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60화 (60/197)

# 60

그림 그리는 마법사 - 60회

우우웅! 우우웅!

개인전 작품을 구상하며 4절 스케치북에 데생하던 강수는 스마트폰이 진동하자 발신자를 확인했다.

하상덕 감독이었다.

[이 작가님? 영화감독 하상덕입니다.]

“예, 하 감독님. 안녕하세요?

[네. 전 요즘 죽돌이 때문에 기운이 펄펄 납니다.]

“죽돌이 때문에요?”

[하하. 그렇습니다. 죽돌이 제작비 모금이 끝났습니다. 오늘까지 총 12억을 유치해서 며칠 내로 촬영에 돌입합니다. 이메일로 투자자별 투자금 현황 자료와 영화제작계획서 등 관련 서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제작비 모금이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하셨네요.”

[하하. 아닙니다. 시나리오가 좋은 평가를 받아서 이번엔 정말 쉽게 제작비를 모금했습니다. 이게 다 원작자인 이 작가님 덕분이죠. 꼭 흥행해서 수익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제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주시니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그럼 다음에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예,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강수는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참, 언제 개봉 예정인지 안 물어봤네? 뭐, 영화 한 편 제작하는데 보통 6, 7개월쯤 걸린다고 했으니까 이르면 내년 3월이나 4월에 개봉하겠구나. 영화를 종합예술이라고 하는데 7개월이나 공들여서 만들려면 쉬운 일이 아니겠어.’

스케치북에 연필을 가져가던 강수의 팔이 멈칫했다.

‘가만? 몬스터를 막아라도 내년 4월쯤 개봉한다고 했는데?’

어쩌면 두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할지도 몰랐다.

‘하, 기왕이면 안 겹쳤으면 좋겠는데···. 아니, 장르가 다르니까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강수는 잡념을 털고 스케치북에 시선을 주었다.

개인전의 주제는 수많은 도시의 하나, 서울에서 살아온 자신의 삶이다.

길지는 않지만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약 7년의 삶이었지만 그 삶 속에서 성공과 희망을 꿈꾸던 날도 있었고, 좁고, 눅눅한 자취방에서 좌절감에 쓸쓸함과 고독을 곱씹었던 날도 있었다. 자신이 살아온 서울에서의 삶,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의 산물이 될 것이다.

*

갤러리윤 관장 박윤재 사무실.

박윤재는 아트페어 상하이 전시 관련 보고를 받고 있었다. 아트페어 상하이 개막일이 어느새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서류를 살펴보던 박윤재가 푸른색 정장을 한 김이라를 바라보았다.

“출품작을 완료해서 보내온 작가가 다섯 명이군. 마감 시한이 낼모레인데 두 작가는 어떻게 된 거야?”

“네. 서일영, 황유강 두 작가는 7일까지 무조건 제출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 정 안되면 완성작만이라도 제출하라고 해. 그리고 보니 내가 이강수의 작품을 아직 보지 못했군.”

박윤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강수 작품을 보러 내려가 보자.”

“예, 관장님.”

두 사람은 아트페어 상하이 참여 작가의 작품을 임시로 보관해 놓은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김이라가 디지털 도어락을 조작해 문을 열고 조명을 켠 후, 강수의 작품을 꺼내와 한쪽 벽에 일렬로 걸어놓았다.

박윤재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작품 하나하나 뚫어지게 관찰했다. 작품 감상하기를 5분여,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이 작품들은 기대했던 것 이상인데?”

박윤재가 캔버스에서 눈을 떼고 김이라에게 물었다.

“저번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군? 김 실장이 보기엔 어때?”

“네.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출품했던 작품들은 도시인의 일상을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묘사와 따뜻한 시선으로 표현했는데 반해 이번 작품들은 추억과 기억을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표현해서 색채감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 시간이 흐르면 잊히고 종국에는 무의식 속에 침잠해 사라지는 추억과 기억을 아련한 분위기로 그려냈어. 그림에 나타난 이 순간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는 거지. 나는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특히 동행이 마음에 드는군.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대면하는 노년의 낡아 버린 삶에 대해 힘을 잃지 말라고 따뜻한 위로를 주는 것만 같아. 김 실장은 어떤 그림이 좋은가?”

“저는 산동네 밤하늘에 환상적인 달이 떠 있는 ‘달이 있는 동네’를 소장 하고 싶네요. 아이들이 저 그림을 보면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잠들 것 같아요.”

