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59회
친구들로부터 답장이 왔다.
-핑크티티라는 걸그룹도 있냐? 처음 들어본다. 뭐, 가입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역시 종대다.
-갑자기 웬 걸그룹 팬카페? 죽여주는 얘라도 있는 거냐?
이 문자는 알바로 입시 미술학원 강사를 하며 작업 하는 이동석.
-팬카페에 가입하라고? 이유가 뭔데?
중견 광고회사 기획부에 다니는 장범일이다.
강수는 핑크티티 팬카페에 가입해야 하는 이유를 간단하게 적어서 보냈다. 추신으로 인증샷 보내면 치맥 쏜다고 했다. 잠시 후, 한 명씩 인증샷을 보내왔다.
-치맥 쏴라.
-불쌍해서 가입해 준다. 원하는 대로 했으니 날 잡아라.
-인증샷이다. 주말에만 시간 된다.
그동안 뭐가 그렇게 바쁜지 친구들 얼굴 본지도 한 달이 넘었다.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되었으니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고, 별일 없으면 다음 주 주말에 보기로 했다.
‘기왕이면 정회원이 되어야겠지.’
정회원 등업은 등업신청양식을 작성해 글을 올리면 담당자가 일주일에 두 번 몰아서 처리해 준다.
등업신청양식을 작성해 글을 올렸다.
가입인사 게시판에 젊은 오빠 가입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라고 간단한 멘트를 남기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컴퓨터를 끈 강수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잠시 주하를 떠올렸다.
강수는 주하가 자신에게 호감을 비추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초상화를 그리면서 호감도가 급상승한 것이 틀림없었다.
차 안에서 자신의 팔을 꼭 안고 있었던 순간만큼은 서로 육체적으로 끌렸고 몸이 달아올랐다. 임해영만 없었으면 분명히 입술을 훔쳤을 것이고 관계가 한 단계 발전했을 것이다.
원래 화가와 여성 모델 사이는 가까워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밀폐된 공간에서 모델과 화가, 단 두 사람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말을 하지 않아도 교차하는 눈빛으로 은밀한 감정과 무언의 대화를 속삭일 수 있다. 눈빛으로 감정을 교류하고 마음을 열게 되면 두 사람이 각별한 사이로 발전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특히 화가가 젊고 잘생겼다면 길게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화가와 모델 사이에는 염문이 끊이지 않았다.
모딜리아니는 화가 가운데서도 최고 미남의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의 사진을 보면 조각 같은 외모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린 수많은 여성 모델과 사랑을 나누었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각양각색의 여성들이 모딜리아니의 모델을 섰고, 옷을 벗었다.
어쨌든 오늘 차 안에서 있었던 스킨십으로 인해 주하와는 한 단계 발전할 가능성이 생겼다.
‘그 정도면 됐지? 정말로 서로 원하면 임해영 씨와는 상관없이 한 단계 올라서겠지.’
*
“강수야, 어서 와라.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어.”
일루션 회장 노민석이 강수를 반갑게 맞이했다.
회원들과 인사를 나눈 강수가 노민석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저를 기다렸습니까?”
“응. 저번에 사 온 원두를 보니까 블랜딩 원두더라. 맛과 향이 꽤 괜찮아서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려고 기다렸지.”
“수유역 근처에 있는 원두이야기에서 샀습니다. 필요하면 제가 또 사오죠.”
“아, 그게 아니고. 실은 내가 카페를 다시 하려고 준비 중이야. 카페는 역시 커피 맛이 좋아야 하는데 좋은 원두를 싸게 구입하는 것도 경쟁력이거든.”
“카페를 차릴 계획인 거예요? 창업자금을 마련했나 보네요?”
노민석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작년에 카페 접을 때 사실 조금은 건졌거든. 나머지는 아버지가 지원해 주신다고 했지. 그래서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해 보려고.”
“와, 그래요? 잘됐네요.”
“원두이야기에 가서 원두 공급해 주는 곳이 어딘지 문의해봐야겠다.”
‘가만, 저번처럼 이센셜아이를 활용하면 가성비 좋은 원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강수는 이센셜아이를 활용하면 노민석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민석 형님, 제가 원두를 조금 고를 줄 알거든요. 저도 여기저기 알아보고 괜찮은 원두 발견하면 추천할게요.”
“아, 그럼 고맙지. 아니 꼭 부탁할게. 저번에도 괜찮은 원두를 사 온 거 보면 강수 미각이 보통은 아닌 것 같거든.”
“하하. 과찬이세요.”
“그럼 좋은 원두 있으면 연락해 줘.”
“예, 형님.”
항상 강수에게 살갑게 구는 연주가 다가와 물었다.
“강수오빠! 커피 드려요?”
“어, 그럼 고맙지. 아메리카노 부탁할까?”
“네.”
잠시 후, 연주가 진한 커피 향이 솔솔 풍기는 아메리카노를 가져왔다.
