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61회
주차장으로 내려온 강수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한 박윤재 관장에게 미안하지만, 강수는 장영봉 선배와 함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장영봉 선배는 빈약한 포트폴리오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작품이었던 ‘강가’를 인정하고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과감하게 참여시켜주었다. 그의 결정으로 인해 최이석 평론가도 자신의 작품을 논평해주었고, 박해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장영봉 선배의 결정은 일상적인 업무의 연장선에서 내린 별 것 아닌 선택일 수도 있었다.
강수는 그때 그랬었지 하고 간단하게 넘어갈 수도 있는 그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장영봉 선배의 그 선택이 자신과 장영봉, 둘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 가치 있는 선택이었음을.
만약 자아 각성 전에 갤러리윤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더라면 장영봉과 한 첫 개인전의 약속을 지킨 후에는 갤러리윤과 함께 작업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강수의 세계관과 의식세계가 변하고 있었다. 강수가 고민하지 않고 갤러리윤의 제안을 거절한 데는 이런 변화된 의식세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강수의 내적, 정신적 변화는 성격 변화와 함께 강수의 삶과 연관된 외부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선암갤러리가 갤러리윤의 명성과 규모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지만 내가 몸담기에 부족한 곳도 아니야. 조금 천천히 장 선배와 함께 달려도 되지 않겠어?’
입가에 자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강수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마나회로 수련은 중독과도 같아서 이제는 하루도 거를 수 없는 강수의 일상이 되었다.
알람에 눈을 뜬 강수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나서 일어났다.
어느새 가을이라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었고, 기온 차가 컸다.
푸른빛을 잃고 있는 나뭇잎은 곧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나무와 산에서 살아가는 것들은 성장을 멈추고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생명을 비축할 것이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삼사일 마나회로 수련만 하면 어떨까? 몸이 견뎌주려나?’
2서클 마나하트를 완성한 후에는 체감할 정도로 마나 축적 속도가 빨라졌다. 기분 같아서는 며칠 동안 꼼짝 않고 마나회로 수련만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며칠 마나회로 수련만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수련하다 육체적인 무리가 오면 어차피 수련을 중단하면 되고, 관절이나 몸에 손상이 생기면 치유마법으로 자가치료하면 된다.
‘지금은 좀 바쁘니까 상하이 갔다 와서 시도해봐야겠다.’
결국, 강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육체적인 한계상황까지 마나회로 수련을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오늘도 마술 공연을 해보자.’
어제 그제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마술 공연 연습이다. 배낭에서 포커 카드를 꺼낸 강수는 연출해 놓은 마술 공연에 맞춰서 마법을 캐스팅했다.
“블링크부터···.”
우아한 팔 동작으로 품속에서 포커 카드를 꺼낸 강수는 카드를 이동하는 블링크마법부터 두께가 가는 나무를 통과하는 투과마법까지 마술 공연에 맞춰서 마법 캐스팅을 끝냈다.
마술 공연을 연기하는 데는 약 8분 정도 걸렸다.
몇 번 연습해보니 연기에 맞춰 마법을 자연스럽게 캐스팅할 수 있었다. 마술 트릭을 쓰지 않고 연기에 맞춰 마법을 캐스팅하면 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없었다.
마술 도구만 준비하면 이젠 실제로 마술 공연을 해도 될 것만 같았다.
강수는 하산하며 할 일을 점검했다.
‘오늘은 주하한테 그림을 가져다줘야지. 그리고 내일은 시골집에 내려가자. 어머니, 아버지한테 지압을 해 드리면서 치유마법을 써봐야지.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네. 그런 다음 토요일에 친구들에게 치맥 쏘고, 다음 주엔 상하이에 갔다 오면 되나?’
머릿속에 상하이 갈 때까지의 일정이 대충 그려졌다.
*
한남동 주택가 골목 담벼락에 차를 주차한 강수는 포장한 캔버스를 꺼내고 문을 닫았다. 김주하가 찍어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찾아온 것이다.
‘저 집인데?’
고개를 들어 단독주택을 확인한 강수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허, 영화에서나 나오는 저택이구나.’
웬만한 사람은 웅장한 위용에 주눅 들만한 철문 앞에 서서 인터폰을 눌렀다.
