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55화 (55/197)

# 5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55회

초상화는 과거부터 수많은 화가가 그렸다.

여성을 그린 가장 유명한 초상화라면 모나리자와 페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꼽을 수 있다.

모나리자는 언급할 필요가 없이 유명하고, 네덜란드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북유럽의 모나리자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뜨거운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타국에서 페이메이르 작품전이 열려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국외 전시를 아예 금지하고 있다고 하니 네덜란드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만하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생각난 김에 강수는 사진 폴더에서 사진 파일을 클릭했다. 머리에 파란 터번을 두른 신비스러운 소녀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페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모나리자와 다르게 배경을 그리지 않았고, 바탕이 검은색이다.

검은색 배경에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는 한 소녀.

관람자를 피해 어딘가를 깊게 응시하는 눈, 훔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살짝 벌어진 매혹적인 입술,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 귀걸이.

수백 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소녀의 순수한 영혼과 고결한 숨결이 느껴진다.

배경이 어두운 검은색이기 때문일까?

파란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얼굴은 더욱 선명했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고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이 작품은 언제 봐도 마음이 설레고 뜻 모를 아쉬움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휴, 나중에 꼭 원화를 보러 헤이그에 가야지.’

강수는 다시 세나의 사진을 클릭하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

서준홍은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하는 3개 갤러리의 작가 명단을 훑어보고 있었다. 약 20여 명의 한국 미술계 최정상 작가 가운데 세 명의 신인작가 이름이 섞여 있었다.

세 명의 신인작가 중 이강수의 이름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장동운은 수화랑 소속 화가고, 박해나는 갤러리윤 소속 화가인데. 갤러리윤에서 이강수를 키우려고 하는 건가? 이건 뜻밖인데?’

수화랑, 갤러리윤, 이오갤러리는 갤러리의 규모와 소장 미술품의 가치, 소속 화가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한국의 대표 화랑으로 꼽힌다.

수화랑의 장동운과 갤러리윤의 박해나는 그렇다 쳐도 이강수의 참가는 의외였다.

갑자기 나타난 신인치고는 굉장히 빠른 성장세였다.

주목해야 할 신인작가가 분명했다.

‘12인전의 호평에 이어 아트페어 상하이의 참가라? 이강수의 작품을 또 하나 사야겠군.’

서준홍은 인지도 있는 중견작가의 작품이나 주로 5, 6회의 개인전을 열고, 작품성을 인정받아 성장해 가는 작가의 작품을 위주로 구입했다.

검증되지 않은 신인작가의 경우 중도에 붓을 꺾거나 무명으로 묻혀서 쓸쓸히 퇴장하기 때문에 신인작가 작품은 가급적 피했다.

국내외 유명작가의 작품은 수억, 수십억, 심지어 수백억 원씩 하므로 그도 부담이 될 정도로 고가다.

천억 원이 넘어가는 전설적인 작가들의 작품이야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런 고가의 작품은 그의 컬렉팅 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고향 충주에 설립할 해왕미술관은 지역문화의 발전과 성장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취지지 외국 작가의 수백억 원대 작품을 전시하고 해왕미술관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국내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성장 가능성이 큰 국내 작가의 작품을 사는 것이 의미가 있다. 그의 컬렉팅은 한국작가가 80%에 이른다.

서준홍은 인터폰을 들고 박 실장을 호출했다.

“박 실장, 들어 오게.”

“예, 회장님.”

세련된 정장을 입은 박연경이 실내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아트페어 상하이 개막일이 15일이야. 14일 출국해서 16일 오전에 귀국할 수 있게 스케줄을 잡아 놔.”

“경호팀은요?”

“명목은 업무 시찰이지만 아트페어 가는데 요란 떨 것 없어. 경호팀장 한 명이면 충분해.”

“예. 회장님, 추가 수행원으로 신유라 사원을 동행해도 될까요? 해외 출장 업무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본인이 원하면 그렇게 해.”

“예. 알겠습니다.”

“됐어, 일 보도록 해.”

박연경이 평상시의 표정으로 회장실에서 나온 후 기쁨을 참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회장실에서 나오는 박연경을 보며 신유라가 물었다.

“좋은 일 생겼나 봐요?”

“그래. 2박 3일 해외 출장. 휴가나 다름없는 일이지.”

“어머, 해외 출장인가요?”

“2박 3일 상하이 출장이야. 유라 씨도 갈 생각 있어?”

“예? 제가 갈 수 있어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물론 가죠. 업무상 해외로 가는 건데요.”

“맨입으론 안 돼.”

“아이, 왜 그러세요. 박 실장님, 제가 뭘 해드리면 돼요? 말씀만 하세요.”

