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63회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기다렸습니다.”
김대풍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강수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림값은 얼마인가?”
주하가 궁금한 표정으로 힐끔 강수를 쳐다보았고, 강수는 주저 없이 명쾌하게 그림값을 말했다.
“그림값은 초상화 한 점에 팔백만 원씩 받겠습니다.”
“팔백만 원? 생각보다 적게 부르는군?”
“나중에는 어떻게 변할지 몰라도 현재 호당 20만 원 정도가 제 그림의 공식적인 가치입니다. 팔백이면 적당한 가격입니다.”
“허허. 선암갤러리에서 팔린 가격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하면 자네 그림의 현재 가치는 그렇다 치고, 자네 그림이 미래 평가받을 잠재적 가치는 셈하지 않는가?”
“미래 잠재적 가치는 제 그림을 구입한 사람의 몫이죠. 그 몫을 제가 가로챌 순 없지요.”
김대풍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합당하고 정확한 그림값 같네. 팔백씩 세 점, 이천사백이군. 통장번호를 놓고 가게. 바로 보내주지.”
강수는 계좌번호를 적어 김대풍에게 주었다.
김대풍이 쪽지를 한동제에게 주며 지시를 내렸다.
“이 계좌로 이천사백을 부치게.”
“예, 회장님.”
강수는 김대풍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며 머리를 긁적였다.
‘헐, 하루 수입이 이천팔백 만원이네? 이게 금수저의 위력인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물론 아직 초상화 세 점을 그리지 않았지만 그림 그리는 일이야 강수에게는 밥 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이다. 어렵거나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강수오빠!”
서재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돌연 주하가 앙칼진 목소리로 강수를 불렀다.
“어? 왜?”
“남자가 쪼잔하게 팔백이 뭐야? 할아버지가 얼마나 돈이 많은데. 한 삼천씩은 불렀어야죠.”
무슨 얘기를 하려고 목소리를 높였나 했더니 자기 할아버지한테 그림값을 더 받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또 나왔다.
“하하, 넌 어째 할아버지 편을 안 들고 내 편을 드냐? 아까 얘기했듯이 내 공식적인 가치에 맞게 받아야지. 너무 높게 받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헤헤 난, 오빠 편이라고요. 근데 오빠도 이럴 땐 답답하네. 프리미엄이라는 게 있잖아요. 물건은 하난데 원하는 사람이 여럿이면 가치가 올라가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할아버지가 오빠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는데 스스로 그 가치를 낮출 필요는 없잖아요.”
주하의 비유가 적당하진 않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그런가? 알았다, 알았어.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오면 잠재 가치를 좀 붙여서 받도록 하마. 볼일 다 봤으니 난 이만 돌아가련다.”
주하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스쳐 지났다.
“차도 한잔 안 마시고 가요?”
“아주머니가 줘서 마셨는데?”
‘치, 눈치, 코치라곤 없네. 한 잔 더 마시고 가면 어디 덧나나?’
강수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주하가 입을 삐죽이며 쫄래쫄래 뒤를 따라가며 슬쩍 말을 걸었다.
“저기, 강수오빠.”
“왜?”
“아파트에서 작업하는 게 좁기도 하고, 냄새도 나는 게 불편한 것 같아서요. 작업실 얻을 생각은 없어요?”
강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유화 그리기엔 집이 좀 좁고 기름 냄새가 나지. 그렇지 않아도 상하이 갔다 오면 작업실 알아볼 생각이야. 회화 작업하기엔 아파트가 안 맞네.”
김주하는 속으로 좋아했다.
‘호호, 잘됐다. 당장 오빠한테 전화해봐야지.’
강수는 육중한 대문을 열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주하가 팔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강수오빠, 또 봐요. 전화해도 되죠?”
“그래, 궁금하면 전화해. 커피 한 잔 못 사겠어? 잘 있어라.”
주하는 대문을 닫고 스마트폰을 꺼내 친오빠, 김주익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야.”
[어, 웬일이냐?]
“뭣 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혹시 내 건물 5층에 빈 사무실 있어?”
[글쎄, 잠깐만 기다려. 확인해 볼게.]
잠시 서류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없어. 전부 임대 중이다. 근데 그건 왜 물어?]
“응, 사오십 평 정도가 필요해서. 그럼 임대 종료되는 사무실은?”
[잠깐. 음, 육 개월 후에 임대 끝나는 45평 사무실이 하나 있네.]
“아, 잘 됐다. 그 사무실 미리 나갈 수 있냐고 물어봐.”
[뭐어. 야, 임대 기간이 남았는데 미리 나갈 리가 없잖아.]
