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그림 그리는 마법사 - 64회
강수는 오태근의 반응을 보고 회사의 자금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걸그룹 무명 생활 5년이면 아무리 행사를 뛰어도 수익은커녕 빚지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강수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말했다.
“사백은 그림을 판매했을 때 가격입니다. 그림은 세나 씨처럼 사진만 필요한 거겠죠?”
자신이 너무 놀란 표정을 티 냈다는 생각이 든 오태근이 멋쩍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예, 예. 그림을 구입하려는 건 아니고요, 사진만 필요합니다. 저희는 사진만 있어도 홍보하는 데 문제가 없으니까요.”
강수의 입장에서 핑크티티 멤버 4명의 인물화를 굳이 시간 들여 그릴 이유는 없었다. 다만 요즘 들어 임해영, 세나, 주하 등 인물화를 그리면서 나름 재미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한 유화물감은 아크릴물감과는 달리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대신 색감의 깊이와 밀도가 미세하게 낫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김대풍 어르신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으니 이참에 더 많은 유화 작업을 하면서 유화물감을 써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수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자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오태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림은 사진만 찍어서 쓰는 거로 하고 사례금은 이백만 원 정도 가능한데 어떻게 안 될까요?”
오태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강수가 말했다.
“그림은 그리죠. 하지만 사례금은 안 주셔도 됩니다.”
오태근의 표정이 금방 환하게 밝아졌다.
“예? 그래도 될까요?”
“괜찮습니다. 다만 먼저 그려야 하는 초상화가 있어서 시간은 좀 걸릴 겁니다.”
“아, 죄송한데 얼마나 걸릴까요?”
김대풍 어르신의 초상화는 2주 정도 걸릴 것이다. 핑크티티 인물화도 4명을 동시에 그리면 되기 때문에 3주쯤이면 충분할 것이다.
한데 문득, 김대풍 어른의 말이 떠올랐다.
‘가만, 김대풍 어르신은 천천히 그려도 된다고 하셨지. 핑크티티를 먼저 그려도 상관없겠구나.’
“생각해 보니 당장 홍보가 필요한 핑크티티를 먼저 그려도 될 것 같습니다. 시간은 아까 얘기한 대로 약 3주 정도 걸릴 것 같네요. 사진은 가져왔나요?”
“아, 감사합니다. 사진은 여기.”
오태근이 USB를 꺼냈다.
“여기 핑크티티 사진이 꽤 들어있습니다. 일부는 사진작가가 찍은 것도 있긴 한데 혹시 맘에 안 들면 더 보내드리겠습니다.”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이 있으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강수는 USB를 받아 챙겼다.
세나의 사진도 인터넷에서 구했다. USB에 있는 사진이면 될 것이다.
오태근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 되어 너무 기뻤으나 대가 없이 받기만 한 것 같아 괜히 미안했다. 어차피 이백만 원은 지급하려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이 선생님, 얼마 되지는 않지만 이백만 원이라도 받아주시면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계좌번호 알려주면 돈을 부치겠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그림은 다른 사람이 살 수도 있고, 또 어딘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요. 그림은 완성하는 대로 촬영해서 이메일로 보내겠습니다. 메일주소만 문자로 보내세요.”
“예, 예. 고맙습니다. 지금 보내지요.”
오태근이 재빨리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우우웅!
강수의 스마트폰이 진동했고, 강수는 문자를 확인했다.
“됐네요. 이제 일어나시죠?”
“예. 이거 너무 감사해서 제가 나중에 저녁이라도 사겠습니다.”
강수가 빙긋 웃었다.
“저녁은 한 끼 얻어먹어야겠네요.”
오태근과 작별한 강수는 죽산화방으로 차를 몰았다.
죽산화방에서 여분의 붓과 기름통, 팔레트, 핑크티티를 그릴20호 인물 캔버스 4개, 김대풍 어르신을 그릴 40호 인물 캔버스 3개, 이젤 3개 등 필요한 물품을 사서 아파트로 돌아왔다.
강수는 이젤 4개를 작업실에서 주방까지 펼쳐놓고 캔버스를 하나씩 걸었다. 기름통과 팔레트까지 등 각종 화구까지 이젤 옆에 정리해 놓았다. 그림 그릴 준비를 해 놓고 보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우와, 이거 가관이네. 상하이 갔다 오면 빨리 작업실부터 구해야겠다.”
강수는 네 개의 캔버스에 제소부터 칠해놓고 책상에 앉았다.