무엇이 기분 좋은지 박윤재가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 저 달은 마치 동화에서 나올법한 신비한 달 같군. 김 실장.”

“예, 관장님.”

“회화예술은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요즘 이 친구는 순수회화의 원초적인 역동성과 힘을 끄집어내는 것 같지 않은가? 이 친구의 작품은 회화예술은 본래 이런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것만 같아.”

“······.”

“이강수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준다고 우리 갤러리 소속으로 스카웃해.”

“예? 전폭적인 지원이라면?”

“당연히 최고 대우야. 국내 전시는 물론이고 해외 전시, 전 세계 유명 아트페어 참가, 경매에도 올리고. 필요하면 창작지원금까지. 오로지 그림만 전념해서 그릴 수 있게 모든 걸 다 지원해.”

‘그 정도까지!’

박윤재가 말한 지원 내용은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국내 정상급 작가와 준하는 대우였다.

김이라는 속으로 놀라면서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림을 보는 박윤재 관장의 안목이야말로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으니까.

*

갤러리윤 빌딩 지상 주차장에 검은색 SUV가 굴러와 주차했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단정한 모습에 슈트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이강수가 내렸다.

강수는 갤러리윤 학예실장 김이라의 면담 요청을 받고 달려온 것이다.

갤러리윤 빌딩은 지하 3층, 지상 8층으로 1, 2, 3, 4, 8층, 5개 층은 갤러리윤에서 사용하고, 나머지 5, 6, 7층은 임대하고 있다.

1, 2층이 전시장인데 각 층의 전시 공간이 300평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4층으로 올라간 강수는 아담하게 꾸며진 회의실에서 김이라와 마주 앉았다.

40대 초반의 김이라는 30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로 피부가 깨끗했고, 두 아이의 엄마였으나 몸매는 날씬했다.

“갑자기 전화했는데 시간 내주어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진작에 인사하러 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사무원 아가씨가 들어와 차를 놓고 나갔다.

홍차를 한 모금 마신 강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김이라를 슬쩍 바라보았다.

‘할 얘기가 있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지?’

오면서도 생각해보았지만, 자신에게 할 얘기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녹차로 입을 축인 김이라가 운을 뗐다.

“강수 씨는 우리 갤러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갤러리윤이야 국내 갤러리 가운데 수위를 다투는 3대 화랑의 하나다.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야 국내의 최고 갤러리라고 해도 손색이 없죠. 학부 시절에는 갤러리윤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이 꿈이기도 했었죠.”

“고마워요.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갤러리는 뉴욕과 홍콩, 베이징에 지점을 운영하고 있어요. 적어도 국내 최고라고 자부하고 있어요.”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강수 씨는 아직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않았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일전에 자신의 작가 경력을 비롯해 여러 가지 서류를 보냈다.

그 서류를 보았으면 대충 짐작하고 있을 만한데 직접 묻는 이유는 뭘까? 강수는 그런 의문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있죠. 사실 올 초까지 먹고 사는데 바빠서 일러스트를 했거든요. 작품 창작할 시간도 개인전을 열 수 있는 작품도 없었죠”

“그래요? 강수 씨 경력을 보니까 출중한 회화 실력을 일러스트에 소비했더군요. 일러스트를 하지 않고 회화를 꾸준하게 했으면 대형 신인화가로 벌써 이름을 날렸을 텐데 아쉽네요.”

자신이 왜 일러스트를 해야만 했는지 이유를 모르니 힐난 조에 가까운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다.

당연히 일러스트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회화 능력이 출중해진 때는 투팍탈이 머리를 치료해준 다음이다. 그 전까지는 예술적인 감각이 부족한, 그저 그림만 잘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였다.

투팍탈 때문에 예술적인 재능에 눈떴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으므로 대충 수긍할 만한 얘기를 해주었다.

“집이 어려워서 돈을 벌어야 했죠. 일러스트는 당장 돈이 됐으니까요. 이젠 일러스트 하지 않아도 생활하는데 어렵지 않아서 화가로 전념할 생각입니다.”

“작품 활동만 하기로 했다니 정말 잘 생각했어요. 재능도 갈고닦지 않으면 녹슬고 말지요. 이 작가는 아직 젊으니까 재능을 얼마든지 꽃피울 수 있을 거예요.”

“저를 좋게 평가해 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이런 얘기 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텐데?’

강수는 홍차를 한 모금 삼키면서 의문의 눈빛으로 김이라를 보았다.