“좋아. 그런 마음가짐이면 충분해. 하여튼 내가 특별히 회장님께 건의해서 유라 씨도 동행하는 거야. 그건 알아두라고. 10월 14, 15, 16일. 2박 3일 상하이 출장 스케줄이야. 호텔 예약과 티켓팅은 내가 할 테니까 각 부서장에게 회장님 상하이 업무 시찰 출장 스케줄 통보하고, 그 외 서류 준비해.”

“출장 인원은요?”

“회장님, 경호팀장, 나, 유라 씨까지 넷.”

“호호, 실장님, 고마워요.”

신유라는 신이 나서 각 부서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

다음날 토요일.

토요일은 마술동호회 일루션에 가는 날이다. 설악산에 가서 작업하느라 거의 한 달 동안 가지 못했다.

강수는 꽤 가격이 나가는 원두와 커카페라떼를 만들어 마실 수 있게 우유 세 통을 사 들고 일루션 동아리실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앗, 강수오빠!”

연주가 제일 먼저 소리지르며 달려왔다.

노민석, 강창호, 염진구, 배홍한과 죽송보육원 갔을 때 만났던 조인호, 채신예 등 회원들이 웃으며 강수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강수 왔구나.”

“이건 뭐예요?”

강수가 건네주는 종이백을 받아 들며 연주가 물었다.

“원두하고 우유.”

“히히, 고마워요.”

강수가 약간 수척해 보이는 강창호에게 말을 건넸다.

“창호야, 너 얼굴이 전보다 핼쑥해 보인다. 건강에 신경 쓰고 있는 거야?”

“괜찮아요. 개강해서 좀 바빠서 그래요.”

“카페라떼 마실 분?”

“나.”

“나도 부탁해.”

“연주야, 강수가 원두하고 우유까지 사 왔으니까 인원수대로 만들어야겠다. 미안하지만 수고 좀 해줘.”

“네, 회장님. 창호야, 넌 원두 좀 갈아라.”

“그러지 뭐.”

강수와 오랜만에 만난 회원들이 탁자에 둘러 앉아 잡담을 나누었다.

염진구가 물었다.

“강수야, 설악산 가서 작업한다더니 작업은 잘 끝냈냐?”

“그래. 다 끝내고 온 거야.”

“작업하러 설악산에 가고, 역시 작가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니까. 어디든지 훌쩍 떠날 수 있으니 말이야.”

옆에서 배홍한이 맞장구쳤다.

“정말 부럽습니다. 우리 같은 직장인은 집하고 회사만 무한 반복하고 있죠. 한 달씩이나 자연에 파묻혀 일하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죠.”

염진구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말이죠, 다 좋은 데 무명예술가는 빌어먹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어요. 팔리지 않는 예술 하면서 옷도 못 사 허름한 옷 입고, 배곯는 작가들 보면 마음이 달라질걸요?”

“하하. 그런가요?”

“수많은 예술가가 예술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이유가 거기 있거든요. 예술도 좋지만 거지처럼 사는 것에 지친 거죠.”

“그렇군요. 강수 씨는 어떻습니까? 생활하는데 지장은 없나요?”

염진구가 강수를 치켜세웠다.

“강수야 잘나가죠. 한국청년화가 12인전 참여작가일 뿐만 아니라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할 정도거든요. 배홍한 씨도 강수 그림 한 점 사 두세요. 나중에 큰 돈 될지도 모릅니다.”

배홍한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강수를 쳐다보았다.

“와, 그런가요? 강수 씨가 대단한 화가였네요.”

“그래, 두고 보세요. 엄청 뜰 겁니다.”

염진구가 너무 치켜세우는 것 같아 강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진구야, 그만해. 몇 작품 발표하지도 않았는데 민망하잖냐.”

“하하. 사실을 말한 건데 뭘.”

이때, 연주가 카페라떼를 만들어왔다.

“카페라떼 왔습니다.”

“야, 이제 라떼에 그림도 잘 그리네. 카페에 취직해도 되는 거 아냐?”

“호호, 간단한 것만 만들 줄 아는데요. 아직 멀었죠.”

카페라떼에는 나뭇잎, 하트, 물고기 등 단순하지만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고마워, 잘 마실게.”

“고맙다, 연주야.”

커피를 마신 노민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 이건 웬만한 카페에서 마시는 맛보다 나은데? 원두가 좋은 건가?’

염진구도 커피 맛을 보더니 연주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야, 연주 카페라떼 만드는 실력이 갈수록 느네. 어떻게 좀 전보다 맛이 확 틀려?”

