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65회
*
시골집으로 차를 몰고 가던 강수는 하상덕 감독으로부터 문자와 여러 장의 사진을 받았다.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문자를 확인해보았다.
-이 작가님, 하상덕입니다. 영화 크랭크인했습니다. 고사 지낸 사진 몇 장 보냅니다.
사진을 살펴보니 배우들과 황구 죽돌이, 고사 지내는 장면 등이었다.
‘드디어 촬영을 시작했구나. 잘됐다.’
강수는 답장을 보냈다.
-사진 잘 보았습니다. 크랭크인 축하드립니다. 수고하십시오.
이제 몇 달 뒤면 자신의 작품 ‘벙어리 황구 죽돌이’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강수는 입가에 흐흐하고 느글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운전대를 잡았다.
양구 시골집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5시 30분이다.
수련 시간을 1시간 줄이고 빨리 움직인다고 했는데도 점심 먹고, 가전제품을 구입하고, 샤워하느라 아파트에서 출발할 때 2시 30분이 넘었다. 그나마 도로정체가 심하지 않아 적당한 시간에 도착한 셈이었다.
강수는 대문 옆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아, 시원하다.”
고향 집에 올 때마다 느끼지만 푸르른 나무와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아늑한 풍경을 둘러보며 깨끗한 공기를 마시면 항상 기분이 상쾌해진다.
강수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며 목청껏 외쳤다.
“어머니, 저 왔어요.”
“오, 강수니? 어서 오너라.”
기쁨이 가득 묻어 있는 정겨운 어머니의 목소리.
부엌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오는 어머니를 보니 괜히 가슴이 뿌듯해진다. 비록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검어지고 주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 한 켠이 아렸지만 강수에게는 언제나 그 누구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어머니였다.
‘빨리 같이 살고 싶은데···. 에이, 조금만 참자.’
강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만석이네 놀러 가셨다. 저녁 먹기 전에 오실 거야. 운전하느라 고생했지? 어여 씻고 쉬고 있거라. 저녁 준비할 테니까.”
“운전이 뭐 힘들어요. 아, 참. 어머니. 냉장고하고 몇 가지 물건이 조금 이따 도착할 거예요. 제가 냉장고 안에 물건들 정리해 놓을게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니?”
“냉장고, 세탁기, TV, 청소기, 전기레인지 전부 새로 샀거든요.”
“뭐어?”
김순옥 여사의 눈이 놀람으로 가득했다.
“돈이 어딨다고 말도 없이 그걸 다 산 거니?”
“집에 있는 것들이 죄다 낡고 10년은 썼잖아요. 제가 요번에 돈을 좀 벌었거든요. 잘됐다 싶어서 이참에 전부 새로 샀죠. 그래 봐야 육백만 원정도 밖에 안 해요.”
“육백만 원이나! 호호, 우리 아들 배포가 왜 이렇게 커? 육백만 원이나 들여서 가전제품을 다 사오고. 돈은 많이 썼지만, 엄마는 너무 좋다.”
“그럼 제가 정리할게요.”
“그려. 아들 덕에 호강을 다 하는구나.”
‘호강이라뇨. 이건 시작이라고요.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진짜 호강시켜드릴게요.’
부엌으로 들어간 강수는 냉장고와 김치냉장고에 든 물건들을 전부 꺼내 한쪽에 모아놓았다. 그리고 안방으로 가서 32인치 TV를 옆으로 치우고, 먼지를 닦아 낸 후 드라이버를 찾아 들고 욕실로 갔다.
수도꼭지에서 호스를 분리하고 세탁기를 옆으로 치운 후, 먼지와 물때 낀 바닥도 깨끗하게 닦았다.
‘이 정도면 됐지?’
정리를 끝냈을 즈음 밖에서 클랙슨 소리가 났다.
“엄마, 물건 왔어요. 제가 나갈게요.”
마당으로 나간 강수가 대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이강수 씨 댁이죠?”
“예, 맞습니다.”
“물건 내리겠습니다.”
배송기사 두 명이 물건을 내리고, 구제품을 수거한 후, 새 제품을 설치하는 데는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김순옥 여사는 깨끗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새 제품들을 보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탄성을 연신 질렀다.
무선 청소기를 들어보고 요리조리 살피는 김옥순 여사.
“어머, 가볍기도 하고 예뻐라.”
65인치 TV에 입이 쩍 벌어진 김옥순 여사.
“아니, 무슨 TV가 이렇게 크니. 꼭 영화관에 온 것 같네.”
청색 바탕에 노란 해바라기 한 송이가 피어있는 디자인의 냉장고를 마른행주로 닦으며 즐거워하는 김옥순 여사.