내일 시골 집에 가서 하루 쉬고 오려 했지만 갑자기 일감이 몰려든 바람에 잠만 자고 올라와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바탕칠하고, 어차피 물감이 말라야 하니까 내일 시골집에 갔다 와야겠다. 가는 김에 가전제품도 전부 사가야지.’
*
다음날.
1시간 일찍 수련을 마치고 하산한 강수는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놓은 수유역 근처 대리점을 찾아갔다.
‘이 근처인데. 아, 저깄구나.’
길 건너편에 있는 LB전자 대리점을 발견한 강수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정장을 입은 20대 후반의 가전 담당 김준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매출을 걱정하고 있었다.
‘휴, 벌써 수요일인데 대박 손님은 안 오고, 매출은 찔끔찔끔 생기네.’
대리점의 판매가 대부분 사장님 이하 부장, 과장의 영업력에 의해 발생하지만, 일반 손님들이 방문해 올려주는 매출도 무시 못 한다. 특히 혼수를 준비하는 고객은 VIP고객인데 혼수가전은 할인도 해 주고, 사은품을 증정하기 때문에 가끔 찾아온다.
“김 주임, 이리 와봐.”
이때, 뒤에서 홍 과장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왜요?”
“오라면 빨리 와.”
김준수는 홍 과장과 윤 대리에게 다가갔다.
홍 과장이 눈으로 길 건너편 횡단보도를 가리켰다.
“저 횡단보도에 서 있는 친구 보이지.”
“예.”
윤 대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과장님, 구매액 맞추기 하자는 거죠?”
“그래. 저 친구가 두리번거리다 우리 상호를 봤거든. 우리 가게에 들어오면 구매액 맞추기다. 오늘 저녁 맥주 사기. 어때?”
가끔 재미 삼아 해 보는 구매액 맞추기에서 성적이 가장 좋은 윤 대리가 능글맞게 웃었다.
“흐흐, 좋죠.”
성적이 가장 낮은 김준수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에 한 번 하는 게임인데 못 한다고 할 수가 없었다.
‘씨앙, 이번엔 기필코 이긴다. 내가 호구도 아니고 맨날 나만 낼 순 없지.’
술값이라고 해 봐야 근처 호프집에 가면 5만 원 내외지만 생각해보니 세 번을 내리 꼴찌 했다.
“신호등 바뀌었다. 빨리 적어라.”
홍 과장이 메모지를 돌리고 금액을 적었는지 메모지를 접어놓았다.
윤 대리도 쓱쓱 금액을 적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메모지를 접었다.
‘얼마를 적지?’
김준수는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배낭을 맨 등산복 차림의 젊은 사내를 보았다.
매장 판매 경력 2년. 옷차림과 표정만 봐도 대충 견적이 나왔다.
‘결혼은 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 같은데···. 노트북을 살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스마트폰도 아닐 테고, 이어폰? 모니터? 청소기? 물건만 구경하는 아이쇼핑족일 수도 있겠는데? 등산복을 입고 있으니 견적이 안 나오네. 한 이십만 원? 으아, 모르겠다. 백만 원이다.’
김준수는 비싼 제품 하나 사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100만 원을 적었다.
술값은 실제 구매액에서 가장 틀리게 예측한 꼴찌가 낸다.
김준수는 출입문으로 다가가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등산복 입은 사내를 맞이했다. 땀냄새를 확 풍기며 들어오는 손님이 고가 제품을 구입할 것 같지는 않았다.
속으로 100만 원 적은 걸 후회했다.
“어서 오십시오.”
김준수는 배낭을 멘 등산복 차림의 후줄근해 보이는 젊은 사내에게 실망했으나 평정심을 잃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표정 관리하며 다가온 판매사원의 속마음을 눈치 챈 강수가 명찰을 슬쩍 보며 씨익 웃었다.
‘판매사원 김준수 씨. 오늘 조금 즐거운 날이 될 겁니다.’
“전자레인지 좀 보려고요.”
“아, 이쪽으로 오시죠.”
김준수는 젊은 손님을 전자레인지가 진열된 곳으로 안내하며 역시 20만 원이 정답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전기오븐이 아닌 전자레인지는 비싸 봐야 15만 원 내외였다.
“직접 쓰실 거죠?”
“아뇨. 부모님이 쓰실 건데요.”
“그럼 어르신들은 복잡한 거 싫어하시니 기능이 단순하고 버튼식인 이 모델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자동요리, 해동이 주기능이고 가격도 십삼만 원대로 저렴하죠.”
“그럼 이 제품으로 하죠.”
‘으잉, 뭐 이렇게 간단하게?’
한 마디 설명으로 제품을 구입하는 고객은 처음이었다.