강수의 의문 가득한 눈빛에 김이라가 미소를 지었다.

“사실을 얘기한 걸요.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하려고요.”

“제안이요?”

“이강수 씨, 우리 갤러리 소속 작가가 되어 같이 일해보지 않겠어요?”

“예? 갤러리윤 소속 작가요?”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이었다.

자신은 내세울 만한 경력도 작품 활동도 없는 그야말로 무명화가다. 하물며 박해나가 추천했다지만 갤러리윤에서 아트페어 상하이에 자신을 참가시켜 준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에게 어째서 이런 과분한 제안을 하는지 어리둥절한 강수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김이라가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강수 씨가 우리 갤러리 소속 작가가 되면 우리는 강수 씨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줄 준비가 되어 있어요. 국내 전시는 물론이고 해외 전시, 전 세계 유명 아트페어 참가, 분기별로 실시하는 윤옥션 경매에 작품을 출품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행사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은 우리가 부담할 거예요. 이강수 씨가 오직 작품 창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걸 지원하겠어요.”

구체적인 지원 내용은 더욱 놀라워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파격적인 제안이 분명했지만, 강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일단 궁금한 점부터 물어보았다.

“저는 무명화가에 불과한데 어째서 그런 과분한 제안을 하는 겁니까?”

“이 제안은 박윤재 관장님의 뜻이에요.”

“박윤재 관장님이요?”

“네. 관장님이 이강수 씨가 보내온 아트페어 상하이 출품작을 보셨어요. 그리고 이강수 씨 그림에 감명받고 그런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거예요.”

“그렇군요.”

강수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관장님의 파격적인 제안은 감사하지만, 지금은 갤러리윤과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예?”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는지 김이라가 황당한 표정으로 강수를 바라보았다.

강수는 장영봉과 선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로 약속했다. 비록 구두로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갤러리윤의 제안은 매력적이고 탐났지만, 강수는 장영봉과의 신의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표정을 수습한 김이라가 이유를 물었다.

“왜죠? 제안 중에 맘에 안 드는 점이라도 있나요?”

“아뇨, 무명이나 다름없는 제겐 너무나 과분한 제안이죠. 더없이 좋은 기회이긴 한데 이미 개인전을 선약한 곳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순간 김이라의 뇌리에 선암갤러리가 떠올랐다.

이강수는 선암갤러리에서 기획한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참여했고, 장영봉은 홍우대 출신으로 이강수의 선배였다.

“아, 혹시 선암갤러리와 개인전을 열기로 선약했나요?”

“예, 맞습니다.”

김이라는 은근히 기분이 나빠졌다.

선암갤러리와 갤러리윤은 명성, 규모 등 모든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아니, 다른 갤러리 소속 작가도 이런 제안을 받으면 넘어오기 마련이다. 고작 단체전 한번 참가한 인연으로 학교 선배와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이강수가 너무나 어리석어 보였다.

‘성공이 목마르지 않은 건가? 아니면 어디 모자란 건가?’

국내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갤러리윤에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제안을 고민도 없이 내치다니!

김이라의 관점에서 볼 때 이강수는 비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설득해서 마음을 바꿀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이대로 맥없이 물러날 수는 없어서 한 번 더 권해보았다.

“이미 선약을 했다니 안타깝네요.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떤가요? 강수 씨가 개인전을 한 번만 열 건 아니잖아요. 첫 번째 개인전은 선암갤러리에서 개최하더라도 그 이후에는 장기적인 견지에서 우리와 함께 작업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물론 낫고 말고요. 제가 왜 그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선암갤러리와 먼저 얘기해 보는 것이 순리 같네요. 죄송합니다.”

예상한 결과에 김이라가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휴, 집안이 어려워 일러스트 해서 학비를 번 모양인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차버리는 건 뭐지?’

어렵고 힘들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이익을 따지고 성공에 집착한다. 이강수도 다르지 않을 것으로 여겼고 당연히 기뻐서 수락할 줄 알았는데 이 결과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의외였다.

김이라는 실망스럽다는 어조로 여운을 남기며 말했다.

“관장님께서 기대가 컸는데··· 어쩔 수 없군요. 그래도 혹시 마음이 바뀌면 연락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김이라는 회의실을 나가는 강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이라는 솟구치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며 얼굴을 와락 구겼다.

‘개인전도 한번 열지 못한 처지에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한 거야? 대책 안 서는 사람이네···. 그나저나 관장님에게 뭐라고 하지? 실망이 크시겠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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