[누구시죠?]
“김주하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무슨 일로 주하 아가씨를 찾아온 거죠?]
“김주하 씨의 초상화를 가져왔습니다.”
[아, 이강수 화가님이군요?]
“맞습니다.”
찌잉! 철컥!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강수는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기잉, 찰칵!
기계음이 나며 대문이 저절로 잠겼다.
정원을 둘러본 강수는 절로 탄성을 질렀다.
‘우와, 여긴 별천지인데?’
수백 평은 됨직한 정원은 꽃과 조경수, 잔디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고, 잘 가꾸어진 작은 공원을 연상케 했다. 청석이 깔린 길의 끝에 3층짜리 주택이 있었다. 2층에 넓은 테라스가 있는 3층 주택은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것이 분명한 예술 작품 같은 건축물이었다.
‘있는 사람들은 이런 집에서 사는구나.’
강수는 대문에서 집까지 깔린 청석을 지나 주택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이 열리고 분홍 원피스를 입은 주하가 아름다운 머릿결을 찰랑거리며 나왔다.
“어서 와요, 오빠.”
“집이 무슨 영화에서 나오는 집처럼 예술 작품 같다?”
“특이하죠? 이 집은 예술적인 건축물을 짓는다는 홍순일이란 건축가가 지었어요. 건축 컨셉이 진취적 기상과 도전이라나요? 후후, 우습죠? 들어가요.”
“그런 거였어?”
실내는 거실만 30평은 될 것 같이 넓었고 바닥은 원목이 깔렸다. 바닥마감재가 원목인 것만 보더라도 조명, 벽 실내 인테리어는 최고급 자재로 마감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성함은 김대풍이에요. 지금 서재에 계세요. 먼저 할아버지한테 인사하러 가요.”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서재로 간 주하가 노크를 했다.
“할아버지, 주하예요.”
“들어오너라.”
강수는 주하의 뒤를 따라 서재로 들어섰다.
서재는 생각보다 넓었고, 전면은 온통 유리창이었는데 꽃과 나무, 바위로 꾸며진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대문이 안 보이는 것을 보면 창밖은 측면의 정원일 것이다.
실내로 들어간 강수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70대의 김대풍과 책상 옆에 서 있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김대풍의 몸에서 위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강수는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젊었을 때는 그 기세가 사람을 압도했을 것이다.
김주하가 김대풍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강수 씨가 제 그림 가져왔어요. 강수 씨, 제 할아버지세요. 인사하세요.”
강수는 캔버스를 문 옆에 세워 두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르신, 처음 뵙겠습니다. 이강수입니다.”
“그리고 우리 집 모든 걸 관리하시는 집사이신 한 실장님.”
“안녕하세요.”
“반갑네. 강수군. 한동제라고 하네.”
김대풍은 말없이 묵묵히 날카로운 눈초리로 강수의 전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허리를 세운 강수는 담담한 시선으로 김대풍을 마주 바라보았다.
주름이 파인 피부는 윤기가 없어 푸석했다. 눈꺼풀은 처지고 흰자위는 색이 바래 열정이 흩어져버린 노안이었으나 그 눈빛만은 폭풍우에도 요동하지 않을 것처럼 고요하고 깊었다.
세월의 흐름에 육신은 노쇠해졌지만 심지는 곧게 서 있는 것이다.
김대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 자네가 이강수군. 고향은 어딘가?”
“강원도 양구입니다.”
“양구? 양구라면 박수근 화백의 고향 아닌가?”
“예, 맞습니다.”
“양구에 박수근 화백 기념 미술관도 있지?”
“박수근미술관, 박수근파빌리온관 두 개가 있습니다. 학창시절 틈만 나면 박수근미술관에 찾아가서 화가의 꿈을 키우곤 했었죠.”
“훌륭한 선배 화가를 가까이에 두고 있었군. 그 캔버스는 이번에 그린 주하의 초상화겠지?”
“예. 그렇습니다.”
“경포대에서 자네가 그렸다던 연필 초상화를 봤네. 아주 독특하고 인상적이었지. 주하의 연필 초상화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연필로 이렇게 감정을 풍부하게 그려낼 정도면 유화는 얼마나 잘 그릴까? 그래서 주하에게 유화를 한 점 부탁했지. 어디 그림을 이리 줘보게.”