“이사비용 넉넉하게 대줄 테니까 한번 나가라고 해봐. 어차피 육 개월 뒤에 나가느니 이사비용 받고 나가는 게 그 사람들에겐 이득일 테니까 나갈지도 모르잖아.”
[그건 그렇지만 손해를 보면서까지 갑자기 사무실이 왜 필요한데? 육 개월만 기다리면 되잖아.]
“내가 필요하다니까. 그것보다 임차인하고 잘 얘기해서 나갈 수 있도록 해봐.”
[참나, 니가 사업할 것도 아니고 사무실이 왜 필요하다는 거냐? 하여튼 알았다. 나갈지 안 나갈지 모르겠다면 알아보고 전화하마.]
“꼭 내보내야 해. 오빠만 믿어. 파이팅.”
[이게 파이팅 한다고 될 일이냐? 끊어라.]
전화를 끊은 주하는 혼자서 헤실헤실 웃었다.
‘헤헤. 강수오빠가 내 건물에서 작업실을 꾸리면 언제든지 놀러 갈 수 있겠지? 건물이 돈암동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강남에 있었으면 아파트하고 너무 멀어서 공짜로 쓰라고 해도 안 썼겠지?’
주하는 괜스레 마음이 풍선처럼 들뜨는 기분을 느끼며 정원 사이로 놓인 청석을 폴짝폴짝 한 칸씩 뛰었다.
‘히히, 해영 언니한테 운동 좀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다. 열심히 운동해서 해영 언니처럼 몸짱 만들어야지.’
*
골목길에 주차해 놓은 차에 올라탄 강수는 시동을 걸다 스마트폰이 진동해 멈추었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근래 들어 어린이 그림책 출간하는 출판사에서 같이 작업하자는 연락이 자주 왔었다. 물론 회화 작업을 한다며 전부 고사했다. 이 전화도 출판사 전화 같았지만 예의상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강수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강수 화가님. 저는 GT엔터테인먼트 핑크티티 매니저 오태근입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통화 괜찮은지요?]
‘GT엔터테인먼트 핑크티티 매니저 오태근? 이 사람이 왜?’
“예, 통화는 괜찮습니다. 한데 무슨 일로 전화를?”
[세나 그림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아, 세나요. 제가 그린 그림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게 아니고요, 선생님이 그린 세나 인물화가 팬카페와 SNS에서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리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댓글을 읽다 문득, 다른 멤버들도 그림을 그려서 캐릭터로 활용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전화로 얘기하기보다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는지요?]
별 내용이 아니라 그림 그려달라는 의뢰였다. 따로 시간을 내는 것보다 밖으로 나온 지금이 괜찮았다.
“마침 한남동에서 볼 일 끝내고 귀가하려는 참입니다. 저는 지금 시간 됩니다만.”
[아, 한남동이면 무척 가까운 곳에 계시네요. 제가 당장 한남동으로 달려가죠. 선생님이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문자 주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카페에서 문자 드리죠.”
강수는 근처에 있는 카페 ‘예띠’에 들어가 오태근에게 문자를 주었다. 카페에서 추천하는 '오늘의 커피' 인도산 카피로얄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박하느낌의 알싸한 커피 향과 쌉싸름한 맛이 입안에 꽉 차면서 감돌았다.
‘이 커피도 맛이 괜찮은데?’
노민석에게 원두를 알아보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집에 가면 원두를 주문해야겠구나. 가성비 좋은 원두를 골라주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어쨌든 민석 형님 카페가 잘 돼서 성공하면 좋겠는데. 민석 형님이 어련히 잘하겠지만. 참, 팬카페에 올린 그림에 댓글이 많이 달렸다고 했지?’
강수는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에 접속해 핑크티티 팬카페에 들어갔다.
그림을 클릭하니 스피커에서 리드미컬하고 경쾌한 비트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 음악을 링크했네? 이게 무슨 노래지?’
강수는 처음 들어보지만 핑크티티의 노래 같았다. 소리를 작게 줄였다.
‘와, 근데 무슨 댓글이 이렇게 많아?’
며칠 전에는 댓글이 대여섯 개에 불과했는데 그사이 댓글이 엄청나게 달려 있었다.
-유심花: 그림을 보고 있으니까 정말 기분이 좋아지네. 노래까지 들으니까 찰떡이야. 구라가 아녔어.
-세나홀릭: 아, 이 그림 뭐냐? 아재 심쿵 한다!
-아람이: 캬아악! 세나언니 멋있쩡! 짱!