“강수오빠가 사 온 원두로 만들었거든요. 원두가 조금 비싼 거라 맛이 더 좋은가 봐요.”

“그래?”

이번에는 회원들이 강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덕분에 잘 마실게요.”

“고마워요. 다음엔 내가 사 와야겠어요.”

사실 강수는 원두를 고를 때 이센셜아이로 품질을 비교해보았다. 비교한 3개의 제품 가운데 가장 신선하고 향이 진하고, 바디감, 단맛, 쓴맛, 산미가 높은 제품을 골라서 사 온 것이다.

카페라떼를 마신 회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라이브카페에서 공연할 마술을 준비하러 무대로 갔다.

강수는 캐비닛에서 포커 카드를 꺼내 손에 익히는 연습부터 했다.

그런 후, 하나의 컨셉으로 마술 연출하는 동영상을 보며 그대로 따라 해 보았다.

마술사의 연기를 따라 하면서 마술의 내용은 마법으로 대체했다. 물론 마법은 머릿속에서 펼쳤다. 어색하고 서투른 연기였지만 연습할수록 연기는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비록 실제로 마법을 캐스팅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진짜로 캐스팅까지 하면서 마술을 펼치면 꽤 신기하고 재밌는 한 편의 마술 공연이 될 것 같았다.

*

“헉헉!”

가쁜 숨소리가 새벽의 선선한 대기를 뚫고 산중으로 퍼졌다.

강수는 가파른 산길을 뛰어 올라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허벅지와 장딴지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지만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나하트에서 서클이 생성되고 있었다.

심상에 떠오른 그 형태는 수련에 대한 욕망을 자극했다. 또한, 달리기하면 빨라진 심장 박동만큼이나 마나의 축적이 많아진다.

달리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였다.

극한의 고통이 지속되면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 뇌에서 쾌감 물질, 엔돌핀을 만들어 배출한다. 평지를 달리는 것보다 험한 산지를 달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강수는 서울로 올라온 후, 더 오래 달리기 위해 기존의 수련 장소에서 30분 정도 계곡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간 곳에 새로 수련 장소를 마련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극한의 고통이 전신을 휘감고 계속된 어느 순간 고통이 사라지면서 쾌감이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그렇게 20여 분을 더 달린 강수는 울창한 수림으로 둘러싸인 은밀하고 작은 공간, 수련장소에 도착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더 뛰고 싶었지만 그것은 위험하다. 몸에 무리를 주어 오히려 무릎 관절이 망가진다.

“후우, 후우.”

달리기를 멈추자 전신에 번져있던 엔돌핀의 기운이 소멸해갔다.

‘이건 꼭 중독 같구나.’

강수는 몸에서 빠져나가는 쾌감을 아쉬워하면서 호흡을 조절했다. 등산복을 벗고 배낭에서 수건을 꺼내 전신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이렇게 땀을 흠뻑 흘리면 전신에서 노폐물이 빠져나간 것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투명해진 느낌이 들었다.

잠시 눈을 감고 인적이라곤 없는 자연을 전신으로 받아들였다.

산새 소리,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 나뭇가지를 타고 종종거리며 움직이는 다람쥐, 허공을 가르고 흩어지는 바람 소리, 산중을 휘감고 도는 고요한 대기의 움직임.

우주를 이루는 근원적인 원소이자 에너지, 마나가 강수의 주위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곧 미세한 흐름을 형성했고, 마나는 빨리듯이 마나하트에 끌려들어 갔다.

호흡을 통해 신체로 들어온 마나 뿐만이 아니라 벌거벗은 투명한 육체로 스며든 마나는 마나하트로 흘러 들어갔다.

무아지경.

강수는 벌거벗은 몸 그대로 팔을 벌리고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인력에 끌리듯 모여든 마나가 소용돌이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알람이 울었으나 강수는 그 소리조차도 듣지 못한 듯 미동하지 않았다.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가고 어둠이 사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강수의 벌거벗은 몸도 어둠에 묻혀 지워져 갔다.

사위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었고,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반달이 서산으로 기울며 아름다운 달빛을 뿌렸으나 무성한 나뭇잎을 뚫고 사위를 비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반달이 기운을 잃고 서서히 서산으로 쓰러져갈 즈음 검푸른 밤하늘에서 희미한 별들이 반짝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낮의 열기는 어둠에 쫓겨가듯 흩어지고 산중의 기온이 빠르게 떨어졌다.

하지만 소용돌이치는 마나에 묻혀있는 강수는 여전히 깨어날 줄을 몰랐다.

어둠에 잠겨있던 사위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강수가 눈을 떴을 때는 해는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서클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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