“고마워, 잘 마실게. 오늘은 창호가 보이지 않는구나.”
“알바 뛰면서 과제 하느라 바쁜가 봐요. 방학해야 자주 나올 수 있을 거예요.”
“그래, 학점이 먼저지. 그리고 보니 연주가 마술하는 건 거의 못 봤네?”
“저는 마술은 잘 못 해요. 주로 마술사 옆에 서 있는 조수를 해요.”
“하하. 마술사에겐 조수도 필요하지.”
“참, 형님이 카페를 오픈 하면 동아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
“회장을 새로 뽑아야겠죠? 근데 다들 바쁘게 살아서 회장을 하려는 사람이 있을지는 불투명해요. 회장이 라이브카페 공연을 주도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해체되고 온라인 카페로 돌아갈지도 모르겠어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일루션은 포털사이트의 온라인 카페 ‘마술세상’ 오프라인 모임으로 시작했다. 강수도 그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굳이 온라인 카페에는 가입하지 않았었다.
“연주야, 나 좀 도와줄래?”
마침 노민석이 연주를 불렀다.
“조수가 필요한가 보다. 전 가볼게요.”
“그래. 수고해.”
강수는 회의 탁자에 앉아 그동안 연습했던 마술 공연의 연출을 글로 정리해보았다.
마술이 아니라 마법으로 연출을 해야 하므로 참고했던 마술사의 연출과 똑같을 수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마술이 아닌 마법이 가능한 연출로 바꾸어야 했다.
기본적인 마술 트릭은 동아리실에 비치된 서적과 동영상을 통해 배울 수 있었지만, 마술 트릭을 트릭이 아닌 것처럼 사용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스킬을 배워야 한다.
강수의 목표는 마법을 이용한 마술이다. 마술 트릭은 원리만 참고했을 뿐 익히지 않았다.
강수가 준비한 마술 공연은 마법으로만 연출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마법 수련이기도 했다.
마법은 수련하면 할수록 캐스팅을 빠르게 할 수 있다. 어차피 마법 수련을 따로 할 바에야 마술 연기와 함께 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강수는 1서클과 2서클 마법을 이용한 마술 공연의 연출을 완성할 수 있었다. 사실 1서클 마법만 사용해서 마술 공연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블링크 같은 경우 순간이동은 되지만 장애물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서클 마법인 투시마법과 투과마법이 그런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었다.
강수가 짜낸 연출의 내용은 이랬다.
일단 카드 마술부터 시작한다. 모든 동작은 천천히 하는데 우아하고 부드러운 동작이 기본이다.
블링크를 이용해 카드 이동하기.
투시마법을 사용해 임의로 불러낸 관객이 뽑은 카드와 똑같은 카드 뽑아내기.
투과마법을 사용해서 빈 나무상자에 카드 넣기.
투과마법은 물건조차 이동 거리가 1m에 불과할 정도로 상당히 짧다. 이동거리는 서클이 올라갈수록 길어진다.
계속해서 공을 위로 던지고 멈춘 후 받는 홀드마법.
스텐리스 잔에 물을 따르고 입김을 불어 넣는 연기를 하면서 물을 얼리는 프리즈.
얼음 송곳으로 얼음을 깨서 진짜로 얼었음을 보여준다.
아이스애로우로 표적 연속으로 맞히기.
피날레는 비키니옷장 같은 검은 천으로 밀폐한 두 개의 도구를 준비해 8센티 간격으로 세워 놓는다. 그리고 한쪽으로 들어가서 투과마법을 사용해 다른 쪽으로 나오기.
8센티만 떼어 놓는 이유는 강수의 몸이 물체를 통과할 수 있는 두께는 물건과 달리 10센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8센티의 간격은 트릭을 사용해 옆으로 이동했다는 인식을 심어줄 것이다.
캐스팅 없이 연기만 해 보니 마술 공연은 약 10분이 걸렸다.
이제 이 연출을 토대로 연기를 하면서 마법을 캐스팅하면 자신만의 마술 공연이 완성된다. 어색하지 않게 연기를 하면서 적절하게 마법을 캐스팅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언젠가 무대에서 자신의 마술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
10월 5일.
하상덕은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바로 맸다.
오후 1시에 힘엔터테인먼트와 미팅이 잡혀 있다.
죽돌이만 생각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5일 현재 ‘벙어리 황구 죽돌이’의 제작비를 7억이나 유치했다. 원래는 5억만 모금해도 제작에 돌입하려 했으나 제작비 모금이 생각보다 빨라서 오늘 미팅까지 연기한 것이다.
이강수에게 영화판권을 투자받은 후, 하상덕은 20여 개 영화사와 투자사에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를 보냈다. 총 5곳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힘엔터테인먼트가 마지막 미팅 회사였다.
오늘 투자 담당자를 만나 3억만 유치하면 목표액 10억을 달성한다.