“계산대에서 기다리시면 제품은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니, 이번엔 청소기 좀 볼까요?”
“아, 청소기요? 이쪽으로 오시죠.”
김준수가 청소기 진열대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청소기는 유선 제품과 무선 제품이 있습니다. 어떤 제품을 원하시는지요?”
“청소기도 제가 쓸 게 아니라 부모님이 쓸 거니까 선이 없는 가벼운 제품이 좋겠는데요.”
“예, 그럼 무선으로 어르신들이 쓰기 편한 가벼운 제품은 20년형 신제품이 무난합니다. 프리미엄 제품이라 가격은 좀 나가는 편이지만 450W 파워의 고성능에 무게는 기존 제품보다 700g을 줄였습니다.”
김준수는 일단 무선 제품 가운데 고가에 속하는 프리미엄 제품을 추천해보았다.
강수는 샘플 제품을 잡고 전원도 켜보고,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말했다.
“가볍고 좋네요. 이걸로 하죠.”
김준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70만 원대 제품이었다. 자신이 예측한 금액에 근접한 것이다.
계산대로 가려는데 젊은 손님이 또 불렀다.
“아, 그리고 세탁기도 하나 필요합니다만.”
‘어? 또?”
이상한 느낌이 찌릿하고 뇌리에 신호를 보내왔다.
‘보통 손님이 아니다!’
김준수는 세탁기까지 산다는 말에 신이 나서 진열대로 안내했다.
김준수의 입꼬리가 귀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흥이 묻어났다.
등산복을 입은 고객의 구매는 세탁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세탁기에 이어 냉장고, 김치냉장고를 추천하는 모델로 차례차례 구입했다. 김준수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65인치 TV까지 혼수에 버금가는 물품을 초단시간에 판매할 수 있었다. 물론 혼수가전 판매처럼 각종 사은품과 할인한 가격으로 판매했다.
이제 남은 단 하나의 절차는 결제다.
결제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총 가격을 확인하고 가격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며 다음에 와서 산다고 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김준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마지막 관문을 위해 입을 열었다.
“손님, 계산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탁이 있는데요.”
“예? 어떤?”
“오늘 중으로 배달해 주시면 고맙겠는데 가능합니까? 부모님 집이 강원도 양구군 팔랑리거든요. 물론 설치도 해주셔야 하고. 그 대신 사은품과 할인은 받지 않겠습니다.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이 내일 받아야겠지만요.”
“아, 오늘 중으로요? 그건 좀 알아봐야 하는데요.”
강원도 양구면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문제는 재고와 배송이었다.
“손님, 잠깐만 기다리시면 재고와 배송 확인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예, 기다리죠.”
카운터로 간 김준수가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전화통화를 하더니 잠시 후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손님, 재고 확인해서 물건 확보했습니다. 설치도 전부 해 드립니다. 주소만 적어주시면 오늘 중으로 필히 배송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계산하죠.”
강수는 계산대로 가서 600만 원이 넘는 돈을 일시불로 계산하고, 주소를 적어주었다.
“배송, 잘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세요.”
“예,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안녕히 가십시오.”
김준수는 밖으로 나가는 강수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예의 바르고 힘을 주는 손님을 일주일에 한 명만 만나도 삶이 좀 더 행복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저 손님은 모든 게 예측불허였어···.’
손톱만큼의 의심과 고민 없이 단시간에, 제품 성능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추천을 믿고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제품 하나가 아니라 혼수에 비견되는 가전제품을 사면서 말이다.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가 없고, 앞일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구나···.’
인생이라는 커다란 흐름에서 보면 일상은 변화 없는 매일이 반복 되는 따분한 삶일지 모른다. 10년 뒤 살아온 자취를 돌아봐도 그저 삶의 공간이 조금 확장되어 있을 뿐이지 않을까?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거나 집을 마련하는 일상적인 일들···.
‘삶은 그저 그렇게 일상 속에서 흘러갈 뿐이었는데···.’
의외로 삶은 한 치 앞조차 내다볼 수가 없어서 살아가는 재미와 가치가 있는 지도 몰랐다.
김준수는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VIP급 매출을 올려준 후줄근한 등산복 차림의 남자는 제 갈 길을 갔는지 이미 모습을 감추었다.
“김 주임, 뭐 하고 있어. 빨리 와.”
김준수는 뒤에서 웃고 있는 홍 과장, 윤 대리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는 내기에 꼭 이기고 싶었지만 갑자기 내기의 결과가 하찮아졌다.
김준수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산대 옆 테이블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