“아휴, 냉장고가 너무 아름답다. 주방이 다 훤해지는 거 같네.”
강수는 흐뭇한 마음으로 소녀처럼 기뻐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진작에 이렇게 해 드리지 못한 무능하고 무관심했던 자신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하이 갔다 오면 식탁이랑 밥솥, 싱크대 전부 새로 해 드려야겠다. 그럼 우중충한 주방이 정말로 깔끔해질 거야. 이제 치유마법을 써봐야지.’
강수는 냉장고를 닦고 있는 김순옥 여사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끌었다.
“어머니, 깨끗한데 자꾸 닦으면 뭐 해요. 그것보다 잠깐 이리와 앉으세요. 제가 어깨 좀 안마해 드릴게요.”
“안마? 호호, 그래. 그렇지 않아도 어깨가 가끔 결리는데 한번 해 보렴.”
“어머니, 이 년 전인가 오십견 왔었잖아요. 지금은 좀 어때요? 완전히 좋아진 거예요?”
“치료받고 많이 좋아졌지. 팔 쓰는 게 예전 같진 않아도 그리 불편한 건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예에···.”
강수는 의자에 앉은 어머니의 어깨를 주먹을 쥐고 가볍게 두드리고 난 후, 손가락으로 어깨 근육을 꾹꾹 주무르며 속으로 치유마법을 캐스팅했다.
‘치유!’
강수의 오른손 바닥에 푸르스름한 빛이 모이더니 김옥순 여사의 어깨로 스며들어 갔다.
약 30초 후, 강수는 심장이 욱신! 하는 느낌을 받고 치유마법을 중단했다. 마나가 10% 남았다는 신호였다. 욱신거림은 잠깐이었지만 심장에 쇼크가 오기 직전이었다.
강수는 가만히 심신을 안정시켰다. 심장의 떨림이 잦아들면서 순간적인 충격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강수는 어깨에서 손을 떼고 물었다.
“어머니, 좀 어때요?”
김옥순 여사가 이상한 표정으로 팔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얘, 강수야, 네 손이 약손인가 보다. 어깨 결림이 하나도 없이 너무너무 시원하구나. 대체 뭘 어떻게 한 거니?”
“하하. 안마만 해 드린 것뿐이에요. 뭉친 근육이 풀려서 그런가 봐요.”
“그래? 강수야, 오늘 고생 많았다. 이제 네 방으로 가서 쉬어. 밥 차리면 부를 테니까.”
“예.”
강수는 자신의 방으로 가 책상 앞에 앉았다.
‘휴, 아슬아슬했다. 잘못했으면 쇼크 올 뻔했네. 아직 3서클이 아니라서 마나 소모가 엄청나구나. 한쪽 어깨도 다 치료하지 못하고 마나가 고갈될 정도니···.’
강수는 오른쪽 어깨의 관절을 치료하다 중단한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최소 3서클은 되야 치유마법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겠다. 그래도 어깨는 거의 치료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나저나 고갈된 마나를 완충하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멋모르고 마법을 남발하다 마나 고갈이 되었을 때는 마나를 완충하는데 약 일주일이 걸렸다. 물론 나중에는 꽤 단축되긴 했다.
이때, 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수 왔냐?”
강수는 마루로 나갔다.
“예, 아버지. 약주 한잔하셨군요.”
이전일이 불콰한 얼굴로 마루에 올라왔다.
“그래. 막걸리 좀 마셨지.”
김옥순 여사가 마루로 나와서 잔소리를 했다.
“이이가 왜 빈 속에 술을 마시고 그래요? 마시더라도 저녁은 잡숫고 마셔야지.”
“막걸리가 무슨 술이여? 속이 허전할 때 마시면 든든하고 좋기만 하구만.”
“알았으니까 빨리 씻고 와서 강수가 사 온 것들 구경해요.”
“강수가 사 온 거라니? 뭘 사 왔는데?”
“호호, 냉장고, 김치냉장고, 세탁기, 이만한 티브이, 청소기, 전자레인지. 엄청 사 왔죠?”
“뭐여!”
이전일이 안방이며 화장실, 주방을 둘러보더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인석아, 무슨 돈이 있다고 저걸 다 사온 게여? 한두 푼 든 게 아니잖여?”
“제가 요번에 이천팔백만 원 정도 벌어서 겸사겸사 산 거예요. 그러니까 돈은 조금도 신경 쓰지 마세요.”
김옥순 여사와 이전일이 놀라서 강수를 쳐다보았다.
“뭐여? 이천팔백만 원을 벌어? 그, 설마 그림 팔아서 그렇게 번 거냐?”