-이쮸: 그림 보고 있으니 졸라 기분 나빠. 짜증 제대로.
┗마튜: 알만 하다. 니 얼굴이 짜증이지?
┗카리수마: 키키, 오크는 찌그러져 있을래? 나대봐야 욕만 처 얻어먹거든.
-코만됴: 적당히 하지? 얼굴로 승부하냐? 얼굴처럼 노래도 잘 좀 불러봐라. 벌써 떴겠다.
┗마튜: 노래는 그럭저럭 부르는데 곡들이 졸망이거든. 그래도 ‘웃어봐’는 들을 만 하잖냐?
-쌈디: 이거 그린 새끼 마약 빨고 그린 거 아님? 뇨자도 마약 빤 거 같은 표정이네
┗jjang서린: 너 약쟁이지?
┗마튜: 크크, 약은 지가 빨아놓고 그림이 이상하대.
-틴바라기: 무슨 댓글이 그림 가지고 난리야? 그림이 뭐 어쨌다고?
-루미양: 세나 미소가 참 보기 좋다! 제대로 그렸네.
-헤오니: 영자 님, 이강수 화가 연락처 알려줘요. 나도 그려달라 하게.
┗은꽁: 추가 1인.
우우웅!
한참 댓글을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오태근이 도착한 것이다.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저 여기 있습니다.”
강수는 전화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흔들었다.
2층 입구에서 20대 후반의 사내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강수가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사내는 청바지에 컬러 있는 티를 입었다.
캐주얼한 복장을 한 오태근은 175cm 정도 되는 신장에 살이 좀 있었다. 약간 처진 눈, 뭉툭한 코, 큰 입에 얼굴선이 둥글둥글해서 개그맨 하면 어울릴 것 같은 특색 있는 외모의 사내였다.
“핑크티티 매니저 오태근입니다.”
“화가 이강수입니다.”
오태근이 악수를 청하며 속으로 안도했다.
‘생각보다 엄청 젊네? 역시 신인화가였어. 다행이다.’
오태근은 화가의 그림값이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림 한 점에 수백, 수천만 원씩이나 하는 화가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강수라는 화가가 무명에 가까운 화가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전화했다. 무명화가라면 한 명당 50만 원 정도에 그려주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회사가 당장 내일 엎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판에 200만 원도 적지 않은 돈이었다.
사장은 회사 유지하는데 버는 돈 전부 꼴아 박고 있어서 사례금 200만 원도 자신이 마련할 심산이었다. 어려운 처지에 200만 원을 투자하려는 이유는 세나의 그림이 팬카페에서 이상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200만 원이나 투자한 그림으로 홍보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그래서 해보려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어차피 오래 못 간다.
그림으로 홍보하겠다는 계획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절박함에 쫓겨 바둥대는 헛짓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어쨌든 좋았다. 3개월 전, 마지막이라고 발표한 싱글 ‘웃어봐’ 마저도 하위권에 잠깐 올랐다가 순위권 밖으로 밀렸다. 사장님이 회사를 정리하기 전에 일말의 실마리라도 보이면 무엇이든 시도해보고 싶었다.
“세나 초상화 보고 그림이 너무 좋아서 많이 놀랐는데 선생님이 너무 젊어서 또 놀랐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세나를 정말 잘 그리셨더군요. 댓글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저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심지어 원화를 보고 싶다. 어디로 가면 볼 수 있냐. 알려달라는 댓글도 있을 정도입니다.”
“제 그림이 이런 관심을 끌 줄은 몰랐네요.”
“사실 지금까지 카페에 많은 사진을 올렸지만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거든요. 희한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댓글을 읽다가 문득 핑크티티 멤버를 전부 세나처럼 그려서 홍보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아, 그렇습니까?”
오태근이 강수에게 정중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선생님,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핑크티티 멤버 전부 세나처럼 그려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뭔가 이슈가 되는 것 같을 때 홍보해 보려고요. 물론 사례도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얘기하면서 오태근이 왜 자신을 만나자고 했는지 강수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일이야 제 일이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아, 그럼 빨리 홍보할 수 있도록 가능하면 빨리 그려주면 좋겠습니다. 네 명을 다 그리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세나를 그릴 때처럼 단계적으로 인물의 분위기를 살리면서 그리려면 최소 3주는 필요하다.
“빨리 그려도 3주는 걸립니다. 그리고··· 그림값은 20호 크기로 그린다고 치면 한 명당 사백만 원입니다.”
그림값을 들은 오태근의 처진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사, 사백이요? 그것도 한 명이요!”
‘사사 십육. 천육백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