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62회
포장을 조심스럽게 제거한 한동제가 캔버스를 벽에 걸었다.
김대풍이 주하의 초상화 앞으로 다가갔다.
강수가 그린 유화를 살펴본 김대풍은 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배경은 검은색 바탕이다.
아니, 검은색 바탕에 파란색이 은은하게 흘렀다. 검은색은 다른 색을 허용하지 않는다. 검은색은 모든 색을 빨아들여 자신 안에 가둬버린다.
하지만 초상화의 바탕은 검은색이었으나 푸른색이 은은하게 자신의 색깔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 획 한 획 정성을 들인 단색조 화풍의 배경은 차분하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그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푸른 색 바탕 위에 주하가 있었다.
뽀얗고 옥 같은 피부는 광채를 품었고 생기가 흘렀으며, 선명하고 입체적인 이목구비는 실물같이 섬세했다. 당장 미소 띤 입술이 방긋하고 벌어져 할아버지하고 말을 걸어올 것만 같았다.
초상화는 물감이 만들어낸 형상에 불과하건만 주하의 얼굴에서 순수하고, 순결한 이미지가 아침 햇살처럼 따스하게 빛났다. 또한 목에 걸린 에메랄드의 초록색 빛깔은 너무나 투명하고 선명해서 영혼마저 초록빛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아, 이건 보통 그림이 아닌데? 내 초상화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생명력, 생동감이 느껴져. 저 에메랄드 색은 말할 수 없이 신비하고 아름답군.’
김대풍이 깊은숨을 내쉬고 한동제를 불렀다.
“휴우, 한 실장. 이 친구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않았다는 거 맞아?”
“예, 맞습니다. 졸업 후 일러스트를 주로 했고, ‘한국청년화가 12인전’ 외엔 지방문화제 같은 형식적인 단체전에 참여한 경력이 전부입니다. 화가 경력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리지? 아니면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초상화 속 주하가 말을 하는 듯한 착각이 드니 말일세.”
“···.”
한동제도 초상화를 자세히 보았으나 김 회장이 말한 그런 느낌까지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화폭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넘치는 생동감과 순결한 얼굴은 눈길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었다.
까칠까칠하게 수염이 돋아난 턱을 쓰다듬으며 김대풍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음, 나를 어떻게 그릴지 내 초상화도 부탁해야겠구나.’
*
서재에서 나온 주하는 주방으로 가서 야채를 다듬고 있는 가정부 홍 씨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강수 씨가 나오면 2층에 올라가 있으라고 하세요.”
“예, 아가씨.”
주하는 밖으로 나가 본채 뒤에 있는 2층짜리 건물로 갔다.
이 건물 1층은 약 30평으로 나무 바닥에 헬스기구와 매트 등을 설치해 놓은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2층은 가정부 두 아주머니와 집안 잡일과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 등 고용인 3명이 묵는 방이 있다. 홍씨 아주머니와 정원사는 부부였다.
주하는 1층 헬스장으로 들어갔다.
퍽! 퍽! 퍽!
둔탁한 소음이 조용한 실내에서 울려 퍼졌다.
운동복을 입은 임해영이 발차기로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날카롭게 호선을 그리며 공간을 가른 임해영의 발차기에 샌드백이 출렁였다.
임해영은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주하의 스케줄에 맞춰 움직였다. 출근해서 주하의 스케줄이 없는 시간은 대부분 체력단련을 하는 데 썼다.
“해영 언니! 잠깐만.”
주하의 부름에 임해영이 발차기를 멈추고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잠깐 얘기 좀 해요.”
“그러죠.”
주하와 임해영은 출입문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임해영이 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강수오빠가 초상화를 가져와서 그림값을 줘야 하거든요.”
“그래요? 그림값이 사백만 원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네. 근데 사백은 좀 적은 것 같아서 천만 원을 주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임해영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처, 천만 원이요!”
“그림이 너무 맘에 들어요. 그 정도는 주고 싶은데 내 맘대로 천만 원을 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요.”
임해영이 고민 같지 않은 고민으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에 사는 공주 같은 아가씨였다.
한때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너무 쉽게 차지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시기심이 일기도 했고 질투도 했었다. 경호를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도 적지 않게 했지만, 재력의 격차가 너무 크다 보니까 나중에는 시기나 질투조차 무의미해졌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고 일도 재미있어졌다. 사실 김주하를 경호하는 일은 장단점이 뚜렷했다. 공주 같은 아가씨를 경호하는 일에 적성이 맞지 않으면 몇 달 하지 못하고 때려치우고 만다.
하지만 조직과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는 것을 싫어하는 자신의 성격상 김주하의 경호는 내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제격이었다.