제작비 모금이 순조롭다 보니 요즘은 몸에서 활력이 솟구쳤다. 마라톤을 뛰어도 지칠 것 같지가 않았다. 당장 메가폰을 잡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다.
하상덕은 오늘 미팅의 성과와 상관없이 영화 제작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이미 스태프를 꾸렸고, 촬영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를 두 편 제작한 전력이 있으므로 이번 영화만 성공하면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힘들게 투자사를 찾아다니지 않고, 제작사나 영화사와 조인해서 훨씬 편하게 영화를 만들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 보자.’
하상덕이 찾아간 곳은 영화 투자사 힘엔터테인먼트.
힘엔터테인먼트는 하상덕이 자신의 두 번째 영화 시나리오를 들고 투자 상담을 했던 회사다. 비록 그 당시 투자는 받지 못했으나 좋은 시나리오가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었다.
힘엔터테인먼트 회의실.
“안녕하세요? 유 팀장님.”
“어서 오세요. 하 감독님. 이쪽으로 앉으시죠.”
“처음 뵙습니다. 이광덕 과장입니다.”
“아, 예. 영화감독 하상덕입니다.”
40대 중반으로 서글서글한 인상의 유임수 팀장은 그 전에 투자 상담했던 안면이 있었고, 자신과 비슷한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통통한 이광덕 과장은 처음 보는 얼굴이다.
유임수가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보내준 시나리오는 검토했습니다. 원작이 있는 시나리오라 그런지 이야기 구조가 탄탄하더군요. 흥행요소도 충분한 것 같고,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영화 제목은 원작과 같은 제목으로 할 건가요?”
“예. 원작인 그림동화책이 베스트셀러이고, 평도 괜찮습니다. 제가 출판사에 알아본 바로는 판매량이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판매량 흐름으로 판단해도 베스트셀러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고, 대중적인 인지도가 상승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제목의 홍보효과는 적지 않을 겁니다.”
“계속 베스트셀러를 유지만 한다면 같은 제목으로 가는 것이 정답이죠. 알겠습니다. 사실 시나리오를 받은 뒤 팀원 회의에서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일반인에게 모니터링까지 했는데 호평을 받았습니다. 결국 이틀 전 투자 회의에서 벙어리 황구 죽돌이에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갑작스러울 정도로 빠른 투자 제안에 하상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하 감독님, 제작비는 얼마를 예상하는지요?”
하상덕은 바로 서류를 꺼내 두 사람에게 한 장씩 건넸다.
“투자유치 현황입니다. 총제작비 10억이고, 현재 7억을 유치했습니다.”
유임수가 가볍게 웃었다.
“하하. 역시 시나리오가 탄탄하니까 벌써 7억이나 유치했군요. 우리는 5억까지 책정했는데 말이죠. 어떻습니까? 우리는 5억까지 투자할 수 있습니다. 원하시면 5억을 전부 투자하기로 하죠.”
5억을 투자한다는 제안에 하상덕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5억을 투자 받으면 목표 투자금을 상회한다. 저예산 영화라고 해도 이렇게 빠르게 목표한 투자금을 유치한 적이 없었다.
하상덕이 원해서 저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다. 제작비를 유치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예산으로 제작하는 것뿐이다. 오죽했으면 기존 두 편의 영화는 친인척에게 손까지 벌렸을까? 이번 영화만큼은 친인척에게 부담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5억을 투자해 주시면 마케팅비를 쓸 수 있으니 저야 감사하죠.”
“그럼 계약하기로 하죠. 이 과장, 계약서 준비하게.”
“예, 팀장님.”
이광덕이 파일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하상덕은 힘엔터테인먼트와 ‘벙어리 황구 죽돌이’ 영화 제작비 투자계약서를 작성했다.
총제작비 12억 가운데 힘엔터테인먼트는 5억을 투자, 지분은 41.667%다.
계약서에 사인을 한 유임수가 물었다.
“크랭크인은 언제 합니까?”
“이미 스태프를 구성해서 크랭크인 준비하고 있습니다. 빠르면 삼사일 안에 늦어도 다음주 월요일에 크랭크인할 계획입니다.”
“하 감독님을 믿습니다. 대박 터트려봅시다.”
“물론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악수를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온 하상덕은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호흡을 깊게 했다. 끓어오르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포효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하상덕은 한국영상원 후배이자 조감독 정인철에게 전화했다.
“예, 접니다.”
“인철아, 형님이 힘엔터테인먼트에서 5억 투자 받았다.”
“우와, 5억이나요? 축하합니다, 선배님.”
“그래. 스태프 회의 준비하고, 가능하면 빨리 크랭크인 할 수 있게 준비해라.”
“옛, 선배님. 당장 스태프 소집하겠습니다.”
“끊는다. 사무실에서 보자.”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고 운전석에 올라탄 하상덕이 스마트폰을 다시 꺼냈다.
‘크랭크인하는 이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이강수 작가에게 알려줘야지.’
하상덕은 연락처에서 이강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