강수가 재빨리 캔버스를 집어 한 실장에게 건네주었다.
“늙은이하고 있어 봐야 재미없겠지? 나는 그림을 감상할 테니 젊은 사람들끼리 차라도 한잔하게나.”
“네, 할아버지. 편히 쉬세요. 강수오빠, 우린 나가요.”
강수가 주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먼저 나가 있어. 초상화 좀 보고 금방 따라 나갈게.”
“예? 알았어요.”
주하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김대풍이 의아한 눈빛으로 강수를 바라보았다.
“내게 할 말이 있는가?”
“예. 어르신.”
김대풍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할 말이 뭐지? 말해 보게.”
“저, 어르신. 외람된 말이지만 혹시 최근에 병을 앓으신 적 있었습니까?”
“뭐?”
예상을 깨는 말에 김대풍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해졌다.
“자네 눈에는 내가 환자 같아 보이나?”
“그렇진 않습니다. 다만 안색이 어두워 병색이 깃든 것 같고 기력이 쇠잔해 보여서요.”
“안색을 보고 건강 상태를 알아? 자네가 관상을 볼 줄 아는가?”
김대풍의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과 위엄이 서린 목소리에도 강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또렷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화가여서 그런지 오감이 조금 예민해 남들보다 사물이나 사람의 기색을 더 잘 볼 뿐입니다.”
뒷짐을 지고 강수를 지긋이 노려보던 김대풍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병을 앓긴 했지만 그건 일 년 전일세. 그 뒤로 아픈 데는 없었어. 단지 요즘 들어 괜히 식은땀이 가끔 나고 순간적으로 기력이 없을 때가 있긴 했지. 내 상태를 진단했으니 내가 뭘 해야 할지도 알겠지? 자네가 보기에 내가 뭘 하면 좋겠는가?”
강수가 고개를 저었다.
“의사도 아닌데 제가 뭘 알겠습니까? 건강에 유의하시겠지만 걷기나 달리기 같은 기본적인 운동을 꾸준히 하시고, 특히 정양에 힘을 쓰시면 좋지 않을까요?”
매서운 눈초리로 강수를 노려보고 있던 김대풍이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정양에 힘쓰라고? 어쨌든 건강까지 신경 써주니 고맙군.”
사실 강수는 김대풍이 건장한 풍채에 비교해 얼굴은 윤기가 죽고, 눈 둔덕이 흐리고 기력이 쇠잔해 보여 자신도 모르게 이센셜아이를 펼쳤다.
2서클 마나하트가 완성된 지금 2서클 마법은 자유롭게 캐스팅할 수가 있었다.
1943년 생, 현명, 독선적, 이기적 등 대략의 정보 가운데 ‘원기 손상’이라는 항목을 발견했다.
원기 손상은 과도한 밤일로 인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밤일은 자제하라는 뜻에서 정양에 힘쓰고 운동을 하라고 권한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눈에서 힘을 뺀 김대풍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강수가 밖으로 나가자 김대풍이 한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한 실장, 자네가 보기에 이강수라는 친구 어떤가?”
캔버스를 잡고 있던 한동제가 잠시 미간을 좁히더니 말했다.
“제가 보기엔 이강수의 태도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신감과 당당함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보면 건방지고 달리 보면 패기가 있는 것도 같습니다. 한데 그의 처지와 평범한 집안 내력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 같습니다. 그리고 마치 회장님의 젊었을 때 저돌적인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허허. 내 젊었을 때 모습? 역시 뭔가 특이하고 재미있는 친구지? 게다가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기개가 굳건하고 성격이 호방해. 이상하지만 그림 그리는 친구 같지가 않아.”
“그러게 말입니다. 정치나 사업을 하면 제격 같네요.”
“정치나 사업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 한데 감히 내 앞에서 밤일을 삼가라는 듯이 정양에 힘쓰라고 하다니. 엉뚱한 놈일세?”
한동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옳은 말을 하긴 했지요.”
김대풍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자네까지 그러긴가? 그나저나 운동도 하고 정양에 힘써야겠군. 아, 포장을 벗겨보게.”
“예,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