‘차 안에서 넋이 나간 것 같더니 이강수를 좋아하나? 하지만 그림값 천만 원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주하 아가씨.”
“네.”
“내 생각엔 천만 원을 준다고 넙죽 받는 남자는 줏대가 없는 것 같아서 별로 거든요. 반대로 자존심 때문에 강수 씨가 육백만 원을 돌려주면 천만 원을 준 아가씨 입장이나 육백만 원을 돌려주는 강수 씨 입장이나 서로 서먹하고 불편해질 것 같은데요?”
주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 언니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러면 원래 얘기했던 사백만 원을 줘야겠군요.”
“그게 정답 같아요.”
“음, 또 한 가지 있어요. 강수오빠가 아파트에서 작업하잖아요. 그 좁은 곳에서 생활하고 작업하는 게 안됐더라구요. 그래서 내 건물 5층을 비워서 작업실로 쓰라고 하고 싶은데 이건 어때요?”
“예? 5층을 전부 다요?”
“화가 아틀리에는 원래 넓어야 하는 거 아녜요?”
‘이건··· 주하가 이강수에게 완전히 빠졌구나! 이강수가 그렇게까지 맘에 들었나?’
임해영이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건 괜찮겠지만 무상으로 쓰라고 하면 강수 씨 입장에서 부담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또 5층이 120평이나 되는데 그 넓은 공간을 다 쓰라고 하는 건 아가씨 의도가 너무 뻔히 드러나지 않겠어요? 더구나 그 공간은 현재 임대하고 있지 않나요?”
“히히, 맞는 말이네. 그러면 어떻게 해요?”
“글쎄요? 무슨 방법이 좋을까요? 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임해영이 묘안을 떠올린 듯 눈빛을 반짝였다.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요.”
“뭔데요?”
“일단 아가씨 건물에서 작업실 하기에 적당한 40평이나 50평 정도 되는 사무실을 하나 비워둬야겠죠? 그리고 강수 씨에게 지나가는 투로 넌지시 제안하는 거죠. 임대되지 않은 빈 사무실이 있는데 공실로 두느니 저렴하게 작업실로 써보지 않겠냐고요. 어떨까요?”
김주하가 손바닥을 치며 좋아했다.
“호호. 그 방법이 좋겠다. 오빠한테 연락해서 적당한 사무실 하나 비우라고 해야지. 고마워요. 고민거리가 전부 해결됐네. 난 가볼게요.”
“네.”
김주하가 밖으로 나가고 마저 운동하러 가는데 스마트폰에서 전주가 흘러나왔다.
경쾌한 스윙 리듬과 리드미컬한 멜로디의 곡이다.
이 노래는 핑크티티의 싱글 ‘웃어봐’다. 발표한 지는 3개월이 지났지만 발표했을 때만 몇 번 방송을 타고 조용히 묻혔다.
“세나구나. 잘 지냈어?”
[응, 언니, 언니. 이강수라는 화가 누구야?]
‘얜 또 왜 이강수를 찾아?’
“그냥 안면 있는 사람인데 왜?”
[내 그림만 올리고 팬카페에 안 들어갔구나. 언니가 카페하고 세이터에 보내준 내 얼굴 그림말이야.]
“그런데?”
[언니, 카페에 들어가봐. 내 그림에 댓글 수백 개가 달렸어. 세이터에도 물론이고. 그것뿐만이 아냐. 댓글을 보면 힐링을 주는 그림이라는 글이 많아.]
“힐링을 주는 그림?”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나. 그리고 운영자가 그림에 우리 노래 웃어봐를 링크했거든. 그랬더니 노래하고 그림이 잘 어울린다는 댓글도 많아.]
“오, 그래? 알았다. 카페 들어가 볼게.”
[아참, 나좀 봐. 여태 딴 얘기만 했네. 언니, 이강수라는 사람 연락처 알아?]
“그건 왜?”
[태근오빠가 그림에 달린 댓글을 읽어보고 희한한 일이라면서 이강수 화가를 만나고 싶대. 이 기회에 멤버 전부 그림으로 그려서 홍보하는데 써보겠다나?]
“핑크티티 멤버 전부를? 알았어. 전화 끊어. 문자로 보내줄게.”
세나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임해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팬카페에 올린 세나의 얼굴을 그린 그림 한 점이 이런 반향을 일으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세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곤 했지. 세나가 귀여운 사촌 동생이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댓글 수백 개가 달릴 만큼 관심을 끌 정도였나?’
그림 올린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댓글 수백 개가 달린 건 놀라운 일이었다.