“예. 아버지. 그림 4점 팔아서 번 돈이에요.”
“그림 4점 값이 이천팔백만 원?”
별안간 이전일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림값이 굉장하구나? 너도 이제 박수근 화백처럼 유명해지는 것 아녀?”
“예? 하하. 아버지, 전 아직 멀었어요. 그분은 그림 한 점에 수억씩 한단 말이에요.”
“허허허. 그런가? 아무튼 잘했다. 잘했어. 암, 그렇고말고.”
“여보,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밥 먹으면서 얘기해요. 강수야, 얼른 식탁으로 가자.”
“예, 아버지. 식사하세요.”
“그려, 그려.”
*
다음날 새벽 5시.
알람에 잠이 깬 강수는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은 벌써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챙겨놓은 배낭을 멘 강수는 마루로 나갔다.
안방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이전일이 마루로 나왔다.
새벽부터 밭일을 나가시는 아버지를 보니 불현듯 가슴이 쓰려왔다.
몇십 년을 이렇게 여명이 트는 새벽에 일어나 농사를 지은 아버지였다. 어제는 몰랐는데 새벽에 보는, 세월이 할퀴고 간 아버지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이 유난히 강수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가슴에 차오르는 왠지 모를 안타까움을 억누르며 말했다.
“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벌써 밭일 나가시게요?”
“날이 밝았으니 나가봐야지.”
자신 앞가림만 하겠다고 그 흔한 해외여행조차 한번도 보내드리지 못했다.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 한 번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어제 저녁을 먹은 후,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마음껏 쓰시라고 어머니와 아버지께 용돈으로 100만 원씩 드렸다. 하지만 그 돈을 마음껏 쓸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성공해서 더 이상 손에 흙 묻히는 일이 없도록 해드릴게요.’
강수는 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하고 말했다.
“아버지, 연세도 있으신데 이젠 농사일 좀 쉬엄쉬엄하시면 안 돼요?”
“인석아, 내 나이가 몇이나 됐다고 연세는 무슨. 해가 중천에 뜨면 볕이 뜨거워서 일 못 하니까 미리 해두는 거야. 농사는 내가 알아서 지으니 걱정하지 마라. 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
“산에 올라가서 시원한 공기 좀 마시고 운동도 좀 하려고요.”
“무슨 운동을 꼭두새벽부터 하려고 해?”
“꼭두새벽은요. 벌써 날이 밝았는걸요.”
이전일이 자식을 힐끔 쳐다보았다.
“흠흠. 녀석도. 요즘 산에 멧돼지가 돌아다니니까 몸조심해.”
“알겠어요. 저, 아버지!”
“왜?”
“제가 제주도여행권 끊어드릴게요. 어머니하고 제주도 좀 다녀오세요.”
“제주도? 객지 나가면 고생인데 거긴 뭐하러 가?”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잖아요. 어머니와 같이 바닷가에 가서 회도 드시고, 식물원도 구경하고 한라산 백록담도 올라가 보세요. 남들은 해외여행도 다 다니는데 어머니, 아버지는 요 밑에 있는 제주도도 한번 못 가보셨잖아요.”
“우리 고향도 볼 데가 많은데 뭐 보겠다고 비행기 타고 그 먼 델 가라는 거여? 할 일도 많아 갈 시간도 없다.”
강수가 마루를 나서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아버지, 그러지 마시고 제주도여행권 사드릴 테니까 어머니랑 꼭 다녀오세요. 어머니도 평생 일만 하시고 여행이라는 걸 못해 보셨잖아요. 어머니를 위해서 꼭이요.”
이전일이 자신의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아들 강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하나뿐인 자식이 어느 순간 자신보다 훌쩍 커버렸다.
배운 것이 농사일이라 평생 아내와 함께 농사지으며 자식만큼은 자신처럼 살지 않고 제 꿈을 향해 매진하며 후회없이 살기를 바라면서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장성한 아들을 보니 새삼스럽게 시간이 참 빨리 흘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들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객지에서 고생하며 자기 살길도 바쁜 아들에게 뭘 바랄 마음도 없고, 제 몸 하나 잘 건사하기만을 바랐는데 이제 자식이 뭔가를 해주려고 한다. 그것도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이전일은 강수가 잡은 손을 빼 마당으로 나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엄마가 좋다고 하면 그리하마. 운동은 조심히 갔다 와.”
“예, 아버지.”
이전일일 따라 대문 밖으로 나간 강수는 밭으로 걸어가는 아버지의 작게 느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울컥하고 가슴에 올라오는 먹먹한 감정을 참아야 했다.
‘아버지···.’
강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몸을 돌려 도솔산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