈인지 이목구비가 시원스럽고 입체적인 마스크의 소유자였다.
메인 댄스 서린. 눈이 사슴처럼 크고 순수해 보였고, 작은 코에 앵두처럼 붉고 도톰한 입술이 전체적으로 여동생처럼 편한 얼굴이다. 소냐가 서구적인 스타일이라면 전형적인 동양인 마스크였다.
막내 진하. 진하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해서 귀엽고 순진무구한 미소녀 캐릭터를 연상케 했다.
모두 예뻤기 때문에 개개인의 개성과 특징을 잡아서 각각의 분위기와 그 분위기에 맞는 바탕색, 인물의 배치와 구도 등을 정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강수는 수백 장의 사진을 살펴보며 지영, 소냐, 서린, 진하의 외모를 관찰했다. 주하처럼 앞에 앉혀 놓고 얼굴을 스케치하는 것이 모델의 개성적인 이미지를 가장 확실하게 끄집어낼 수 있겠지만 어차피 핑크티티는 대중의 인기를 먹고 크는 걸그룹이다.
세나를 그렸을 때처럼 걸그룹이라는 현실을 바탕으로 각각의 개성과 특징적인 이미지를 찾아 그리는 것이 옳은 방향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걸그룹이 외모는 메이크업에 의해 비슷해지고, 깜찍하고 발랄한 스타일로 획일적이고 정형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획일적이고 정형화된 비슷비슷한 외모의 수많은 걸그룹 소녀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개성적인 이미지를 잡아내야 한다.
세나를 그렸을 때는 구체적인 자료보다는 강수의 상상력이 큰 역할을 했다. 밝게 웃는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세나의 개성과 걸그룹의 이미지를 조합해 창조한 인물화였다.
이번에 그리는 핑크티티의 멤버들은 비록 사진이지만 수백 장의 다양한 모습을 참조했기 때문에 강수의 상상보다는 사진에서 구현된 이미지를 캐치했다.
강수는 사진을 훑으며 멤버의 개성을 찾아냈다.
지영은 농염하고 열정적이며 섹시한 분위기, 소냐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미녀 컨셉으로 가면 좋을 듯했고, 서린은 맑고 편한 느낌을 주는 여동생 스타일, 진하는 깜찍하고 귀여운 소녀 스타일로 각각의 개성을 부여하기로 했다.
각각의 특징을 잡아내고 나니 배경이 저절로 떠올랐다.
지영은 장미꽃을 연상케 하는 붉은색 배경, 소냐는 숲을 연상케 하는 초록색 배경, 서린은 일렬로 걸어가는 병아리 같은 장난스럽고 익살스런 이미지를 주는 주황의 배경, 진하는 꿈을 꾸는 것 같은 몽롱한 분홍의 배경.
각각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살려줄 배경까지 정하고 나니 어떻게 그려야 할지 뇌리에서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형상화되었다.
강수는 연필을 들고 즉각 스케치를 시작했다.
*
토요일.
콤비를 입은 강수는 두 개의 쇼핑백 가득 원두를 채워서 일루션 동아리방으로 들어갔다.
“우와, 이게 다 원두예요?”
연주가 두 개의 쇼핑백에 가득 담긴 원두를 탁자 위에 하나씩 꺼내며 탄성을 내질렀다.
동아리 회원들이 몰려와서 탁자 위에 가득한 원두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노민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강수야, 이게 다 무슨 원두냐?”
“제가 괜찮은 원두를 찾아본다고 했잖아요. 맛을 봐야 어떤 원두가 괜찮은지 알죠.”
강수가 원두 세 봉지를 노민석에게 건네주었다.
“민석 형님, 저는 이 세 가지 원두가 가장 나은 것 같거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른 것들도 다 맛보시고 형님 맘에 드는 걸 골라보세요. 원두 봉지에 원산지와 가격, 판매업자 전부 적어놨어요.”
노민석이 놀라서 강수와 원두를 번갈아 보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가, 강수야. 갑자기 뭐가 뭔지 모르겠다만 정말 고맙다. 허, 이거 고맙다는 말 밖에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데 뭐 그러세요?”
“강수 씨, 대단한 일 한 거 맞습니다. 겸손하시네요.”
저음의 듣기 좋은 음성으로 강수를 칭찬한 사내는 죽송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같이 한 조인호였다.
깔끔한 정장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조인호는 20대 후반으로 수학 강사라고 했다.
“하하. 그런가요?”
강창호가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멋쩍다는 듯 웃는 강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강수형, 누가 이렇게 원두를 사서 하나하나 맛을 보고 좋은 걸 고를 수 있겠어요?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요. 완전 지리네요. 감동입니다.”
“강수오빠, 멋져요. 최고예요.”
“멋지긴 뭐가. 사실 시간만 좀 투자하면 되는 건데. 근데 창호야, 오랜만에 본다.”
“예. 동호회에 너무 안 나온 거 같아 형님들 얼굴 보러 나왔습니다.”
“너 살도 빠지고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 학업에 대리운전에 좀 무리하는 거 아니니? 몸 좀 생각해.”
“네. 조금만 더 하면 방학이잖아요. 그때까지만 참아야죠.”
염진구가 강수의 어깨를 툭 치면서 물었다.
“강수야, 원두 가격만 해도 꽤 될 것 같은데 대체 이게 얼마어치냐?”
“응? 글쎄 한 백만 원 정도.”
“헉!”
헛바람을 들이킨 염진구가 강수의 위아래를 훑었다.
“너 강수 맞아? 옛날에는 이렇게 대인배가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그전부터 느꼈지만 뭔가 이상해졌다?”
“인마, 사람이 변할 수도 있지. 항상 똑같아서야 하겠냐?”
“헐, 이거 참 당황스럽군.”
뒷머리를 긁는 염진구를 보며 강수가 속으로 웃었다.
‘자식, 대학교 같이 다녔다고 옛날하고 달라진 걸 눈치챘네.’
회원들이 미소 띤 얼굴로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강수 씨, 배포가 장난 아니네요. 놀랐습니다.”
“민석 형님, 이번엔 꼭 성공하셔야겠습니다.”
염진구가 주위 회원들을 쭉 둘러보며 분위기를 잡았다.
“자자,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도 원두 맛을 보고 품평회 좀 해 보죠? 저는 민석 형님이 들고 있는 그 세 봉지의 원두 맛이 매우 궁금하네요. 형님, 그 원두 맛 좀 보죠?”
“하하, 그래. 나도 강수가 추천한 이 원두 맛이 어떨지 궁금하다. 연주야, 나랑 에스프레소 좀 만들어 볼래?”
“네,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