*
헬스장에서 나온 주하는 자신의 방이 있는 본채 2층으로 올라갔다. 강수가 테라스 파라솔 아래 있는 것을 본 주하는 괜히 미소를 지으며 자기 방에 들어갔다. 화장대 위에 있는 봉투에서 수표 6장을 꺼낸 후 테라스로 나갔다.
“강수오빠, 뭐 해요?”
“주하? 경치가 좋아서 구경하고 있었지. 넌 어디 갔다 왔어?”
“해영 언니한테요. 잠깐 할 얘기가 있었어요.”
“그래? 테라스가 무지 넓다. 배드민턴을 쳐도 되겠는데.”
“30평쯤 될걸요? 요 아래가 할아버지가 쓰는 공간이에요. 할아버지가 조용한 걸 원해서 이 위는 아예 전부 테라스로 만들었대요.”
“하하, 그렇구나.”
“참, 오빠, 이거.”
주하가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그림값이요.”
강수가 봉투를 받으며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어, 제때 챙겨주네. 고맙다.”
강수는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백만 원짜리 수표 4장이었다.
“정확하게 사백이네. 하하. 목돈 생겼다. 잘 쓸게.”
“근데 사백이면 좀 적지 않아요? 오빠 그림 정도면 더 받아도 될 것 같은데. 할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은 한 점에 수천만 원이거든요. 비싼 건 억대고요.”
“아, 서재에서 김환기 님의 작품 봤는데 할아버지가 미술품 컬렉터였구나. 김환기 님은 한국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인데 당연히 비싸지. 나 같은 피라미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어. 그리고 그림값 사백이면 적지도 많지도 않은 적정 수준이야. 7월에 선암갤러리에서 개최한 단체전에 참가했을 때 내 작품이 사백에 팔렸거든.”
“아, 그랬구나. 난 오빠 그림이 엄청 좋더라고요. 사백만 원은 무지 싸게 느껴지는 거 있죠?”
“하하. 그런 얘길 들으니 기분 좋은데?”
이때, 뒤에서 한 실장이 다가오며 인기척을 냈다.
“허허, 주하 아가씨. 강수 씨와 여기 있었군요.”
“한 실장님? 왜요?”
“회장님이 이강수 씨를 잠깐 보자고 하시네요.”
“어? 무슨 일로 그러시지? 강수오빠, 내려가 봐요.”
“그래.”
세 사람은 1층으로 내려가 서재로 들어갔다.
손녀의 초상화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김대풍이 서재로 들어오는 세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 부르셨어요?”
“오냐. 이보게, 이 작가.”
“예. 어르신.”
“자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만. 그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자네가 그린 주하 초상화가 참 맘에 드네.”
“감사합니다.”
“어쨌든 내가 하려는 얘기는 다름이 아니고, 내 초상화도 몇 점 그려줄 수 있는가?”
“아, 초상화라면 지금 모습 말인가요?”
김대풍이 책상에 놓여있는 앨범을 집어 강수에게 주었다.
“내 젊었을 때 사진일세.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서 세 점만 그려주면 고맙겠군. 어떤가?”
앨범에는 색이 바래고 낡은 옛날 사진부터 선명하고 깨끗한 비교적 최근의 사진까지 다양했다.
앨범을 살펴보던 강수가 대답했다.
“예, 물론 그려드릴 수 있습니다. 단지 제가 하는 일이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나야 남아도는 게 시간이야. 시간은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그려도 돼.”
“알겠습니다. 사진은 제가 임의로 고르는 것보다 어르신이 골라주시면 작업하는데 더 수월할 것 같은데요. 사진은 어르신이 골라주시죠?”
“그러지.”
김대풍이 앨범을 뒤적이며 사진 세 개를 골라주었다.
하나는 20대의 젊은 모습이고, 하나는 40대로 보이는 중후한 인상의 얼굴이고, 마지막 사진은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노년의 얼굴이었다. 강수는 세 개의 사진을 머릿속에 기억시켰다.
“어르신, 몇 호 사이즈를 원하시는지요?”
“40호는 되어야겠지?”
“네. 40호 내외 규격으로 그리겠습니다.”
“할아버지, 제 초상화는 가져가도 돼요?”
김대풍이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여기에 두거라. 할애비가 좀 더 보고 나중에 주마.”
“힝, 알았어요. 그럼 우린 나갈게요.”
“오냐. 일 보거라.”
문득, 김대풍이 밖으로 나가려는 강수를 불렀다.
“이 작가. 잠깐만 보게.”
“예?”
강수가 뒤돌아 김대풍을 보았다.
“내가 깜박했는데 그림값은 왜 물어보지 않지?”
강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